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데 있어 내게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그건 그냥 내키는 대로 읽는다는 것인데, 그런 이유로 종종 약간의 의무감을 동반하고 읽는 소위 '무거운' 책은 어지간해서는 연속적으로 읽지 않는다. '무거운' 책 한 권쯤이야 단단히 마음먹고 읽어낼 수도 있지만, 그걸 다 읽고 다시 또 한 권의 '무거운' 책을 연이어 집어 드는 건 절대로 '내키는' 일이 아니까 말이다. 물론, '무거운' 책이라는 건 물리적으로 무거운 게 아니라 그 내용이 꽤 어렵고 따분하며 무엇보다 재미없다는 걸 의미하고, 이를테면 '철학', '종교', '인문', '역사' 등을 다루는 책들이 바로 내게는 '무거운' 책이다. 몸에 좋은 약은 대체로 쓰게 마련이니 나는 이런 '무거운' 책의 위대함을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쓴 약을 하나 삼킨 후 사탕 하나 입에 물 사이 없이 또 다시 꾸역꾸역 쓴 약을 입에 집어 넣는 것은 정말이지 할 짓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나는 절대로 부정할 생각이 없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은 후 <역사사용설명서>를 읽고, 그 다음으로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와 <산중에서 길을 물었더니>를 차례로 읽은 지난 7,8월의 내 독서 여정은, 그래서 위와 같은 평소 독서 스타일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는 약간 흥미 위주의 책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차례대로 '역사', '역사', '역사', '종교' 서적을 읽은 셈인데,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전적으로 가장 먼저 읽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이 책에 대해서는 리뷰를 쓴 바 있으니 짧게 덧붙이자면, 이 책은 책을 읽을 때 기대함직한 거의 모든 것들을 독자에게 제공해 주는 듯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적 만족감, 나열된 사실 속에서 큰 줄기를 헤아리는 통찰력, 권력의 일방적인 역사관에 대한 대항의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과거의 시사점 등, '무거운' 책이 과연 몸에 좋은 것임을 이 책은 훌륭히 증명했고, 게다가 이 책은 꽤나 재미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책을 덮은 다음에 <역사사용설명서>라는 만만치 않아 보이는 책을 들었다는 점에서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흥미로움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마거릿 맥밀런의 <역사사용설명서>는 제목의 유머러스함에도 불구하고 (내 입장에서는) 농담으로라도 재미있다고 할 만한 책은 아니다. 원제는 '역사의 사용과 악용'이라는 좀 더 근엄한 제목을 갖고 있거니와, 실제로 이 책은 원제 그대로 역사 속의 무수한 사례들을 끌어와 눈앞에 현란하게 들이밀며 역사가 어떻게 사용 혹은 악용되는지를 깊이 파고든다. 당연히 책은 유머와는 거리가 멀고, 혹 저자가 유머를 구사했을지라도 그게 나와 코드가 맞는 게 아닌 건 틀림없다. 하지만 대신 이 책은 상당히 유익하다. '유익하다'는 말은 대개 '재미없다'는 말과 동의어이고 나 또한 여기서 어느 정도 그런 뜻으로 사용했음을 부인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역사'라는 것에 대해 어떤 의문들을ㅡ그것이 무엇이든ㅡ가져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상당히 유익하며 심지어 의외로 흥미로울 수도 있다는 데에 열렬히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러한 유익함과 깊이가 생각할 거리를 늘려주는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많아지면 외려 그와 관련해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이고, 그게 내가 이 책에 대해 더 길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저 다시 말하건대, 이 책은 정말로 '유익'하다.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는 이미 말했듯 '역사' 보다는 '흥미'를 좇아 집어 든 책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굉장히 실망스러웠다.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건 이 책의 구조적인 문제다. 400페이지가 좀 넘는 이 책은 33명의 역사 속 인물들을 다루는데, 이는 사진을 제외하면 한 인물 당 기껏해야 10여 페이지 가량의 분량이 할애됨을 의미하고(이 책은 개정,증보되어 발간된 것으로, 처음 나왔을 때는 무려 50명을 다루었다고 한다), 이는 또한 독자가 이 책이 다루는 인물과 깊이 있게 마주하는 일을 대단히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구조적인 문제보다 더 실망스러운 건, 이 책이 소개하는 각 인물들에 대해 깊이 있게 파고들지도 못하면서 이내 섣부른 평가를 내리고 만다는 점이다. 예컨대, 클레오파트라 여왕에 대해 저자는 "아름다움이 전부인 여성이 아니"며 "엄청난 노력가였으며 뛰어난 정치가였고 개인보다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던질 줄 아는 호쾌한 위정자"라는 평가를 내리는데, 정작 클레오파트라에 관한 짧은 글 속에서 그러한 면모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또한 락슈미바이에 대해서는 "19세기 인도에서 여성의 권리에 대한 매우 급진적인 생각을 가졌으며 담대함과 용기, 지혜를 가진 여성으로, 인도 독립 운동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다."라고 하는데, 이러한 일방적인 외부의 평가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 외에 구체적으로 락슈미바이의 '여성의 권리에 대한 매우 급진적인 생각'과 '담대함과 용기, 지혜'를 알고자 한다면 오직 실망밖에는 얻을 게 없다.

 

물론 애당초 '흥미'를 목적으로 집어든 책에서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게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사용설명서>에서 마거릿 맥밀런이 '나쁜 역사서'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읽은 후에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를 읽으니 '나쁜 역사서'의 실제 예시를 접하는 느낌이 강렬한 건 어쩔 수 없다. 마거릿 맥밀런은 "나쁜 역사서는 주인공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가졌을 법하지 않은 통찰력을 가졌기를 바라거나 할 수 없었을 법한 결정을 내렸기를 기대할 때 그렇다. (중략) 나쁜 역사서는 충분한 근거도 없는 현상을 대충 일반화하고, 부합하지 않는 거북한 사실들은 무시해버린다."라고 말하며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런 역사서가 주는 교훈은 너무 단순하거나 그저 틀린 것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는 마거릿 맥밀런의 주장을 훌륭히 뒷받침한다.

 

<산중에서 길을 물었더니>는 이 책이 꽤나 오랫동안 책장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게 눈에 밟힌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 시대 큰스님 33인과의 만남'이라는 부제 중, '33'이라는 숫자에 끌려서 집어 들었다. 이미 앞에 읽었던 책에서 33명의 인물을 만난 후 다시 33명의 인물과 만나는 건 결과가 좋든 나쁘든 어쨌거나 흥미로운 일일 것 같았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괜찮았다. 기본적으로 33명의 인물을 한 권의 책에서 만난다는 건 태생적으로 독자의 기억력과 책에서 다루는 인물과의 깊이 있는 만남에 부담을 주는 일이지만, 이 책의 경우에는 그런 문제를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33명의 스님들이 각각 하시는 말씀은 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뒤섞이기 일쑤였지만 이에 대해서는ㅡ스님들도 종종 말씀하시듯ㅡ"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잠언으로 넘어갈 수 있고, 또 이 책은 저자가 직접 스님들을 찾아뵌 후 그 생생한 가르침을 기록한 것으로 짧은 글 속에도 스님들의 큰 자취가 물씬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간 과장하면 이 책을 처음 읽어나가기 시작했을 때는 마치 스님이 옆에서 죽비소리로 정신을 깨우쳐주는 듯한 상쾌한 느낌도 있었는데, 이제 다만 사실을 말하면 스님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는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뒤로 갈수록 심드렁해지는 느낌도 있었다. 내 생각에 이런 책은 매일 조금씩, 특히 아침에 읽고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안중근 선생의 말씀을 실감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데, 불행히도 현대인의 아침은 지나치게 바빠서 입안의 가시보다는 위장의 공복을 신경 쓰기에도 벅찬 게 문제다. 뭐, 물론 대체로 비겁한 변명이지만.

 

그런데 책 속에서 다른 스님들이 모두 어느 종교를 믿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달리 한 스님이 "역사적으로 볼 때 국가적으로 불교를 권장했을 때 외침을 잘 막아냈었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게 이채로웠다(이 부분을 정확히 외우지는 못하지만 비슷한 의미였던 건 분명하다). 나는 이 비슷한 이야기를 몇 년 전 어느 목사님께서 하셨던 걸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불교를 믿는 나라치고 잘 사는 나라가 없다."라는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두 이야기 속에서 추출해낼 수 있는 공통점이 '아집'과 '독선'과 '편견'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어디까지나 지극히 단편적인 이야기에 따른 섣부른 비약일 뿐이지만, 나는 위의 두 분을 작은 방안에 모셔두고 서로의 종교에 대해 끝장토론을 하게 하여 어떤 합의에 이른 후에야 비로소 방문을 열고나올 수 있게 한다면 그 방문이 결코 쉬이 열리지 않으리라는 데 기꺼이 500원쯤은 걸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TV로 고스란히 보여준다면 충실한 시청자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역시나 궁금해서라도 한 번씩 채널을 돌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물론, 이때 내가 궁금한 건 누가 더 깊은 신앙심을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얕은 인내심과 관용을 보여주는냐 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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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세계사 - 개정판 거꾸로 읽는 책 3
유시민 지음 / 푸른나무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여름, 나를 충격과 공포 속으로 밀어 넣었던 책은 여름을 노리고 본격적으로 쏟아진 스릴러물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해당 책은 '역사'에 관한 책으로, '거꾸로 읽는 세계사'라는 제목이 다소 도발적이기는 해도 이런 '역사' 관련 책이 스릴러물보다 더한 '충격'과 '공포'를 내게 안기리라고는 감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건 사실 공평하지는 않다. 지난 여름은커녕 최근 몇 년간을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내가 스릴러물을 읽은 기억은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스릴러물보다 이 책, 정확하게 말해서 이 책에서 핵과 관련해 인용한 내용 중의 일부가 정녕 두려웠던 건, 거기에는 주인공도 악당도 없이 다만 온통 끔찍한 피해자만 가득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간과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사설이 길었는데, 1945년 8월 6일과 9일, 각각 한 발씩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의 상황을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인용해 놓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전차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B29 두 대가 꽤 높은 상공에서 북동족으로 날아갔다.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다음 순간 번쩍! 맹렬한 빛이었다. 순간 그 자리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 다음은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손발을 움직여 보니 움직여졌다. "아아, 살았구나, 살았다." 일어나 히로시마역 쪽으로 달렸다. 여기저기 길에서 사람들이 나왔는데, 큰길에는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유령처럼 양손을 흔들흔들하는 반라의 여자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도 넘쳐흘렀다. 눈도 귀도 입도 녹아서 얼굴이 수박같이 되었다. 여기저기를 헤메다가 마침내 해안에 도착, 거기서 군인들에게 물을 받아 마시고 멍석 위에 누웠다. 그러자 구토가 나 아침에 먹은 걸을 토하고 잠들었다. ......화상을 입은 얼굴에서는 고름과 피와 땀이 흘렀다. 왼쪽 귀가 녹아내려 구더기가 끓고, 매일 학질 걸린 것처럼 고열이 났다. ......그해말 귀국했는데, 윤곽만 남은 자식의 모습에 부모님은 피를 토하듯 우셨다. (한국인 원폭피해자 협회장 신영수 씨의 증언) (p357~358)

 

물론 일본에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두 번의 폭격이 단순히 '폭격'이라는 무심한 단어 이상의 끔찍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너무나도 유유히 떨어진 단 두 개의 물체가 누군가의 터전을 망가뜨리고,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고, 누군가의 현재와 미래 모두를 짓밟았으리라는 것도 전혀 상상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종종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참혹한 짐작과 상상을 마주하는 대신에 단순한 인과론과 일방의 정의에 의한 단선적 서술을 목격하곤 한다. 위의 사례를 가지고 말하자면,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을 앞세워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유린한 일본의 기도를 분쇄하고 끝내 일본 천황의 입에서 "항복"이라는 말을 내뱉게 한 것이 바로 두 발의 원자폭탄이었다고 말하곤 끝내는 식이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두 발의 폭탄은 독립을 알리는 축포와도 같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단선적인 레일 위의 역사를 탈피한다는 점에서 무척 가치가 있는 책이다. 자본주의는 지구상 유일의 성공한 체제이고,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우방이며,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는 우리의 대척점에 서있다는 등의 일방적인 역사적 시각에 대항하여, 이 책은 외려 '거꾸로' 역사를 바라봄으로써 그 이면을 깊이 들여다보며 되묻는다. 과연 세계를 전쟁의 공포로 밀어 넣었던 나치즘은 단지 한 미치광이 전쟁광의 광기였을 뿐인지, 베트남 전쟁은 그저 한국이 우방국가 미국을 도와 치른 정의로운 전쟁이었을 뿐인지, 말콤X는 다만 백인을 증오하는 극렬분자였을 뿐인지, 핵은 인류의 진보를 표상하는 위대한 발명품일 뿐인지 등.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어쩌면 우리가 꽤 오랫동안 유일한 것이라고 배워왔던 객관식 답안과는 다를 수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역사사용설명서>에서 마거릿 맥밀런이 말했듯, "집단의 입맛에 맞는 억측에 이의를 제기하는 역사는 고통스럽"기 마련이고, 때문에 이 책에서 말하는 역사도 입맛에 맞기보다는 오히려 쓴맛을 남긴다. 나치즘을 한 개인의 탓이 아닌 자본주의의 비민주적 속성에서 끌어내고, "벗을 돕는 것이 목적이 아닌"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의 추한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을 대면하고, 말콤X에게서 사회에 깊이 박힌 편견과 증오의 뿌리를 확인하고, 핵이 지닌 그 피아를 가리지 않는 파멸적 힘의 공포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일은 확실히 즐겁고 유쾌한 일과는 거리가 멀다. 악당과 영웅이 등장하고, 적과 친구가 분명하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단선적 역사에 비해 "이의를 제기하는 역사"는 좀 더 복잡, 난해하며 당혹스럽기도 하다. "저는 노벨처럼 새로운 발견에서 인간성이 악보다도 선을 많이 얻는다고 믿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라는 퀴리의 인간에 대한 믿음도 '거꾸로 읽는' 역사 속에서 위태로워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역사는 현세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쓰여서는 안 되고, 인간사가 복잡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쓰여야 한다."라고 마거릿 맥밀런이 단언하듯이, 이 책이 '거꾸로 읽는' 목적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역사를 지향하는 데에 있다. 그로 인해 이 책이 보여주는 역사 속에서 인류의 선함에 대한 신념과 진보에 대한 장밋빛 전망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신뢰와 우방에 대한 믿음은 왕왕 흔들리기도 하지만, 바로 그러한 '복잡성' 속에서 우리가 역사를 더 잘 이해하게 될 수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컨대, '복잡한 인간사'를 포괄한 '역사' 속에서 우리는 오로지 영웅과 친구와 피해자가 아니고 또한 반대로 오로지 악당과 적과 가해자도 아니며, 다만 우리는 그 사이를 복잡하게 오가며 그 모든 입장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의 시각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는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거꾸로 읽는' 이 책의 시각을 배제하면 우리가 보는 역사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일방적이며, 따라서 거기에서 얻을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 존 아널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과거를 방문하는 것은 타국을 방문하는 것과 같다. 거기서는 똑같이 돌아가기도 하고 다르게 돌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우리는 거기서 이른바 '고국'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만약 역사의 의미가 '고국(현재)'을 더 잘 이해하는 데 있다고 동의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역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인정한다면, 이 책이 전하는 "지적 반항"은 더 이상 '반항'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가 "역사를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정치권력이 제멋대로 통제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과 토론을 억압하는 풍토가 사라져 아무도 이 책이 전하는 '지적 반항'에 귀기울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내가 진정 바라는 일"이라고 쓴 지 십수 년이 지난 현재에도, 저자의 바람은 아직도 요원하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2011년도 저물어가는 지금, 이 책의 "지적 반항"이 여전히 유효함을 나 역시 진정 슬프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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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칼링컵 3라운드에서 박주영이 드디어 70여분을 뛰며 아스날 데뷔전을 치렀다. 4부리그 팀을 상대한 걸 감안하면 조금 아쉬운 활약이었을 수도 있지만, 경기 후 뭔가 큰일이라도 났다는 듯이 부정적인 전망을 잔뜩 쏟아내는 기사들을 보노라니 조금 우습기도 하다. 몇몇 기사들의 제목에 따르면, 주전경쟁은커녕 "조커도 위험"해지고 박주영과 교체해서 20여분을 뛴 일본의 신성 미야이치 료와 "희비가 엇갈리고" 기껏해야 "헛심"이나 쓰고 한마디로 "설설기었다"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런 기사들만 보면 이것으로 박주영의 올시즌은 이미 끝난 모양새인 듯하다. 게다가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어느 기사에서는 "박주영 아스널 데뷔전으로 본 여섯 가지 과제들"(http://sports.media.daum.net/worldsoccer/news/breaking/view.html?cateid=100032&newsid=20110922064404789&p=sportalkr)을 친절하게 짚어주기까지 하는데, 내가 보기에 문제는 박주영의 플레이가 아니라 바로 이런 기사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일단 박주영은 "지나치게 긴장했"단다. 그래서 "발바닥으로 긁으려다 볼이 걸리지 않아 역습타이밍을 놓쳤"다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일단 박주영이 지나치게 긴장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두세 번의 볼 컨트롤 실수가 곧 긴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경기에서 뛰는 모든 선수는 지나치게 긴장했다는 말과 같다. 경기 중 누구나 볼 컨트롤 실수는 몇 번씩 하게 마련이니까. 게다가 그런 실수로 박주영이 역습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은 지나치게 '과장된 해석'이다. 실제로 전반전에 있었던 아스널의 가장 좋은 찬스는 박주영의 '사소한' 실수 이후에 만들어졌다. 박주영이 발바닥으로 긁으려다 공이 걸리지 않아 결과적으로 템포를 죽인 후(어차피 대단한 역습 상황도 아니었다) 때맞춰 왼쪽으로 돌아나가는 키어런 깁스에게 패스를 내주고 깁스가 지체 없이 샤마크에게 크로스를 올린 것. 비록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긴 했지만 '과장되게 해석'하자면 활동반경을 넓힌 박주영이 좋은 장면에 기여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기사에 따르면 박주영은 동료들과 동선이 겹쳤는데, 이는 "지난 3년간 자신을 중심으로 뛰어주는 환경에 익숙해진 탓"이란다. 즉, "AS모나코에서는 자기가 볼을 잡고 있으면 동료들이 움직여줬고, 공간으로 뛰어 들어가면 여지없이 패스가 들어왔다"고 하는데, 이건 실로 터무니없는 소리다. AS모나코의 문제는 동료들의 움직임이 부족하고 누군가 공간으로 뛰어 들어가도 적절한 패스가 들어오지 않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AS모나코는 지난 시즌 강등을 당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동료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주고 누군가 공간으로 들어갈 때 여지없이 패스가 들어오는 팀은 많지 않다. 게다가 박주영의 데뷔전 경기를 보면 특히 베냐윤과 겹치는 장면이 꽤 있었는데, 알다시피 베냐윤도 이적생이다. 아니, 실상 그날 경기를 뛴 많은 선수들이 아스널에 익숙한 선수들은 아니다. 당연히 선수들 모두 동료에 익숙해져서 팀워크를 이루는 게 자연스럽지, 기사에서 말하는 대로 오직 박주영만이 "동료의 동선에 자신을 맞춰야" 하는 건 아니다.

박주영이 경기 후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것을 두고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클럽 아스널 소속 선수라면 가끔 고집을 버릴 필요가 있다"며 "일반인들도 회사 다니다 보면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 운운하는 것은 도저히 보아주기 힘들 지경이다. 일반인들이 회사를 다니며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은 대개 회사에서 직접적으로든 혹은 암묵적으로든 시키는 일을 할 때다. 하지만 아스널이 박주영에게 인터뷰에 응하도록 종용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기사 말미에는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을 현장취재 했을 때 한 번도 취재진 인터뷰를 거부하지 않았던 선수로 티에리 앙리를 소개하며 노골적으로 박주영과 비교하는 데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앙리와의 인터뷰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다면 '친절한 앙리씨'를 찾아 미국으로 날아가면 될 뿐 박주영에게 툴툴거릴 일은 아니다. 박주영의 말 한마디를 어떻게든 '기사화'하기 위해 영국에 날아간 기자로서는 '박주영의 취재요청 거절'이 못마땅할 수 있겠지만, "본래 일반인들도 회사 다니다 보면 못마땅한 일을 그저 속으로 감내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당시 앙리는 아스널의 주장직을 맡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장이라면 책임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고, 그런 이유로 박주영도 언론과의 인터뷰를 기피하는 자신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대표팀 주장으로서 대표팀의 공식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클럽" 맨유의 퍼거슨 감독이 영국 BBC가 자신의 셋째 아들인 에이전트 제이슨이 맨유로부터 부당이득을 취했다는 내용의 보도를 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오랫동안 영국 BBC와의 인터뷰를 거절했던 것은 유명하다. 만약 박주영이 언론을 기피한다면 거기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고, 위에 소개한 기사가 하나의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정확한 사실에 입각하여 공정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기사에 투사하여 입맛대로 해석하는 기사들, "사람들은 이런 기사를 '찌라시'라 부르"고, 이런 기사를 좋아할 만한 선수는 드문 법이다.

박주영의 데뷔전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또 그 경기를 통해 그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요컨대 누구도 박주영의 아스널 데뷔전이 그의 미래에 어떤 지대한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언론에서 말하는 것만큼 박주영의 현실과 미래가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 완벽한 예시는 박지성이다. 만약 언론에서 했던 우려와 비판과 부정적 전망의 단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사실에 부합했다면, 아마도 박지성은 이미 맨유에서 수십 번쯤 짐을 싸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박지성은 이제 맨유에서 7시즌 째를 맞고 있다. 물론 박지성의 예가 박주영의 경우에도 정확히 들어맞으리란 법은 없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박주영은 이제 겨우 한 경기를 치렀을 뿐이다. 지금 박주영의 데뷔전 이후 쏟아지는 평가들을 과장되게 비유하자면, 돌잡이 때 아기가 돈을 집다 찢어버리자 그 아이가 나중에 전 재산을 모조리 날리게 될 거라고 호들갑스럽게 걱정하는 것과 같다. 설령 아이가 돈을 찢었을지라도 그 아이에게 '과제'를 주고 아이의 미래에 대해 '전망'을 하기에는 일러도 지나치게 이르다.

덧. 박주영의 '기도 세레모니'를 못마땅해 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그의 세레모니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 이유는 종교적인 문제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뭐랄까, 박주영의 기도 세레모니는 축구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너무 일찍 잘라버려서, 고양된 흥분의 지속을 허락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개인의 골 세레모니에 대해 다른 사람이 감놔라 배놔라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아주 조금만 더 뒤로 돌려서 안티팬의 상당수가 돌아설 수 있다면, 박주영으로서도 꽤나 괜찮은 일이 아닐까. 내가 하나님을 잘은 몰라도 그분은 당신의 이름을 조금 더 늦게 부른다고 화를 내실만한 분은 아닌 반면, 나를 포함한 축구팬은 좀 더 성급하고 좀 더 화를 잘 내는 편에 속하니까 말이다. 뭐, 물론 내가 몰라서 그렇지, 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조금만 늦게 불러도 화를 내는 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면, 솔직히 그런 분에게 왜 '기도' 씩이나 해야 하는지는 나로서는 죽을 때까지 모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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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 6월 동안 읽은 책의 권수를 셈해보니 가뿐하게 100권이 넘는다. 100권은 실로 대단한 수치가 아닐 수 없어서 일일이 셈하는 일조차 어려웠을 것 같지만, 사실 이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공은 거의 대부분 만화책 <메이저>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과연 완결이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마냥 의심스러웠는데, 드디어 <메이저>가 78권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이다. 내가 대략 50여 권을 읽다가 말았고, 그 이후에도 30여 권쯤 더 나왔으니 내 기억력으로 대관절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나는 내가 경험한 바 가장 많은 권수를 자랑하는 이 희대의 대작을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이야기는 실로 방대했고 꽤나 역동적이었으며 때로 감동적이었는데, 한편 진부했다. 왠지 도돌이표를 반복하는 듯한 느낌이 작품 스스로를 '진부함'으로 구겨넣는 듯했다.

일명 '천재 열혈 야구소년'인 고로가 리틀 야구단에서 활약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고작 초등학생 꼬마에 불과할지 몰라도 고로가 동료를 얻고, 미숙하기 짝이 없는 동료들이 거듭된 훈련과 실전으로 조금씩 나아지고, 그리하여 최강의 상대와 맞서 싸우는 과정 속에는 우정과 경쟁과 열정이 넘쳐난다. 객관적인 실력 차이가 엄연하기에 투지와 의외성이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동원되고, 하여 매 승부는 치열하기 짝이 없다. <메이저>가 아니라 <열혈 리틀 야구>라는 제목의 만화가 그냥 그렇게 끝난다고 해도 좋다.

그런데 그러한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투수로서 오른쪽 팔을 못 쓰게 된 고로는 이제 왼손 투수로서 고교야구에서의 2막을 열어젖힌다. 야구부조차 없는 학교에서 새로 야구부를 만들어 다시 동료를 얻고, 미숙하기 짝이 없는 동료들이 거듭된 훈련과 실전으로 조금씩 나아지고, 그리하여 최강의 상대와 맞서 싸우는 과정 속에는 우정과 경쟁과 열정이 넘쳐난다. 객관적인 실력 차이가 엄연하기에 투지와 의외성이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동원되고, 하여 매 승부는 치열하기 짝이 없다. <메이저>가 아니라 <열혈 고교 야구>라는 제목의 만화가 그냥 그렇게 끝난다고 해도 좋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열혈 리틀 야구>의 재탕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물론 재탕이라는 평가는 다소 과장된 것이고 실제로 영웅의 성장기라고 할 만한 앞의 두 이야기는 사뭇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편이다. 게다가 순간순간 발휘되는 개그 센스나 꽤 섬세한 그림체도 괜찮고, 무엇보다도 무려 17년 간 78권을 연재한 작가의 집념은 실로 존경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집념이 지나쳐서 작품에도 '집념'이 범람한다는 게 문제다.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차례로 마이너리거, 일본 국가대표, 메이저리거를 거치는 고로의 행보 내내 치열한 승부와 시련이 반복되다 보니 외려 읽는 내가 물릴 지경이다. 특히 언제나 혼돈 상황으로 몰아가는 경기 장면은 투지와 의외성을 강조하다 보니 결국 비슷한 승부가 반복된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정신력으로 버티는 고로와 그런 고로에게서 힘을 얻는 동료들, 마지막 순간 반드시 나오는 상대의 실책과 우리 편의 행운의 안타, 누구도 예상 못한ㅡ하지만 <메이저>를 계속 읽다 보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ㅡ의외의 홈런포 등, 이쯤 되면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경기가 없는 게 꼭 내 기억력 탓만은 아니다.

더군다나 경기 외적인 측면에서도 '무리수'라고 할 만한 설정도 적지 않다. 대개의 경우 이런 무리수는 극한의 상황을 부러 강조하는 와중에 튀어나오는 경향이 있는데, 심지어 모든 파고를 넘은 듯하던 마지막에 또 다시 극한의 상황을 조성하는 작가의 '집념'에는 정말 두손 두발 다 들 지경이다. 만약 78권이 완결인 걸 진즉 몰랐다면 아마도 78권이 완결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게 분명하다. 다만 자연스럽기는커녕 지나치게 극적인 상황으로, 사뭇 작위적으로 끌어나가는 것이 분명한 것 같은데도 의외로 그런 상황에서조차 일말의 감동을 안겨주는 저자의 능력은 차라리 감탄스럽긴 하다. 하지만 마침내 대작을 완성시킨 저자의 또 다른 '야구만화'를 기대한다는 말은 예의상으로라도 차마 못하는 건, 솔직히 나는 이 작가가 설령 다른 야구만화를 내어 놓는다고 해도 그게 결국 <메이저-다시보기>가 될 거라고 거의 확신하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이제 <열혈 야구소년 대 분투기>는 그쯤하면 되었으니까.

<메이저> 다음으로 공을 세운 것은 장영훈의 무협소설인 <절대군림>이다. 언제가부터 무협소설의 권수가 늘어나는 게 흔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14권은 상당한 분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절대군림>을 집어 들었던 초반만 해도 나는 이 작품의 넉넉한 분량을 꽤나 흐뭇하게 여겼었다. 한 마디로 그리 선호하지는 않는 '먼치킨'이라고 해도 좋은 작품임에도, 초반의 재미가 기대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책장을 서너 장씩 휙휙 넘길 만큼 재미가 확연히 떨어졌다. '상식 이상'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주인공의 등장은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그들의 범상치 않은 행보 덕에 그럭저럭 납득했지만, 더욱 강한 적이 나타나고 그에 맞추어 주인공의 능력도 계속 급속도로 높이다 보니 <절대군림>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사라져 버렸고 결국 그냥 그렇고 그런, 먹지도 못하는 '먼치킨'만 남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장영훈의 또 다른 작품인 <보표무적>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보표무적>의 경우에도 엄청나게 강한 주인공을 내세운 독특한 전개가 초반에 상당한 재미를 주었지만 뒤로 갈수록 심각하게 강한 적과 역시나 터무니없이 강한 주인공이 부딪치면서 재미가 급격히 떨어졌었다. 물론 재미를 느끼는 부분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장영훈의 무협소설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익살스럽고 소소한 이야기들인데, 이런 부분들이 엄청나게 강한 적과의 싸움에서는 유독 사라지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특히 <절대군림>의 경우에는 중반쯤부터 갑자기 분량을 늘리기 위해 억지로 이야기를 비틀어 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는데, 초반이 무척 흥미로웠던 까닭에 아쉬움이 더욱 컸다.

마지막으로 100권을 독파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도움이 되었던 책은 <심야식당>이었다. 얼핏 보면 어설퍼 보이는 듯한 그림체와 약간은 작위적인 느낌이 드는 이야기들은 내 높은 기대를 충족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었지만 그런 것이야 어쨌든 이 책에는 요리,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비엔나소시지'가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이 '비엔나소시지'로 말할 것 같으면, 엄마의 주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가 언제부턴가 슬며시 우리집 식탁 위에서 사라진 메뉴였는바, 나는 <심야식당>을 보고서 필연적으로 '비엔나소시지'를 떠올렸고 이내 엄마에게 '비엔나소시지'를 주문했다(<심야식당>의 '비엔나소시지'처럼 문어 모양으로 칼집을 내어달라고 했다가 엄마에게 혼났다는 얘기 따위는 굳이 덧붙이지 않기로 하자). 그리하여 오랜만에 먹은 '비엔나소시지'의 맛은 기대만큼 훌륭했으니, 나는 실로 지난 몇 년간 이보다 더 충실한 '독후활동'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계속해서 <심야식당>의 다음권을 보려는 유일한 이유는 '비엔나소시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확실히 '비엔나소시지'에게는 그만한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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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은 살아가면서 결코 할 수 없는 세 가지 일 중 하나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꼽았지만 내 경우에는 완전히 그와 반대다. 나라면 살아가면서 결코 할 수 없는 세 가지 일 중 하나로 "고향을 떠나는 것"을 들 테고, 물론 이때 말하는 '고향'이란 빌 브라이슨이 의미한 것과 마찬가지로 '조국'을 뜻한다. 어쩌다보니 나는 '대한민국'이라고 자칭하는 나라에서 태어났고 그게 싫든 좋든, 나로서는 도저히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덧붙이자면, 내가 살아가면서 결코 할 수 없는 나머지 두 가지는, 책장에 안 읽은 책이 없게 하는 것, 그리고 할 수 없는 일을 단 세 가지로만 꼽는 것이다ㅡ슬프게도 할 수 없는 일은 너무도 많다).

그러나 세상에는 어떤 이유로든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나서 살아가는(혹은 살았었던)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렇기에 그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접하게 된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는 않다. 아니, 그렇기는커녕 외려 '고향'을 떠나는 일이 내게는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는 만큼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삶은 어쩐지 조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데가 있고, 이번에 읽은 세 권의 책이 모두 고향을 떠난(혹은 떠났었던) 이들의 이야기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선택은 꽤나 괜찮았다.

먼저 집어든 책은 요네하라 마리의 <프라하의 소녀시대>.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프라하에서 소녀시대를 보낸 요네하라 마리와 함께 우정을 나누던 소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러한 과거에 대한 회상과 더불어 수십 년 후 요네하라 마리가 그때 그 소녀들을 찾아나서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리차, 아냐, 야스나와 관련된 일화를 풀어내는 요네하라 마리의 기억력과 묘사력은 탁월하며, 소녀들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과의 재회를 위해 홀연 동유럽으로 날아가는 요네하라 마리의 의지는 탄복할 만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건, 이른바 '소녀시대'로 대변되는 '과거'를 대하는 요네하라 마리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러시아어를 배웠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결국 러시아어 동시통역사의 삶으로 이어졌다거나 혹은 남들은 흔히 경험하기 어려운 이국에서의 특별한 우정이 있었기에 수십 년 만에 동유럽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고 하는 단선적 결론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배웠던 가치, 이국에서 나누었던 우정, 역사적인 교훈, 태어난 뿌리에 대한 자각 등, 행간 곳곳에는 '과거'로부터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요네하라 마리의 사고가 여실히 드러나고, 하기에 요네하라 마리가 보여주는 지금의 모습이 오히려 그의 '소녀시대'를 빛나게 만든다고 말해야 옳을 듯하다. 요컨대, '과거'란 단지 지나가 버린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지금 과거를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채색될 수 있는 무엇이며, 이 책은 그점을 증명하는 빛나는 예시인 셈이다.

한편, 그에 비해 영국인인 저자가 프랑스의 프로방스로 옮겨와 산 열두 달의 경험을 풀어낸 <나의 프로방스>에는 무엇보다도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두드러진다. 집을 사는 데 필요한 엄청난 양의 문서, 휴가철이면 우르르 몰려드는 관광객들, 무지막지한 추위, 도무지 끝나지 않는 공사 등, 영국에서의 삶과 비교하면 이상해 보이고 심지어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프로방스에는 가득하지만 저자는 그 모든 것들을 긍정적이고 유쾌한 시각으로 바라볼 줄 안다. 그리고 동시에 멋진 날씨, 맛있는 식사, 여유로운 나날 등, 프로방스에서 주어지는 축복을 마음껏 즐긴다. 어느 곳에서 태어났든 혹은 어느 곳에서 왔든지 상관없이, 다만 지금 살아가는 프로방스의 방식을 존중하고 기꺼이 여기며 프로방스에 동화되는 저자의 모습은 싱싱하면서도 매력적이고 또 즐거워 보인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의 방식의 요체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어느새 우리는 며칠이나 몇 주가 아니라 계절 단위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프로방스가 우리 때문에 본연의 속도를 바꾸지는 않을 테니까.(p352)

그런데 이쯤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새로운 '고향'에서의 삶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는 매우 훌륭하긴 해도 아주 재미있지는 않다. 내가 유독 베베 꼬인 사람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고향에서 맞닥뜨리는 '본연의 속도'란 건 이쪽에서 봤을 때 종종 납득하기 어렵고, 하여 그럴 때 초래되는 엇박자의 이유를 그 '제멋대로의 속도' 탓으로 돌려버리는 건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 아닌가. 쉽게 말해서 새로운 고향에 대해 한바탕 불평을 쏟아내는 일은 꽤나 자연스럽고 특히 흥미로울 수 있다는 얘기고, 내가 아는 한 그런 일을 세상에서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빌 브라이슨이다. "당신은 그 칼럼에서 늘 불평만 늘어놓잖아요."라는 아내의 말에 빌 브라이슨은 이렇게 대꾸한다. "불평하는 게 내 일인걸."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의 선전 이후 빌 브라이슨의 책들을 이른바 '빌 브라이슨 발칙한 시리즈'로 통일해버리는 출판사의 작명센스는 그리 호감이 가는 건 아니고 그 중에서도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이라는 제목은 납득하기도 어렵지만(그런데 이런 제목이 꽤나 부러웠던지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을 출간했던 또 다른 출판사는 이번에 개정판을 내면서 제목을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산책'으로 바꿨다), 나는 내가 이런 제목 따위는 무시하고 이 책을 읽게 된 일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은 일단 '미국학'이라는 단어에서 멈칫하게 되고, 혹 진심으로 '미국학' 따위를 읽을 마음이 있더라도 '발칙한'에서 턱 걸리게 될 것 같지만, 빌 브라이슨은 적어도 이 책에서 '빌 브라이슨'이라는 이름에 대한 독자의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일전에 어느 책에서 빌 브라이슨이 농담처럼 언급한 바 있던, "살아가면서 결코 할 수 없는 세 가지 일 중 하나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철회하면서 시작하는 이 책에서 빌 브라이슨은 흔히 '귀향'이라는 이미지가 품기 쉬운 애틋함과 그리움 그리고 익숙함이라는 감정 대신 불평과 불평 그리고 불평으로 채워 넣어 독자를 즐겁게 한다. 우편 서비스, 컴퓨터 모델 넘버, 영화, 크리스마스 장식, 철자법 검사 프로그램, 관료주의, 가게 계산대, 커피 판매대 등, 그가 불평을 쏟아낼 대상은 '고향' 어디에나 넘쳐나고, 물론 실은 꼭 '고향'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빌 브라이슨은 그저 어쨌거나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여전히 그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언제나 느끼는 바지만 확실히 그는 자신의 '일'에 대단한 재능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빌 브라이슨의 대꾸에 "불평하는 게 당신이 하는 전부죠."라고 맞받아친 아내의 말처럼 이 책이 오직 불평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나로서도 오직 불평만을 쏟아내며, 이런 불평쟁이의 책을 읽는 일 따위는 진즉 관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거지 같은 불평 뒤에 자리한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탁월한 유머 감각 그리고 의외의 따뜻함이 진정 그의 불평을 돋보이게 만든다. 익숙하기보다는 종종 낯설고, 그립고 애틋하기보다는 때때로 당혹스러운, 하여 도처에 불평해야 할 것이 넘쳐나는 그의 '조국' 미국이 그래도 괜찮은 나라 같고 또한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 만한 곳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불평 뒤에 자리한 빌 브라이슨의 그와 같은 진면목이 충분히 독자의 마음으로 전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거나 빌 브라이슨이 '불평'을 '일'로 삼는 괴짜인 건 분명하고, 다시 찾은 '고향'에서 불평을 한껏 쏟아내는 게 그리 훌륭한 태도라고 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심지어 고등학교 졸업식 축사의 연설마저도 즐겁게 읽을 수 있게 만드는, 더군다나 의외로 가슴에 와 닿는 내용을 담을 줄 아는 빌 브라이슨의 불평 가득한 글이 대단히 매력적인 것도 분명할 것이며, 모르긴 몰라도 이런 불평쟁이라면 그의 고향도 그의 불평을 즐거이 반겨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과히 틀리지는 않으리라. 그러니 아무쪼록 "만약 당신이 빌 브라이슨만큼 언어 구사에 능하고, 위트 있고, 역사와 통계에 관심이 많고, 웃음이 터져 나올 시점을 정확히 아는 작가를 알고 계시다면 내게도 알려주시기 바란다."라는, 책 뒤표지에 언급된 <시카고 트리뷴>의 짤막한 리뷰 내용처럼, 그런 작가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도 꼭 알려주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1. 가끔은 여러분이 살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가 이런 고마운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어찌나 적은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엄청난 행운에 의해 이 우주의 모든 물질들 중 아주 적은 일부가 모여서 여러분이 생겨났고, 여러분이 존재하는 특권을 누리는 기간은 영겁의 세월 중 극히 짧은 한순간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은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다시 무(無)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여러분은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 놀라운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하든 여러분을 태어나게 한 이 놀라운 성취에 조금이나마 비견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축하합니다. 잘 태어나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특별합니다.
2. 그러나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지구상에는 50억 명의 다른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 모두가 여러분만큼이나 중요하고 여러분만큼이나 신의 위대한 계획 속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의 배려를 고마워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피자를 배달하고, 여러분이 구입한 식료품을 봉투에 담아주고, 여러분이 어지럽힌 모텔 방을 청소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지 않다면 지금부터라도 그런 습관을 들이십시오. (p297-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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