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잉글랜드 칼링컵 3라운드에서 박주영이 드디어 70여분을 뛰며 아스날 데뷔전을 치렀다. 4부리그 팀을 상대한 걸 감안하면 조금 아쉬운 활약이었을 수도 있지만, 경기 후 뭔가 큰일이라도 났다는 듯이 부정적인 전망을 잔뜩 쏟아내는 기사들을 보노라니 조금 우습기도 하다. 몇몇 기사들의 제목에 따르면, 주전경쟁은커녕 "조커도 위험"해지고 박주영과 교체해서 20여분을 뛴 일본의 신성 미야이치 료와 "희비가 엇갈리고" 기껏해야 "헛심"이나 쓰고 한마디로 "설설기었다"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런 기사들만 보면 이것으로 박주영의 올시즌은 이미 끝난 모양새인 듯하다. 게다가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어느 기사에서는 "박주영 아스널 데뷔전으로 본 여섯 가지 과제들"(http://sports.media.daum.net/worldsoccer/news/breaking/view.html?cateid=100032&newsid=20110922064404789&p=sportalkr)을 친절하게 짚어주기까지 하는데, 내가 보기에 문제는 박주영의 플레이가 아니라 바로 이런 기사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일단 박주영은 "지나치게 긴장했"단다. 그래서 "발바닥으로 긁으려다 볼이 걸리지 않아 역습타이밍을 놓쳤"다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일단 박주영이 지나치게 긴장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두세 번의 볼 컨트롤 실수가 곧 긴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경기에서 뛰는 모든 선수는 지나치게 긴장했다는 말과 같다. 경기 중 누구나 볼 컨트롤 실수는 몇 번씩 하게 마련이니까. 게다가 그런 실수로 박주영이 역습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은 지나치게 '과장된 해석'이다. 실제로 전반전에 있었던 아스널의 가장 좋은 찬스는 박주영의 '사소한' 실수 이후에 만들어졌다. 박주영이 발바닥으로 긁으려다 공이 걸리지 않아 결과적으로 템포를 죽인 후(어차피 대단한 역습 상황도 아니었다) 때맞춰 왼쪽으로 돌아나가는 키어런 깁스에게 패스를 내주고 깁스가 지체 없이 샤마크에게 크로스를 올린 것. 비록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긴 했지만 '과장되게 해석'하자면 활동반경을 넓힌 박주영이 좋은 장면에 기여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기사에 따르면 박주영은 동료들과 동선이 겹쳤는데, 이는 "지난 3년간 자신을 중심으로 뛰어주는 환경에 익숙해진 탓"이란다. 즉, "AS모나코에서는 자기가 볼을 잡고 있으면 동료들이 움직여줬고, 공간으로 뛰어 들어가면 여지없이 패스가 들어왔다"고 하는데, 이건 실로 터무니없는 소리다. AS모나코의 문제는 동료들의 움직임이 부족하고 누군가 공간으로 뛰어 들어가도 적절한 패스가 들어오지 않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AS모나코는 지난 시즌 강등을 당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동료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주고 누군가 공간으로 들어갈 때 여지없이 패스가 들어오는 팀은 많지 않다. 게다가 박주영의 데뷔전 경기를 보면 특히 베냐윤과 겹치는 장면이 꽤 있었는데, 알다시피 베냐윤도 이적생이다. 아니, 실상 그날 경기를 뛴 많은 선수들이 아스널에 익숙한 선수들은 아니다. 당연히 선수들 모두 동료에 익숙해져서 팀워크를 이루는 게 자연스럽지, 기사에서 말하는 대로 오직 박주영만이 "동료의 동선에 자신을 맞춰야" 하는 건 아니다.

박주영이 경기 후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것을 두고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클럽 아스널 소속 선수라면 가끔 고집을 버릴 필요가 있다"며 "일반인들도 회사 다니다 보면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 운운하는 것은 도저히 보아주기 힘들 지경이다. 일반인들이 회사를 다니며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은 대개 회사에서 직접적으로든 혹은 암묵적으로든 시키는 일을 할 때다. 하지만 아스널이 박주영에게 인터뷰에 응하도록 종용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기사 말미에는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을 현장취재 했을 때 한 번도 취재진 인터뷰를 거부하지 않았던 선수로 티에리 앙리를 소개하며 노골적으로 박주영과 비교하는 데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앙리와의 인터뷰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다면 '친절한 앙리씨'를 찾아 미국으로 날아가면 될 뿐 박주영에게 툴툴거릴 일은 아니다. 박주영의 말 한마디를 어떻게든 '기사화'하기 위해 영국에 날아간 기자로서는 '박주영의 취재요청 거절'이 못마땅할 수 있겠지만, "본래 일반인들도 회사 다니다 보면 못마땅한 일을 그저 속으로 감내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당시 앙리는 아스널의 주장직을 맡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장이라면 책임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고, 그런 이유로 박주영도 언론과의 인터뷰를 기피하는 자신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대표팀 주장으로서 대표팀의 공식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클럽" 맨유의 퍼거슨 감독이 영국 BBC가 자신의 셋째 아들인 에이전트 제이슨이 맨유로부터 부당이득을 취했다는 내용의 보도를 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오랫동안 영국 BBC와의 인터뷰를 거절했던 것은 유명하다. 만약 박주영이 언론을 기피한다면 거기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고, 위에 소개한 기사가 하나의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정확한 사실에 입각하여 공정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기사에 투사하여 입맛대로 해석하는 기사들, "사람들은 이런 기사를 '찌라시'라 부르"고, 이런 기사를 좋아할 만한 선수는 드문 법이다.

박주영의 데뷔전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또 그 경기를 통해 그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요컨대 누구도 박주영의 아스널 데뷔전이 그의 미래에 어떤 지대한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언론에서 말하는 것만큼 박주영의 현실과 미래가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 완벽한 예시는 박지성이다. 만약 언론에서 했던 우려와 비판과 부정적 전망의 단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사실에 부합했다면, 아마도 박지성은 이미 맨유에서 수십 번쯤 짐을 싸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박지성은 이제 맨유에서 7시즌 째를 맞고 있다. 물론 박지성의 예가 박주영의 경우에도 정확히 들어맞으리란 법은 없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박주영은 이제 겨우 한 경기를 치렀을 뿐이다. 지금 박주영의 데뷔전 이후 쏟아지는 평가들을 과장되게 비유하자면, 돌잡이 때 아기가 돈을 집다 찢어버리자 그 아이가 나중에 전 재산을 모조리 날리게 될 거라고 호들갑스럽게 걱정하는 것과 같다. 설령 아이가 돈을 찢었을지라도 그 아이에게 '과제'를 주고 아이의 미래에 대해 '전망'을 하기에는 일러도 지나치게 이르다.

덧. 박주영의 '기도 세레모니'를 못마땅해 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그의 세레모니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 이유는 종교적인 문제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뭐랄까, 박주영의 기도 세레모니는 축구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너무 일찍 잘라버려서, 고양된 흥분의 지속을 허락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개인의 골 세레모니에 대해 다른 사람이 감놔라 배놔라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아주 조금만 더 뒤로 돌려서 안티팬의 상당수가 돌아설 수 있다면, 박주영으로서도 꽤나 괜찮은 일이 아닐까. 내가 하나님을 잘은 몰라도 그분은 당신의 이름을 조금 더 늦게 부른다고 화를 내실만한 분은 아닌 반면, 나를 포함한 축구팬은 좀 더 성급하고 좀 더 화를 잘 내는 편에 속하니까 말이다. 뭐, 물론 내가 몰라서 그렇지, 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조금만 늦게 불러도 화를 내는 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면, 솔직히 그런 분에게 왜 '기도' 씩이나 해야 하는지는 나로서는 죽을 때까지 모를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잉글랜드의 한 대학 연구진의 발표에 따르면, 메이저 대회를 개최하게 되는 나라의 국민들은 방금 결혼한 커플보다 1.5배나 더욱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나는 아직 결혼해 본 적이 없어서 메이저 대회 개최의 기쁨을 결혼의 기쁨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지난 2002년 월드컵 개최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비록 그때 나는 군대에 짱 박혀 있었지만-확실히 메이저 대회 개최의 기쁨이 컸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물론 2002년 월드컵의 경우에는 한국 대표팀의 활약 덕에 기쁨이 배가된 측면도 있겠으나, 그 활약 여부를 논외로 하더라도 지구촌 최대의 축제 중 하나를 내 나라에서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평생을 두고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거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기쁨을 혹 다시 누릴 수 있게 된다면, 그건 또 한 번 환상적인 일이 될 것임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시점에서 또 한 번 월드컵 개최를 위한 노력을 경주한다는 게 과연 덮어놓고 찬성할 만한 일일까.

지난해 2월, 한국의 2022년 월드컵 유치 신청 발표가 있기 한 달쯤 전만 해도 대한축구협회의 조중연 회장은 한 라디오 프로에서 "2022년 월드컵 유치는 현실성이 없다."고 단언했었다. 하지만 이 발언 이후 2022년 월드컵 유치 신청을 한 조중연 회장은 FIFA에 우리가 월드컵 유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알리는 게 중요하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고, 이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이 전면에 나서면서 한국의 월드컵 유치는 어느 정도 경쟁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자평하는 모양새다. 특히 정몽준 명예회장은 최근 기자회견을 통해 지난 2002년 월드컵 유치 경쟁에 비하면 이번에는 여건이 더욱 낫다고 전하며, 월드컵 유치가 "정부와 국민이 힘을 모은다면 충분히 가능"하며, 또한 한반도에서의 월드컵 개최가 "동북아 및 한반도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정부와 국민이 힘을 모아 또 한 번 한반도에서의 월드컵을 개최하고, 이것이 동북아 및 한반도 평화에 기여할 수도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낙관적인(심지어 공상적인) 결과론일 뿐, 거기에 이르기 위한 현재의 유치 과정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가장 먼저, 국민 대다수의 염원이 모여 그 힘을 바탕으로 월드컵 유치를 하는 게 순서일 텐데, 이미 신청을 한 지 오래고 그 동안 소리 소문 없이 유치활동을 하다가 이제 유치 결정을 불과 두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힘을 모아야 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 최근의 한 신문광고에서는 "서울 G20 의장회의의 의장국, 대한민국이 자랑스럽습니다."라는 문구를 곁들이며 "2022년 월드컵 개최를 온 국민과 함께 이루어내겠습니다." 운운하는 것을 보았는데, 일단 이게 G20 유치 광고인지 월드컵 유치 광고인지 의심스러운 건 차치하고, 과연 서울 G20 의장회의 의장국인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며 2022년 월드컵 개최를 염원하는 국민이 얼마나 많을지는 의심스럽기만 하다. 국민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내실을 쌓은 후든 아니든, 그저 어떻게든 일단 유치 의사를 밝히면 국민은 거기에 동조해야 하고, 나아가 그것이 실제 성사된다면 무조건 자랑스러워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적어도, 그 '국민'에 내가 포함되지 않는 건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2022년 월드컵 유치를 원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몽준 회장도 역시 시기적으로 두 번째 월드컵 개최 시기가 너무 빠름을 잘 인식하기 때문인지 2022년 월드컵은 '두 번째 월드컵'이 아니라 제대로 하는 '첫 번째 월드컵'(First full world cup)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이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에 불과하다. 지난 월드컵 개최의 기쁨이 아직도 선연한 이상 또 다른 월드컵 개최는 한국의 '두 번째' 월드컵이 될 게 너무도 명백하고, 그렇기에 조금 과장되게 비유하자면 2022년 월드컵 유치는 이제 막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혼인신고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다음 결혼식 날짜를 잡으려는 것과 같다. 물론 이때 실제 결혼 날짜는 좀 더 나중의 일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지금은 결혼식의 기쁨을 추억하며 일상의 결혼생활 내에서 행복을 찾는 게 지극히 현명한 일일 것이며, 이는 대한축구협회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아닌 게 아니라, 월드컵 유치가 아니더라도 대한축구협회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쏟아야 할 한국축구의 문제는 산적해 있다. 텅텅 비는 다수의 K리그 경기장과 K리그 경기 중계를 외면하는 방송사들, 그리고 한국축구의 나아갈 길이자 아킬레스건인 승강제까지, 내실을 다져야 하는 만만치 않은 현안들을 안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의 놀라운 성과와 2010년 월드컵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는 '안'의 문제들이 이렇듯 여전함에도, '밖'으로만 관심을 기울이는 대한축구협회의 모습은 스러져가는 내부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그저 외부의 페인트칠에만 몰두하는 격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더군다나 한국이 현재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과 2015년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유치했고, 또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와 2020년 부산 올림픽 유치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환기해보면, 국가적으로도 2022년 월드컵 유치는 다소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각각의 대회 유치에 대한 적정성은 차치하고라도, 이처럼 줄줄이 메이저 대회 유치 활동이 진행 중임에도 '현실성 없다던' 월드컵을 또 유치하기 위해 과연 '정부와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할까. 이쯤 되면 2022년 월드컵 유치의 진정한 의도와 재임기간 중 기어코 어떤 '대회'를 개최하고자 노력하는 자치단체장들의 정치적 의도가 어쩐지 겹쳐보이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지난 해 한국이 월드컵 유치 의사를 밝혔을 무렵, 한 칼럼에서는 2022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2022년 월드컵이 누군가에게 엄청난 정치적 이득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를 예상하기도 했었다. 한국의 2022년 월드컵 개최가 현실이 되기란 녹록치 않은 일이니 그 시나리오는 실현될 확률이 낮겠지만, 적어도 지금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현실성 없던' 2022년 월드컵 유치가 '충분히 가능'한 일로 둔갑되는 과정과 한 인물의 등장 시기는 완전히 무관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정몽준 명예회장이 전면에 등장하는 시점과 대한축구협회의 뒤늦게 요란해지는 유치활동 시점이 묘하게 겹쳐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정몽준 명예회장이 FIFA의 부회장이니 그가 유치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 하지만 2022년 월드컵 유치를 현실성 없는 일로 보았던 '현'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생각이 극적으로 변하는 과정과, 현재의 월드컵 유치활동을 보면 과연 대한축구협회가 '무엇'을 위한 조직인지, 심지어 '누구'의 조직인지 의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나는 한 사람의 축구팬으로서 몇 번의 월드컵을 모국에서 거푸 치러내는 것을 보고 싶은 욕심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월드컵이 동일 국가에서 몇 번씩 치러질 수 없다면, 다음 월드컵은 다음 세대의 기쁨으로 남겨두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물론 모두가 같은 마음일 수는 없으니 또 다른 월드컵을 유치하는 게 절대적으로 틀린 일이라고까지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월드컵이 진정 '정부와 국민이 힘을 모아야' 가능한 것이고, 또한 그 이전에 월드컵이 진정 '국민의 기쁨'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이 월드컵이 '기쁨'만이 아닌 '비용'이라는 '대가'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좀 더 진지한 논의를 통해 뜻을 모으는 게 먼저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혹 그러한 논의를 거쳐 국민이 또 한 번의 월드컵을 현시점에서 염원한다면 그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또 한 번의 월드컵이 그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군다나 그의 머릿속에 사특한 계산이 아주 약간이라도 도사리고 있다면, 섣부른 '결혼식' 추진을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그때는 '결혼식'은커녕 오히려 '이혼'을 생각해야 할 것이고, 이때 이혼의 당사자는 물론 대한축구협회와 정몽준 명예회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몽준 명예회장이 한국 축구에 일정 부분 기여한 바는 인정해야겠지만, 이제는 서로를 위해서라도 분명 헤어져야 할 때이다.

덧. 메이저 대회 개최가 언제나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닌데, 이와 관련해서는 정희준의 <어퍼컷>을 읽어 보면 놀랍고 흥미로운 내용을 많이 접할 수 있다. 내 마음 같아서는 관련된 내용 전부를 인용하고 싶지만 스크롤의 압박상 여기에 약간의 내용만 인용한다.

스포츠 메가 이벤트는 그래서 그 규모가 크면 클수록 개최 도시에겐 빚잔치였다. 올림픽 때문에 쪽박을 차게 된 기념비적 사례는 1976년 올림픽을 개최했던 몬트리올이다. 당시 몬트리올 시장은 올림픽으로 인해 재정 적자가 날 가능성은 남자가 아이를 낳을 가능성보다도 낮다고 했지만 결국 몬트리올 시는 엄청난 적자로 인해 파산 직전까지 몰렸고 그 빚을 갚는 데 30년을 허비해야 했다. 그래서 몬트리올 사람들은 올림픽 경기장을 'The Big Owe(거대한 빚)', 'The Big Mistake(엄청난 실수)'라고 부른다. (p163) 

많고 많은 '빚더미 올림픽' 중에서도 동계 올림픽 삼수에 도전하는 강원도 평창이 특히 주목해야 할 곳이 있다. 1998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했던 이웃 일본의 나가노다. 일본, 아니 아시아 최대의 겨울 휴양지로 사실상 '준비된 개최지'였던 나가노는 물경 190억 달러를 투자해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그러나 폐막 후 다른 역대 개최지와 마찬가지로 곧장 포스트올림픽 불경기Post-Olympic Slump로 빠져들었다. 필자는 2006년 일본에서 만난 미디어 마케팅 전공 교수와 나가노 올림픽에 참여했던 세계적 광고 회사 덴츠의 스포츠 마케팅 담당 임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가노가 동계 올림픽을 개최한 것이 지역 주민들에게 잘된 일이었나요?" 두 사람은 입을 맞춘 듯 동시에 대답했다. "NO." (p165)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스포츠 메가 이벤트의 경제 효과란 고상하게 말하면 '환상'이고 쉽게 표현하면 '뻥'이다. 지역 경제와 도시 공학 분야의 외국 학자들은 스포츠 메가 이벤트와 지역 경제 활성화의 상관관계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영국 경제학자인 시맨스키Szymanski는 <월드이코노믹스>지에 실린 '월드컵의 경제 효과'라는 논문에서 "월드컵의 거시 경제적 효과는 없다"고 결론 내리며 "국가는 스포츠 이벤트 유치에 나서면서 갖은 경제적 효과를 '창조inventing'하는 나쁜 버릇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p169) 

그런데도 왜 우리나라 지자체들은 국제 대회를 유치하는 데 '환장'하는 것일까. 첫째는 지자체장들, 정치인들의 욕심이다. 이들에게 이런 대규모 국제 스포츠 이벤트만큼 좋은 건 없다. 이만큼 '폼' 나는 게 없다. 방송 타고 사진 찍힐 가장 좋은 기회다. '국제적'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외제라면 환장하고 국제도시라면 앞뒤 안 가리는 동네 사람들 허파에 바람 넣기 가장 좋다. 공장을 유치해 일자리 만드는 그런 정도에 비할 게 아니다. 게다가 일단 유치만 하면 몇 년 후인 개최 때까지 재선이고, 삼선이고 도대체 걱정이 없다. 아무런 업적이 없어 현직 프리미엄은커녕 2010년 지방 선거를 앞두고 당 공천조차 걱정해야 하는 허남식 부산 시장이나 박광태 광주 시장이 각각 올림픽과 유니버시아드 유치에 목을 매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p169-170)

국제 행사 유치에 일단 눈이 멀면 이들에겐 혈세도 곶감으로 보인다. 강원도는 결국 실패한 동계 올림픽 유치에 6,000만 달러, 물경 600억 원을 썼다. 아시안 게임 유치전이 막바지까지 접전을 벌이게 되자 인천시는 급한 나머지 스포츠 약소국 지원 프로그램에 2,000만 달러를 지원하고 참가국의 숙박과 항공료 일체를 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게 무려 400억 원어치란다. 한마디로 '묻지마 유치', '퍼주기 유치'다. 광주는 201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유치에 100억 넘는 돈을 쏟아 붓고도 실패해 그 돈의 출처와 사용처가 문제가 됐었는데 그 논란을 정말 끝끝내 '쌩' 까고 2009년 5월 기어이 2015년 대회를 유치하고야 말았다. 이번엔 얼마를 썼는가. 정말 누구를 위해 유치하는가. (p1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네티즌은 차두리가 골을 넣으면 세레머니로 비행능력을 공개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결국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차두리는 비행능력을 끝내 공개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차두리는 눈물을 보였는데, 그것은 비행능력보다도 좀 더 멋있었고 훨씬 아름다웠으며 무엇보다도 감동적이었다. 그 눈물로써 차두리의 심장은 엔진이 아님이 밝혀졌고, '로봇'이 아닌 '인간'이었던 차두리의 어떤 진실한 감정의 분출은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촉촉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경기가 끝난 이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패배의 원인을 쏟아내는 글들은 이러한 눈물을 서둘러서 훔치는 듯해서 안타까웠다. 여전히 특정 선수의 특정 플레이가 패배의 원흉이고, 허정무 감독의 전술이 글러 먹었고, 조직력이 문제였다는 등, 일부 사람들의 글 속에는 감정이 아닌 그저 이성을 가장한 무정만이 넘쳐나는 듯했고, 나는 그들이야말로 정녕 로봇이 아닐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물론 종종 그게 일인 사람들도 있고 그런 분석도 필요한 일이니 그걸 마냥 나무랄 수는 없다. 단지 그때의 내 감정은 그랬다). 감정의 여운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서둘러 감정과의 결별을 강제하는 SBS의 인터뷰도 그래서 못마땅했다.

개인적으로 패배 자체는 별로 아쉽지 않다. 4강 신화를 다시 재현할 수 없게된 것도 그다지 아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건 이번 월드컵에서 더 이상 한국 대표팀의 경기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이러면 결국 말 장난 같기도 하지만, 나는 이게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나는 승패보다도, 4강보다도, 무엇보다도 90분간 감정의 파노라마를 겪게 되는 일이 즐거웠었다. 어디가서 그러한 90분을 경험할 수 있단 말인가. 또 경기를 앞두고 느끼는 유쾌한 긴장감과 기대를 어디가서 쉬 경험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제는 그런 일들이 당분간 끝났다는 게 정녕 아쉽다.

비록 패배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멋진 경기였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근래에 본 최고의 경기였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경기였다. 더불어 다른 선수들도 그랬지만 눈물 흘리는 '인간', 차두리가 있어서 경기 후의 여운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지만, 이제 이것으로 '우리의' 월드컵은 끝났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혼신의 힘'이라는 이 진부한 표현을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체현해낸 선수들이 대견하고, 특히 재미와 감동을 더한 차두리가 있어 즐거웠다. 차두리, 로봇이 아니라서 고마워!



덧 하나. 감동을 좀 더 지속시켜줄 말들.

두리한테서 자꾸 문자가 오네. 정말정말 아쉽네요. 난 이기는 줄 알았어요... 이러면서. 설마 아직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한 시가 다 되가는데...  ㅡ차범근 트위터 中ㅡ 

"이번 월드컵에 오기 전, 안전 문제에 대해 워낙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걱정을 하고 왔었다. 그런데 이곳에 막상 와보니 우리가 경기장, 훈련장, 숙소를 오갈 때마다 우리를 보는 많은 남아공 사람들, 어린아이들이 모두 환호하고 좋아해줬다." "어린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주는 것을 보니 축구선수로서 우리의 큰 임무를 완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ㅡ차두리ㅡ 

어느날 팀 마사지사가 "경기도 안 하는데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물은 모양이다.
그러나 두리는 의아해 한 마사지사에게 "나는 입으로 나의 위기를 벗어나고 싶지는 않다.
더 열심히 해서 실력으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고 설명했단다.
그 자리에서 마사지사, 난 너에게 무릎 꿇어 존경을 보낸다며 무릎을 꿇는 시늉을 해보이더란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너무나 기특하고
또 어려움을 아빠가 원하는 방식대로 이겨내려고 애쓰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인생은 길다.
선수 생활이 끝나면 모든 걸 결산해야 하는 게 인생은 아니다
오늘도 경기를 마친 두리에게 물었다.
"경기 재미있게 했어?"
나는 잘 했느냐고 묻지는 않는다.
그게 중요하지는 않으니까.
단지 좋은 경기를 하고 나면
주변의 잡음이 줄어들고 본인이 마음 편해 하니까
나는 감사한 것일 뿐이다.
 

ㅡ차두리 어머니 오은미 씨의 글 中ㅡ (출처 : http://blog.naver.com/haena37/140025725820)

"한국 선수들은 고개를 들기 바랍니다. 당신들은 고개를 떨굴 이유가 없는 멋진 축구를 했고, 고개 들어 당당하게 어깨펴고 고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고개를 드세요." ㅡ독일의 한 캐스터ㅡ (출처 : http://v.daum.net/link/7769310) 

덧 둘. 차두리에 관한 재밌는 일화.

이젠 우리 두리 녀석도 제법 컸다. 분데리스가 선수들에 관한 폭넓은 지식과 정보를 가진 전형적인 꼬마 팬이다. 아빠인 내가 얻어다 주지 않으니까 레버쿠젠 팀의 리벡 감독에게 직접 전화를 걸고서는 "내가 두리인데 우리 아빠가 자꾸 까먹어서 그러니까 사인 두 장만 보내달라."고 해서 기어이 사인지를 손에 넣을 만큼 열성이다. 한 번은 장차 독일 국가대표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한국 국가대표가 될 것인가 하는 주제 넘은 고민을 하기도 했다. 또 1986년 겨울엔 내가 깁스를 해서 한쪽 밖에 양말을 신을 수가 없었는데 그것도 아빠가 하는 것이라 좋아 보였는지 녀석도 겨우내 한쪽 양말만 신고 다녔다.

또 1986년 9월의 일이다. 반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두리 녀석과 마당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이날도 두리 녀석은 11번이 새겨진 유니폼에 팬츠, 그리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기다란 스타킹에 뽐이 제법 뾰족뾰족한 축구화를 신고 있었다. 내가 볼을 갖고는 뺏으라고 했더니 갑자기 내 정강이를 향해 두 발로 덮치는 것이었다. 어찌나 아픈지 '악' 소리만 하고 두 손으로 정강이 뼈를 붙들고 주저않고 말았는데 두리 녀석은 옆으로 쓱 오더니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아무 일 없다는 듯 냉큼 돌아서는 것이었다. 화가 나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야! 볼을 보고 태클을 해야지 다리를 차는 게 어딨어? 그리고 아빠가 아파 죽겠다는데 미안하다는 말도 없어?"하고는 소리를 냅다 질렀다. 그런데 녀석의 하는 말이 더 걸작이었다. "월드컵 선수들은 다 그렇게 하는 거야." 

ㅡ차범근 에세이 中ㅡ (출처 : http://blog.naver.com/jordyinny/1100056796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월드컵은 그 자체로 '순수한 축구대회'를 표방하지만 지구상 최대의 국제적 이벤트라는 점에서 '순수성'의 포장지를 가볍게 벗어던진다. 독재정권의 추악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1978년 아르헨티나) 열린 적도 있고 독재에서 벗어나 그 억압적 이미지를 벗기 위해(1982년 스페인) 열린 적도 있다. 역대 개최국들은 악착같이 월드컵을 국운 상승의 호기로 삼았다. 미국(1994년)과 프랑스(1998년)는 경제적 효과와 '일시적' 인종화합의 장으로 삼기도 했다. ㅡ<축구장을 보호하라> 中ㅡ 

월드컵의 역사가 증명하듯 본래 월드컵은 '순수한 축구대회'와는 거리가 있었다지만,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유독 상업주의와 관련하여 '순수성'이 발가벗겨지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특히 이와 관련해서는 SBS의 공로를 특별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SBS는 월드컵 단독중계를 강행하면서 독점한 '상품'을 통해 최대한 많은 돈을 뽑아내기 위해 가히 천박할 정도로 혈안이 되어 있는 듯하다. 덕분에 월드컵 경기를 전후로 보이는 광고들은 오직 소수의 대기업의 것으로만 채워져 있고, 시민들을 위해 전광판에 광고 대신 축구를 보여주고자 하는 전광판 업체들의 호의는 그에 대해 돈을 요구하는 SBS에 의해 무산되기도 했다. 게다가 열정적이고 자발적인 거리 응원은 발 빠르게 장소를 선점한 기업들에 의해 그 순수성의 상당부분을 위협받고, 많은 돈을 지불한 월드컵 '공식' 스폰서들을 위한 FIFA의 특혜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순수성이 훼손된 월드컵에 냉소가 자리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 대표팀이 지난 2002년 월드컵의 영광을 재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누군들 없겠는가마는, 이미 순수성이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진 상황에서 한국 대표팀의 승리는 천박한 자본주의와, 혹은 때로는 정권을 쥐고 있는 이들의 승리를 아울러 의미하고, 그것은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다. 한국 대표팀의 조별 경기만으로도 이미 손익분기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SBS의 수익은 한국 대표팀이 토너먼트에 진출할 때부터 급격히 늘어나는데, 이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의 중계권마저 독점으로 보유한 SBS의 향후행보에 타당성을 안겨주고, 또한 한국 대표팀의 경기가 있을 때 몇몇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일들을 서둘러 처리하려는 '독재적' 정권은 대표팀의 승리가 있을 때마다 벙커에서 승리의 휘파람을 부는 것이다. 그 꼴을 볼 바에야 차라리 대표팀이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오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축구가 그렇게 희생만 치른 것은 아니다. 프랑코 독재시대를 끝낸 스페인에게 축구는 희망의 예광탄이었으며 남미와 아시아에서도 축구는 거역할 수 없는 저항적 에너지가 되기도 했다. 구체적인 스트라이크의 계기는 물론 아니다. 그러나 축구가 없는 독재를 상상해 보자. 무슨 낙으로 그 혹독하고 지루한 세월을 견딜 것인가. 물론 그 참담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경기가 독재자의 안녕에 이바지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권력자가 애용하는 축구라고 해서, 이를테면 약 20년 동안 집권했던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신의 이름을 딴 아시아 지역 축구대회를 열어 독재의 달콤한 맛을 즐겼다고 해서 그 자리에 모인 수만 명의 관중들이 오로지 독재자에게 충성을 다짐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ㅡ<축구장을 보호하라> 中ㅡ 

하지만 월드컵이 개막한 이후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단지 냉소만으로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어떤 가치들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우려스러웠던 팔 부상에도 불구하고 끝내 조별리그 첫 경기에 잠시 모습을 드러낸 드록바가 2006년 월드컵 당시 자국의 내전 중단을 눈물로 호소했던 이야기라거나, 혹은 북한 대표팀 선수로서 월드컵 무대를 밟아 세계최강 브라질을 상대하게 된 정대세가 만감이 교차한 듯 눈물을 쏟았다는 이야기라거나, 혹은 1966년 월드컵에서 8강에 진출했던 북한이 준결승 티켓을 양도해야만 했던 상대인 포르투갈과 44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나서 다시 맞붙게 되었다는 이야기라거나, 또는 시한부 인생 선고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출전 의지를 불태운 호주의 해리 큐얼에 대한 이야기 등, 월드컵이 엮어내는 문화적,역사적 '드라마'에는 문자 그대로 '월드컵'이기에 접할 수 있는 전세계의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이 존재하고 있고, 이에 대한 반응은 결코 냉소일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리면 이제 '냉소'는 눈을 씻고 봐도 흔적을 찾기 어렵다. 거슬리는 부부젤라의 소음과 지나치게 다루기 힘든 자블라니의 탄성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은 열의를 다해 경기장에서 땀을 흘리고, 그 선수들을 보며 관중들은 때로 환호하고 때로 슬픔의 눈물을 흘린다. 한국 대표팀 선수들 역시 그 어느 대표팀 선수들 못지않게 열심히 그라운드를 누비고, 와중에 훌륭한 경기력으로 승리를 기록하기도 하고 아쉬운 경기력으로 패배를 기록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경기장에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오직 '축구경기'가 펼쳐지고, 그것은 세계의 많은 나라 그리고 각국의 많은 선수들이 바라마지 않던 순수하고 역사적인 현장인 셈이다. 그렇기에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며 거리로 나선 붉은 악마들의 순수성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고, 이는 또한 여전히 유효한 축구의 가치를 확고히 웅변하는 것이다.

축구는 철저히 산업화되었다. 수익성이 없는 것은 곧 무익한 것으로 변했다. 어린아이가 공을 가지고 놀거나 고양이가 면실 꾸러미를 가지고 노는 것과 같은 순수한 쾌락은 상실되었다. 프로 축구의 관료화는 단순한 주력과 체력적 강인함만을 요구한다. 즐거움을 박탈하고 환상을 쇠퇴시키고 대담성을 금지시켰다. 금지된 자유를 향해 모험적으로 돌진하는 육체의 순수한 쾌락이 사라졌다. ㅡ<축구, 그 빛과 그림자> 中ㅡ

<축구, 그 빛과 그림자>에서 축구의 역사를 "즐거움에서 의무로 변해가는 서글픈 여행의 역사"라고 단언한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말은, 그래서 그 대단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정답은 아니다. 그가 지적하듯이 "수익성이 없는 것은 곧 무익한 것"이 되고, "어린아이가 공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같은 순수한 쾌락"은 상실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축구장에서 "환상"과 "대담성"과 "즐거움"을 만난다. 최고의 무대에서 승부를 가리려는 그 승부의 원초적 순수성은 월드컵 역사에서 있었던 몇몇 의심스러운 경기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이어져왔고, 이제 월드컵은 수억의 인구가 지켜보는 축제의 장이 되면서 더 이상 적어도 경기장 안에서의 순수성을 훼손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축구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그러므로 결코 천박한 상업주의와 과잉된 민족주의만이 아닌, 축구경기에 대한 혹은 나아가 축제에 대한 기대와 환희와 즐거움이기도 한 것이며, 이는 오늘날의 축구가 오로지 '의무'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반증하는 것이다.

물론, 축구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경계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축구와 월드컵에 환호하는 이들의 순수성을 이용하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월드컵을 마치 '악의 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도할 이유로까지 확대되기에는 불충분하다. 움베르토 에코는 "과연 월드컵이 벌어지는 일요일에 무장투쟁이 가능한가? 축구경기가 있는 일요일에 혁명이 가능한가?"라고 물었다지만, 지난 2006년 <한국일보>의 한 칼럼에서 강준만이 서남대 김욱 교수의 말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 이에 대해서는 이런 반론도 가능한 것이다. "축구경기가 없는 일요일에는 언제나 혁명이 가능한가?"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강준만은 월드컵 열풍에 대한 비판이 '관심'의 기회비용을 걱정하는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월드컵 과잉은 4년에 한 달이지만 나머지 3년 11개월이 더 문제가 아닌가?"하는 재반론도 가능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특히 <축구는 한국이다>에서 강준만이 소개한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의 비유는 월드컵에 대한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속 시원한 해답의 하나를 제시한다고 믿는다.

"때로 경기 하나가 인식의 일대 전환을 가져오고 그것이 실제의 물적 질적 변화를 선도한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 혹여나 촌스런 애국주의에 대한 민망함에 그를 질타하는 분석은 참아 달라. 지난 월드컵 애국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근엄한 분석을 접할 땐, 어렵게 만난 멋진 연인과 이제 겨우 연애 좀 시작해 보겠다는데 연애 너무 집착하면 자칫 살인나는 수도 있다는 훈계부터 듣는 기분이었다." ㅡ<축구는 한국이다> 中ㅡ 

1970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우승하며 줄리메 컵을 영구히 소장함에 따라, 새로이 월드컵 트로피를 고안하게 된 이탈리아의 조각가 실비오 가자니가는 월드컵 트로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광의 선수는 초인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이어야 하며 더욱이 최선을 다해 고난을 이겨낸 영웅이어야 한다. 그 선수가 세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어쩌면 우리가 월드컵을 둘러싼 '순수성의 훼손'에 대해 과도한 비판을 하는 건, 월드컵에서 초인의 모습을 기대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의 비루하고 천박한 감정과 행태 따위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월드컵은, 그리고 축구는 오직 '인간'의 놀이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월드컵에는 종종 인간의 추악한 모습이 끼어들기도 하지만,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인간의 모습도 상존하는 것이다. 땀을 흘리며 공을 좇는 순수성이 있고, 거기에 기뻐하고 슬퍼하는 인간들의 '진실한' 감정이 넘실댄다. 물론, 그런 이유로 월드컵을 향한 비판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겠지만, 또한 그런 이유로 월드컵을 향한 열광도 이해될 수 있어야 마땅하다. 요컨대, 월드컵은 그 트로피의 형상이 그러하듯 단언컨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고, 바로 그것이 우리가 끝내 그 '그림자'의 암울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축제인 월드컵을, 차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월드컵에 가장 바라는 것은... 인간을 고무시키고 단합시키는 (축구의) 힘이다." ㅡ넬슨 만델라ㅡ

멀미나는 알제리 시절, 그 수난의 햇살 아래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던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알베르 카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궁극적으로 알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윤리와 의무는 축구선수로서 지녀야 할 윤리와 의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ㅡ<축구장을 보호하라> 中ㅡ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와의 첫 경기를 시원한 승리로 장식해 기대감을 한껏 높였던 한국 대표팀은 아르헨티나와의 두 번째 조별예선 경기에서 1대4로 패했다. 몇몇 아쉬운 상황들을 보면 운이 없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개인 기량의 차이를 여실히 드러낸 경기였다. 그런데, 대패였던 만큼 한국 대표팀 선수들의 플레이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과도한 비판이 쏟아지는 게 마뜩치않다. 더욱이 몇몇 선수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경기에 투입해서는 안 되었다는 원초적인 비난을 가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렵다.

인터넷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박주영과 염기훈 그리고 오범석을 투입한 게 잘못이었다고 말하고, 이를 한국축구가 지닌 고질적인 인맥과 학연에 따른 선발과 연결시킨다. 오범석의 경우에는 그의 아버지가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에 김희태 축구센터 총괄감독이라는 사실까지 언급된다. 하지만 경기 시작 전 오범석이 선발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 기사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유럽선수들과 상대하기 위해 신체조건이 좋은 차두리를 기용하고, 기술이 좋고 작은 남미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영리하고 민첩성이 좋은 오범석을 기용한다는 전략은 꽤나 그럴듯한 전략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고, 누가 나오든 선전을 바란다던 기사 말미의 응원은 끝내 공염불로 남았다.

박주영에 대한 비판은 사실 그리스 전과의 경기에서도 없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미국의 한 언론매체에서는 박주영을 경기 MVP로 뽑을 만큼 그의 공헌도를 인정했고, 굳이 그런 공식적인 평가가 아니더라도 박주영이 그리스의 거한들과 맞서 공중볼을 경합하고 활발하게 공간을 창출했던 것은 모두가 목도했던 바와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번 경기에서 박주영이 기록한 자책골은 그의 모든 노력을 단번에 부정해버리는 모양새다. 그리고 이러한 잔인하리만치 혹독한 '비난'은 그리스 전에서 중원 장악에 힘을 보탠 김정우나 대표팀 선수 중 가장 많은 활동량을 소화했던 염기훈에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물론, 이번 경기에서 앞서 언급한 선수들이 아쉬웠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상대가 강하니 만큼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그리스 전에 비하면 집중력이 조금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지적도 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해당 선수를 빼버려야 했다거나 모든 것이 인맥에 의한 선발 탓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어떤 건설적인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비판'이 아닌, 소모적이고 찰나적인 '비난'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에서 지적하는 그런 식으로 몇몇 선수들을 계속해서 빼다보면 대표팀에 남는 선수들은 거의 없다. 가령, 적게 뛰는 이동국을 빼고 노쇠한 안정환을 빼고 경험 없는 이승렬을 빼고 인맥으로 들어간 염기훈을 빼고 이제는 세레머니도 못마땅한 박주영도 빼면, 과연 대표팀의 공격진에는 누가 남는가. 설령 누군가 새로운 선수가 들어간다고 해도 언젠가 지는 경기를 피할 수 없는 한 한국 대표선수들은 영원한 돌림노래처럼 들고 나기를 반복해야 할 뿐이 아니겠는가.

어떤 말로도 패배를 아름답게 포장하기란 어렵다.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패배조차도 쿨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역시 어렵다. 하지만 정말로 씁쓸한 것은 비단 패배가 아니라, 패배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일부의 사람들처럼 '패배'를 그렇게 발작적으로 받아들일 바에야 차라리 한국 대표팀의 응원을 당장 관두고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혹은 스페인과 같은 강팀을 응원하는 쪽으로 선회하는 게 백 배 나은 일이다. 물론 아무리 강팀들이라도 승리가 영원할 수 없는 한, '발작'은 곧 되풀이되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제는 그저 한국 대표팀 선수들이 패배의 아쉬움을, '비난'의 대열에 가세하지 않는 대다수의 팬들이 그렇듯, 다음에 다가올 짜릿한 승리에 대한 기대와 열정으로 승화시킬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마냥 슬퍼하며 고개를 숙이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