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 1
황규영 지음 / 웍스비전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이 무협소설에 무언가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느낀 건 '상검상단'이 등장할 때부터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상검상단'에 관한 서술이 하나 둘씩 쌓여 '상검상단'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가 형성되어 갈 즈음, 어쩐지 이 '상검상단'이라는 가상의 이익집단이 내가 딛고 있는 현실 속의 어느 이익집단과 대단히 흡사하다고 생각하면서부터였다. 이를테면, 상검상단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문어발식 경영을 하고 있다거나, 혹은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거래처를 압박하는 한편 소비자들로부터는 폭리를 취하고 있다거나, 혹은 관부의 사람을 뇌물로 포섭하여 어지간한 비리로부터는 손쉽게 면죄부를 얻는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게 단순히 무협소설 속의 과장된 설정만은 아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상검'이라는 단어의 모음과 자음을 적절히 조합하면 익숙한 단어 하나를 쉽게 연상할 수 있다는 것도 마냥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한번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나자 더 이상 이 무협소설이 흔한 무협소설로 여겨지지 않았다. 소설 속 누군가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라고 소리치면, 이 대사의 그 놀랄만한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대담하고 신선하게 느껴졌고, 또 누군가 "오해입니다."라고 변명하면 그 지극히 일상적인 대사가 사뭇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뿐인가, 외국의 사신으로 온 공주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공주에게 내어준 건물의 담장을 넘는 '무례하고 제멋대로인' 왕자들의 이야기에서 나는 어느 유명축구감독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슬리퍼를 신은 채 나타났다는 어느 나라의 왕자를 떠올렸고(소설 속 왕자들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그들이 형편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있을 뿐이다),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이웃나라를 두고 있으면서도 정작 위정자들은 그것을 정치적으로만 이용할 뿐 거기에 무관심하다는 이야기에서 안보와 보수를 부르짖으면서 정작 그들 스스로는 총 쏘는 법도 알지 못하는 어느 나라의 왕 이하 관리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건 그저 '무협'이 아니었다.

 

상황이 이쯤에 이르자 이제 나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에서 어쩌면 어떤 중대한 메시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별 하나에 그리운 이름 하나를 불러보았다는 어느 시인의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마음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미 결론을 내놓고 거기에 맞춰 파란색 매직으로 쓰인 숫자를 증거로 찾아낼 줄 아는 직관적이고 맹목적인 어느 명탐정의 심정으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악당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보았다. ooo, ooo, ooo, 기타등등. 파란색 매직으로 각 이름의 자음과 모음 중 필요한 것에만 덧칠하면 '니가 바로 범인이다.'라고 못할 것도 없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는 깨끗이 포기했다. 나는 시인은 결코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역시나 파란색 매직으로 쓰인 숫자 하나로 모든 것을 파악하는 명탐정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다만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여느 무협소설과 다르게 조선시대와 흡사한 시대를 배경으로 선택한, 그래서 어떤 의도가 느껴지는 이 소설 속 왕의 성이 '이'씨 라는 것, 그리고 이 탐욕스럽고 소심하며 비겁한 데다 음흉스러우며 무능력하기까지 한 왕이 조선시대 그 어떤 왕과도 닮지 않았고, 외려 어쩐지 오늘날 우리 시대 높은 자리에 있는 누군가를 연상하게 만든다는 것.

 

'후기'에서 "이전에 쓰던 글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고 밝히는 저자는 짤막한 '후기'를 이렇게 끝맺는다. "다만, 멀리 가지는 못했습니다. 더 멀리 가도 되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저자가 생각하는 '다른 길'이 내가 생각하는 '다른 길'과 같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고, 그렇기에 '멀리 간다는 것'도 내가 생각한 것과 같은 의미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확실히 '다른 길'을 걷는 독특한 이 무협소설을 좀 더 흥미롭게 읽기 위해서는 애당초 이 소설이 '현실 비판적 무협소설'이라고 믿거나 혹은 독자 스스로가 '현실 비판적 무협독자'가 될 필요가 있어 보이며, 둘 모두가 아니라면 꽤나 재미없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다른 길'을 함께 걷는다는 믿음 혹은 착각은 사뭇 유쾌한 일이지만, 그런 믿음 혹은 착각이 사라지는 순간 이 책은 '무협' 본연의 멋을 상실한 천덕꾸러기가 될지도 모를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다른 길'을 걷는 모든 것들의 숙명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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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10-09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황규여의 개천만은 읽지 않았는데 한번 구해서 읽어봐야할 듯 합니다. 가끔 무협지들 중에서 명작들이 등장합니다.

Fenomeno 2012-10-10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솔직히 굳이 구해 읽을 만한 작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유쾌한 재미가 있지만, 혹시라도 많은 것을 기대하신다면 실망이 크실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제가 읽어낸 것과 같은지도 장담할 수 없고요. 리뷰를 너무 호의적으로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드네요;;;
 

'아름다운 우리말'이라는 건 다른 나라의 말과 비교해서 하는 말이 아닌 그저 우리말만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일 뿐일 테지만, 나로서는 설령 그것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하는 말이라고 해도 전혀 불만이 없다. 어차피 우리말은 내가 아는 유일한 말이니 이왕이면 우리말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누가 딱, 정해주면 아 네, 하고 냉큼 받아들일 생각도 없지 않다. 혹은 누군가 우리말이 아름답지 않다고 하면 우리말이 아름다운 이유를 한 100가지쯤 대면서 항변할 재간 따위는 물론 없지만, 니가 아름다운 우리말을 개뿔이나 아냐, 라는 식의 마뜩찮은 표정을 지어줄 용의 정도는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 요컨대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우리말이 아름답다는 데 대해 나는 전혀 반감이 없다는 거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우리말'을 기꺼이 인정한다고 해도 도무지 아름답지 않게 생각되는 우리말도 있다. 당연히 아름답지 않은 험한 말들을 제외하면, 나는 유독 '올케'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든다. 일단 '올케'에 쓰인 '케'는 우리말에서 찾아보기 쉬운 글자는 아니다. 실제로 국어사전에서 '케'로 시작하는 단어를 찾아보면 '케이스', '케이크', '케첩' 등 외래어들이 눈에 띌 뿐 우리말 중에는 '케케묵다'가 유일하다. '케'로 끝나는 말 중에도 '부리나케' 정도가 생각날 뿐 딱히 떠오르는 다른 말이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올케'는 어쩌다가 생긴 말일까.

 

어느 유래에 따르면 '올케'는 '오라비'에 '겨집'이 합쳐져서 '오랍겨집'이 되었고 그것이 축약되어 '올케(올겨집)'가 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기는 어렵다. 대관절 오랍겨집을 어떻게 축약해야 올케가 된단 말인지. 이리저리 발음해 보고 특히 술이 취했을 때라든지 혹은 무언가를 먹으면서 말할 때를 가정해 보아도 납득하기가 어렵다. '계집'이라는 단어가 번연히 살아남은 판에 하필 '오랍겨집'의 '겨집'을 '케'로 만들 건 뭐란 말인지. 그것도 잘 쓰이지도 않는 글자를 가져다가.

 

'올케'가 마음에 안 드는 이유는 단 하나, 그 어감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올케'의 어감에서 '수캐'의 어감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이 '수캐'는 특히 어느 시에서 그러했듯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에서의 바로 그 '수캐'다. 또는 '발정난 수캐'의 그 '수캐'라고 해도 좋다. 수캐한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도무지 '건강한 수캐'라든지 '정숙한 수캐' 따위의 말들은 어딘가 모르게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올케'의 경우에는ㅡ어디까지나 내 느낌일 뿐이지만ㅡ영락없이 '얄미운 올케'가 어울린다. '다정한 올케'랄지 '사랑스러운 올케'와 같은 말들은 역시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다. 물론 이런 인식 한편에는 실제 혹은 드라마 속 '올케'에 대한 이미지와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그러한 이미지를 공고히 하는 데 '올케'라는 좋지 않은 어감이 한몫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그저 과장일 뿐일까. '오랍겨집'에서 왔음에도 정작 오빠의 아내에게는 호칭어로 '(새)언니'라 하고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호칭어로 '올케'를 쓰는 이유를, '올케'의 어감 때문에 손윗사람에게 쓰기 꺼려진 데서 찾는다면 그 또한 억측에 지나지 않을 뿐일까.

 

어쨌거나 우리나라에서 우리말을 하면서 남자로 살아가는 데에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만, 평생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올케라 부를 일도,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올케라 불릴 일도 없는 건 분명 좋은 점 중의 하나다. 세상에 좋은 올케는 얼마든지 있고 우리말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그래도 나는 '올케'라는 말만큼은 사양하고 싶다.

 

덧. 비슷한 이유로 '개구리 중사 케로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케로로'와 '뽀로로'는 단 한 글자 차이지만, 내 생각에 그 차이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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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전혀 상관 없을 것 같은 3권의 책을 읽었는데, 공교롭게도 세 권의 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게 재미있다. 먼저 김찬호의 저서인 <사회를 보는 논리>에서는 우리 사회의 여러 현상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그 나아갈 바를 독자와 함께 모색해 나가고자 한다. 쉬운 설명과 간결한 논지를 통해 이끌어 내는 이 책의 문제의식이 그 자체로 패러다임의 변화를 지향하고 있는 건 당연한 노릇이다. <광고천재 이제석>에서 저자 이제석이 말하는 핵심도 결국 패러다임의 변화다. 그는 책 속에서 "판을 바꾸라."라고 말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증명해 낸 그 실례를 천재적인 자신의 광고를 곁들여 털어 놓는다. 마지막으로 황규영의 무협소설 <개천>은 제목부터 '開天(하늘을 열다)'이다. 이 '개천'은 저자가 '후기'에서 말하듯 '파천(破天)' 이후에 시작되는 것으로, 주인공 강대수의 여정은ㅡ약간 과장되게 말해서ㅡ패러다임의 변화를 위한 투쟁에 다름없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렇듯 비슷한 핵심을 가진 듯한, 그러나 당연히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내용을 펼쳐내는 이 세 권의 책의 차이가, 저마다 각기 속한 장르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이건 한편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가장 온순하고 부드러운 세기를 가진 것은 물론 인문학 서적에 해당하는 <사회를 보는 논리>이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저자는 책에서 우리 사회의 제반현상들에 대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분석하고 비판하지만, 대안의 모색은 모두의 과제로 남겨둔다. 예컨대 결혼식 문화에 대해 저자는 '체면유지'와 '차이에 대한 집착'과 '악순환' 등의 표현으로 거침없이 날을 세우지만, 그렇다고 "그딴 결혼식 따위는 당장 치워버려라."라고 일갈하지는 못한다. 또한, 일찍이 '애정남'에서 정한 것처럼 "결혼식 축의금은 성수기에 3만원이다."라는 식으로 무엇 하나 정해주지도 못한다. 다만, 책에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결혼식에 대해 토론할 거리를 남겨줄 뿐이다. 그래서 당연히 약간 미적지근한 느낌이지만, 진짜 '애정남'처럼 정해주었다면 그건 그거대로 좀 웃기겠다는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다. 어쨌거나 인문학이란 게 코미디는 아닐 테니까.

 

<광고천재 이제석>은 무엇보다도 책 표지에 한눈에 반해서 관심을 가졌고 결국 읽게 되었다. 초반에는 조금 불편한 느낌도 있었다. 가히 천재적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은, 책에 소개된 저자의 광고들은 감탄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치열한 노력과 그에 따른 성공으로 얻은 자신감이 종종 지나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천재란 기실 노력의 산물이라는, 그 평범한 클리셰를 되풀이하는 듯하던 이 책은 결정적으로 조금 다른 행보를 보인다. 진취적인 태도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성공을 얻은 저자가 그저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저자는 '이제석 광고 연구소'를 차려 공익 광고를 제작해 시민단체에 기부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둘러싼 불리한 환경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판을 바꾸어" 성공을 이뤄냈던 저자가 이제 세상이라는 거대한 "판을 바꾸려"는 의미 있는 일보를 내딛은 셈이고, 에세이라는 장르 안에서 자신의 삶을 유일한 증거로 하여 펼쳐낸 이렇듯 치열한 '진실성'은 자못 감동적인 데가 있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거창한 무엇이 아닌, 결국 자신과 자신의 주변부터 바꿔나가는 것이라는 진부한 교훈이 한 개인의 실제 삶과 만날 때면 그것이 무엇이든 언제나 찬란하게 빛나게 마련이니까. 조금만 겸손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은 여전히 떨치기 어렵다.

 

당연한 말이지만, 역시 무협소설이라는 장르는 어떤 한계를 깨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장르다. <개천>은 다분히 저자의 어떤 의도가 느껴지는 설정 하에서(조선시대를 모델로 한 가상의 세계) 말 그대로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무능한 위정자와 부정부패한 관료와 탐욕스러운 거대상인 등이 판치는 세상에서 주인공 강대수는 기득권 세력을 완전히 타파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세상을 뒤집는 것(파천)' 외엔 없다고 굳게 믿는다. 그리하여 펼쳐지는 주인공의 활극 속에는 묘하게 현실 비판적인 메시지가 곳곳에서 느껴져서 나름의 재미와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다만 굳이 덧붙이자면, 그러한 현실 비판적 메시지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무협소설 자체의 재미를 따진다면 솔직히 좀 약한 것 같기는 하다. '현실 비판적 메시지'란 게 진짜 이 작품 속에 있는지 어떤지 장담하기 어렵지만, 독자보다도 오히려 저자 쪽에서 그것을 좀 더 어필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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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늦은 오후. 한적한 공원 벤치에는 양복을 잘 차려입은 중년의 신사가 한 명 앉아 있다. 신사는 품에 아기를 안고 있고, 품에 안긴 아기는 시끄럽게 울고 있다. 벤치 한쪽에는 신사의 것으로 보이는 책 한 권이 놓여 있다. 표지에는 '모두 다 예쁜 말들'이라고 적혀 있다. 잠시 후 한 젊은이가 나타나자 신사가 반가운 기색으로 인사한다.)

 

신   사: 안녕하신가, 젊은이!

젊은이: 안녕하세요.

신   사: 참 좋은 날씨지 않은가? 이런 날에는 '강 같은 평화'라는 말의 의미를 실감하곤 한다네. (신사는 시끄럽게 울고 있는 아이를 한 번 쳐다본다.) 정말 축복 같은 날이야.

젊은이: 네, 그렇군요. 저, 그런데 아기가 울고 있는데요. 혹시 선생님 댁 아기인가요?

신   사: 아기가 우는 데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 자네는 그걸 분간하기 위해 필요한 게 뭔지 아는가?

젊은이: 글쎄요... 그건...

신   사: 그건 사랑이라네. 나는 이 아기를 무엇보다도 사랑하네. 나는 아기의 울음소리에서 36가지의 다른 의미를 분간해 낼 수 있지. 사랑이 없다면 그런 건 불가능하지. 암, 그렇고 말고.

젊은이: 네, 그렇군요. 저, 그런데 아기가 울고 있는데요. 혹시 아기가 배가 고픈 건 아닐까요?

신   사: 자네는 유독 어머니들만이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젊은이: 글쎄요... 그건 혹시...

신   사: 그건 사랑이라네. 아버지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에 비할 것도 없지. 넘치는 모성애가 아니라면 유독 어머니에게서만 젖이 나오겠는가. 아버지들은 어머니들의 사랑을 본받아야 해. 암, 그렇고 말고.

젊은이: 네, 그렇군요. 저, 그런데 아기가 울고 있는데요. 혹시 기저귀를 갈 때가 된 건 아닐까요?

신   사: 내가 어렸을 때에는 천 기저귀 뿐이었지. 하지만 천 기저귀에는 1회용 기저귀가 감히 흉내낼 수 없는 따스함과 정성이 가득했지. 자네는 그 이유가 뭔지 짐작하겠는가?

젊은이: 글세요... 그건 아마도...

신   사: 그건 사랑이라네. 매번 기저귀를 빨아서 뽀송뽀송하게 말리는 건 보통 사랑가지곤 안 되는 법이지. 암, 그렇고 말고.

젊은이: 네, 그렇군요. (불편한 듯한 얼굴로)저, 그런데 저는 이만 볼일이 있어서...

신   사: 오, 그렇게 하게. 정말 사랑이 넘치는 대화였다네, 젊은이!

젊은이: 네, 저도 즐거웠습니다. 그럼...

 

(젊은이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머뭇거리며 걸어간다. 아기는 여전히 울고 있다. 몇걸음을 뗀 젊은이가 이내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다시 신사에게로 돌아온다.)

 

젊은이: 저, 그런데 아기가 울고 있는데요.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닐까요?

신   사: 옛날에는 아이들이 다쳤을 때 어머니가 발라 준 된장만으로 거뜬히 낫곤 했다네. 어지간한 약 따위는 댈 것도 없지. 자네는 그 이유가 뭔지 알 수 있겠는가?

젊은이: 글쎄요... 그건 역시...

신   사: 그건 사랑이라네. 한낱 된장으로 사람의 몸을 치유한다는 건 거짓말 같은 일이지. 사랑이 아니라면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암, 그렇고 말고.

젊은이: 네, 그렇군요...(젊은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인다) 이제 정말로 가보겠습니다.

 

(젊은이는 아까보다 좀 더 단호한 걸음으로 총총히 퇴장한다. 그리고 잠시 후 어디선가 찬송가 소리가 들린다. 신사는 찬송가에 맞추어 흥얼거리다가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라는 대목을 유독 크게 따라 부른다. 신사의 노랫소리에 놀란 듯 아기의 울음소리가 더 커진다. 신사의 노랫소리와 아기의 울음소리가 경쟁하듯 울려 퍼진다. 아기는 계속해서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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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질소 포장 과자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질소 기체는 상온에서 화학적으로 비활성이며 이를 이용하여 식품의 선도를 유지하는 데 사용되며 과자봉지의 충전제로 쓰인다."라고 한다. 질소가 언제부터 과자봉지의 충전제로 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대기의 약 78%를 차지하고 있다는 흔하디흔한 질소가 과자봉지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건 그저 겉멋만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질소가 과자봉지 안에 너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일찍이 누군가는 "질소를 샀더니 과자가 따라왔다."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적어도 롯데제과의 타코스를 먹기 위해 과자봉지를 뜯어본 사람이라면 이 표현의 빛나는 통찰력에 감탄함과 동시에, 이 표현이 그저 농담이 될 수 없는 상황에 화가 솟구칠 게 틀림없다. 혹시나 타코스를 먹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부연하자면, 타코스는 약 22%의 과자와 약 78%의 질소로 이루어져 있는바, 만의 하나라도 빵빵한 포장에 속아 친구와 나눠먹을 요량이었다면 꽤나 민망한 상황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가령 떡과 오뎅이 대략 4:1의 비율로 되어있는 떡볶이를 친구와 먹는다고 가정하면 떡을 네 개 먹고 나서 오뎅을 하나 먹는 게 매너일 텐데, 타코스를 먹을 때면 질소를 네 번 흡입하고서야 비로소 과자 하나를 먹을 수 있는 셈인 것이다. 나는 차라리 가격이 올라가는 것은 괜찮지만 못 먹는 질소 따위로 양을 채워 실질적으로 가격을 올리는 이따위 짓거리를 보면 꽤 화가 난다.

 

2. 담배와 침

 

흡연자들의 흡연권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반대할 생각은 전혀 없다. 건물 내의 모든 곳을 금연구역으로 설정하고 무작정 흡연자들을 밖으로 내모는 행위도 일면 가혹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에서 굳이 걸어 다니며 담배를 피우는 흡연자를 보면 그들이 자신들의 흡연권만을 지나치게 과신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하필 담배를 피우는 이의 바로 뒤에 걸어가게 되어 담배연기를 도리 없이 모조리 흡입하게 될 때면, 그를 앞질러 가면서 뒤로 에프킬라를 뿌리며 걷는 상상을 하곤 한다. 과연 그는 자신의 담배연기와 나의 에프킬라가 적어도 내게는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거리에서 침을 마구 뱉는 사람도 역시 곱게 보아 넘기기 어렵다. 최악인 것은 엘리베이터 안에다가 침을 뱉는 것인데, 나는 어느 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침을 뱉은 이가, 볼일을 마치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러 와서는 자기가 뱉은 바로 그 침을  본인이 밟은 적이 있으리라는 것을 거의 확신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누군가의 침을 밟은 것을 알게 되면 "어떤 개새끼냐?"라며 화를 낼 텐데, 내가 그때 그에게 CCTV를 증거로 들이밀며 "니가 바로 그 개새끼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세상이 무척이나 흥미로워질 거라고 항상 생각하곤 한다.

 

3. 야구천국 불신지옥

 

며칠 전 어느 글에서 "야구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야구관련 방송이 봇불을 이루는 현 상황은 야구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천국이지만, 야구를 싫어하는 이에게는 지옥이 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야구를 딱히 싫어하지 않았지만 점점 불신지옥으로 빠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저녁을 먹은 후에 스포츠 채널을 차례로 돌려보면 당연하다는 듯 모든 구장의 야구경기가 중계중이고, 심지어 경제 채널(SBS CNBS)에서조차 이대호의 경기를 중계해준다. 뿐인가, 야구경기 재방송은 물론이고 야구관련 방송까지 재방송이 넘쳐나고, 게다가 어느 날엔가는 어느 스포츠 채널에서 "48시간 동안 야구만 보자."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진짜로 48시간 연속으로 줄창 야구 관련 방송만 내보내기도 했다. 물론, 가끔은 나도 한때 해태의 팬으로서 해태왕조에 관한 영상을 즐겁게 보기도 했고, 야구 레전드에 관한 영상도 흥미롭게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건 거의 변태적으로 지나치다. 지금의 스포츠 방송을 보면 방송사가 '야구천국과 불신지옥' 중 하나를 택하라고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천국의 주민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그래놓고는 또 월드컵 시즌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축구관련 방송을 늘어놓고는 '보편적 시청권' 운운하며 월드컵 경기를 중계하려고 안간힘을 쓸 게 뻔한데, 그런 꼬락서니는 더욱 보기 싫다).

 

4. 귀를 닫은 모든 것

 

지난주의 프리미어리그 마지막 라운드는 한국 축구팬들에게 꽤나 흥미로운 경기들로 가득했다. 맨체스터 시티는 44년만의 우승을 위한 마지막 경기를 남겨두고 있었고, 볼튼은 이청용이 10개월 만에 복귀한 상태에서 강등을 벗어나기 위한 힘든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맨유와 선덜랜드는 한국인 프리미어리그 소속팀 간 맞대결로 관심을 끌었다. 마지막 라운드는 모든 경기가 동시에 치러지기에 어느 한 경기만이 생중계될 수 있었고, SBS ESPN은 맨유와 선덜랜드의 경기를 생중계로 선택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좋지 않았다. 박지성과 지동원 모두 결장한 것은 물론, 역전 우승을 노리던 맨유는 맨시티의 승리로 인해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한마디로 시즌 말미의 의미 없는 경기가 되어버린 셈이다. 반면에 맨시티의 경기에는 환희가 넘쳐흘렀다. 맨시티는 추가시간에 2골을 터뜨려 거짓말 같은 역전승으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더할 수 없이 드라마틱한 경기였다. 볼튼의 경우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예상했던 대로 이청용이 출전하여 시즌 첫 슈팅을 기록하는 등 의미 있는 행보를 보였지만, 끝내 볼튼은 승부를 뒤집지 못하고 2부리그로 강등되고 말았다. 슬픈 일이지만, 역시 그 경기에도 드라마틱한 요소가 가득했다.

물론 예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어느 경기를 중계하든 모든 축구팬들을 만족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아마도 맨유팬들은 극적인 역전우승을 기대하며 맨유경기를 마음 졸이며 지켜봤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방송사에서 시청자 투표라도 했다면 과연 맨유 경기를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됐을까. 유감스럽게도 SBS ESPN은 언제부턴가 시청자 게시판을 닫아 놓았고, 당연하다는 듯 자기들 좋은 대로 했다. 영국으로 날아가 맨유와 선덜랜드의 경기를 현지 생중계하는 것은 아마도 꽤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 중계에 관련된 일부 사람들은 영국에서 좋은 추억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올시즌의 마지막 경기를 보다가 결국 TV를 꺼버렸고, 그건 의심의 여지없이 화나는 일이었다.

 

5. 모기

 

대학생 때 하숙방에서 하룻밤 사이에 십 수 마리의 모기를 잡은 적이 있다. 적어도 열다섯 마리 이상을 잡았고, 그건 내가 자려고 누웠다가 적어도 열 번 이상을 일어나야 했다는 걸 의미한다. 당연히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그 작은 방 한 칸에 대체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모기가 숨어 있었는지에 관해서, 지금도 일종의 경이로운 의문을 가지고 있다.

모기의 가장 나쁜 점은, 다시 말해 모기가 나를 가장 화나게 하는 점은 꼭 사람이 잘 때 피를 빨아서는 사람을 깨운다는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런 짓거리를 쉴 새 없이 해대면 제아무리 '생태계의 조화' 어쩌고저쩌고 해도 모기의 멸종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내가 예전에 위키백과에서 본, "과학자들은 모기를 멸종시키기 위해 연구하고 있다."라는 문장에 전적으로 지지를 보내는 건 절대로 내 탓만은 아니다.

 

6. 마일리지

 

내 알라딘 마일리지는 현재 4980원이다. 한편 생각하면 4990원까지는 아니라 다행이지만, 대관절 왜 이런 마일리지 같은 것들은 조금 넘치는 경우는 없고 언제나 조금 모자라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혹 마일리지 합계가 5020원이 될 것 같으면 컴퓨터 시스템이 알아서 4980원으로 수정하는 것일까. 마음 같아서는 20원은 현금으로 결제하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인터넷 환경이라는 건 때때로 지독하게도 융통성이 없다. 내가 20원의 5배인 100원을 주겠다고 해도 아마 4980원을 쓸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도 가끔 지독하게 융통성이 없는 경우를 만난다. 얼마 전에는 쿠폰으로 통닭을 시켜 먹으려고 했더니 몇 장의 쿠폰이 유효기간 만료였다. 언제나 그 집에서 시켜 먹었고 몇 번은 공짜로 먹기도 했는데 쿠폰의 유효기간이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사정 얘기를 했더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결국 나도 기분이 별로라 그냥 다른 데에서 돈 내고 시켜 먹었다. 미스터 피자와 작별하게 된 데에도 쿠폰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우리 집은 도미노 피자와 미스터 피자를 한 번씩 시켜 먹곤 했는데, 도미노 피자는 쿠폰을 모아 여러 번 공짜로 먹었지만 미스터 피자는 단 한 번도 공짜로 먹지 못했다. 도미노 피자를 좀 더 자주 사 먹은 것도 한 이유겠지만, 결정적으로 미스터 피자의 쿠폰은 그 유효기간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짧았다.

쿠폰을 주는 건 그것을 미끼로 소비자가 다시 자기네 것을 사먹도록 유도하는 것이 목적일 텐데, 그깟 쿠폰 따위로 외려 소비자의 반감을 사게 하는 건 정말로 멍청한 짓이다. 모름지기 마일리지 혹은 쿠폰이란 건, 최대한 소비자가 편하게 그리고 자주 쓸 수 있도록 하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7. 하의실종

 

다음 검색창에서 '하의실종'이라고 치면 약 12600건의 기사와 약 37100건의 이미지가 검색된다. 그리고 블로그에서는 약 45900건이, 웹문서에서는 무려 약 444000건이 검색된다. 그 뿐인가, 뭔놈의 '종결자'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하의실종 종결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의실종'의 홍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하의실종'이라고 해서 놀란(?) 마음에 해당기사를 클릭했던 기억이 있지만, 이제는 '하의실종'이라고 해서 '실종 신고' 따위를 생각할 마음은 전혀 없다. 다만 이제는 화가 날 뿐이다. 거짓말도 정도가 있지, 그 많은 거짓말쟁이들의 눈에는 명명백백히 입고 있는 '하의'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좀 더 많이 어렸다면 그 '하의'란 것이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처럼 착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거라고 믿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나는 어리지 않고 무엇보다도 착하지 않다. 그저 바라거니와, 실종된 하의들이 다시 주인의 하체로 무사히 돌아가기를...아니, 하의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무쪼록 하의를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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