어리둥절함. 이번에도 끝끝내 나는 책장을 덮고 난 뒤에도 뫼르소라는 인간에게 꼬리표를 붙이지 못했다. 이제는 뭐라고 판단을 할 수 있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어리둥절함이 여전히 남아 있는 한, <이방인>은 언제든 다시 읽힐 수 있다.

출간 당시 꽤 논란이 일었던(것으로 알고 있는) 새움 출판사 본은 아직 읽지 않았다. 번역의 문제는 나 같은 문외한으로서는 언급할 자격도 없기는 하다. 그러나 책세상 본에 김화영 교수가 선정해 실은 세 편의 이방인 해설은 본문만큼이나 흥미롭다. 읽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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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한 달은 카뮈를 읽어봐야지 하고 마음 먹었다. 고작 한 달을 들여서 읽을 수 있는 작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의식으로 이 정도면 넉넉하니까.

<안과 겉>과 <결혼>은 청년 카뮈의 도취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산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에의 도취인가. 그것은 어지럽게 쓰여지기는 했지만 자연과 인간, 영원과 유한, 허무와 열정이라는 극단의 모순적 틈새에서의 도취가 아닌가 싶다. 가난하지만 삶을 너무나 사랑하는 명석하고 예민한, 고작 20대 청년의 현란함과 과장이 눈이 부시면서도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그 현란한 문장의 파도를 통해 어떻게든 자꾸만 늪처럼 빠져드는 유한한 생의 허무로부터 그 의미를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써본다는 인상이다.

<여름>은 <결혼>과 함께 묶여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약 15년 동안의 시간이 카뮈를 관통하는 동안의 글이다. 샘처럼 솟아나던 열정은 이제 길어오르기 위해 저 밑바닥까지 온 몸을 굽혀서 긁어야 하고 도덕이, 결국은 도덕이 더욱 카뮈를 사로잡게 된 것처럼 보이나 그는 언제나 양 끝의 모순을 끌어 안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예술가였다. 카뮈를 읽는다는 것은 결국 모순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자세를 배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한지 아닌지는 이제 읽어나가면서 차차 음미해보면 될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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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책을 두 권 읽었다. 소설집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사월의 미, 칠월의 솔>,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았다. 김연수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면 어쩐지 가슴이 벅차고, 진실이라는 미궁과 나타나지 않는 탈출구에 대해 말할 때면 가슴이 묵직해진다.

<소설가의 일>은 경쾌하면서도 김연수라는 작가의 철학이 명징하게 전달되는 에세이다. 김연수의 애독자라면 당연히 읽을 것이고 수많은 문청들이 읽기에도 좋다. 무엇보다도 글을 읽다보면 뭐라도 쓰고 싶다는 욕구를 잠재우기 어려울 것이다. 애써 잠재울 필요가 없는 욕구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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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유언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전집 12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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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는 현대 예술의 웅변적 파수꾼. 아마 쿤데라 본인으로서는 이러한 칭호를 좋아하지 않을 듯 싶지만(무엇보다도 '웅변적'이라는 수사적 표현을 경멸하며,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다는 표현에서 조롱하듯 웃을 테지만) 이것이 내가 쿤데라를 이해하고 있는 수준이다. 다만 힘이 있고 단단하면서도 그만큼 오해하기 쉬운 웅변의 우악스럽고 선동적인 이미지가 담백하게 제거된, 우아하고 유머러스하며 웃다가도 등 뒤에서 칼침을 놓을 수 있는 날카로운 웅변가이자 파수꾼이라고 덧붙일 필요가 있다.


『배신당한 유언들』은 일종의 쿤데라 예술론이라고 볼 수 있는 에세이로, 『소설의 기술』, 『만남』, 『커튼』등과 궤를 같이 한다. 우아하고(동어반복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명쾌하며, 박식한데다가 유머러스까지한, 무엇보다도 예술에 대한 확고한 심미안을 갖고 있는 쿤데라의 글이기 때문에 읽는 재미는 말 할 것도 없다. 둔하고, 모호하며, 지식이 얕은데다가 딱딱하기까지한, 무엇보다도 예술에 대한 확고한 심미안 대신 얇은 귀를 갖고 있는 나로서는 괜한 리뷰 글을 쓰기가 망설여지는 이유이다. 자칫 형편 없는 리뷰를 읽고 쿤데라를 오해하면 어쩔 것인가! 딱딱하고 어렵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그렇고 그런 명성 있는 작가라는 불명예로.


쿤데라가 다루는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범위가 (아마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에게)생소하겠지만 그의 주장은 일관되다. 예술을 예술로 이해하라는 것. 그래서 스트라빈스키를 정치적 반동주의자로 몰아 세운 아도르노를 안타까워하고, 야나체크를 민족주의라는 새장에 가둔 체코의 음악가들을 씹어 대고, 카프카를 성자의 반열에 올리지 못해 안달이 난 브로트를 심미안이 결여된 무지렁이 취급 하기를 쉼 없이 되풀이 한다. 이들에게 예술은 견딜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든가, 형이상학적으로 추앙되기 위한 도구이든가, 아니면 당대의 공인된 예술적 형식을 유지하기 위한 기술적인 복제품이든가, 그것들 중 하나에는 꼭 포함되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예술은 이들이 견뎌낼 수 없는 것, 무의미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자신이 이해하고 친숙한 범주로 끌어들여 해석하고 해부할 수 있는 무엇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결코 만만한 주제가 아닐 뿐더러 통용되기 용이한 주장도 아니다. 당장 쿤데라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작가가 누구인지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쿤데라가 자신의 반대편에 기를 쓰고 세워 놓은 작가는 조지 오웰이고 『1984』를 위시한 그의 소설들(쿤데라 자신에겐 정치적 팸플릿에 지나지 않는)인 것이다. 집단적 엑스터시에 지나지 않는 록은 쿤데라에게 라디오 스타의 살인마가 아니라 예술의 살인마가 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당신은 예술을 견뎌낼 수 있습니까?


물음에 대한 대답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사고의 확장이라는 허울과 쿤데라의 기지와 확고한 예술적 태도와 예술(가)들을 향한 애정, 그리고 조롱과 애도 섞인 문장들을 읽어나가는 즐거움을 느끼길 바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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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파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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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정도의 작가라면 새로운 소설을 읽기 전에 주어지는 선험적 독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 날의 선발 투수 명단을 보며 시합의 흐름을 예상하듯이. 그래서일까. 나로서는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한 번을 더 읽은 뒤에도 미진함이 가시질 않았다. 채워지지 않는 공백 때문에 이 소설에 관해 글을 쓰기가 대단히 어려웠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폴 오스터의 소설을 읽는 몇 가지의 키워드가 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독자마다 분명히 그런 것이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있지 않을까. 우연과 선택의 문제, 고립과 자유의 문제, 뭐 이를 테면 이런 추상적 개념들도 폴 오스터의 키워드 목록에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이 소설은 여전히 폴 오스터 다운 폴 오스터의 소설이지만 또 왜 그렇게 미진하고 맥이 빠지는 것처럼 느껴질까. 그것도 폴 오스터 답다고 해야 할까?


모리스 헬러는 자신의 아들인 어린 시절의 마일스 헬러가 『앵무새 죽이기』라는 소설을 읽고 내린 결론에 감동을 받는다. "상처를 입어 보아야만 비로소 한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선셋 파크』를 읽고 나는 무슨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까. 나는 마일스 헬러의 태도에 감동을 받은 모리스 헬러 때문에라도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는 강박이 든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것이 어렵다. 서브프라임 사태라는 최악의 경제 공황과 비도덕적 자본주의의 행패로 인한 실패의 이야기일 뿐인가? 선셋 파크라는 황량한 지역에 불법 거주하며 공동체주의를 염원하는 무리의 이야기인가?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홈리스 생활기인가? 해체된 가족의 복원을 바라는 가족의 탄생기인가? 어느 결론도 불만족스럽지만 또 제각각이 아주 생뚱 맞은 감상도 아니다. 어째서 선셋 파크의 이야기가 헬러 가문의 이야기처럼 읽힐 수 있는가(마일스 헬러와 모리스 헬러, 또 그들 가족의 일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메리 리의 이야기를 합치면 이 소설 분량의 2/3를 차지한다)? 이 소설이 헬러 가족의 이야기라면(분량으로만 본다면) 빙 네이선과 패거리들의 이야기는 무엇이며 그들이 없는 선셋 파크라는 건 또 무엇인가? 왜 선셋 파크는 자신이 마치 소설의 주인공인 것처럼 구는가?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폴 오스터가 각자 실패한 젊은이들, 마일스 헬러와 빙 네이선, 엘런 브라이스와 앨리스 버그스트롬을 한 장소에 함께 모여 살도록 종용하는 실험을 펼쳤지만 결국 이것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이들이 이 작은 공동체 내에서 빙 네이선의 바람 대로 서로 격려하고 위로 받고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공동체의 힘을 발견하기를 기대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고. 이들의 문제는 제각각이었고, 함께 있어도 공통점이 없었고, 설사 공통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미국의 사회는 분할되었고, 가족이 해체되었으며, 이제 더 이상 낙관적인 전후 세대의 윤리 의식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아마 그것이 선셋 파크의 초상이 아니겠느냐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황량하게 홀로 떨어진 선셋 파크의 버려진 집처럼, 그들의 맞은 편에 놓인 무덤처럼, 결국은 모든 것이 개인의 문제가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죽음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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