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두들 등반기
W. E. 보우먼 지음, 김훈 옮김 / 마운틴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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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보내는 메일 혹은 문자메시지는 내게 거의 소용이 없다. 알라딘에서는 꽤나 자주 이런저런 소식들을-아마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내게 전해주는데, 대개의 경우 나는 제목만 보고 삭제를 해버린다. 심지어는 '스팸차단'과 '삭제' 사이에서 꽤 고민하는 편이다. 하지만 끝내 '스팸차단'을 하지 않는 이유는 드물게 혹하는 소식을 전해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며, 얼마 전 '빌 브라이슨' 운운하며 전해진 소식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자세히 읽어보니 빌 브라이슨이 새로운 책을 낸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떤 책을 추천하는 것뿐이었지만, 어쨌거나 웃기는 사람이 웃기는 책이라고 추천해주는데 웃기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곧 나는 그 책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리고 그 책의 이름은ㅡ맹세하거니와 나는 빌 브라이슨이 아니었다면 이런 제목의 책을 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산을, 등산을, 하물며 등반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ㅡ<럼두들 등반기>였다.


<럼두들 등반기>를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건 빌 브라이슨의 서문을 읽는 것이었다.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고 통계를 활용하고 과장되지만 재미있는 일화를 덧붙이고 심술맞게 구는 듯하다가 끝내 찬사를 보내는 건 빌 브라이슨이 가장 빈번히 그리고 훌륭히 해내는 것이고, 끝내 독자가 그 대상에 매료되지 않기란 어렵다. 예컨대, 빌 브라이슨이 유럽에 대해, 영국에 대해, 미국에 대해, 그리고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할 때 독자는 필연적으로 그 대상에 대해 호의를 가지게 마련이고, 이 책의 서문에서는 이 책 자체가 바로 그런 대상에 해당한다. 무엇보다도 "이제 나는 특권을 누리는 듯한 즐거운 기분으로 여러분에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 가운데 하나를 읽어 보시라 권한다."라는 말에 혹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이 책에서는 빌 브라이슨의 서문을 읽는 것이 가장 흥미로웠고, 이는 당연히 이 책에 대한 찬사는 아니다.


물론 빌 브라이슨의 서문 외에도 이 책에서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 무려 12000.15미터에 이르는 럼두들 산을 등반하기 위해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여 팀을 이루었을 때, 다시 말해 이제 막 책장이 넘어가기 시작해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었던 때는 기대감과 흥미로움이 최고조에 달했었다. 특히 등장인물의 이름과 전문분야 자체가 그들의 행태와 어우러져 재미있는 농담으로 기능했기에 각 대원들의 이름과 전문분야를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나 책장을 앞으로 넘겨야 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다시 앞으로 책장을 넘길 일이 없었던 건 꼭 등장인물의 이름과 전문분야를 외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등장인물의 전문분야와 행태와의 괴리가 즐거움을 주었지만 뒤로 갈수록 그러한 전복적인 특성이 외려 공고해지는 듯했고, 그건 더이상 그러한 괴리로부터 즐거움을 찾기가 어려웠다는 뜻이다. 게다가 어떤 흥미로운 사건도 이 책에는 드물었다.


옮긴이주가 꽤 들어간 이 책에서 옮긴이는 옮긴이주가 많은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유려함과 익살 때문에 시와 비슷한 성격을 지녀 옮길 때 옮긴이주를 붙이지 않으면 도저히 그 뜻을 전할 길이 없을 때가 많았다." 이 책에서 즐거움을 느껴야 하는 부분은 대체로 언어유희가 이루어지는 부분일 때가 많았고 하기에 이 소설이 시와 비슷한 성격을 지녔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옮긴이주의 도움으로도 즐거움을 느끼기에는 어쩔 수 없이 한계가 있었다(웃기는 데 해설이 필요하다면 그건 더 이상 웃기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이 소설에는 옮긴이의 말대로 잘 안 풀리는 미스터리가 몇 가지 숨어 있고, 사실을 말하면 나는 옮긴이조차 답을 말하기 어렵다고 한 미스터리뿐만 아니라 옮긴이가 쉽게 풀린다고 말한 미스터리조차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게 이 책의 잘못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내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물론 내가 영어공부를 한 20년 했지만 여전히 영어를 못하는 건 내 잘못이다).

 

빌 브라이슨이 이 책을 그토록 추천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빌 브라이슨도 언어유희에 꽤 집착하는 작가고, 그렇기에 그가 이 책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도 납득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내가 빌 브라이슨의 책에서 종종 난감했던 부분이 그가 언어유희에 집착하던 순간이고, 때문에 내가 이 책을 좋아하기 어려운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 책은 어쩔 수 없이 언어의 벽을 실감하게 해주는 책이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실은 언어의 벽이 아니라도 과연 내가 그렇게 재미있다고 느낄 수 있을 만한 책인지도 회의적이다(물론 여전히 이 책을 재미있게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좋아하는 작가가 좋아하는 책이라고 추천하기에 좋아했건만 읽고 나서는 도무지 좋아할 수 없어서 심히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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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 메이저리그 124승의 신화
민훈기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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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124승의 신화 박찬호>를 읽은 건 박찬호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책의 저자인 민훈기 때문이었다. 한 포털 사이트에서 우연히 민훈기 기자의 메이저리그 관련 칼럼을 읽게 되었는데 사뭇 마음에 들었고, 이후 그의 글은 일부러라도 찾아서 읽곤 했다. 냉정히 말하면 아름다운 문장도 아니고 완전히 새로운 자료를 제시하지도 않지만, 평이한 문장과 새삼스러울 것 없는 자료를 가지고 그는 기어이 어떤 의미들을 찾아내곤 했다. 그 의미란 때로는 1회에 던져진 95마일의 강속구 하나이기도 했고, 타격 슬럼프 와중에 나온 꾸준한 출루이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한 타자에게 두 번의 홈런 허용 이후에 나온 한 번의 삼진이기도 했다. 공 하나 하나가 던져지는 순간의 중요함을 캐치하고, 똑같은 통계자료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고, 나빴던 순간에도 좋았던 점을 찾을 줄 아는 저자의 밝은 눈은 기어코 그를 다른 야구 전문가와 차별하게 만든다.

 

익히 알려져 있다면 알려져 있는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여정을 다루는 이 책에서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전적으로 저자의 특별함에 힘입은 바 크다. 박찬호의 전성기 시절, 내 다이어리에는 박찬호의 승리가 숫자로 기록되었던 때도 있었듯 누구나 박찬호의 승리 숫자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이 책은 그러한 단순한 숫자 혹은 결과로서의 승리가 아니라 새로운 무대를 개척해 나가는 박찬호의 집념을 좇으며 그 과정을 상세히 복기해놓고 있다. 책 속에는 승리의 환희만이 아니라 고통과 좌절의 패배, 행운과 불운의 교차, 인고와 재기의 순간이 숨김 없이 펼쳐지며, 때문에 이 책은 저자가 말하듯 "승리한 자의 기록이이지만 동시에 온전하게 패배할 줄 아는 자의 기록이기도 하다."

 

사실 박찬호가 LA에서 전성기를 구가한 것이나 텍사스에서 힘겨운 시기를 보낸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가 샌디에이고, 뉴욕 메츠, 필라델피아, 토론토, 뉴욕 양키스, 피츠버그 등에서도 분투를 이어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설령 단편적인 뉴스를 통해 그의 이적 소식을 들었을지라도 그가 여러 팀에서 어떤 활약을 선보였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잊혔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며, 선발에서 불펜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그가 던지는 공 하나 하나의 중요성이 작아진 것도 아니었으며, 패배라고 해서 오로지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이 숨을 쉬어야 살듯이 야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박찬호는 묵묵히 공을 던졌고, 그것은 과장하자면 단지 살아가는 것의 경이로움만큼이나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인생의 축소판에 비견되는 야구의 진면목은 책 속에서 박찬호라는 한 야구선수의 도전을 매개로 하여 실로 매력적으로 드러난다.

 

저자의 안내대로 박찬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무심코 넘겼던 많은 부분들이 큰 의미로 다가온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동양인 최다승인 124승을 달성하는 과정이 사뭇 감동적이었다. 책에 따르면 박찬호는 2010년 10월 2일, 소속팀 피츠버그가 플로리다에 3대 1로 앞서던 5회 말에 마운드에 올라 3이닝을 완벽하게 막으며 대망의 124승 째를 거뒀다고 한다. 당시 러셀 감독은 박찬호에게 신기록의 기회를 주기 위해 4회까지 호투하던 선발투수 다니엘 매커친의 양해를 얻어 박찬호를 넣었고, 모두가 알다시피 그 경기의 승리는 박찬호의 마지막 승리가 되었다. 한편 매커친 또한 대선배의 기록 달성을 위해 양보를 했고, 다음 날 박찬호는 매커친에게 아이패드를 선물했다고 한다. 쉽게 얘기되는, 혹은 단지 동양인들만의 무의미한 기록으로 폄하되는 박찬호의 기록달성에는 이와 같은 배려와 양보가 숨어 있었고, 이는 박찬호가 걸어온 발자취의 위대함을 아름답게 증명한다.

 

IMF시대에 박찬호의 야구가 국민에게 큰 희망과 기쁨을 주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가 국민에게 더 이상 희망과 기쁨을 주지 못한다고 여겨질 때에도, 그는 오직 야구를 했었다고 이 책은 항변하는 듯하다. 박찬호의 여정은 그 자체로 위대하지만 그 여정을 훨씬 깊이 있고 풍요롭게 만든 것은 저자의 넓고 깊은 식견과 순간순간의 성적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냉철함, 무엇보다도 취재 대상에 대한 한결같은 애정이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 대단한 야구 여정에 우리를 초대해주어서 고맙다."는 저자의 마지막 말은, 그래서 저자에게도 또한 되돌려 주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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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영 지음 / 웍스비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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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협소설에 무언가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느낀 건 '상검상단'이 등장할 때부터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상검상단'에 관한 서술이 하나 둘씩 쌓여 '상검상단'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가 형성되어 갈 즈음, 어쩐지 이 '상검상단'이라는 가상의 이익집단이 내가 딛고 있는 현실 속의 어느 이익집단과 대단히 흡사하다고 생각하면서부터였다. 이를테면, 상검상단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문어발식 경영을 하고 있다거나, 혹은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거래처를 압박하는 한편 소비자들로부터는 폭리를 취하고 있다거나, 혹은 관부의 사람을 뇌물로 포섭하여 어지간한 비리로부터는 손쉽게 면죄부를 얻는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게 단순히 무협소설 속의 과장된 설정만은 아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상검'이라는 단어의 모음과 자음을 적절히 조합하면 익숙한 단어 하나를 쉽게 연상할 수 있다는 것도 마냥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한번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나자 더 이상 이 무협소설이 흔한 무협소설로 여겨지지 않았다. 소설 속 누군가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라고 소리치면, 이 대사의 그 놀랄만한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대담하고 신선하게 느껴졌고, 또 누군가 "오해입니다."라고 변명하면 그 지극히 일상적인 대사가 사뭇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뿐인가, 외국의 사신으로 온 공주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공주에게 내어준 건물의 담장을 넘는 '무례하고 제멋대로인' 왕자들의 이야기에서 나는 어느 유명축구감독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슬리퍼를 신은 채 나타났다는 어느 나라의 왕자를 떠올렸고(소설 속 왕자들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그들이 형편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있을 뿐이다),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이웃나라를 두고 있으면서도 정작 위정자들은 그것을 정치적으로만 이용할 뿐 거기에 무관심하다는 이야기에서 안보와 보수를 부르짖으면서 정작 그들 스스로는 총 쏘는 법도 알지 못하는 어느 나라의 왕 이하 관리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건 그저 '무협'이 아니었다.

 

상황이 이쯤에 이르자 이제 나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에서 어쩌면 어떤 중대한 메시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별 하나에 그리운 이름 하나를 불러보았다는 어느 시인의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마음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미 결론을 내놓고 거기에 맞춰 파란색 매직으로 쓰인 숫자를 증거로 찾아낼 줄 아는 직관적이고 맹목적인 어느 명탐정의 심정으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악당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보았다. ooo, ooo, ooo, 기타등등. 파란색 매직으로 각 이름의 자음과 모음 중 필요한 것에만 덧칠하면 '니가 바로 범인이다.'라고 못할 것도 없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는 깨끗이 포기했다. 나는 시인은 결코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역시나 파란색 매직으로 쓰인 숫자 하나로 모든 것을 파악하는 명탐정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다만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여느 무협소설과 다르게 조선시대와 흡사한 시대를 배경으로 선택한, 그래서 어떤 의도가 느껴지는 이 소설 속 왕의 성이 '이'씨 라는 것, 그리고 이 탐욕스럽고 소심하며 비겁한 데다 음흉스러우며 무능력하기까지 한 왕이 조선시대 그 어떤 왕과도 닮지 않았고, 외려 어쩐지 오늘날 우리 시대 높은 자리에 있는 누군가를 연상하게 만든다는 것.

 

'후기'에서 "이전에 쓰던 글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고 밝히는 저자는 짤막한 '후기'를 이렇게 끝맺는다. "다만, 멀리 가지는 못했습니다. 더 멀리 가도 되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저자가 생각하는 '다른 길'이 내가 생각하는 '다른 길'과 같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고, 그렇기에 '멀리 간다는 것'도 내가 생각한 것과 같은 의미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확실히 '다른 길'을 걷는 독특한 이 무협소설을 좀 더 흥미롭게 읽기 위해서는 애당초 이 소설이 '현실 비판적 무협소설'이라고 믿거나 혹은 독자 스스로가 '현실 비판적 무협독자'가 될 필요가 있어 보이며, 둘 모두가 아니라면 꽤나 재미없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다른 길'을 함께 걷는다는 믿음 혹은 착각은 사뭇 유쾌한 일이지만, 그런 믿음 혹은 착각이 사라지는 순간 이 책은 '무협' 본연의 멋을 상실한 천덕꾸러기가 될지도 모를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다른 길'을 걷는 모든 것들의 숙명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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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10-09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황규여의 개천만은 읽지 않았는데 한번 구해서 읽어봐야할 듯 합니다. 가끔 무협지들 중에서 명작들이 등장합니다.

Fenomeno 2012-10-10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솔직히 굳이 구해 읽을 만한 작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유쾌한 재미가 있지만, 혹시라도 많은 것을 기대하신다면 실망이 크실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제가 읽어낸 것과 같은지도 장담할 수 없고요. 리뷰를 너무 호의적으로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드네요;;;
 
거꾸로 읽는 세계사 - 개정판 거꾸로 읽는 책 3
유시민 지음 / 푸른나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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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나를 충격과 공포 속으로 밀어 넣었던 책은 여름을 노리고 본격적으로 쏟아진 스릴러물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해당 책은 '역사'에 관한 책으로, '거꾸로 읽는 세계사'라는 제목이 다소 도발적이기는 해도 이런 '역사' 관련 책이 스릴러물보다 더한 '충격'과 '공포'를 내게 안기리라고는 감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건 사실 공평하지는 않다. 지난 여름은커녕 최근 몇 년간을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내가 스릴러물을 읽은 기억은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스릴러물보다 이 책, 정확하게 말해서 이 책에서 핵과 관련해 인용한 내용 중의 일부가 정녕 두려웠던 건, 거기에는 주인공도 악당도 없이 다만 온통 끔찍한 피해자만 가득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간과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사설이 길었는데, 1945년 8월 6일과 9일, 각각 한 발씩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의 상황을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인용해 놓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전차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B29 두 대가 꽤 높은 상공에서 북동족으로 날아갔다.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다음 순간 번쩍! 맹렬한 빛이었다. 순간 그 자리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 다음은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손발을 움직여 보니 움직여졌다. "아아, 살았구나, 살았다." 일어나 히로시마역 쪽으로 달렸다. 여기저기 길에서 사람들이 나왔는데, 큰길에는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유령처럼 양손을 흔들흔들하는 반라의 여자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도 넘쳐흘렀다. 눈도 귀도 입도 녹아서 얼굴이 수박같이 되었다. 여기저기를 헤메다가 마침내 해안에 도착, 거기서 군인들에게 물을 받아 마시고 멍석 위에 누웠다. 그러자 구토가 나 아침에 먹은 걸을 토하고 잠들었다. ......화상을 입은 얼굴에서는 고름과 피와 땀이 흘렀다. 왼쪽 귀가 녹아내려 구더기가 끓고, 매일 학질 걸린 것처럼 고열이 났다. ......그해말 귀국했는데, 윤곽만 남은 자식의 모습에 부모님은 피를 토하듯 우셨다. (한국인 원폭피해자 협회장 신영수 씨의 증언) (p357~358)

 

물론 일본에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두 번의 폭격이 단순히 '폭격'이라는 무심한 단어 이상의 끔찍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너무나도 유유히 떨어진 단 두 개의 물체가 누군가의 터전을 망가뜨리고,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고, 누군가의 현재와 미래 모두를 짓밟았으리라는 것도 전혀 상상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종종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참혹한 짐작과 상상을 마주하는 대신에 단순한 인과론과 일방의 정의에 의한 단선적 서술을 목격하곤 한다. 위의 사례를 가지고 말하자면,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을 앞세워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유린한 일본의 기도를 분쇄하고 끝내 일본 천황의 입에서 "항복"이라는 말을 내뱉게 한 것이 바로 두 발의 원자폭탄이었다고 말하곤 끝내는 식이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두 발의 폭탄은 독립을 알리는 축포와도 같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단선적인 레일 위의 역사를 탈피한다는 점에서 무척 가치가 있는 책이다. 자본주의는 지구상 유일의 성공한 체제이고,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우방이며,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는 우리의 대척점에 서있다는 등의 일방적인 역사적 시각에 대항하여, 이 책은 외려 '거꾸로' 역사를 바라봄으로써 그 이면을 깊이 들여다보며 되묻는다. 과연 세계를 전쟁의 공포로 밀어 넣었던 나치즘은 단지 한 미치광이 전쟁광의 광기였을 뿐인지, 베트남 전쟁은 그저 한국이 우방국가 미국을 도와 치른 정의로운 전쟁이었을 뿐인지, 말콤X는 다만 백인을 증오하는 극렬분자였을 뿐인지, 핵은 인류의 진보를 표상하는 위대한 발명품일 뿐인지 등.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어쩌면 우리가 꽤 오랫동안 유일한 것이라고 배워왔던 객관식 답안과는 다를 수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역사사용설명서>에서 마거릿 맥밀런이 말했듯, "집단의 입맛에 맞는 억측에 이의를 제기하는 역사는 고통스럽"기 마련이고, 때문에 이 책에서 말하는 역사도 입맛에 맞기보다는 오히려 쓴맛을 남긴다. 나치즘을 한 개인의 탓이 아닌 자본주의의 비민주적 속성에서 끌어내고, "벗을 돕는 것이 목적이 아닌"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의 추한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을 대면하고, 말콤X에게서 사회에 깊이 박힌 편견과 증오의 뿌리를 확인하고, 핵이 지닌 그 피아를 가리지 않는 파멸적 힘의 공포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일은 확실히 즐겁고 유쾌한 일과는 거리가 멀다. 악당과 영웅이 등장하고, 적과 친구가 분명하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단선적 역사에 비해 "이의를 제기하는 역사"는 좀 더 복잡, 난해하며 당혹스럽기도 하다. "저는 노벨처럼 새로운 발견에서 인간성이 악보다도 선을 많이 얻는다고 믿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라는 퀴리의 인간에 대한 믿음도 '거꾸로 읽는' 역사 속에서 위태로워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역사는 현세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쓰여서는 안 되고, 인간사가 복잡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쓰여야 한다."라고 마거릿 맥밀런이 단언하듯이, 이 책이 '거꾸로 읽는' 목적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역사를 지향하는 데에 있다. 그로 인해 이 책이 보여주는 역사 속에서 인류의 선함에 대한 신념과 진보에 대한 장밋빛 전망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신뢰와 우방에 대한 믿음은 왕왕 흔들리기도 하지만, 바로 그러한 '복잡성' 속에서 우리가 역사를 더 잘 이해하게 될 수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컨대, '복잡한 인간사'를 포괄한 '역사' 속에서 우리는 오로지 영웅과 친구와 피해자가 아니고 또한 반대로 오로지 악당과 적과 가해자도 아니며, 다만 우리는 그 사이를 복잡하게 오가며 그 모든 입장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의 시각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는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거꾸로 읽는' 이 책의 시각을 배제하면 우리가 보는 역사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일방적이며, 따라서 거기에서 얻을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 존 아널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과거를 방문하는 것은 타국을 방문하는 것과 같다. 거기서는 똑같이 돌아가기도 하고 다르게 돌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우리는 거기서 이른바 '고국'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만약 역사의 의미가 '고국(현재)'을 더 잘 이해하는 데 있다고 동의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역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인정한다면, 이 책이 전하는 "지적 반항"은 더 이상 '반항'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가 "역사를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정치권력이 제멋대로 통제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과 토론을 억압하는 풍토가 사라져 아무도 이 책이 전하는 '지적 반항'에 귀기울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내가 진정 바라는 일"이라고 쓴 지 십수 년이 지난 현재에도, 저자의 바람은 아직도 요원하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2011년도 저물어가는 지금, 이 책의 "지적 반항"이 여전히 유효함을 나 역시 진정 슬프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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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존재
이석원 지음 / 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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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1980년, 컬러TV의 국내 시판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해의 가을과 겨울이 교차할 무렵, '한 남자'가 10개월 여의 어둠 속 칩거를 끝내고 마침내 총천연색의 빛으로 둘러싸인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ㅡ

위에서 언급한 '한 남자'란 다름 아닌 '나'를 가리키는 것인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컬러TV가 시중에 유통되어 많은 사람들이 다채로운 색의 향연을 누리게 된 것과 내가 태어난 것 사이에 필수불가결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우길 생각은 전혀 없다. 그렇게 따지자면, 유사한 인과관계를 주장할 사람이 족히 수만은 될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른바 '컬러 시대'에 태어난 내가 좀 더 "반짝반짝 눈이 부신" 삶을 살기는커녕, 흑백텔레비전의 무채색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게 되리라고는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아무거나 골라잡아도 상관없던 어린 시절, 너무나 많은 가능성 때문에 오히려 단 하나의 장래희망을 고르지 못하곤 했지만, 그게 훗날 장래희망이 그저 맘대로 고른다고 되는 게 아님을 예견한 셈이 되리라고도, 나는 차마 상상하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보통의 존재'임이 이제는 분명해졌고, 이건 확실히 그다지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자랑은커녕 '보통의 존재'는 판타지나 로망과는 억만광 년쯤 떨어져있으면서 콤플렉스와는 꽤나 사이가 좋은, 가능하다면 이쪽에서 내팽개쳐버리고 싶은 감투다. 화려하고 넓은 집과 비싸고 멋진 차, 근엄하고 존경스러운 아버지와 자애롭고 현명한 어머니를 비롯한 완벽한 가정, 잘생긴 외모와 탁월한 능력 등등. TV화면에 비치는 찬란한 어떤 판타지 같은 삶들은 '보통의 존재'에게는 당연한 귀결로 허락되지 않고, 그 대신 '보통의 존재'는 그 대척점의 삶 속에서 콤플렉스에 휩싸이며 번민할 뿐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그럼에도 끝내 내게 고스란히 물려진 것들에 대해, 그리하여 이상과는 거리가 먼 현실에 대해, 무엇보다도 특별하지 않은 나의 존재에 대해. 과연 이러한 '보통의 존재'에게도 희망과 로망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스스로 '보통의 존재'를 자처하는 이석원은 이 책에서 '보통의 존재'로서 '보통의 존재'에게 말을 건넨다. '보통의 존재'답게 그의 이야기들은 대개 소소한 것들에 관한 것이고 종종 음울하고 쓸쓸한 이야기들이며 자주 애잔함과 서글픔을 자아내지만, 놀랍도록 솔직하고 잔잔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글은 놀랍게도 독자에게 애틋한 공감과 위로를 전해준다. '보통의 존재'로서 일상적으로 느끼던, 하지만 섣불리 말하기는 어려운 내밀하고 꺼림칙한 고민과 불안들이 책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저자의 사유와 만나 고요하게 가라앉고, 또한 나아가 보통의 존재에게도 허락된 따스한 추억과 소소한 즐거움 그리고 마음속 깊숙이 숨겨둔 빛바랜 희망이 새삼 꿈틀대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종래에 그는 '보통의 존재'인 스스로와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틀림없는 '보통'의 존재이지만, 중요한 건 여전히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데에 있다고.

평일 밤 아홉 시쯤, 느지막이 서점을 찾아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한적한 서점 이곳저곳을 거닐 때면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좀 더 젊은 시절에는 이런 사소한 일에 행복을 느껴야 하는 내 처지가 가여웠던 적도 있었지만 행복 중의 으뜸은 평범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더더욱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오늘도 서점을 찾고 있다. (p308)

생각해보면 타인의 삶을 접하며 느꼈던 감정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색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지닌 이의 삶이 보여주는 당당함과 찬란함, 그로부터 비롯되는 선망과 부러움이 그 하나고, 마치 검푸른 바다색과 같은, 깊이 침잠할 대로 침잠해 버린 삶을 사는 이의 슬픔과 고통, 그로부터 비롯되는 연민과 자기기만적 안도가 다른 하나다. 여기에는 '공감'이 자리할 여지는 적다. 이에 비해 이석원이 공개일기를 통해 보여주는 그의 삶은 무채색처럼 선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마치 무채색이 빛에 의해 밝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듯, 적나라한 자기응시로 드러내는, 그러나 결코 과잉되는 법이 없는 그의 감정들이 내밀하고 절제된 글들을 통해 독자라는 빛에 닿아 이런저런 감정 상태를 낳는 듯하다. 때로 유치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개인적인 일 같기도 한 그의 글 속에서 이렇듯 커다란 공감과 따스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닮은 '보통의 존재'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보통의 존재'란, 간단히 말해 지갑에 5천원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누구나 화려하고 찬란한 어떤 것들을 원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지갑에는 언제나 5천원 밖에 없다는 게 문제다. 이 5천원으로는 영원한 사랑을 사는 데에도, 주연 배역을 사는 데에도, 금석 같은 친구를 사는 데에도, 이상적인 가족을 사는 데에도 불충분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5천원으로 종종 추억과 즐거움과 행복을 사곤 한다.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커피를 마실 때나 서점에서 책을 뒤적일 때에나 즐겨 찾는 블로거의 새로운 글을 읽을 때 5천원은 충분하고, 이것은 결코 값싼 자기만족이 아니다. 중요한 건 보통의 존재에게도 5천원쯤은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이고, 이건 이석원이 말하듯, 우리의 '위대한 유산'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나 해답을 알 수 없는 오랜 물음을 던진 끝에 어느 날, 내가 그토록 달아나고 싶고 회의하던 것들로부터 나와 내 삶이 이우러져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인 순간, 나의 모든 아쉬움들은 그제야 비로소 위대한 유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바로 잘나지 않은 내 가족과 친구들, 무엇보다 늘 부끄럽게 여기던 내 자신까지, 바로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수많은 것들이 내게 건넨 힘과 그들과 함께했던 세월 덕택이었습니다. 비록 조금 뒤늦긴 했지만, 이젠 내겐 이 화려한 유산을 마음껏 쓰는 일만 남았습니다. (p99)

생각하기에 따라서 '보통의 존재'도 얼마든지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이석원은 하지 않는다. 물론 설령 그런 거짓말을 하더라도 이쪽에서 고분고분 믿어줄 마음도 없긴 하지만. 그러나 쉽게 꺼내기 힘든 고민도 서슴지 않고 펼쳐내는 그의 솔직한 글들은 독자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과 더불어 독자의 마음마저 솔직하게 만들어 주고, 하여 독자가 그의 글 속에서 문득 조우하게 되는 솔직한 마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보통의 존재'는 종종 유감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슬픔과 좌절의 필요충분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그렇다면 '보통의 존재'라고 너무 침울해 할 필요는 없다는 것. '보통의 존재'에게도 즐거움과 행복은 남의 일만은 아니거니와, 무엇보다도 '보통의 존재'란 나만을 일컫는 것도 아니니까. 아무튼 그러니까, 기운을 내자!

ㅡ2010년, 컬러TV가 국내에 시판된 지도 30여 년이 지났다. 그리고 이제 태어난 후 서른 한 번째 새해를 목전에 둔 '한 남자'는 종종 슬퍼하고 불안해하며 좌절하기도 하지만, 또한 때때로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며 끝내 마음속 로망이 실현되기를 바라며, 꽤나 잘 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보통의 존재로서'ㅡ

아무튼 기운 내. 너만 그런 건 아니니까.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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