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불과 5일 앞으로 다가온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란 누구도 쉽사리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총 64경기가 펼쳐지는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최소한 3경기는 치르리라는 것이고, 이는 곧 한국 축구대표팀을 응원하는 이들이 적어도 3경기는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남아공과 한국 간의 시차로 인해 특히 마지막 조별 경기인 나이지리아와의 일전을 보기 위해서는 어중간한 새벽 시간대를 뜬눈으로 보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4년 만에 한 번 찾아오는 월드컵에서 자국의 경기를 응원할 수 있다는 것은 진정 축복받은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작 그 정도로만 만족한다면 이는 4년간의 기다림 끝에 맞은 월드컵을 여전히 꽤나 소박하게 즐기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한국 대표팀이 토너먼트에 진출하여 경기수가 늘어날 가능성도 없지 않고, 또 꼭 한국 대표팀의 경기가 아니더라도 여전히 주목해 볼 만한 경기는 충분하지만, 가령 경기가 없는 날이랄지 혹은 경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어떨까? 주구장창 재방송을 시청하거나 관련 기사를 찾아 읽거나 혹은 목욕재계를 하고 한국팀의 선전을 기원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만, 조금만 눈을 돌리면 좀 더 월드컵을 재미있고 풍요롭게 그리고 유익하면서도 비판적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들도 넘쳐난다. 이른바 '월드컵 특수'를 맞아 축구와 관련된 책과 영화 등이 잇달아 선을 보이고 있거니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월드컵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월드컵 따위를 즐기지 않는다면 모르되, 이왕지사 월드컵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면 월드컵과 축구 관련 문화매체를 눈여겨보는 건 그래서 추천할 만한 일이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진짜로 11배쯤 월드컵이 즐거워지는 건 실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월드컵과 축구가 이루어 온 방대한 역사적,문화적 깊이에 다가가면 갈수록 월드컵이 좀 더 풍성하게 다가오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장담할 수 있다. 다가오는 남아공 월드컵 기간 동안, 월드컵의 품 안에서 그저 '축구'에 흠뻑 빠져보는 것도 제법 괜찮은 일이 아닐까.

  

1. 포포투

 월드컵을 맞아 월드컵 가이드북들이 더러 나왔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번 달 포포투 한 권만 있으면 굳이 가이드북들이 없어도 월드컵을 즐기는 데에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월드컵이 열리는 달인 만큼 기본적으로 이번호는 월드컵과 관련된 특집 기사들이 다수 눈에 띄는데, 그중에는 대개의 가이드북들이 다룰 법한, 본선에 진출한 32개국에 대한 분석이나 한국 대표팀과 상대할 팀들에 대한 분석 그리고 한국 대표팀 자체에 대한 분석 등이 포함된 것은 물론이고, 또한 월드컵에 출전하는 해외 스타들과의 짤막한 인터뷰나 잉글랜드 대표팀 선수 몇 명의 인터뷰 등 어지간한 가이드북에서는 보기 힘든 기사도 수록되어 있다.
더욱이 이번 달 포포투는 부록만 해도 두툼하다. 제지값 상승으로 인한 부록 제공 중단을 번복하고 여전히 부록으로 제공된 <챔피언스>는 차치하고라도, 이번호에는 각각 나이키와 아디다스와 관련된 읽을거리들도 부록으로 제공된다. 물론 이러한 소책자들은 기본적으로는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광고를 위한 것이겠지만, 월드컵의 역사가 본래 축구와 거대 스포츠 기업과의 공생의 역사인 만큼 이 부록들은 그러한 관계를 증명하는 흥미로운 자료라고 할 만하다.

2. 축구장을 보호하라 

 이 책은 2002년 월드컵과 관련한 책이다. 당장 2010년 월드컵을 코앞에 둔 마당에 또 2002년 월드컵 타령이냐고 하겠지만, 이 책의 의미는 시간이 흐른다고 사라지지 않는 그런 류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 책의 가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2002년에 우리를 환희로 이끌었던 한국 대표팀의 선전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선'이었지만, 또한 그런 이유로 2002년 월드컵은 다분히 제한된 수사에 의한 단선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곤 한다. 투혼을 보인 선수들에 대한 환호, 명민한 전략을 보인 히딩크에 대한 찬사, 열광적이고 동시에 질서 있는 응원을 한 국민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등, 이런 기억들이 모두 한국 대표팀의 선전과 결부되면서 2002년 월드컵을 여전히 가슴 떨리는 '영광'의 이미지만으로 한정시키는 셈이다.
그에 반해 이 책은 보다 다채로운 수사로써 2002년 월드컵의 다양한 기억들을 풍부하게 펼쳐 놓는다. 단지 '한국팀이 선전한' 월드컵이 아닌, 이런 저런 에피소드와 이면들로 가득한 문자 그대로의 '월드컵'을 저자는 인문학적 깊이와 예민한 감각으로 접근하고, 이는 곧 월드컵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고 깊어질 수 있음을 뜻한다.

3. 피파의 은밀한 거래

 가뜩이나 월드컵 단독 중계를 고수하면서 축구팬에게 밉보인 SBS는 최근 '전시권(Public Exhibition Right)'과 관련해 공문을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과연 시방새'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전시권이란 공공장소에서 월드컵 경기를 상영하면 경기당 적게는 수백만원에서부터 많게는 1억원에 이르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체. 하지만 시방새도 시방새지만, 사실 '전시권'에 대해서 특히나 찬사(?)를 받아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 바로 'FIFA'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뜯어내려는 그들의 상업적 명민함을 보라.
이미 하나의 권력이 되어버린 FIFA가 그렇게도 돈을 벌어서 대체 어디에 쓰려고 하는 것일까? 지구의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축구의 발전을 위해서?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축구공을 선물하기 위해서? 분명 일부분은 그렇게 쓰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돈의 용처는 여전히 불투명하기만 해서, 심지어 지난 2007년 제프 블래터 회장이 어느 자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연봉으로 100만 달러를 받고 있다고 말하기 전까지(물론, 이 발언도 FIFA의 공식적인 발언은 아니다) FIFA 회장의 연봉조차도 베일 속에 가리어져 있었다. 이 책은 그렇듯 거대한 권력 속에서 썪어 있는 'FIFA의 은밀한 치부'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4. 존 듀어든의 거침없는 한국축구 

 한국인 아내를 두고 소주와 삼겹살을 사랑하는 영국인 저널리스트 존 듀어든은 그의 독특한 포지션만큼이나 독특한 글을 쓰는 이다. 자발적으로 한국과 연을 맺은 만큼 그에게는 한국,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축구에 대한 애정이 넘치지만, 또한 태생적으로 한국과는 멀고도 다른 곳에서 온 만큼 한국축구가 지니는 모순과 문제점에 대해서도 적확하고 날카롭게 지적할 줄 안다.
이 책은 그렇듯 내국인의 따뜻함과 외국인의 냉철함을 아울러 지닌 그가 네이트에 연재한 칼럼을 모은 것이다. 연재의 묶음이라는 책의 속성상 시의성 측면에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지만, 다양한 이슈들에 대해 그야말로 '거침없이' 써내려간 그의 글들은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봄직한 것들임에는 분명하다. 여느 한국의 축구칼럼과 달리 시원하고 명쾌한 것은 물론, 유머러스한 그의 글은 사뭇 재미있기까지 하다.

 

 

5.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임 

 세계의 도처에서 무시로 벌어지는 무수한 축구경기 중에서도 유독 아름다운 경기들이 존재한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적대 중이던 영국군과 독일군이 잠깐 휴전을 하고 치렀던 축구경기라거나 혹은 비아프리아 전쟁(나이지리아 내전) 중 3일 간의 휴전을 이끌어 낸, 펠레가 속한 브라질과 나이지리아와의 축구경기 같은. 물론, 경기가 끝난 이후 짧은 휴전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그때 있었던 '아름다운 게임'의 의미마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로벤섬에서 펼쳐졌던 '아름다운 게임'의 자취를 좇는 이 책이 오늘날 여전히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절망과 고난의 수용소에서 '인간'의 '존엄'과 '행복'과 '희망'을 되새기는 데에 기여했던 '축구'의 가치는 수용소가 폐쇄된 후에도 여전히 빛나고, 또한 그곳에서 남아공 축구 리그가 배태되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이래저래 이 책은 남아공 월드컵과 함께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책으로 보인다.


6. Football 축구
 

 3만원 대의 정가에 200페이지도 안 되는 이 책의 스펙(?)을 보면 일단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 이 책의 실물을 확인하고는 조금은 납득을 했다. 이 책의 외관은 기본적으로 축구공을 닮은 둥근 형태를 띠고 있는데, 표지의 재질은 마치 스펀지 마냥 푹신푹신하다. 전체적으로 미니 사이즈의 축구공을 압축한 형태로, 외관만 놓고 보자면 이 책은 진정 축구팬을 위한 '맞춤형' 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에 비해 책의 내용은 기실 그렇게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다. '축구의 역사와 규칙'을 설명하고 '불멸의 스타'들을 언급하며 '주요 대회'를 소개하는 건 이미 축구팬들이라면 익숙한 내용이다. 관건은 익숙한 내용을 얼마나 참신하고 생생하게 다루느냐 인데, 솔직히 말해서 191페이지로는 너무 턱없이 부족할 듯하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나, 축구팬의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독특한 책임에는 분명하다.

7. 축구란 무엇인가 

 작년에 <야구란 무엇인가>를 무척 감명 깊게 읽고는 왜 축구에는 그와 같은 책이 없는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신문의 북 섹션을 통해 <축구란 무엇인가>가 출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야구란 무엇인가>와 <축구란 무엇인가>는 실제로 각기 다른 국적의 원서를 번역한 것이고, 둘 사이의 상관관계는 사실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야구란 무엇인가>가 그랬던 것처럼 <축구란 무엇인가> 또한 수많은 축구관련 서적 중에서도 '탁월한' 책을 출판사가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목차를 살펴보면 일단 충분히 흥미로워 보인다. 다양하고 독특한 소제목들은 과연 그러한 소재로 축구의 어떤 면을 이야기하려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6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내용도 적잖이 만족스럽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축구 책들 중 으뜸가는 책이다."라는 어느 방송의 소개 멘트는 믿을 게 못 되지만 "독일의 수많은 축구 도서 중에서도 이 책이 최고로 꼽힌다."는 차범근의 추천사는 한 번 믿어 봐도 좋을 듯하다.

 

8. 월드컵 1930-2010 

 이른바 '월드컵 시즌'을 맞아서 나온 책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을 단 한 권만 고르라면 바로 이 책, 표지부터 익살스럽고 독특한 캐리커처로 흥미를 끄는 <월드컵 1930-2010>을 선택하겠다.
책장을 넘기면 이내 마주하게 되는 캐리커처의 향연으로 일단 눈이 즐거운 이 책은 내용 면에서도 나무랄 데가 없다. 1930년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부터 2010년 제19회 남아공 월드컵까지, 월드컵의 역사를 모두 아우르면서 각 대회를 빛냈던 선수나 결승전의 골 장면들, 혹은 '지단의 박치기'와 같은 흥미로운 사건들과 특기할 만한 단편적인 사실 등이 헤르만 악셀의 재기 넘치는 일러스트로 '재현'되고, 각 대회의 특징을 포착하는 안목도 인상적이다. 게다가 도판의 시원한 크기는 이 책의 소장 가치를 더욱 높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책은 가히 축구팬의 보물이 될 만한 책이며, 굳이 축구팬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난 월드컵의 역사를 흥미롭게 개관하는 데에 상당히 유용하고 즐거운 책이라고 할 만하다.


9. 맨발의 꿈

 월드컵은 지구촌 축제로 명명되지만, 기실 이 축제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국가는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이를테면 동티모르. 200개국 남짓의 피파 회원국 중에서 현재 200위를 기록 중인 동티모르가 월드컵을 즐기기란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동티모르에도 '기적'은 일어났다. 2004년 일본에서 열린 국제 유소년 대회인 리베리노컵에서 동티모르의 어린 소년들은 일본을 4-2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 것. 그리고 이 기적의 한가운데에 한국인 김신환 감독이 있었다.
<맨발의 꿈>은 김신환 감독과 동티모르가 함께 엮어낸 기적 같은 실화를 다루고 있는 영화다. 축구선수로서 불운을 겪었던 김신환이 동티모르에 스포츠 용품점을 열고, 거기서 장사에는 실패한 대신 소년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게 되고, 함께 '꿈'을 꾸게 되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6월 24일 개봉 예정이며, 최근에 김신환 감독이 직접 쓴 <맨발의 기적>이라는 제목의 책도 출간된 바 있다.

 



10. 축구의 신 : 마라도나

 축구에 관하여 21세기를 20세기와 비교하여 정의 내리자면, 나는 21세기는 '신들이 사라진 시대'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록 21세기에도 여전히 호날두와 메시 같은 경이로운 선수들이 존재하지만, 전설처럼 전해지는 20세기 선수들의 압도적인 존재감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유일무이한 '축구황제'로 추앙 받는 펠레나, 혹은 '신'으로까지 일컬어지는 마라도나와 같은 선수들이 21세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실제 아르헨티나에는 마라도나를 숭배하는 종교도 있다고 한다).
<축구의 신 : 마라도나>는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와 조별 예선에서 만나게 되면서 더욱 많이 들리게 된 이름인 마라도나에 관한 영화다. 아직까지는 과연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이 마라도나의 '신적인 행적'일지, '인간적인 면모'일지, '악동의 기행'일지, 아니면 이 모든 모습을 망라한 것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거나, '신들의 시대'인 20세기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던 한 위대한 축구 선수에 관한 영화는 축구팬들이 놓치기 아까운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다.

 


11. 피파 피버(FIFA FEVER)
 

 "17번의 월드컵을 종합한 FIFA공식 최초의 영상물"이라는 영광스러운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외관과 구성은 그렇게 고급스럽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FIFA라는 든든한 배경을 소스로 하는 DVD답게 총 3장의 디스크로 구성된 <피파 피버>는 축구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혹은 흥미를 끌 만한 동영상들이 가득 들어 있다. 예컨대, 각종 '베스트10'이나 '최고의 팀', '최고의 선수'에 관한 영상처럼 익숙하지만 여전히 또 보고 싶은 동영상들이 있는가 하면, '여자축구'와 '악동', '풋살'에 관한 동영상 등 흔히 접하기 어려운 자료들도 있고, 또한 한국팀의 경기('이변의 명승부 : 2002년 한,일 월드컵 한국-이탈리아전')나 한국 선수의 활약상('헤딩골 베스트10 : 안정환')처럼 한국팬들이 반가워할 만한 동영상도 FIFA에 의해 선정되어 수록되어 있다.
한국팀의 경기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보내기에 이 DVD는 꽤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고, 특히 지난 2006년에 출시된 이후 가격이 착해졌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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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냐
박상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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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 전에 '새파란상상' 출판사의 관계자인 듯한 분이 댓글을 남겨 주었다. 댓글의 내용인즉슨,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박상의 야구소설 <말이 되냐>가 나왔으니 한 번 읽어보라는 얘기였고,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를 계기로 '야빠 대동단결 이벤트'에 참여하라는 얘기였다. 뜬금없이 이런 댓글이 달린 이유는 순전히 내가 야구 관련 서적을 읽고 리뷰를 쓴 전례가 있기 때문인데, 이렇듯 야구팬으로 보이는 잠재적 독자를 일일이 찾아가는 홍보 방식은 나름 괜찮아 보였다. 어차피 야구소설이란 건, 결국 읽을 만한 사람만 읽게 되는 장르이니까. 다만 그 분이 간과한 게 하나 있다면, 그렇다고 해서 야구 관련 서적을 읽는 사람이 반드시 야구팬은 아니라는 것이고, 유감스럽게도 내가 바로 그런 경우다. 굳이 밝히자면 나는 '축구팬'이다. 그러니까 '축구팬' 블로그에 찾아와서 "야빠대동단결" 운운이라니, 이게 말이 되냐!

그런데 말이 안 되기로 따지자면, 제목조차 '말이 되냐'인 이 소설은 그보다 한술 더 뜬다. 사회인 야구팀에서도 별 볼 일 없는 야구를 하며 회사를 다니던 주인공(이원식)이 회사에서 잘린 후 산속 암자를 찾아가게 되고, 거기에서 만난 무공스님과의 인연 덕택에 무공을 전수 받고 내공을 얻고 비도술을 익힌다? 잠깐, 혹시나 이 정도쯤이야 이른바 차원이동 무협소설에서 흔히 보던 패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분명히 말해두자면,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대판 야구소설의 입장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후의 상황은 점입가경이어서, 비도술의 방식으로 던지는 이원식의 공은 조금씩 신체 운용의 묘리를 깨우쳐 가면서 점점 더 빨라지고, 그는 곧 꿈에서나 밟아 보았던 프로의 마운드 위에 오른다. 게다가 그런 그의 곁에는 야구를 사랑하며 언제나 그에게 기적을 베푸는 아름다운 여인(이선희)도 있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냐!

그러나 평범하고 찌질한 인생을 살던 한 야구팬에게 일어나는 이러한 일들이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다거나 하는 따위의 문제는 기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 소설이 지향하는 바가 본래 판타지와 로망의 영역이라는 것이고, 알다시피 판타지와 로망이라는 건 현실과는 억만 광년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까닭에 도리어 위안과 만족을 주는 법이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야구를 인생의 한가운데에 둘 수 있는 기쁨과 시속 160km대의 직구를 던질 수 있는 환희,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우정과 유대, 그리고 야구를 사랑하는 이와의 사랑도 외려 현실과는 다르기에 바라마지 않는 기적과도 같은 셈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야구소설'이랍시고 완전히 '현실'적이라면, 아마도 야구를 너무나 좋아하다가 회사에서도 잘리고도 정신 못 차린 채 '프로야구'를 꿈꾸는 이원식은 야구공을 손에 쥔 채 '야, 구..' 한 마디를 남기고는 처참하게 죽게 될 테고(물론 그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끝내 남기고 싶었던 말은 '야, 구해줘, 제발'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 소설을 읽으며 독자는 이렇게 소리칠 것이다. 찌질한 인생은 야구조차도 꿈꿀 수 없다니, 이게 말이 되냐!

유쾌하고 코믹하지만 과장되고 엉뚱한 듯하던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해지고, 점점 더 궁극의 판타지에 다가갈수록 어떤 현실성 없는 욕망의 대리만족도 더욱 충족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환상이 본래 그렇듯, 그것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한다. 시련과 고난이 닥치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부조리와 약은 술수로 무장한 악당이 등장할 때, 가령 소설 속에서 "비열한 악한이 권력자가 되기도 하는 사회"에서 당연하다는 듯 음험한 쥐새끼 같은 타자(그러니까 이름이 이명......아, 그래 이명복이었다. 뭐, 중요한 건 아니지만)를 상대하게 될 때, 이 판타지란 것도 결국 현실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음을 새삼 깨닫고, 그렇다면 아무리 빠른 직구라도 별무소용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곤 하는 것이다. 하긴, 아닌 게 아니라 여전히 부조리한 현실에서 그저 빠른 공만 장땡이라면, 그게 말이 되냐!

최고의 강속구. 최고의 멋진공. 부조리라곤 없는 정직한 직구. (p439)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스포츠인 야구에서 정직한 직구의 매력이란, '작가후기'에서 작가가 언급하듯 "극복에의 의지"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빠르다고 무조건 얻어맞지 않는 것도, 느리다고 무조건 얻어맞는 것도 아니지만, 있는 힘껏 던지는 최고의 강속구에는 정정당당하게 맞부딪치는 순수한 의지가 가득 담겨 있고, 그것은 그 자체로 종종 어떤 '희망'을 은유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정당한 야구를 도외시하는 타자(그러니까 이름이 이명......아, 이명복. 물론, 중요한 건 아니지만)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정의'랄지, 혹은 나아가 "대통령은 밥 먹고 국민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운동선수는 밥 먹고 열심히 운동만 하는", 그런 잘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기대' 같은. 물론, 현실은 그와는 달리 여전히 쥐똥 같을지도 모르지만, '극복의 의지'가 있는 한, 그리하여 "우리에게 좋은 날이 올 수 있도록 극복하는 힘이 되어 줄 해피엔딩의 마력"을 믿는 한, '희망'을 은유하는 정직한 직구의 가치는 여전히 작지 않다. 그러한 '희망'조차도 말이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 될 테니까. 

덧. 어쩌다 보니 '야빠 대동단결 이벤트'에 당첨된 모양인지, 어느 날 야구 티켓 두 장이 집으로 날아왔다. 물론 일단은 고맙긴 한데, 다만 문제라면 자동차를 타고 먼 거리를 달려 온 티켓이 가리키는 일시와 장소가 바로 다음날의 서울 목동야구장이라는 것. 그러니까 지방에 사는 사람한테 당장 내일 열리는 서울 경기 티켓이라니, 이게 말이 되냐!(...라는 건 얼마 전까지의 일이고, 며칠 전에 이번에는 다소간의 여유를 둔 티켓이 또 날아왔다. 이것은...그러니까 '축구팬'을 '야구팬'으로 회유하기 위한 대대적인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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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
팔리 모왓 지음, 곽영미 옮김, 임연기 그림 / 북하우스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소년에게 개가 없다는 것은 드넓은 대초원을 반밖에 즐길 수 없다는 뜻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고 사뭇 감동적인 데가 있는 이 한 문장에 크게 공감을 한 이후에는, 왠지 꽤나 무덤덤하게 책을 읽어 나갔다. 대초원이 드넓게 펼쳐진 곳을 배경으로 하는 팔리 모왓의 가족 이야기는, 조금 별난 아버지와 따뜻한 어머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혀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 머트의 기상천외한 행동으로 인해 독특하고 흥미로웠지만, 뭐랄까, 자전적인 이야기와 동화의 경계 속에 위치한 탓에 나와는 미묘하게 어긋나는 듯했다. 논픽션을 지향하는 듯하면서도 약간의 상상력과 다소의 과장이 뒤섞이는 글에 공감하기에는, 내 감성이 그리 풍요롭지 않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고 보면, 일전에 읽었던 팔리 모왓의 다른 책 <울지 않는 늑대>에서도 글쓰기 방식은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와 유사했었다. 그러나 전자가 익숙지 않은, 그래서 인간의 일방적인 편견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늑대'를 다분히 옹호하고자 하는 의도 하에서 그러한 방식이 '효과적'이었다면, 후자는 너무나도 익숙한 '개'를 대상으로 하면서 그러한 방식이 외려 조금은 '낯선 거부감'을 낳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세상에는 별의별 개들이 다 있고, 내가 실제로 길러본 바 개가 종종 자신이 개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알지만, 아무래도 이 책의 주인공 머트의 행동까지 수긍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머트는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였다기 보다는, 차라리 그냥 '개가 아닌 개'가 더 어울릴 정도였고, 그래서 심지어는 이 책이 주는 감동마저도 종종 작가에 의해 다분히 의도적으로 직조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상상력과 과장이 글의 재미를 위한 한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고, 인간과 동물의 교감을 전하는 팔리 모왓의 따뜻한 메시지는 이 책에서도 여전하다. 그리고, 단지 그것만으로도 팔리 모왓의 책을 읽는 이유로는 충분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이상을 원했던 내게, 이 책은 아쉬웠던 부분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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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 책의 날 기념, 10문 10답 이벤트!

1. 개인적으로 만나, 인생에 대해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누고픈 저자가 있다면?

닉 혼비. '소설가' 닉 혼비는 잘 모르겠고 인생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를 원하지도 않지만, "잉글랜드는 나의 팀이 아니다."라고 말한 위트 있는 '축구팬' 닉 혼비와 대화를 하면 꽤나 즐거울 것 같다. 그가 한국말을 할 줄 안다는 가정하에 만난다면, "아스날이 역사적인 무패우승을 달성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라거나 "아스날의 아름답지만 반드시 승리를 담보하지는 못하는 경기 스타일과 아름답지는 않지만 대체로 승리를 담보하는 경기 스타일 중 하나를 택하라면 무엇을 택할 것인지?"와 같은 질문들을 하고 싶다.

2. 단 하루, 책 속 등장 인물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누구의 삶을 살고 싶으세요?

<구운몽>에 나오는 양소유의 삶. 2처 6첩을 거느리고 부귀공명을 얻는 삶이란 남아라면 한 번쯤 꿈꿔볼 만한 삶이다. 다만, 양소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타이밍이 중요한데, 행여나 성진이 꿈을 깨버리면 이쪽도 산통이 다 깨지니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자칫하면 하루 웬종일 불경만 외어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3. 읽기 전과 읽고 난 후가 완전히 달랐던, 이른바 ‘낚인’ 책이 있다면?

나는 최근 십수 년 간, <퍼거슨 리더십>보다 더 실망스런 책은 읽은 기억이 없다.

4. 표지가 가장 예쁘다고, 책 내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책은?

기본적으로 표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고 내 심미안이란 것도 형편없지만, <야구란 무엇인가>가 괜찮았다. 하얀 바탕에 야구공 하나가 박힌 게(야구공은 엠보싱(?) 처리가 되어 있다!) 심플하면서도 품격이 있어 보였다. 책장만 널찍하다면 앞표지가 나오게 꽂아 놓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 정도였다. 게다가 내용까지 최고!
반면에ㅡ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만ㅡ그리 산뜻한 느낌은 아닌 축구 경기장을 바탕에 깔고 불에 타는 듯한 축구공 하나가 박힌 <피버 피치>의 표지는 좀 아니었다. 솔직히 그런 표지를 가진 책의 제목으로는 <불꽃 슈터 통키> 정도가 어울리지 않나 생각한다.


 
 

 

 

 

 

 


5. 다시 나와주길, 국내 출간되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책이 있다면?

사이먼 쿠퍼가 지은 <축구 전쟁의 역사(원제: Football against the enemy)>. 나는 이 책을 대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었는데, 나 말고는 이 책을 아무도 안 읽는 것 같았다. 그때 이미 이 책은 품절 상태라 살 수는 없었고 도서관에는 한 3권쯤 있어서, 나는 이 책을 소유하고픈 욕심에 일단 이 책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도서관 측에 변상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하지만 '희귀본'은 정가의 몇 배 이상을 변상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혹 '품절본'도 '희귀본'에 속할까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대학에 갖다 바친 돈을 생각하면 이런 아무도 안 읽는 책 한 권쯤은 내게 그냥 줄만도 한데, 유감스럽게도 대학이란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이 다시 국내에 출간될 일은 없을 것 같다. 여전히 이 책을 읽을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그저 이제는 사이먼 쿠퍼의 다른 책이나마 국내에 출간되기를 바랄 뿐이다.

 

 

 

 

 

 

 


6. 책을 읽다 오탈자가 나오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요.

내가 글을 쓸 때 오탈자를 주의하는 만큼 오탈자를 쉽게 찾는 편이긴 한데, 그렇다고 특별히 어떤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꽤 마음에 들었던 책에 오탈자가 많다면 출판사에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물론, 실제로 그러지는 않는다).

7. 3번 이상 반복하여 완독한 책이 있으신가요?

하루키의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3번 가량 읽었던 것 같다. 이런 일은 무척 이례적인 경우인데, 사실 그렇게나 읽었던 이유는 그 책이 무지 마음에 들어서는 아니었다. <상실의 시대>를 읽은 이후, 독서에는 그닥 관심이 없던 내가 하루키의 책 몇 권을 의욕적으로 찾아 읽었었는데,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읽고 나서는 외려 하루키를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고, 나는 그 뜻밖의 변심에 나름대로 해명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여러 번 읽었다. 하지만 끝내 이유를 알 수 없었고, 그쯤 해도 어떤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제 그것으로 되었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책을 한 3번쯤 읽은 이유는 헤어지는 상대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다고 해도 좋겠다.



 

 

 

 

 

 


8. 어린 시절에 너무 사랑했던, 그래서 (미래의) 내 아이에게 꼭 읽어주고 싶은 책?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으로는 기껏해야 셜록 홈즈나 괴도 루팡 시리즈 정도인데, 이것들은 지가 직접 읽으면 모를까 별로 읽어줄 만한 책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이 질문을 조금 바꿔서, 내 아이에게 꼭 물려주고 싶은 책으로 나는 아다치 미츠루의 <터치>를 꼽겠다.
나는 모든 스포츠 중에서 축구를 가장 사랑하기에 나의 아이도 축구를 좋아하길 바라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야구에 대해서도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야구를 모른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재미가 조금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며, 말할 필요도 없이 <터치>를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것도 그중의 하나다.



 

 

 

 

 

 


9. 지금까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두꺼운(길이가 긴) 책은?

단권으로 치면 아마도 <야구란 무엇인가>가 가장 두꺼웠던 것 같다. 단권이 아니어도 괜찮고 만화책이어도 괜찮다면 <메이저>. 나는 <메이저>를 52권쯤까지 본 것 같은데, 지금 검색해 보니 <메이저>는 73권까지 나왔고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 같다. 아마도 그 책을 모으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언젠가 파산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모을 생각은 없으니 한 200권을 넘겨도 상관은 없지만, 아무쪼록 내가 죽기 전까지는 완결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51권까지 나온 <열혈강호>도).

10. 이 출판사의 책만큼은 신뢰할 수 있다, 가장 좋아하는 출판사는?

딱히 좋아하는 출판사는 없지만, 굳이 꼽으라면 <돌베개>와 <한겨레출판>의 책들이 좀 더 믿음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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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퍼컷 - 신성 불가침의 한국 스포츠에 날리는 한 방
정희준 지음 / 미지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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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가 나온 경기를 나는 생방송으로 지켜 보았었다. 김연아가 아니었다면 평생 볼 일이 없었을지도 모를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종목을, 그러니까 나는 순전히 김연아 덕택에 약간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유심히 지켜 보았던 셈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금메달을 땄을 때에는 확실히 조금 감동적이었다. 김연아가 경쟁자들에 비해 기술적으로 얼마나 탁월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알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그녀의 연기는 충분히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은 가장 좋았던 건 어쩌면 그냥 '금메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녀가 앞으로 혹 '메달권'과 거리가 먼 선수가 되더라도 그렇게 유심히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종목을 볼 일이 있을까, 라는 질문에 섣불리 긍정적인 답변을 내어놓지 못하기 때문일 테다.

물론 '한국' 국적을 지닌 탁월한 재능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각고의 노력 끝에 올림픽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금메달을 따낸다는 스토리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고, 금메달을 따낸 선수를 향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팬들의 열광 또한 대단히 자연스럽다. 하지만 시야를 조금만 돌리면 '금메달'과 대비되는 까닭에 더욱 불편한 장면들도 이내 눈에 띈다. 이를테면, 환한 표정으로 환대를 받으며 돌아오는 '금메달' 선수들과, 그중에서도 유독 찬란히 빛나는 '세계 기록 보유자' 김연아 선수, 그리고 그들을 위해 마련된 기자회견과 김연아의 미래에 관한 기자들의 질문 공세. 그러나, 함께 올림픽에 참가했던, '금메달'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외려 미래가 더욱 만만치 않을 그 많던 선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설마하니 그들은 캐나다에서 돌아오지 않았단 말인가.

나 역시 그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지만, 한국에서 스포츠가 소비되는 방식은 대단히 '反스포츠적'이다. '스포츠맨 정신'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도, 한국에서는 승부와 결과에 관심이 집중되고 그 과정의 정당성과 가치는 간과되기 일쑤다. 스포츠계에 만연한 폭력과 권위주의는 성적지상주의에 대한 압력 하에서 독버섯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고, '선수'로서 성공하지 못하는 이들의 퇴로는 완전히 막혀 있다. 더욱이 당연한 수순처럼 스포츠가 '국가주의'와 결합하면, 이제 스포츠는 스포츠를 넘어 종종 '국가' 그 자체와 동일시되면서 스포츠는 더 이상 즐거움이나 여가를 위한 창조적이고 흥미로운 '놀이'가 아닌, 단지 '국가'를 위한 강압적이고 도구적인 '수단'으로 전락하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스포츠에 남는 건, 종래에는 그저 '금메달'이라는 이름의 '강박'일 뿐이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면서 그저 감동하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어려움이 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대~한민국'으로 치환해버리는 데 대해 불편해 하는 저자는 이러한 '반스포츠적'인 현실에 대해 날을 세우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도 스포츠계의 내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경기 단체, 팀, 지도자, 그리고 일부 기자들이 공고하게 얽혀있는 스포츠계를 '카르텔'로 규정하고 비판하면서 일종의 내부고발자로서의 역할을 자청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한국 스포츠를 관통하는 세 가지 키워드로 '국가주의', '집단 몰입', 그리고 '폭력'을 들면서 우리가 간과하는, 그래서 더욱 기승을 부리는 '반스포츠적'인 장면들에 여지없이 '어퍼컷'을 날린다.

스포츠라면 종목을 막론하고, 아울러 非스포츠 영역까지도 아우르는 저자의 글은 '어퍼컷'이라는 책 제목이 부끄럽지 않게 그야말로 거침이 없어서 읽노라면 절로 통쾌한 마음이 들 정도인데, 이건 책의 소제목만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가령 <언론의 박지성 장사, 그 불편한 진실>, <촛불 정국, 보이지 않는 스포츠 스타들>, <MLB 제국주의에 열광하는 한국>, <올림픽은 개고생이다>, <한국 스포츠 최고의 명곡, "금메달 타령">,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 등등, 소제목들이 시사하는 바는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고, 실제로 내용 역시 실명 비판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사뭇 공격적이고 논쟁적이다. 그러나 단순히 감정적인 호소와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수치와 근거 그리고 다채로운 사례의 제시를 통해 저자의 비판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특히 스포츠 이벤트를 유치하기 위한 자치단체장들의 노력에 대해 그 부당성을 논박하는 대목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모든 논조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고, 몇몇 대목들에서는 동의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또한 저자의 "들여다보기"가 지나치게 '반스포츠적'인 불편한 장면들에 집중되는 탓에, 도리어 그것이 그저 '스포츠'를 순수하게 '스포츠'로서만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측면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저자의 "들여다보기"는 '금메달'에 환호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금메달' 뒤에 가리어진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비판이다. 지난 캐나다 동계 올림픽에서 금빛 역주를 펼쳤던 쇼트트랙 선수들에 대한 환호 뒤에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선수선발과정이 있었던 사례에서도 보듯, 스포츠계에는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저자는 다만 그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자고 역설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외려 스포츠를 순수한 스포츠로 남겨 두기 위한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은, 시원하고 통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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