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 1
황규영 지음 / 웍스비전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이 무협소설에 무언가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느낀 건 '상검상단'이 등장할 때부터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상검상단'에 관한 서술이 하나 둘씩 쌓여 '상검상단'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가 형성되어 갈 즈음, 어쩐지 이 '상검상단'이라는 가상의 이익집단이 내가 딛고 있는 현실 속의 어느 이익집단과 대단히 흡사하다고 생각하면서부터였다. 이를테면, 상검상단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문어발식 경영을 하고 있다거나, 혹은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거래처를 압박하는 한편 소비자들로부터는 폭리를 취하고 있다거나, 혹은 관부의 사람을 뇌물로 포섭하여 어지간한 비리로부터는 손쉽게 면죄부를 얻는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게 단순히 무협소설 속의 과장된 설정만은 아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상검'이라는 단어의 모음과 자음을 적절히 조합하면 익숙한 단어 하나를 쉽게 연상할 수 있다는 것도 마냥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한번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나자 더 이상 이 무협소설이 흔한 무협소설로 여겨지지 않았다. 소설 속 누군가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라고 소리치면, 이 대사의 그 놀랄만한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대담하고 신선하게 느껴졌고, 또 누군가 "오해입니다."라고 변명하면 그 지극히 일상적인 대사가 사뭇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뿐인가, 외국의 사신으로 온 공주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공주에게 내어준 건물의 담장을 넘는 '무례하고 제멋대로인' 왕자들의 이야기에서 나는 어느 유명축구감독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슬리퍼를 신은 채 나타났다는 어느 나라의 왕자를 떠올렸고(소설 속 왕자들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그들이 형편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있을 뿐이다),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이웃나라를 두고 있으면서도 정작 위정자들은 그것을 정치적으로만 이용할 뿐 거기에 무관심하다는 이야기에서 안보와 보수를 부르짖으면서 정작 그들 스스로는 총 쏘는 법도 알지 못하는 어느 나라의 왕 이하 관리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건 그저 '무협'이 아니었다.

 

상황이 이쯤에 이르자 이제 나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에서 어쩌면 어떤 중대한 메시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별 하나에 그리운 이름 하나를 불러보았다는 어느 시인의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마음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미 결론을 내놓고 거기에 맞춰 파란색 매직으로 쓰인 숫자를 증거로 찾아낼 줄 아는 직관적이고 맹목적인 어느 명탐정의 심정으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악당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보았다. ooo, ooo, ooo, 기타등등. 파란색 매직으로 각 이름의 자음과 모음 중 필요한 것에만 덧칠하면 '니가 바로 범인이다.'라고 못할 것도 없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는 깨끗이 포기했다. 나는 시인은 결코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역시나 파란색 매직으로 쓰인 숫자 하나로 모든 것을 파악하는 명탐정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다만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여느 무협소설과 다르게 조선시대와 흡사한 시대를 배경으로 선택한, 그래서 어떤 의도가 느껴지는 이 소설 속 왕의 성이 '이'씨 라는 것, 그리고 이 탐욕스럽고 소심하며 비겁한 데다 음흉스러우며 무능력하기까지 한 왕이 조선시대 그 어떤 왕과도 닮지 않았고, 외려 어쩐지 오늘날 우리 시대 높은 자리에 있는 누군가를 연상하게 만든다는 것.

 

'후기'에서 "이전에 쓰던 글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고 밝히는 저자는 짤막한 '후기'를 이렇게 끝맺는다. "다만, 멀리 가지는 못했습니다. 더 멀리 가도 되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저자가 생각하는 '다른 길'이 내가 생각하는 '다른 길'과 같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고, 그렇기에 '멀리 간다는 것'도 내가 생각한 것과 같은 의미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확실히 '다른 길'을 걷는 독특한 이 무협소설을 좀 더 흥미롭게 읽기 위해서는 애당초 이 소설이 '현실 비판적 무협소설'이라고 믿거나 혹은 독자 스스로가 '현실 비판적 무협독자'가 될 필요가 있어 보이며, 둘 모두가 아니라면 꽤나 재미없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다른 길'을 함께 걷는다는 믿음 혹은 착각은 사뭇 유쾌한 일이지만, 그런 믿음 혹은 착각이 사라지는 순간 이 책은 '무협' 본연의 멋을 상실한 천덕꾸러기가 될지도 모를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다른 길'을 걷는 모든 것들의 숙명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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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10-09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황규여의 개천만은 읽지 않았는데 한번 구해서 읽어봐야할 듯 합니다. 가끔 무협지들 중에서 명작들이 등장합니다.

Fenomeno 2012-10-10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솔직히 굳이 구해 읽을 만한 작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유쾌한 재미가 있지만, 혹시라도 많은 것을 기대하신다면 실망이 크실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제가 읽어낸 것과 같은지도 장담할 수 없고요. 리뷰를 너무 호의적으로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