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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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TV의 고발 프로그램이나 뉴스에서는 마치 인간성이 상실된 듯한, 난폭하고 잔인하며 무도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낮에는 마냥 좋은 남편이자 아들이었던 사람이 밤에 술을 마신 후 돌변하여 아내와 어머니를 폭행했다든지, 어느 10대가 강남에서 살기 위해 엄마와 누나가 집에 있을 때 후배를 시켜 집에 불을 지르게 했다든지, 아버지가 의붓딸 혹은 심지어 친딸을 성폭행했다든지 등등. 이런 일들은 물론 끔찍한 일들이지만, 대개의 경우 '나'와는 무관하다. 나의 일이 아닌 타인의 일이니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일들은 나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렵고 또 그래야 마땅한 일이라는 의미다. '나'의 도덕률(혹은 '나'가 모인 '우리'의 도덕률)로 재단할 때, 그런 일들은 영원히 일어나서는 안 되고 또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건 명백한 '거짓말'이다. 결국 그 일들은 일어났다는 게 그 부인할 수 없는 증거다.

거짓말 하나 - '나'는 '나'가 아니다 

헝가리 태생의 작가인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3부작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중, 1부에 해당하는 '비밀노트'에서는 온갖 비밀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쌍둥이인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가 함께 쓴 '비밀노트'에는 도둑질이나 폭력에서부터 살인과 방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들이 낱낱이 기록되고, 이는 그러한 일들이 '우리'에 의해 그대로 자행되었음을 뜻한다. 그들은 전쟁 통에 할머니 댁에 맡겨지면서 할머니의 온갖 폭언과 구박에 시달리고, 선과 악의 혼돈 상황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여 크게 다르지 않아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나 그 자신만의 '비밀노트'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용인되지 못하는 일들이 은밀히 숨겨져 있고, 작가는 이러한 비밀들을 감정을 배재한 채 지극히 담담하고 간결한, 그러나 대단히 매혹적인 문체로 풀어낸다.

물론 '우리'에 의해 자행된 반인륜적이기까지 한 일들은 '실제'가 아닐 수도 있다. 각각 2부와 3부에 해당하는 '타인의 증거'와 '50년간의 고독'을 통해 루카스와 클라우스의 기록들은 허구로 암시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일들이 특정한 누군가에 의해 실제로 행해졌느냐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은밀한 '비밀(혹은 욕망)'들이 '나'의 의식 속에 존재했다는 데에 있다. 추악한 비밀들을 그저 숨겨둔 채 겉으로만 달리 행세한다고 해서 겉으로 드러난 '나'만이 그대로 '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쌍둥이들을 작중 화자로 내세워 '우리'로 서술한 것은 어쩌면 이렇듯 의식 속에 감추어둔 비밀과 행동의 이중성을 의도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이를 통해 작가는 '나'라는 존재가 지닌 모순을 여지없이 폭로하는 듯하다.

거짓말 둘 - '너'는 '너'가 아니다 

2부인 '타인의 증거'에서는 유독 '타인'의 존재로부터 '나'의 존재를 증거 삼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이를테면, 불구의 몸을 지닌 소년은 잘 생긴 금발 소년의 모습으로부터 자신의 추악한 용모와 불구를 더욱 뚜렷이 인식하고, 서점 주인은 누나의 존재로 인해 자신이 글을 쓸 수 없다고 여기는 반면 누나는 자신의 희생이 모두 동생이 글을 쓸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루카스는 클라우스가 반드시 생존해있음을 강하게 주장하며, 클라라는 여전히 남편의 잔영을 떨치지 못한다. 그래서 1부와는 달리 2부에서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비로소 각기 '이름'을 갖게 되지만, 이것은 '타인'으로서의 그들 각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나'의 실존을 규정짓는 하나의 표식이 되는 듯하다. 그리하여 심지어 서점 주인 빅토르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이렇게 묻는다. "내 누나의 시체 하나만으로는 부족해서 거기에 내 것까지 보태야 하는 건가? 하지만 누가 그 두 번째 시체를 원하는 거야?"

모든 생존과 죽음은 '나' 스스로의 의식과 결정으로만 비롯되지 않고, 이러한 실존적인 문제를 결정짓는 주체는 오히려 '타인'이다. 누군가의 애정을 갈구하며, 혹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증오하며, 혹은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또는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기를 원하며 '나'는 '타인'의 존재에 매달린다. '그들이', '그들은', '그들의', '그들을'. 유달리 굵은 글씨로 표시된 '그들'이라는 인칭대명사 속에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질식할 것만 같은 강박관념마저 느껴지며, 이러한 타인의 존재 속에서 독자는 문득 깨닫게 되는 듯하다. '너'는 그저 '타인'이 아니라 '나'를 규정하고 속박한다는 것을. 그것은 태생적으로 '나'와 구분되어야 할 '너'라는 존재가 지니는 모순처럼도 보인다. 요컨대, '너'는 그저 '너'가 아닌 셈이다.

거짓말 셋 - '나'는 '너'가 아니다 

3부인 '50년간의 고독'에 이르면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듯했던 사실들은 모호해지고, 모호한 듯하던 것들이 도리어 사실처럼 밝혀지기도 한다. 거짓말들이 쌓이고 모순은 중첩되며, 와중에 의미는 풍성해진다. 하지만 굳이 하나의 단어로 3부를 이야기하자면,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단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3부에서는 드디어 '우리'가 아닌, 또한 3인칭의 어느 '이름'이 아닌 '나'(클라우스)가 화자가 되는데, 이러한 형식 자체가 이미 분화된 혹은 단절된 쌍둥이의 의식 상태를 의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이 단절을 조금 확장하면, 결국 '나는 너가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원제가 '세 번째 거짓말'인 3부에서 세 번째 거짓말은 '나는 너가 아니다.'라는 당연한 전제로부터 비롯된다. 가령, 병원에서 요양 중인 아이들에게 전해진 편지에는 부모의 따뜻한 애정이 충만해 있는 것 같지만, 클라우스가 다시 멋대로 바꾸어 읽어주는 편지에는 잔인하고 냉정한 말들이 가득하다. 아이들은 설령 거짓일지라도 따뜻한 애정을 갈구하지만, 내가 원하는 감정이 상대에 의해서도 똑같이 공유된다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거짓말을 야기한다. 마찬가지로, 평생 서로 함께 하기를 원했던 사라와 클라우스의 감정도, 루카스를 끊임없이 미화시키며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감정도, 다시 함께 하기를 원하는 루카스의 바람도 그래서 진실과는 멀어진다. 이는 결국 '나'의 존재는 '너'의 존재와는 다른 까닭이며, 이러한 '단절'은 현실의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인쇄소에서 찍어내는 "우리는 자유다."라는 표어가 상징하듯,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관한 냉소적인 은유로도 읽힌다.

진실 하나 - 그것은 우리가 아는 사항이다

책 뒤에 수록된 '작가와 작품해설'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작품의 인물들이 체험하는 일들을 모두 내 자신의 일로 느낀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슬픔에 빠지기도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독자 또한 마찬가지다. 비록 그 체험들이 먼 이국의 역사적 배경 하에서 하나 같이 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비추고 있는 것일지라도, 작품 속 인물들의 체험에 공감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은밀하게 자리한 추악한 비밀과 타인에 의해 강요되는 폭력과 근본적인 단절로 인한 고독 등, 인간의 존재가 초래한 그 어떤 일이든(혹은 그 어떤 거짓말이든), 그것은 결국 인간의 역사와 경험 속에서 이미 증명된 것에 다름 아니므로. 그리고, 그렇기에 그러한 체험이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말이야말로 가장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헝가리가 1,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옛 마자르 격언에는 'Temetni tudunk'라는 말이 있다. 영어 단어 10개로도 완전한 번역이 어려운 이 말은 대체로 이렇게 번역된다고 한다. "사람을 어떻게 매장할까ㅡ그것은 우리가 아는 사항이다." 물론 되풀이된 헝가리의 폭력과 파괴의 역사 속에서 끌어올린 이 말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 인간의 존재가 지닌 모순과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이 격언은 어쩐지 요긴할 것 같다. 그러니까 이 격언을 살짝 바꾸어서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는 의미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ㅡ그것은 우리가 아는 사항이다." 설령 그 세 가지 거짓말이 얼마나 참혹하고 적나라한 것이든, 그것이 우리가 이미 아는 사실이라는 것만큼은 명백한 진실이 아닐까. 그 진실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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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횡단기 -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미국 소도시 여행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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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이 스퍼프가 마침내 스머프 마을을 떠나기로 한다고 해도, 그건 별로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이 스머프든 저 스머프든 죄다 엣지 없이 흰색 두건과 흰색 바지(?)를 착용하고 있다거나 혹은 모든 집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버섯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못 봐줄 노릇이지만, 특히 항상 가가멜과 아지라엘의 위협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책 없는 낙관과 평화가 넘쳐 흐르는 스머프 마을은 분명 투덜이 스머프가 마음에 쏙 들어할 마을은 아닌 탓이다. 좀 더 다채롭고 엣지 있는 패션과 창의적이고 다양한 집들이 넘쳐나고, 무엇보다도 적당한 흥밋거리와 자극이 있으면서 또한 풍요와 평화가 공존하는 마을을 찾으려는 투덜이 스머프의 여정은, 그러니까ㅡ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ㅡ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난데없이 투덜이 스머프의 여정을 가정해보는 데에는 사실 이유가 있다. 이 책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횡단기>는 제목 그대로 빌 브라이슨의 미국 여행을 다루고 있는데, 이 여정은 마치 '투덜이 스머프가 스머프 마을을 떠난다면?'하는 가정을 꼭 현실에 적용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오와 주 디모인 출신이다. 누군가는 그래야 했으니까."라는 첫 문장에서부터 고향마을에 대한 미묘한 불만을 감지하게 하는 빌 브라이슨은 성인이 되어 고향을 떠난 이후 다시 돌아와, 이른바 "재발견 여행"을 떠나며 모든 것이 완벽한 마을(일명 '모아빌')을 찾아 나선다. 물론, 이 여행은 그가 어린 시절의 가족여행으로부터 얻은 추억을 다시 돌아보는 의미도 있지만, 나비테 안경에 벌집 머리를 한 여자들과 '농부의 선탠'으로 표식을 삼는 남자들이 있는,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평온하기만 한 아이오와와는 다른 이상적인 마을을 희구한다는 점에서 빌 브라이슨의 여행은 영락없이 투덜이 스머프의 여정을 연상시킨다.

투덜이 스머프, 아니 빌 브라이슨의 이 여행의 경과는 짐작할 만한 그대로다. 빌 브라이슨은 미국 대부분의 주를 차로 2만 2496킬로미터를 달리며 여행하지만, 그가 바라던 '완벽한 마을'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여행에서 그가 지나치는 수많은 마을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의 투덜거림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마치 다른 나라의 언어를 쓰는 듯한, 독특한 억양과 발음을 구사하는 사람들과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풍자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싸구려 관광지로 변하거나 지독하게 가난하거나 범죄가 넘쳐나는 도시들이 조소와 비난의 대상으로 언급된다. 그리고 그러한 와중에 그의 추억 속에서 아름답게 채색되었던 낭만과 즐거움과 매력 역시 종종 우중충한 회색빛으로 현현하기도 하지만, 빌 브라이슨은 결코 특유의 유머를 잃어버리는 법은 없다.

물론, 때로는 빌 브라이슨이 구사하는 유머가 지나치게 과격한 탓에 읽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그가 만나는 사람에 대한 인신공격에 가까운 언사들과 그가 둘러본 마을과 유적지 등에 대한 일방적이고 과장된 평가는 이 책의 객관성과 균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 브라이슨의 무례함을 결국 웃음으로 받아줄 수 있는 건, 능글거리며 불평이나 토해내던 그가 갑자기 정색을 하는 순간이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테다. 이를테면, 미국의 의료체계에 대한 강도 높은 힐난이나 인종차별에 반대한 '자유의 기수'들이 살해당한 사건에 대한 확고한 비판의식 등, 이러한 대목에서 빌 브라이슨의 진정성은 빛을 발한다. 그리고 이는 불평으로 일관하던 그가 자연의 순수한 경이로움과 잘 보전된 역사의 가치에 대해 찬탄을 발할 때도 마찬가지다.

설령 투덜이 스머프가 스머프 마을을 떠날지라도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불만 끝에 언제나 "하지만 아기 스머프는 좋아."라고 덧붙이던 투덜이 스머프의 말에서 아마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빌 브라이슨의 여행 또한 그렇다. 비록 여전히 아이오와의 디모인은 결코 '완벽한 마을'은 아니지만 그가 길고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를 진정어린 환대와 편안함으로 맞아준 건,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고향집이 있는 아이오와의 디모인이었다. 물론 여전히 이곳은 나비테 안경에 벌집 머리를 한 여자가 있고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분위기가 있는, 단조롭고 지루하기도 한 곳임을 빌 브라이슨은 잊지 않고 다시 한 번 지적하기는 하지만, 그리운 추억과 느긋한 평화가 넘쳐흐르는 이곳이야말로 그가 찾아 헤매던 마을이었음을 빌 브라이슨은 긴 여행 끝에 비로소 따뜻하게 자각한다. 그리고 기실, 이러한 따뜻함이야말로 거침없는 불평과 비판 뒤에 가리어진 빌 브라이슨의 진면목이며, 또한 이는 내가 빌 브라이슨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아쉬운 점을 조금 말하자면, 이 책은 20년 전에 이미 발간된 것으로 이 책이 다루는 미국은 아무래도 오늘날의 미국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또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빌 브라이슨의 다른 책들보다는 이 책이 흥미가 조금 덜하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빌 브라이슨의 책들은 모두 일정 부분 조금씩 연결되어 있어서 그러한 부분들이 엮이는 재미가 있다. 가령, 이 책에서 빌 브라이슨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할 수 없는 세 가지 일이 있음을 얘기하는데 그게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에서 번복된다거나, 혹은 이 책에서 종종 회상되는 그의 가족 얘기가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에서 구체화되는 식이다. 그러니까 빌 브라이슨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 역시 읽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며,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건 꽤 환영할 만한 일이다. 어쨌거나 투덜이 스머프의 여행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빌 브라이슨의 이 여행은 가정이 아니니까 말이다. 게다가 투덜이 스머프의 여행보다는 역시 빌 브라이슨의 여행 쪽이 좀 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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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로미오, 로미오! 당신은 왜 로미오인가요?" 

남의 이름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건 분명 초딩이나 할 법한 짓이지만, 그게 비극의 주인공 줄리엣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조금쯤 다르게 이해해야 마땅하다. 이름 따위,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개뼉다귀 같은 이름이라도 상관없지만, 하필, 이름이 다른 무엇도 아닌 '로미오'라는 게 유일하고도 중대한 문제가 될 때도 있는 법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로미오'라는 이름 자체가 문제인 건 전혀 아니다. '로미오'를 둘러싼 가문과 환경과 배경 등,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그 이름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데 근간을 이루어온 모든 것이며, 또한 누군가를 사랑할 때 받아들여야 하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그 이름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을 택했고, 그들의 이름이 지닌 모든 것을 감내하고자 했으며, 그리하여 죽었다. 하지만 너무 심란해할 필요는 없다. 이 비극은 이름이 지닌 무게로 인한 필연이었다기보다는, 그냥 운이 좀 많이 나빴을 뿐이다.

만약 이름의 무게가 필연적으로 비극을 잉태한다면, 브라질의 유쾌한 로맨틱 영화인 <로미오와 줄리엣 결혼하다>는 필경 비극으로 끝나야 마땅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브라질 축구 클럽 팔메이라스의 팬으로 운명 지워진 줄리엣이(심지어 이름조차도 아무렇게나 지어진 것이 아니라, 팔메이라스의 전설적인 선수들의 이름을 조합하여 지어진 것이다!), 역시 운명이 코린티안스(팔메이라스의 라이벌)의 팬으로 점지한 로미오와 결혼을 한다니, 그게 어디 눈곱만치나 행복하게 끝날 일이겠는가. 하지만 이미 제목에서 결론을 내 버리는 이 영화는 결국 해피엔딩을 추구한다. 비극의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 데서 짐작되듯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름이 지닌 무게도 역시나 무거웠지만, 그들은 그 무게를 받아들이려고 했고, 그리하여 결혼에 골인했다. 그렇다. 이 희극은 운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경우다.

이미 대충 영화가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를 알고 있고 결과 또한 안다면, 이제 관건은 '축구'라는 소재를 이용해 영화가 원작을 어떤 식으로 변주하는가에 있다. 영화는 축구의 라이벌 구도를 적절히 배합하고 실제 축구경기장의 모습을 차용하면서, 익히 알려진 이야기를 꽤나 흥미롭게 재구성한다. 물론 당연히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할 법한, 사랑을 선택하면서 서로의 이름이 지니는 무게를 감당하려고 하는 연인의 노력만큼은 빠지지 않아서 각각 팔메이라스와 코린티안스의 열성팬인 줄리엣과 로미오가 상대팀을 인정하려는 모습은 이 영화의 가장 큰 흥밋거리다. 이를테면, 한눈에 반한 연인 줄리엣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을 팔메이라스 팬이라고 속이며 팔메이라스 엠블럼이 선명한 줄리엣의 침대에 몸을 누이는 로미오의 모습이라든지, 이미 로미오의 거짓말을 아는 줄리엣이 팀에 대한 충성과 연인이 사랑하는 팀에 대한 증오로 번민하는 로미오에게 코린티안스 엠블럼이 새겨진 콘돔 하나를 건내는 모습 등. 서로의 이름을 둘러싼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두 연인의 모습은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줄리엣의 절절한 애원에 대한 유쾌한 변주로도 손색이 없다. "단지 저와의 사랑만을 맹세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케퓰렛이라는 이름을 더 이상 쓰지 않을 거에요."

그러나 서로를 사랑하기에 라이벌 팀마저 기꺼이 품는다고 하여도, 그들의 사랑은 더 큰 시련과 필연적으로 마주한다. 영화는 팔메이라스의 열혈팬인 줄리엣의 아버지와 코린티안스의 팬임을 숨긴 로미오 사이의 긴장을 시종일관 유쾌하게 늘어놓다가 모든 것을 일거에 터뜨려버린다. 그동안 예비사위를 자못 마음에 들어 하던 예비장인은 일변하고,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는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 영화가 비극과 다른 결말을 향하는 건 앞서 말했듯 역시 운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그걸로 뭔가 좀 미진하다고 생각한다면 영화의 엔딩과 함께 나오는 내레이션을 한 번 음미해 볼 만하다. 대단히 감동적이라거나 끝내주게 멋진 문구는 아니지만, 나름 그럴 듯해 보이는 그 문구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사랑으로 초래되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 것'.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사랑이란, 자신의 이름이 뿌리 내린 공고함에서 벗어나 상대의 이름 뒤에 자리한 상이한 모든 것들을 용기 있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변화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일 테고, 결국 평화와 행복은 그 과정 끝에야 비로소 얻게 되는 사랑의 결실인 셈이다. 뭐 물론, 운이 아주아주 나쁘다면 그저 명복을 비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음을 잊어선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늘 사랑한다면 그 공간은 사랑으로 변합니다. 사랑은 불을 녹이고 얼음을 태웁니다. 그리고 산들바람을 폭풍으로 변화시켜서 바다가 넘치고 집이 무너지고 나면 평화의 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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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 걷기여행
이혜영 지음 / 한국방송출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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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에 대해 처음 들었던 건 '제주 올레길'을 걷고 난 이후였다. 제주 올레길에 환호했던 나는, 곧 새로운 걷기여행의 명소가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는 지리산 둘레길을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 두었고, 그래서 <지리산 둘레길 걷기여행>이라는 이 책이 나왔을 때에는 적잖이 반가운 마음이 들었었다. 제주 올레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가득할 지리산 둘레길을, 과연 이 책은 어떻게 펼쳐낼지 무척이나 기대되고 궁금하였더랬다. 하지만 그렇게 적지 않은 기대로 집어든 이 책은, 솔직히 말해서 조금 아쉬웠다.

일단 이 책은 여러모로 준비를 많이 했다는 인상을 준다. "사람살이 땅살이 보듬은 산채비빔밥 같은 길"이라는, 지리산 둘레길에 대한 책표지의 수사처럼 책도 지리산길 위의 '사람살이'와 '땅살이'를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해 버무려낸, 꼭 '산채비빔밥' 같은 느낌이다. 이를테면 길 위를 걷는 와중에 만난, 길 위에 사시는 분들의 삶이 조명되고, 지리산의 역사적 사실들이 언급되고, 지리산을 읊었던 문학작품이 인용되며, 또 지리산을 무대로 펼쳐졌던 비극을 되살려 내기도 하는 식이다. 물론,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상세한 정보 역시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리산을 둘러싼, 이러한 많은 역사와 문학과 삶과 정보가 버무려지는 와중에 정작 '걷기여행의 즐거움'은 잘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지리산 둘레길'의 매력에 조금씩 빠지려다가도 곧바로 언급되는, 만만치 않은 '무게'를 지닌 서술들에 경쾌한 발놀림은 이내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지리산 둘레길을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탓인 듯도 하지만, 저자가 딛고 있는 공간을 내가 따라가기가 꽤 버거웠고, 당연히 그 공간을 배경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머릿속에서 생경하게 흩날리기 일쑤였다. 좀 더 경쾌하고 즐거운 '걷기여행'을 기대했던 내게, 이 책은 쉬이 읽히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저자가 "아픈 상처까지 불쑥 선물마냥 휙 던져주고는 내내 담담한"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소문'의 굴레에 갇힌 길까지 고민하자니 여행자는 어렵다고 뒤통수만 긁적거린다."고 말할 때에는 속으로 뜨끔했음을 밝혀 두어야겠다. 즐거운 길을 걸으며 지나치게 무거운 주제(빨치산과 민간인 집단 학살, 제주 4. 3 등)에 유독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만이 있었지만, "'역사의 기억'이라는 후대의 일차적인 의무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저자의 말에는 동의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오고가고, 기억하고, 묻다보면 언젠가 진실 또한 밝혀지겠지."라는 저자의 믿음 앞에서는, 어쩐지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이 그저 내 탓인 듯 미안해진다.

4. 3을 기억하지 않아도 제주여행에는 사실 지장이 없다. 굳이 상기하면서 다니더라도 제주의 목가적 풍경이 그 역사를 거짓말처럼 여기게 만든다. '잃어버린 마을' 터에 자못 무거운 걸음을 했다가도 비석 뒤편 푸른 초원에 마음을 훌렁 뺏기고 만다. 아무래도 제주는 어제의 사실과 오늘의 감각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여행자를 시험에 들게 하는 섬이다. 그래도 '역사의 기억'이라는 후대의 일차적인 의무론은 진부하지만 유효한 것 같다.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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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완결판 - 못다한 이야기>를 보기에 앞서 나는 내 나름대로 마음의 무장을 했다. 제목에서부터 언뜻 짐작되는, '국가'로 귀결되는 다분히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감정들에는 결코 내 마음을 쉽사리 내주지 않을 참이었다. 태극기가 자랑스레 휘날리고, 애국가가 감동적으로 울려 퍼지고, 함께 얼싸안으며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혹 영화가 비추기라도 할 양이면, 나는 오만하게 팔짱을 끼고서 기꺼이 냉소해주리라 마음을 단단히 여미고 있었다. 물론, 딱히 '국가'가 밉다거나, 그런 감정들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단지 너무나 노골적인 듯한, 그래서 애초부터 이미 어떤 정형화된 '국가'의 이미지를 연상케하는 제목을 지닌 영화가 별다른 고민 없이 그 이미지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관객에게도 또한 마찬가지의 이미지를 강요하는 데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면서, 나는 싸울 상대를 찾지 못했다. 당연하다는 듯 태극기가 나왔고, '어글리 코리아'를 말하는 미국 선수들과의 싸움이 있었고, 한국 대표팀을 소리 높여 응원하는 사람들이 존재했지만, 정작 그 한가운데에 있는 '국가대표'는 지레 짐작했던 '국가'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엄마를 찾기 위해, 군대를 면제 받기 위해, 집을 사기 위해, 또 감독의 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들이 국가대표가 된 순간, '국가'와 '국가대표'가 지니는 견고하고 답답한 이미지들은 우수수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국가대표라면 마땅히 지니어야 한다고 믿어지는 사명감과 애국심을 '국가대표'의 선수들은 누구도 지니지 못했고, 그래서 그들이 '국가대표'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차 보였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국가대표'가 그 각 '개인'의 선수들을 감당하기에 버거웠다고 말하는 게 더 합당한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선수들이 순수하게 국가대표로서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대표 역시 선수들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 전략적으로 급조된 스키점프 대표팀은 유치 실패 이후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전혀 기대를 받지 못하던 스키점프 대표팀이 의외로 활약을 하자 갑자기 자랑스러운 한국팀으로 변모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아쉬움 속에서 귀국할 때 그들을 반기는 건 위로와 격려가 아닌, 오직 승자에 대한 환호와 대비되는 씁쓸한 무관심일 뿐이다. 국가대표와 선수들은 그렇게 서로를 배반하기 일쑤고, 그래서 국가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선수'들과 선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랑스러워할 만한 대한민국'일 때만 의미가 부여되는 '국가대표'의 조합은 다분히 공고화된 이미지를 전복시키고, 영화는 수시로 전복되는 이미지들을 무심한 듯 내어 놓는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은 '국가'나 '국가대표'를 향한 감정들이 철저히 논리와 이성의 영역 밖에 놓여 있음을 조용히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대표'를 둘러싼 감정들의 찰나적이고 급작스러운 면모에 대해 날을 세우기보다는, 외려 한 발 물러나 오직 감정의 영역에서만 걸음을 옮기며 단지 감정을 분출해내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듯 보인다. 가령, 길러준 엄마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순간에도 낳아준 엄마를 찾으러 돌아다닌다든지, 역할이 모호한 말썽쟁이 딸과 끝내 모질게 인연을 끊어내지 못한다든지, 골프채를 휘두르며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던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다든지 등, 영화는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거나 혹은 관객을 정교하게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 대신, 순간적인 감정의 향연들로 관객을 웃기고 울리고 감동시킨다. 그 감정들은 단계를 거쳐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만 찰나적으로 소비되고 곧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영화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다분히 과장되고 극대화된 감정의 분출이고, 그런 이유로 영화는 '비판' 대신 '배설'을 선택했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영화의 선택은 영화 속에서 비 내리던 어느 날,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들의 선택과 사뭇 닮은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고, 약에 취해 거리를 돌아다니고, 절망에 채여 비틀거리던 그 순간, 그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고는 하나같이 스키점프가 주는, 아찔한 속도감과 하늘을 나는 듯한 쾌감을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거기에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국가에 대한 사명감도, 현실에 대한 냉철함도 없이, 그저 즉각적인 감정의 분출만이 넘쳐날 뿐이었다. 물론 그러한 그들의 선택과 나아가 영화의 선택은 관객에게 충분한 감정적 고양을 선사하지만, 마치 스키점프 선수가 하늘을 나는 순간이 영원일 수 없듯이, 고양된 감정은 끝내 오래 지속되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키날이 대지를 디딛는 순간, 애써 외면했던 논리와 이성과 현실을 마주하는 일은 피할 수 없고, 하늘을 나는 듯한 짜릿함도 점차 사그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감정의 분출을 끝낸 영화는, 싸울 상대를 찾지 못한 관객을 총총히 집으로 돌려보내는 듯하다. 시원한, 그러나 조금쯤 허랑한 기분을 안긴 채. 이제 쇼는 모두 끝났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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