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독자에게 간접경험을 선사한다."라는 명제를 순진하게 받아들이자면, 2011년 초를 나는 꽤나 근사하게 보낸 셈이 된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잉글랜드로 날아가 프리미어리그에 속한 20개 팀이 있는 지역을 차례로 둘러보았고(<곡괭이 싸커홀릭>), 다음으로 일본으로 날아가서는 일본의 아름다운 이곳저곳을 여유롭게 누비고 다녔으며(<일본의 걷고 싶은 길>), 그걸로도 모자라 종래에는 제주도에서 아름답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제주올레를 맛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 확실히 이 정도라면 누구한테도 꿀리지 않을 만한 환상적인 새해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지만 슬픈 사실을 말하자면, 직접경험이 언제나 좋지는 않은 것처럼 간접경험도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며 이건 그 이름만으로도 근사해 보이는, 이를테면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축구여행'이랄지 혹은 '일본걷기여행'이랄지 또는 '제주올레' 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좋은 간접경험을 얻기 위해서는 직접경험을 솜씨 있게 전해주는 저자를 만나야 하고, 아울러 독자의 경험치나 성향도 간과할 수 없다. 더군다나 내가 생각하기에, 독자로서 '간접경험'에 대한 기대와 실망의 교차를 가장 크게 느끼기 쉬운 분야가 '여행서'가 아닐까 싶은데, 유감스럽게도 새해 들어 처음으로 집어든 <곡괭이 싸거홀릭>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기본적으로 2009~2010시즌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에 참가중인 20개팀을 모조리 방문할 꿈을 가지고서 마침내 이를 실현한 한 축구팬의 여행기인 <곡괭이 싸커홀릭>에는 기대가 컸었다. 흔히 보던 축구 '전문' 기자의 식상한 형식이 아닌, 그저 한 명의 축구팬이 영국으로 날아가 좌충우돌하며 건져낼 자유롭고 생생한 프리미어리그 이야기를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되나 싶었다. 시작은 괜찮았다. 첫 번째 방문지는 런던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는 풀럼. 비록 풀럼의 경기를 보았다거나 풀럼의 경기장 내부를 둘러본 것은 아니지만 풀럼 구장 주변의 사진들은 흥미로웠고, 특히 풀럼 공식 상점에 진열된 다양한 상품들을 찍은 사진은 디자이너인 저자의 관심과 색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해서 즐거웠다. 두 번째로 풀럼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첼시를 방문할 때도 괜찮았다. 첼시의 홈구장과 그 주변의 모습에 대한 짤막한 단상과 사진들. 그리고 첼시의 푸른 유니폼을 닮아 푸르기 그지없는 다채로운 첼시의 상품들과 그것을 느낌 있게 담아낸 사진들. 다 괜찮았다. 하지만 이런 레퍼토리가 계속, 그러니까 정확히 20번이 반복되면 별로 괜찮지가 않다.

<곡괭이 싸커홀릭>은 이미 말했듯 프리미어리그 20개 팀을 모조리 둘러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만만치 않은 여정이 단 20일 만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여행의 절대적인 시간이 여행기의 질을 절대적으로 좌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20일은 20개 팀을 모두 둘러본다고 말하기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임에는 틀림없다. 결국 이 책에서 계속해서 주연 역할을 하는 건 '축구'나 '여행'이 아닌, 각 구단들의 다양한 엠블럼과 유니폼 색상만큼이나 다채롭고 화려한, 각 구단의 '상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품'이 빠지지 않고 나오고, 그런 와중에 처음에는 흥미롭고 색다르게 느껴지던 장점들이 동일한 패턴 속에서 단점으로 탈바꿈하는 듯하다. '프리미어리그의 모든 팀을 둘러보겠다.'는 것이 저자의 꿈이었으니 만큼 그것을 현실화시킨 것은 대단하다고 할 만하지만, '20'이라는 숫자에 방점을 찍어 '모든 팀'을 비슷한 비중으로 소개하다 보니 여행의 특별함과 생생함은 상당 부분 사라지고 만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한정된 시간 안에 숙제를 해치우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 여행에는, 필연적으로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헤어지는, '사람'과의 접점이 드물 수밖에 없다는 게 가장 아쉽다.

이미 여러 권의 여행기를 펴낸 김남희의 <일본의 걷고 싶은 길>도 '사람'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꽤나 실망할 뻔했다. 마치 국어 교과서에 예문으로 실리겠다는 듯, 어디에 가서 무엇을 보고 듣고 경험했는지를 기행문에 어울리는 간결한 현재진행형 시제로 써내려간 문장들은, 역시나 국어 교과서를 읽을 때면 대개 그러했듯 조금 따분했다. 약간 과장하면 저자가 일본여행에 대해 보고를 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았는데, 나는 여행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니 내가 관심 가질 만한 보고도 물론 아니었다. 외려 나는 2권에서 다룰 '규슈와 시코쿠'에 대해서는 단호히 보고를 받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다행히도 책을 읽으며 이 보고에 익숙해질수록, 그리고 특히 '사람'이 하나 둘씩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할수록 책을 읽는 일이 좀 더 흥미로워졌다. 저자는 일본에 사는 지인들을 여행 속에서 적극적으로 만나고 그러한 만남 속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따뜻함과 우의 그리고 한일 관계에 얽힌 그들의 생각 등을 접하게 되는 일은 꽤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편으로 저자가 너무 빈번히 지인들과의 만남을 가지는 덕분에 이 여행기는 종종 '일본의 걷고 싶은 길'에서 '일본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둔갑하곤 한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내가 저자의 인맥에 대해서도 구구절절 알아야 되나 싶기도 하고, 또 일본에 지인이 없는 사람은 대체 어떻게 일본을 여행하란 말인가, 하는 심술궂은 반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언제나 다정한 오사카의 일본인 부모님, 평생토록 가까이 모시고 싶은 스승 신이치 선생님 가족, 나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요코 언니 부부, 내 오랜 친구 마미코와 켄, 새벽의 계단 콘서트를 열어준 가케이 군, 열흘이나 나를 먹이고 재워준 테리와 마유미의 따뜻한 마음이 없었다면 여행은 무척 쓸쓸했으리라."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나로서도 이들의 등장이 반갑다고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의심의 여지없이 나는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고, 더욱이 딱히 내게 따뜻하게 대해준 것도 아니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이 여행기는 무척 무미건조했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물론 덧붙이자면, 이건 이 책에 대한 찬사의 의미만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이번에 읽은 세 권의 여행기 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제주올레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는 서명숙의 두 번째 책,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이었다(이 책을 단순히 여행서로 분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명숙의 첫 번째 책 <제주걷기여행>에 비하면 이번 책은 좀 더 '사람'에 초점을 맞춘 짤막짤막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읽는 내내 자그마한 감동들이 마치 잔잔한 파도처럼 되풀이하여 밀려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려운 와중에도 초심을 지켜 '제주올레'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곁을 찾아들어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 각자의 재능을 발휘해 '길'을 좀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들, 그리하여 계속해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변화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책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면서 독자의 마음을 살며시 흔들었고, 나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가끔씩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하고 때로는 울컥해 하기도 하면서 내가 생각만큼 감정이 메마른 사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공연히 다시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물론 만약 여전히 내가 내 생각만큼은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면 그건 그냥 책이 메마른 이의 감정마저 적실 정도로 좋았다는 뜻이니, 나로서는 어느 쪽이 맞든 별로 불만은 없겠다. 어쨌거나 책을 읽는 동안 행복함과 그리움에 감싸여 머지않아 직접 다시 제주도를 찾을 꿈을 꾼다는 게 적잖이 위안이 되었고, 생각해 보면 결국 아마도 이런 이유로 잦은 실패를 맛보면서도 끝내 여행 관련 서적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일 테다.

끝으로 여행기와는 무관한 한상운의 무협소설 <무림사계>를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이 작가, 정말로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무림사계>가 대단한 핵심적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이 무협소설이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설정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그러한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읽는 이를 끝내 감탄하게 한다면 이거야말로 정말 대단한 솜씨라 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참고로 내가 싫어하는 설정이란 무협소설에 강시나 기괴한 술사들이 지나치게 활보하면서 강호를 도산검림이 '무색한' 세계로 만드는 것인데, <무림사계>의 경우에는 배경을 서양인들이 중국에 출몰하던 19세기 무렵(아마도?)으로 설정하면서 무림인과 '총'과의 조우를 초래한다. 물론 총에 맞으면 무림인이라도 당연히 죽고, 이건 강시만큼이나 도산검림의 강호를 위협할 수 있는 치명적인 요소다. 게다가 <무림사계>의 결말 방식도 내가 별로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무림사계>는 자칫 한순간에 무너지기 쉬운 세계를 정말로 매끄럽게 끌고 나간다. 제목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은 단순한 재미 이상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스토리는 기발하며 구성은 탄탄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긴장감 속에서도 깨알 같이 터지는 유머까지. 그간 보아오던 무협소설과는 그 궤를 달리하기에 단순한 비교는 어렵겠지만, 이 정도면 정말 최고의 무협소설이라고 해도 그리 모자라지 않을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1권에서 잠깐 등장할 때만 해도 그리 예쁘지는 않은 여자로 묘사된 앵앵이, 이후 6권에서 주인공과 재회했을 때에는 상당한 미색의 여인이라고 나와서 약간 의아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건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여자의 변신이 무죄인 건 무협소설 속이라고 해서 딱히 예외는 아닐 테니까. 물론, 설령 그게 아니라 작가가 잠깐 딴 데 정신을 팔았기 때문이라고 해도 별로 상관은 없다. 지금 심정만 같아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라면 앵앵이 나중에 남자로 둔갑하다고 해도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남자의 '변심' 또한 무죄라는 단서 하에서 하는 말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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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라는, 제목만 봐도 잠 깨나 올 것 같은 책을 감히 집어든 건 내가 그 무렵 잠을 잘 못 자고 있었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그보다는 일단 이 책이 집에 굴러다니고 있었던 데다(물론 내가 사 놓은 건 아니다) 책도 퍽 가벼웠던 점을(물론 단지 물질적인 관점에서만) 이유로 들 수 있겠는데, 이런 없어 보이는 이유가 별로라면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올림픽의 몸값>이 이 책을 집어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말해도 좋겠다. 과연 일본의 도쿄 올림픽 개최를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위협하며 '올림픽의 몸값'을 요구하는, 소설 속 주인공 시마자키 구니오를 단지 '아나키스트'라는 하나의 단어로 대치할 수 있을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악당과 정의의 사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듯한 주인공의 행보를 보자니 '위험'과 '매력'을 동시에 풍기는 듯한 '아나키스트'에게도 약간이나마 관심이 갔던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리하여 슬며시 집어든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는 솔직히 내 기대와는 조금 달랐다. 얄팍한 책임에도 진도는 잘 나가지 않았고, 특히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어떤 '위험한 매력'을 드러내는 데에도 충분치 않았다. 본래 잠 못 들어 고민하는 일도 드물었으니 수면제로 유용하지 않았음도 물론이다.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이건 책이 나빴다거나 혹은 형편없었다든가 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아나키즘에 관한한 문외한에 가깝다). 다만 소설 속 주인공에게서 아나키스트의 면모를 보고, 아니 아마도 아나키스트의 면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 따위를 하다가 책장 한쪽에 꼽혀있는 '아나키스트' 어쩌고저쩌고 하는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는, 더욱이 그 책이 비교적 얄팍하기에 내심 반가워하며 그보다 더 얄팍한 마음으로 책을 펼쳐든, 그러니까 이건 애당초 접근방향이 사뭇 달랐던 한 독자의 가벼운 불평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가벼운 접근에 따른 가벼운 실망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몇 가지 인상적인 부분이 없지 않은데, 아나키즘을 단순히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건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를 조장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과 그 자체로 묵직한 무게감을 지니는 몇몇 아나키스트들이 남긴 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올림픽의 몸값>의 시마자키 구니오의 위험한 행보를 독자가 은연중 응원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를 이 책에서 찾았다는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민중은 권력에 쉽게 굴복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숭배하지는 않는다."(p7) ㅡ바쿠닌ㅡ
"군비와 전쟁은 오늘날의 국가가 자본주의 제도를 옹호하기 위해 만든 철의 장벽이며, 대다수의 인류는 이로 말미암아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다."(p29) ㅡ고토쿠 슈스이ㅡ
"천황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인간의 신체, 생명, 재산, 자유를 끊임없이 침해하고, 유린하고, 겁탈하고, 위협하는 조직적 대강도단이다. 대규모 약탈주식회사이다. 법률은 국가라는 대강도단과 약탈회사 주주들의 대표자회이다. 천황과 국가란 이들 강도단과 약탈회사의 우상이며 신단이다."(p125) ㅡ박열ㅡ
"천황은 일본에서 태어난 인간에게 최대의 모욕이며, 천황의 존엄성을 입증하는 것은 국민이 노예임을 의미하는 것"(p125) ㅡ가네코 아야코ㅡ

사실 <올림픽의 몸값>에서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보는 결코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올림픽 개막식이 열리는 주경기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키겠다는 건 미친 짓이며, 특히나 소설 속에서 시마자키 구니오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면 더욱더 그러하다. 예컨대, 경시청 소속의 형사 오치아이 마사오는 시민의 안전과 경찰로서의 자부심 그리고 국가의 위신을 위해 시마자키 구니오를 잡으려 노력한다. 그는 올림픽 개막식이 둘째 아이의 출산예정일인 한 아내의 남편이자 이제 막 건설된 아파트에 새로 입주한 가장으로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며, 따라서 시마자키 구니오의 테러 성공은 곧 오치아이 마사오의 임무 실패를 의미한다. 또한 올림픽 경비 책임자의 둘째 아들이자 시마자키 구니오의 대학 동문이기도 한 스가 다다시라든지, 시마자키 구니오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는 헌책방 집 딸 고바야시 요시코의 입장에서도 시마자키 구니오의 테러 시도는 이해와 응원의 대상은 아니다. 각각 올림픽 이후 새로운 일본의 세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이들과 시마자키 구니오 사이에는 서로 넘을 수 없는 큰 강이 존재하는 셈이다.

더군다나 이들 주요 등장인물들뿐만이 아니라 책 속에 나오는 다양한 인물들이 한결같이 올림픽 개최 성공을 기대하는 모습을 보면 시마자키 구니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전후의 힘겨운 시기를 지나 세계가 지켜보는 올림픽 개최를 맞이하여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 올림픽을 들뜬 마음으로 보러 나가는 고바야시 요시코의 할머니랄지, 혹은 입으로는 올림픽 개최의 국가 총동원 체제를 비판하면서도 은근히 올림픽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못하는 과격 학생운동 단체랄지, 혹은 심지어 올림픽 기간 동안 자발적으로 조직원들을 산으로 피하게 하는 도쿄의 야쿠자 두목까지, 올림픽 성공개최를 희망하는 절대 다수 일본 국민들의 모습까지 감안하면 이제 시마자키 구니오의 편에는 오직 그의 동료인, 소매치기 무라타 도메키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심지어 무라타조차도 올림픽의 성공을 방해하는 일은 꺼려하니, 과연 이런 상황에서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동이 티끌만큼이나마 '정의'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과격하고 고독한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보를 긍정하게 만드는 것은 공안요원 야노로 대표되는 '국가'의 존재다. 공공의 이익 혹은 국가를 우선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에게 거리낌 없이 행해지는 국가의 폭압적인 수단들, 사소한 소수의 희생 따위는 더 큰 대의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국가의 인식이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보를 일정부분 정당하게 만든다. 시마자키 구니오는 올림픽 경기장을 빨리 건설하기 위한 '속도전' 속에서 희생되는 노동자들을 목격하고, 그런 희생을 무심히 보아 넘기는 세상을 경험한다. 그가 최대한 인명 피해가 없게 하며 벌인 일련의 폭탄 테러는 완벽한 국가의 통제 아래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그 사건은 단지 폭발을 직접 목격한 일부의 환상으로만 남는다.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라는 오직 유일무이한 목표를 위해서는 어떠한 반대 의견이나 비판 그리고 흠집이나 우려도 용납되지 않고, 이런 상황 속에서 시마자키 구니오가 좀 더 과격한 테러를 시도하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필연인 것이다.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에서 말하듯, 시마자키 구니오에게 있어 "테러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행동을 통한 선전' 수단의 하나"였고, 결국 "테러가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도덕성과 희생을 담보로 테러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알기에 독자는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보를 은연중 응원하게 되는 것이리라.

하지만 <남쪽으로 튀어>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쿠다 히데오는 <올림픽의 몸값>에서도 일방적으로 어느 하나가 옳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시마자키 구니오 외의 다른 주요 등장인물은 그들이 서있는 지점에서, 전후 올림픽 개최에 성공하며 바야흐로 새로운 시기를 향해 나아가는 일본을 나름대로 충실히 살아내고 있고, 이들에 대한 오쿠다 히데오의 시선은 시마자키 구니오를 향한 시선과 비교해 더 따뜻하지도 혹은 더 차갑지도 않다. 다만 오쿠다 히데오는 '역자후기'에서 역자가 말하듯, "국가 권력이 철저히 은폐해버린 단 한 명의 이질분자를 훌륭하게 발굴"해 내었고, 그리하여 진정한 '올림픽의 몸값'의 베일을 벗겨내는 데 주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올림픽으로 대표되는, '국익'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바는 모두가 다를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올림픽의 몸값'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의미가 있는 법일 테니까 말이다. 물론, 이때 '올림픽의 몸값'이란 시마자키 구니오가 국가에 제시한 8천만 엔이 아니라,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이면에서 힘든 노동을 강요당하는 민중의 희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고, 덧붙여 이를 은폐하는 '국가'가 별로 좋은 놈만은 아닌 것도 크게 의심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뭐, 2011년의 '대한민국'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어쨌거나 소설적 재미와 현실의 무게를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오쿠다 히데오의 능력은 이 소설에서도 또 한 번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노동자의 목숨이란 얼마나 값싼 것인가. 지배층이 민중을 바라보는 시선은, 19년 전에 본토 결전을 상정하고 '1억 국민이 모두 불꽃으로 타오르자' 라고 몰아치던 시절 그대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민중은 한낱 장기 말로만 취급되고,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희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옛날에는 그게 전쟁이었고, 이제 그것은 경제발전이다. 도쿄올림픽은 그 헛된 구호를 위해 높이 쳐든 깃발이었다." (1권 p386)

"날마다 소금땀 흘리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집 한 채 못 가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2권 p96)

한편, 이번에 읽은 또 다른 책들로는 <축구의 문화사>와 <보통의 존재>가 있다. 먼저 <축구의 문화사>는 유럽의 몇몇 축구리그의 라이벌전들을, 그 유래와 역사 등과 관련해서 들여다보고 있는 책이다. 얇은 책인 만큼 '문화사'라는 제목에 걸맞을 만큼 깊은 주제를 다룬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축구팬들에게 비교적 익숙한 라이벌전들을 다루면서도 단순히 알려진 사실의 정리 수준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것 같다. 그리고 <보통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리뷰를 쓴 바 있으니 여기서는 '공감'과 관련해서 짧게 언급하는 게 낫겠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고 느끼는 '공감'이라는 건 많은 경우 '이해'나 '납득'의 의미라고 생각하는데, <보통의 존재>는 정말 문자 그대로 '공감'하며 읽었다. 그렇게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책을 읽는 기쁨이 작지 않았음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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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존재
이석원 지음 / 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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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1980년, 컬러TV의 국내 시판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해의 가을과 겨울이 교차할 무렵, '한 남자'가 10개월 여의 어둠 속 칩거를 끝내고 마침내 총천연색의 빛으로 둘러싸인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ㅡ

위에서 언급한 '한 남자'란 다름 아닌 '나'를 가리키는 것인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컬러TV가 시중에 유통되어 많은 사람들이 다채로운 색의 향연을 누리게 된 것과 내가 태어난 것 사이에 필수불가결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우길 생각은 전혀 없다. 그렇게 따지자면, 유사한 인과관계를 주장할 사람이 족히 수만은 될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른바 '컬러 시대'에 태어난 내가 좀 더 "반짝반짝 눈이 부신" 삶을 살기는커녕, 흑백텔레비전의 무채색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게 되리라고는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아무거나 골라잡아도 상관없던 어린 시절, 너무나 많은 가능성 때문에 오히려 단 하나의 장래희망을 고르지 못하곤 했지만, 그게 훗날 장래희망이 그저 맘대로 고른다고 되는 게 아님을 예견한 셈이 되리라고도, 나는 차마 상상하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보통의 존재'임이 이제는 분명해졌고, 이건 확실히 그다지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자랑은커녕 '보통의 존재'는 판타지나 로망과는 억만광 년쯤 떨어져있으면서 콤플렉스와는 꽤나 사이가 좋은, 가능하다면 이쪽에서 내팽개쳐버리고 싶은 감투다. 화려하고 넓은 집과 비싸고 멋진 차, 근엄하고 존경스러운 아버지와 자애롭고 현명한 어머니를 비롯한 완벽한 가정, 잘생긴 외모와 탁월한 능력 등등. TV화면에 비치는 찬란한 어떤 판타지 같은 삶들은 '보통의 존재'에게는 당연한 귀결로 허락되지 않고, 그 대신 '보통의 존재'는 그 대척점의 삶 속에서 콤플렉스에 휩싸이며 번민할 뿐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그럼에도 끝내 내게 고스란히 물려진 것들에 대해, 그리하여 이상과는 거리가 먼 현실에 대해, 무엇보다도 특별하지 않은 나의 존재에 대해. 과연 이러한 '보통의 존재'에게도 희망과 로망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스스로 '보통의 존재'를 자처하는 이석원은 이 책에서 '보통의 존재'로서 '보통의 존재'에게 말을 건넨다. '보통의 존재'답게 그의 이야기들은 대개 소소한 것들에 관한 것이고 종종 음울하고 쓸쓸한 이야기들이며 자주 애잔함과 서글픔을 자아내지만, 놀랍도록 솔직하고 잔잔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글은 놀랍게도 독자에게 애틋한 공감과 위로를 전해준다. '보통의 존재'로서 일상적으로 느끼던, 하지만 섣불리 말하기는 어려운 내밀하고 꺼림칙한 고민과 불안들이 책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저자의 사유와 만나 고요하게 가라앉고, 또한 나아가 보통의 존재에게도 허락된 따스한 추억과 소소한 즐거움 그리고 마음속 깊숙이 숨겨둔 빛바랜 희망이 새삼 꿈틀대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종래에 그는 '보통의 존재'인 스스로와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틀림없는 '보통'의 존재이지만, 중요한 건 여전히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데에 있다고.

평일 밤 아홉 시쯤, 느지막이 서점을 찾아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한적한 서점 이곳저곳을 거닐 때면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좀 더 젊은 시절에는 이런 사소한 일에 행복을 느껴야 하는 내 처지가 가여웠던 적도 있었지만 행복 중의 으뜸은 평범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더더욱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오늘도 서점을 찾고 있다. (p308)

생각해보면 타인의 삶을 접하며 느꼈던 감정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색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지닌 이의 삶이 보여주는 당당함과 찬란함, 그로부터 비롯되는 선망과 부러움이 그 하나고, 마치 검푸른 바다색과 같은, 깊이 침잠할 대로 침잠해 버린 삶을 사는 이의 슬픔과 고통, 그로부터 비롯되는 연민과 자기기만적 안도가 다른 하나다. 여기에는 '공감'이 자리할 여지는 적다. 이에 비해 이석원이 공개일기를 통해 보여주는 그의 삶은 무채색처럼 선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마치 무채색이 빛에 의해 밝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듯, 적나라한 자기응시로 드러내는, 그러나 결코 과잉되는 법이 없는 그의 감정들이 내밀하고 절제된 글들을 통해 독자라는 빛에 닿아 이런저런 감정 상태를 낳는 듯하다. 때로 유치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개인적인 일 같기도 한 그의 글 속에서 이렇듯 커다란 공감과 따스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닮은 '보통의 존재'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보통의 존재'란, 간단히 말해 지갑에 5천원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누구나 화려하고 찬란한 어떤 것들을 원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지갑에는 언제나 5천원 밖에 없다는 게 문제다. 이 5천원으로는 영원한 사랑을 사는 데에도, 주연 배역을 사는 데에도, 금석 같은 친구를 사는 데에도, 이상적인 가족을 사는 데에도 불충분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5천원으로 종종 추억과 즐거움과 행복을 사곤 한다.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커피를 마실 때나 서점에서 책을 뒤적일 때에나 즐겨 찾는 블로거의 새로운 글을 읽을 때 5천원은 충분하고, 이것은 결코 값싼 자기만족이 아니다. 중요한 건 보통의 존재에게도 5천원쯤은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이고, 이건 이석원이 말하듯, 우리의 '위대한 유산'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나 해답을 알 수 없는 오랜 물음을 던진 끝에 어느 날, 내가 그토록 달아나고 싶고 회의하던 것들로부터 나와 내 삶이 이우러져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인 순간, 나의 모든 아쉬움들은 그제야 비로소 위대한 유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바로 잘나지 않은 내 가족과 친구들, 무엇보다 늘 부끄럽게 여기던 내 자신까지, 바로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수많은 것들이 내게 건넨 힘과 그들과 함께했던 세월 덕택이었습니다. 비록 조금 뒤늦긴 했지만, 이젠 내겐 이 화려한 유산을 마음껏 쓰는 일만 남았습니다. (p99)

생각하기에 따라서 '보통의 존재'도 얼마든지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이석원은 하지 않는다. 물론 설령 그런 거짓말을 하더라도 이쪽에서 고분고분 믿어줄 마음도 없긴 하지만. 그러나 쉽게 꺼내기 힘든 고민도 서슴지 않고 펼쳐내는 그의 솔직한 글들은 독자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과 더불어 독자의 마음마저 솔직하게 만들어 주고, 하여 독자가 그의 글 속에서 문득 조우하게 되는 솔직한 마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보통의 존재'는 종종 유감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슬픔과 좌절의 필요충분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그렇다면 '보통의 존재'라고 너무 침울해 할 필요는 없다는 것. '보통의 존재'에게도 즐거움과 행복은 남의 일만은 아니거니와, 무엇보다도 '보통의 존재'란 나만을 일컫는 것도 아니니까. 아무튼 그러니까, 기운을 내자!

ㅡ2010년, 컬러TV가 국내에 시판된 지도 30여 년이 지났다. 그리고 이제 태어난 후 서른 한 번째 새해를 목전에 둔 '한 남자'는 종종 슬퍼하고 불안해하며 좌절하기도 하지만, 또한 때때로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며 끝내 마음속 로망이 실현되기를 바라며, 꽤나 잘 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보통의 존재로서'ㅡ

아무튼 기운 내. 너만 그런 건 아니니까.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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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종종 이 질문은 세상에서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중의 하나로 회자되곤 하는데, 이는 아마도 아빠들의 가여운 기대를 차마 야멸치게 잘라버리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빠와 엄마 중에 누가 더 좋냐니? 바른대로 말해서 이런 한숨 나올 만큼 쉬운 질문이 세상에 또 있단 말인가. 단언하건대 나는 두 가지 대상 중에 더 좋고 덜한 것이 있음을 인식한 이후로 줄곧, 아빠보다 엄마를 더 좋아했다. 나를 세상에 내어놓고 먹인 것도, 입힌 것도, 기른 것도 엄마였으니, 어쩌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줄곧 나는 엄마를 더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빠라고 해서 나를 위해 한 일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비교 대상이 '엄마'라면, '아빠'에게는 불행하게도, 절대로 승산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얼마 전에 화제가 되었던 한 초등학생의 주옥같은 시('아빠는 왜')는, 기실 많은 이들이 알면서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이 진실을 거침없이 폭로하여 세간에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은근슬쩍 엄마와 비교대상이 되면서, 설령 엄마보다는 못할지라도 그래도 엄마 다음쯤은 될 것이라는 아빠들의 기대는 도덕 교과서와 같은 철저한 진실성으로 무장한 한 초등학생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던 것이다. 도덕적이고 명민한 초등학생의 시에 따르면, 아빠는 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 멍멍이나 냉장고보다도 못한 존재로 드러났는데, 돌이켜 보면 확실히 어린 시절의 나 역시 아빠보다는 변신합체로봇을 더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아빠는 그게 불만이었던지 어느 날 내 변신합체로봇을 집어 던져서 변신합체로봇이 더 이상 변신도 합체도 할 수 없게 만들었지만, 그게 별로 좋은 행동이 아니었음은 금세 분명해졌다. 결국 아빠는 변신합체'불가'로봇에게도 자리를 내어주어야만 했으니까. 

<아빠는 왜?>

엄마가 있어 좋다. / 나를 예뻐해 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 나랑 놀아 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아빠가 언제나 변신합체'불가'로봇보다도 못한 존재였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고, 또 모든 아빠가 냉장고나 멍멍이보다도 못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아빠를 엄마와 비교하려는 건 그야말로 아빠의 언감생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런 아빠에 관한 서글픈 진실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혹은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라고 해도 피해 가지는 못하는 듯 보인다. 예컨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책 <여보, 나좀 도와줘>를 보면 그는 아내의 항의를 이렇게 옮기고 있다. "아내가 나를 구박할 때는 언제나 아이들 이야기를 내세운다. '아이들을 위해서 관심 가져 본 적이 있느냐.' '아버지 노릇한 거 뭐 있느냐.'는 거다." 엄마들이 서슴없이 아이들을 전면에 내세워 아빠들에게 공세를 취할 수 있는 건 엄마들이 아이들과의 특별한 유대를 확고히 자신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또한 아이들에게 쏟아지는 엄마의 관심과 애정이 아빠에 비해 얼마나 월등한 것인지를 분명히 증명한다. 이런 사정은 아빠가 나중에 대통령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그런가 하면 다산 정약용의 서간문을 모은 책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정약용이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다산의 높은 의기와 절개 그리고 뛰어난 학식과 인품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좋아하긴 어려운 아버지로군,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편지에서 다산은 아들들에게 이런 저런 '지극히 옳고 유교적인' 조언들을 하는데, 문제는 이 '지극히 옳고 유교적인' 조언이 지나칠 정도로 이상적이라 종종 답답하게 여겨질 정도라는 데 있다. 편지마다 효와 예를 언급하고 학문에 힘쓰기를 권하며 과제를 잔뜩 내주는 건 분명 마냥 불만을 쏟아내기 어려운 아버지의 가르침이라 할 만하지만, 벼슬길이 막힌 '폐족(廢族)'의 청년들에게 아버지의 유별난 결기는 때로 원망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이런 편지를 보내주는 아버지를 그저 좋아만 할 수 있을까.

네가 양계(養鷄)를 한다고 들었는데 양계란 참으로 좋은 일이긴 하지만 이것에도 품위 있는 것과 비천한 것과 더러운 것의 차이가 있다. ...(중략)... 이미 닭을 기르고 있으니 아무쪼록 앞으로 많은 책 중에서 닭 기르는 법에 관한 이론을 뽑아내어 차례로 정리하여 계경(鷄經) 같은 책을 하나 만든다면 육우(陸羽)라는 사람의 <다경(茶經)>,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의 <연경(煙經)> 같은 서적처럼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속사(俗事)에 종사하면서도 선비의 깨끗한 취미를 갖고 지내려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 (p82)

내가 벼슬하여 너희들에게 물려 줄 밭뙈기 정도도 장만하지 못했으니 오직 정신적인 부적 두 글자를 마음에 지녀 잘 살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도록 이제 너희들에게 물려주겠다. 너희들은 너무 야박하다고 하지 말라.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 (p148)

물론, 나는 다산의 아들이 아니니 이런 편지를 받은 다산의 아들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시와 지금은 시대가 다르니 미루어 짐작을 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할 요량으로 이제 닭을 기르려 하는데, 거기에서도 품위를 찾으며 책을 저술하기를 권하고, 더군다나 당장 가난한 마당에 '근'자와 '검'자가 기름진 땅보다 낫다는 데에는, 솔직히 너무 태평한 소리를 한다는 마음이 아주 없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시는 예를 말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인정을 살피십시오."라고 한 다산의 아내의 편지 한 구절은 다산의 '예'로 가득한 편지와 얼마나 비교가 되는지. 만약 다산이 우리 아버지였다면 내가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중에는, 어쩌면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제가 불초하여 아버지를 편안히 모시지 못했으니 오직 정신적인 부적 두 글자로써 아버지를 모시고자 합니다. 아버지는 너무 야박하다고 하지 마십시오. 한 글자는 건(健)이고 또 한 글자는 강(康)입니다. 이 두 글자는 좋은 음식이나 편안한 의복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농담만도 아니다. 어쨌건 다산이 나의 아버지가 아닌 것이 서로에게 다행스러운 일임은 분명하고, 아이들이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기 어려운 건 더욱 분명하다.

다산이 둘째 형님에게 보내는 편지에 보면 다산이 집주인 노파와의 문답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노파는 다산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선생은 책을 읽은 사람인데 이런 뜻을 아시는지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는 똑같고 더구나 어머니가 오히려 더 애쓰시는데도, 성인들이 교훈을 세우기를 아버지는 중히 여기고 어머니는 가벼이 하도록 했고 성씨도 아버지를 따르게 하였으며 복(服)을 입을 경우에도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한 등급 낮게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혈통으로 집안을 이루게 해놓고는 어머니 집안은 도외시해 버리도록 하였으니 이거 너무 편파적이 아닌가요?" 다산과 노파는 성인의 말씀을 지극한 것으로 여겨 그에 맞도록 해석을 하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성인들이 모두 아버지이기 때문으로, 그들은 그런 예법을 애써 마련해 두지 않으면 아버지의 위치가 이내 땅에 떨어질 것임을 잘 헤아렸던 것이 틀림없다(오늘날 세계적으로 어머니날이 성행하는 것과 달리 아버지날은 썰렁하기 짝이 없는 것을 보라). 요컨대 심지어 성인이라 할지라도, 역시나 엄마에게는 역부족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본래 아버지들이 엄마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해서 아버지들이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엄마보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는 어려워도, 여전히 '좋은' 아버지는 될 수 있다. 가령, 딸과 함께 유럽으로 사진여행을 떠나는 아버지라면 어떻겠는가. 함께 여행을 하고 사진을 찍으며 "인생의 선배로서, 같은 사진의 길을 가는 동료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딸을 이끌어주고 또 딸의 뒷모습을 지켜봐주는 아버지라면 참으로 든든하지 않을까(<사진가의 여행법>). 스스로 "나는 아이들로부터 존경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수치감을 준 일도 없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아버지라면 또 어떤가. 아이들에게 위선만큼 해로운 게 없다고 믿고 그대로 실천하는 아버지를 아이들이 존경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여보, 나좀 도와줘>). 또한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내가 귀양이 풀려 돌아가느냐, 못 돌아가느냐 하는 일은 참으로 큰일은 큰일이나, 죽고 사는 일에 비하면 극히 잗다란 일이다."라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아버지를 마음 깊이 우러르지 않을 수 있을까(<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그리하여 이미 아버지를 든든히 여기고 존경하며 마음 깊이 우러른다면, 어찌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아빠의 경쟁상대가 엄마가 아니라, 실은 멍멍이나 냉장고라는 건 꽤나 가혹한 진실이지만, 그렇다고 낙심하여 결국 멍멍이나 냉장고에게조차 뒤처지는 건 더욱 더 가혹한 노릇이다. 적어도 그 꼴이나마 피하려면 역시나 나름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함은 자명하며, 게다 잘 생각해 보면 멍멍이나 냉장고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어쨌거나 멍멍이나 냉장고는 엄마 다음으로 시에서 언급될 정도니까. 하지만 달리 말하면, 멍멍이나 냉장고만큼만 해도 엄마 다음쯤은 될 수 있다는 얘기고, 끝내 멍멍이나 냉장고를 제칠 수 있다면 스스로 꽤 좋은 아빠임을 자부해도 좋으리라. 물론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그러나 실은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시선이 보지 못하는 아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항변이 마음속에 사무치지 않을 리 없겠지만, 어쩌랴. 아이가 자라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고, 아이가 자라서 지니게 될 시선은 다름 아닌 지금의 시간 속에서 잉태되는 것임에야. 그러니 아무쪼록, 아빠들의 건투를 비는 바이다. 아이가 자라면 그때는 너무 늦다.

덧. 아다치 미츠루의 <크로스 게임>이 어느 틈엔가 완결이 된 걸 알고 다시 한꺼번에 몰아서 보았다. 역시나 재미있긴 했는데, 굳이 <크로스 게임>을 <터치>나 <H2>와 비교하자면 이는 마치 아빠를 엄마에 비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마디로 말해 그건 무리라는 얘기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크로스 게임>에 대한 폄하가 될 수는 없다. 비교대상이 '엄마'나 마찬가지인 <터치>와 <H2>라는 건 너무 사정없이 높은 잣대니까. 그저 이 대목에서는 '엄마'를 둘(혹은 셋-<러프>도 훌륭하다)이나 세상에 내어놓은 아다치 미츠루의 능력에 새삼 경탄할 따름이다(아, <크로스 게임>도 물론 괜찮다. '엄마'는 아니지만 좋은 '아빠'쯤은 된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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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한 대학 연구진의 발표에 따르면, 메이저 대회를 개최하게 되는 나라의 국민들은 방금 결혼한 커플보다 1.5배나 더욱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나는 아직 결혼해 본 적이 없어서 메이저 대회 개최의 기쁨을 결혼의 기쁨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지난 2002년 월드컵 개최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비록 그때 나는 군대에 짱 박혀 있었지만-확실히 메이저 대회 개최의 기쁨이 컸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물론 2002년 월드컵의 경우에는 한국 대표팀의 활약 덕에 기쁨이 배가된 측면도 있겠으나, 그 활약 여부를 논외로 하더라도 지구촌 최대의 축제 중 하나를 내 나라에서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평생을 두고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거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기쁨을 혹 다시 누릴 수 있게 된다면, 그건 또 한 번 환상적인 일이 될 것임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시점에서 또 한 번 월드컵 개최를 위한 노력을 경주한다는 게 과연 덮어놓고 찬성할 만한 일일까.

지난해 2월, 한국의 2022년 월드컵 유치 신청 발표가 있기 한 달쯤 전만 해도 대한축구협회의 조중연 회장은 한 라디오 프로에서 "2022년 월드컵 유치는 현실성이 없다."고 단언했었다. 하지만 이 발언 이후 2022년 월드컵 유치 신청을 한 조중연 회장은 FIFA에 우리가 월드컵 유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알리는 게 중요하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고, 이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이 전면에 나서면서 한국의 월드컵 유치는 어느 정도 경쟁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자평하는 모양새다. 특히 정몽준 명예회장은 최근 기자회견을 통해 지난 2002년 월드컵 유치 경쟁에 비하면 이번에는 여건이 더욱 낫다고 전하며, 월드컵 유치가 "정부와 국민이 힘을 모은다면 충분히 가능"하며, 또한 한반도에서의 월드컵 개최가 "동북아 및 한반도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정부와 국민이 힘을 모아 또 한 번 한반도에서의 월드컵을 개최하고, 이것이 동북아 및 한반도 평화에 기여할 수도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낙관적인(심지어 공상적인) 결과론일 뿐, 거기에 이르기 위한 현재의 유치 과정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가장 먼저, 국민 대다수의 염원이 모여 그 힘을 바탕으로 월드컵 유치를 하는 게 순서일 텐데, 이미 신청을 한 지 오래고 그 동안 소리 소문 없이 유치활동을 하다가 이제 유치 결정을 불과 두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힘을 모아야 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 최근의 한 신문광고에서는 "서울 G20 의장회의의 의장국, 대한민국이 자랑스럽습니다."라는 문구를 곁들이며 "2022년 월드컵 개최를 온 국민과 함께 이루어내겠습니다." 운운하는 것을 보았는데, 일단 이게 G20 유치 광고인지 월드컵 유치 광고인지 의심스러운 건 차치하고, 과연 서울 G20 의장회의 의장국인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며 2022년 월드컵 개최를 염원하는 국민이 얼마나 많을지는 의심스럽기만 하다. 국민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내실을 쌓은 후든 아니든, 그저 어떻게든 일단 유치 의사를 밝히면 국민은 거기에 동조해야 하고, 나아가 그것이 실제 성사된다면 무조건 자랑스러워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적어도, 그 '국민'에 내가 포함되지 않는 건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2022년 월드컵 유치를 원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몽준 회장도 역시 시기적으로 두 번째 월드컵 개최 시기가 너무 빠름을 잘 인식하기 때문인지 2022년 월드컵은 '두 번째 월드컵'이 아니라 제대로 하는 '첫 번째 월드컵'(First full world cup)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이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에 불과하다. 지난 월드컵 개최의 기쁨이 아직도 선연한 이상 또 다른 월드컵 개최는 한국의 '두 번째' 월드컵이 될 게 너무도 명백하고, 그렇기에 조금 과장되게 비유하자면 2022년 월드컵 유치는 이제 막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혼인신고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다음 결혼식 날짜를 잡으려는 것과 같다. 물론 이때 실제 결혼 날짜는 좀 더 나중의 일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지금은 결혼식의 기쁨을 추억하며 일상의 결혼생활 내에서 행복을 찾는 게 지극히 현명한 일일 것이며, 이는 대한축구협회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아닌 게 아니라, 월드컵 유치가 아니더라도 대한축구협회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쏟아야 할 한국축구의 문제는 산적해 있다. 텅텅 비는 다수의 K리그 경기장과 K리그 경기 중계를 외면하는 방송사들, 그리고 한국축구의 나아갈 길이자 아킬레스건인 승강제까지, 내실을 다져야 하는 만만치 않은 현안들을 안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의 놀라운 성과와 2010년 월드컵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는 '안'의 문제들이 이렇듯 여전함에도, '밖'으로만 관심을 기울이는 대한축구협회의 모습은 스러져가는 내부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그저 외부의 페인트칠에만 몰두하는 격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더군다나 한국이 현재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과 2015년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유치했고, 또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와 2020년 부산 올림픽 유치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환기해보면, 국가적으로도 2022년 월드컵 유치는 다소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각각의 대회 유치에 대한 적정성은 차치하고라도, 이처럼 줄줄이 메이저 대회 유치 활동이 진행 중임에도 '현실성 없다던' 월드컵을 또 유치하기 위해 과연 '정부와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할까. 이쯤 되면 2022년 월드컵 유치의 진정한 의도와 재임기간 중 기어코 어떤 '대회'를 개최하고자 노력하는 자치단체장들의 정치적 의도가 어쩐지 겹쳐보이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지난 해 한국이 월드컵 유치 의사를 밝혔을 무렵, 한 칼럼에서는 2022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2022년 월드컵이 누군가에게 엄청난 정치적 이득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를 예상하기도 했었다. 한국의 2022년 월드컵 개최가 현실이 되기란 녹록치 않은 일이니 그 시나리오는 실현될 확률이 낮겠지만, 적어도 지금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현실성 없던' 2022년 월드컵 유치가 '충분히 가능'한 일로 둔갑되는 과정과 한 인물의 등장 시기는 완전히 무관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정몽준 명예회장이 전면에 등장하는 시점과 대한축구협회의 뒤늦게 요란해지는 유치활동 시점이 묘하게 겹쳐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정몽준 명예회장이 FIFA의 부회장이니 그가 유치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 하지만 2022년 월드컵 유치를 현실성 없는 일로 보았던 '현'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생각이 극적으로 변하는 과정과, 현재의 월드컵 유치활동을 보면 과연 대한축구협회가 '무엇'을 위한 조직인지, 심지어 '누구'의 조직인지 의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나는 한 사람의 축구팬으로서 몇 번의 월드컵을 모국에서 거푸 치러내는 것을 보고 싶은 욕심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월드컵이 동일 국가에서 몇 번씩 치러질 수 없다면, 다음 월드컵은 다음 세대의 기쁨으로 남겨두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물론 모두가 같은 마음일 수는 없으니 또 다른 월드컵을 유치하는 게 절대적으로 틀린 일이라고까지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월드컵이 진정 '정부와 국민이 힘을 모아야' 가능한 것이고, 또한 그 이전에 월드컵이 진정 '국민의 기쁨'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이 월드컵이 '기쁨'만이 아닌 '비용'이라는 '대가'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좀 더 진지한 논의를 통해 뜻을 모으는 게 먼저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혹 그러한 논의를 거쳐 국민이 또 한 번의 월드컵을 현시점에서 염원한다면 그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또 한 번의 월드컵이 그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군다나 그의 머릿속에 사특한 계산이 아주 약간이라도 도사리고 있다면, 섣부른 '결혼식' 추진을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그때는 '결혼식'은커녕 오히려 '이혼'을 생각해야 할 것이고, 이때 이혼의 당사자는 물론 대한축구협회와 정몽준 명예회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몽준 명예회장이 한국 축구에 일정 부분 기여한 바는 인정해야겠지만, 이제는 서로를 위해서라도 분명 헤어져야 할 때이다.

덧. 메이저 대회 개최가 언제나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닌데, 이와 관련해서는 정희준의 <어퍼컷>을 읽어 보면 놀랍고 흥미로운 내용을 많이 접할 수 있다. 내 마음 같아서는 관련된 내용 전부를 인용하고 싶지만 스크롤의 압박상 여기에 약간의 내용만 인용한다.

스포츠 메가 이벤트는 그래서 그 규모가 크면 클수록 개최 도시에겐 빚잔치였다. 올림픽 때문에 쪽박을 차게 된 기념비적 사례는 1976년 올림픽을 개최했던 몬트리올이다. 당시 몬트리올 시장은 올림픽으로 인해 재정 적자가 날 가능성은 남자가 아이를 낳을 가능성보다도 낮다고 했지만 결국 몬트리올 시는 엄청난 적자로 인해 파산 직전까지 몰렸고 그 빚을 갚는 데 30년을 허비해야 했다. 그래서 몬트리올 사람들은 올림픽 경기장을 'The Big Owe(거대한 빚)', 'The Big Mistake(엄청난 실수)'라고 부른다. (p163) 

많고 많은 '빚더미 올림픽' 중에서도 동계 올림픽 삼수에 도전하는 강원도 평창이 특히 주목해야 할 곳이 있다. 1998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했던 이웃 일본의 나가노다. 일본, 아니 아시아 최대의 겨울 휴양지로 사실상 '준비된 개최지'였던 나가노는 물경 190억 달러를 투자해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그러나 폐막 후 다른 역대 개최지와 마찬가지로 곧장 포스트올림픽 불경기Post-Olympic Slump로 빠져들었다. 필자는 2006년 일본에서 만난 미디어 마케팅 전공 교수와 나가노 올림픽에 참여했던 세계적 광고 회사 덴츠의 스포츠 마케팅 담당 임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가노가 동계 올림픽을 개최한 것이 지역 주민들에게 잘된 일이었나요?" 두 사람은 입을 맞춘 듯 동시에 대답했다. "NO." (p165)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스포츠 메가 이벤트의 경제 효과란 고상하게 말하면 '환상'이고 쉽게 표현하면 '뻥'이다. 지역 경제와 도시 공학 분야의 외국 학자들은 스포츠 메가 이벤트와 지역 경제 활성화의 상관관계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영국 경제학자인 시맨스키Szymanski는 <월드이코노믹스>지에 실린 '월드컵의 경제 효과'라는 논문에서 "월드컵의 거시 경제적 효과는 없다"고 결론 내리며 "국가는 스포츠 이벤트 유치에 나서면서 갖은 경제적 효과를 '창조inventing'하는 나쁜 버릇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p169) 

그런데도 왜 우리나라 지자체들은 국제 대회를 유치하는 데 '환장'하는 것일까. 첫째는 지자체장들, 정치인들의 욕심이다. 이들에게 이런 대규모 국제 스포츠 이벤트만큼 좋은 건 없다. 이만큼 '폼' 나는 게 없다. 방송 타고 사진 찍힐 가장 좋은 기회다. '국제적'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외제라면 환장하고 국제도시라면 앞뒤 안 가리는 동네 사람들 허파에 바람 넣기 가장 좋다. 공장을 유치해 일자리 만드는 그런 정도에 비할 게 아니다. 게다가 일단 유치만 하면 몇 년 후인 개최 때까지 재선이고, 삼선이고 도대체 걱정이 없다. 아무런 업적이 없어 현직 프리미엄은커녕 2010년 지방 선거를 앞두고 당 공천조차 걱정해야 하는 허남식 부산 시장이나 박광태 광주 시장이 각각 올림픽과 유니버시아드 유치에 목을 매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p169-170)

국제 행사 유치에 일단 눈이 멀면 이들에겐 혈세도 곶감으로 보인다. 강원도는 결국 실패한 동계 올림픽 유치에 6,000만 달러, 물경 600억 원을 썼다. 아시안 게임 유치전이 막바지까지 접전을 벌이게 되자 인천시는 급한 나머지 스포츠 약소국 지원 프로그램에 2,000만 달러를 지원하고 참가국의 숙박과 항공료 일체를 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게 무려 400억 원어치란다. 한마디로 '묻지마 유치', '퍼주기 유치'다. 광주는 201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유치에 100억 넘는 돈을 쏟아 붓고도 실패해 그 돈의 출처와 사용처가 문제가 됐었는데 그 논란을 정말 끝끝내 '쌩' 까고 2009년 5월 기어이 2015년 대회를 유치하고야 말았다. 이번엔 얼마를 썼는가. 정말 누구를 위해 유치하는가.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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