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에 저자의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는 데에는 대체로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해당 책이 다름 아닌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해당 책에서 풀어내는 내용과 관련된 분야에서 저자가 상당한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는 경우이다. 이러한 구분 하에서 보자면 지난 7월과 8월, 이 두 달 동안에 읽었던 책 중에서 <존 듀어든의 거침없는 한국축구>와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그리고 <진산 무협 단편집>은 모두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존 듀어든은 한국 축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따뜻한 애정이 공존하는 칼럼으로 한국 축구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저자이고, 빌 브라이슨은 약간의 과장과 주관이 개입되어 있는 표현이긴 해도 "세계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행기를 쓰는" 저자이며, 진산은 상당한 이견의 여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단편 무협'에 가장 어울리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들을 읽은 건 순전히 그 세 사람의 이름 덕택이었던 셈이다.

존 듀어든이 '한국축구'에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는 점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축구의 종주국이라는 영국에서 날아온 파란 눈의 사람이 하필 '한국축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데 대해 까닭모를 반감이 생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글을 지속적으로 읽어보다 보면 그가 '한국축구'에 대해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고, 그래서 그의 날선 비판들에조차도 고마운 마음이 들곤 할 정도다. 단적인 증거로, <존 듀어든의 거침없는 한국축구>에는 'K리그'가 한 100번쯤 언급되는데(실제로 세어 보지 못해서 장담은 못하겠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그 정도쯤 되는 것 같다), 과연 세상의 그 어느 책에서 'K리그'라는 단어를 이렇게까지 많이 볼 수 있겠는가. 이쯤 되면 'K리그'를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데에 이 책을 강제로 읽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진정 애정 어린 비판을 보여주는 존 듀어든의 글이 축구팬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부 (높은 자리에 있는) 축구관련 종사자들에게는 그의 글이 그리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서 유감스럽다. 얼마 전 울산의 김호곤 감독은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해 존 듀어든의 칼럼에 화가 나서는 그를 고소할 생각까지 했었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런 일화는 존 듀어든의 날카로운 펜에 대응하는 일부 축구인들의 고압적인 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존 듀어든의 글이 언제나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존 듀어든의 비판에 대해 김호곤 감독도 얼마든지 지면을 통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음에도, 그런 극단적인 방식을 고려한다는 게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간다). 이와 관련해 존 듀어든은 이 책에서 주목할 만한 지적을 하는데, 이 지적은 축구 종사자들과 언론인 모두 새겨들을 만하며(비단 축구계에만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축구팬들이 그의 글이라면 덮어 놓고 신뢰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쓰지는 말라"는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 왜 안 되는 건가? 그들의 요점은 내가 자신들이 원하는 이야기만 써야 한다는 것인 듯하다.
한국 축구계의 지도자들과 언론이 편안하고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한국 축구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 아니다. 서로를 위해서는 좋을지도 모른다. 감독은 실패하고 바보처럼 행동해도 비난을 받지 않으며, 기자들은 유명 인사들과 꾸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 물론 나는 영국에서 왔기 때문에 그런 것들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측면도 있다. 또한 영국이나 유럽에서 보던 언론과 대표팀의 극한 상황을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비판도 없고 토론도 없는 세상은 감독들에게는 좋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축구 전체를 위해서는 결코 건강한 일이 아니다. (p253)

물론 감독들은 언론에 대한 불만을 터뜨릴 수 있다. 하지만 축구와 언론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지도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언론은 감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팬들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나 역시 한 사람의 언론인으로서 선수, 감독들이 내 기사를 좋아한다면 기분이 괜찮겠지만, 그들이 내 글을 싫어한다고 해도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축구계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내 글을 좋아한다면, 오히려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 것 같다. (p430) 

다른 모든 일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 역시 서서히 잊혀질 것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보기 위해 모인 6만 5000명의 관중들은 맨유와의 친선전이 한국 축구의 위상을 널리 알리는 일인 양 기뻐할 것이고, 언론들은 맨유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기사로 만들어 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내가 한국에서 접한 최악의 사건 중 하나로 기억할 것이다. 내가 비록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축구 팬으로서 이번 일이 흘러온 모습에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던 것은 한국 축구계를 이끌어나가는 힘 있는 분들께서 보여준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태도였던 것 같다. (p453)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은 기대보다는 못했다. 미리 밝혀두자면, 나는 지난 해 알라딘의 '올해의 저자' 투표에서 기꺼이 빌 브라이슨에게 표를 던진 바 있는데, 이것은 내가 빌 브라이슨의 책을 좋아한다는 것과 그렇기에 빌 브라이슨의 책에 대한 기대치가 조금 높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정당하게 말하자면, 빌 브라이슨의 영국 여행기도 나쁘지는 않았다. 초반에는 약간 지루한 느낌도 있었고 그가 즐겨하는 일 중 하나인 언어유희도 별로 재미있지 않았지만, 뒤로 갈수록 책이 흥미로워졌다. 그가 사물과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와 각 도시들을 여행하는 방식에 익숙해질수록 그의 이야기에 집중이 되기 시작했고, 특히 커다란 나라에서 온 그가 지난 20여 년간 산, 작은 섬나라 영국이 지닌 매력들을 하나하나 짚어줄 때쯤엔-그의 책을 읽으면 언제나 그러했듯-결국 때로는 악의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독설을 서슴지 않는 이 저자를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여전히 과장과 허풍을 일삼고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살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로 이따금 드러나는 그의 통찰과 따뜻함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는 것도.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읽은 빌 브라이슨의 다른 책들과 비교하면 역시 이 책이 상대적으로 더 지루하고 집중이 안 되었던 건 사실인데, 여기에는 이 번역된 책 자체의 책임도 없지 않다. 이를테면 '-하건대'를 '-하건데'로, '개중에는'과 '대개'를 마치 '게'가 좋아 미치겠다는 듯한 태도로 각각 '게 중에는'과 '대게'로 고집하고 있는 걸 우선 지적할 수 있겠다('대게'는 족히 수십 번쯤 쓰이는데, 책에서는 단 한 번도 그게 '큰 게'를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지 않는다). 물론, '게 중에는' 역시 '대게'가 최고라는 데에 동의하거니와, '개'보다는 '게'를 사랑하는 누군가의 취향도 존중받아야 할 뿐더러, 무엇보다도 나는 모든 책이 국어맞춤법을 완벽하게 준수해야 마땅하다고 목소리를 높일 생각도 없다(물론 가급적 그러면 좋겠지만, 그러기에 국어는 지나치게 까다롭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그러나 아주 약간의 주의만 기울이면 충분히 고칠 수 있는 오류들이 지나치게 빈번하게 나타나는 책에서 정확하고 매끄럽게 번역된 문장들이 이어질 거라고 믿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라고는 믿을 수 있다. 그리고 아닌 게 아니라, 과연 실제로도 그랬다.

내가 집중하며 읽은 책 후반부에서 나는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널따란 부지가 있었다."나 "입김을 크게 불어 휙 날려버리고 건물들이 있다."와 같은 명백히 틀린 문장들을 더러 발견했고, 그러자 새삼 앞부분을 집중하지 못하고 읽었던 건 순전히 앞부분에 모호하고 틀린 문장들이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오류가 심각하거나 완전히 엉망진창이라거나 할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가벼이 볼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이 책의 관계자 분들은 이 책이 몇 번씩 거듭해서 읽을 만큼 재미있지는 않아서 그냥 한 번 보는 것으로 대충 교정을 갈음하고는 서둘러 출간을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적어도 만약 나라면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거듭 읽고 싶을 만큼 흥미진진한 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뜻이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게 이 책의 유감스러운 점이다.

너무 부정적인 이야기만 한 것 같아서 조금 긍정적인 이야기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만약 누군가 혹 이 책을 통해 빌 브라이슨을 처음 접한다면, 부디 너무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책은 빌 브라이슨의 매력을 드러내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 이 책으로 빌 브라이슨과 만나자마자 곧 안녕이라고 작별을 고하는 것은 조금 이르다는 말이다. 특히 누군가 이 책을 중간쯤 읽다가 집어던져버렸다면, 다시 집어 들기를 권하는 바이다. 뒤로 갈수록 이 책은 좀 더 재미있어질 뿐더러, 책의 후반부에는 실생활에 굉장히 도움이 될 법한 대화가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대화로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매번 불필요한 메뉴를 권하는 점원의 입을 막게 하는 것은 물론, 종교나 신문을 강권하는 사람에게도 응용하여 써먹을 수 있는 기가 막힌 기술이다. 다만,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과감성이 필요해 보이는데, 다행히 평생 한 번이라도 이 대화를 써먹을 수 있다면 삶이 좀 더 흥미진진해질 것 같을 정도다. 사설이 길었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다음에 인용하는 대목 하나만으로도 빌 브라이슨의 이 책은 용서받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책이 나쁘지 않은 이유가 단지 이것 하나만이 아님도 물론이다).

마침내 커피 한 잔과 에그 맥머핀을 주문하는데 내 주문을 받던 젊은 남자가 물었다.
"애플 턴오버 파이도 함께 드시겠어요?"
나는 잠깐 동안 질문 당사자를 쳐다보았다.
"죄송한데, 내가 머리에 총 맞은 사람처럼 보이오?"
"네?"
"내 말이 틀린 데가 있으면 틀렸다고 이야기를 해요. 내가 애플 턴오버 파이를 주문했었던가요?"
"어..., 아니세요."
"그럼 내가 애플파이를 먹고 싶어 하면서도 주문을 못하는 지적장애로 보이오?"
"아니. 저희는 그저 모든 손님들께 그런 질문을 하라고 지시를 받았어요."
"애든버러에 있는 사람들은 다 머리를 다쳤답니까?"
"저희는 그냥 손님들께 더 여쭈어 보라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뭐, 좋아요. 나는 애플파이를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주문을 안 했죠. 자, 그럼 이번엔 또 어떤 음식을 안 먹을 건지가 궁금한가요?" (p388-389)
 

<진산 무협 단편집 -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는 특히나 진산이라는 이름이 아니었다면 집어 들기 어려운 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 권은 기본이고, 언젠가부터 대여섯 권도 훌쩍 넘기기가 예사인 무협이라는 장르에서 '단편 무협'은 쉽게 받아들여지는 형태는 아니다. 하지만 그 '단편 무협'을 '진산'이 썼다면 얘기가 조금은 달라진다. 이 '단편 무협집'이 거의 유일무이한 경우이니 구체적인 비교는 어렵겠지만, 나는 '단편 무협'에 가장 어울리는 작가는 단연코 진산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이 책은 유려하고 서정적인 진산의 스타일이 매력적으로 드러나는 책이었다. 단지 몇몇 단편의 경우에 다소 뻔한 결말이 조금 아쉬운 느낌도 있었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역시나 자연스럽고 괜찮은 결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결말이야 어쨌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진산의 글쓰기 솜씨는 정말로 발군이다. 한때 충성스러웠던 무협 팬으로서, 이 멋진 스타일의 '무협 작가'가 현재 무협을 떠나 있다는 게 정녕 아쉽다.

이제까지 언급했던 책들이 모두 작가의 이름을 믿고 읽은 책인 것과 달리, <인간 수컷은 필요없어>는 순전히 흥미를 끄는 제목과 내용 때문에 읽은 책이다. 하지만 정작 책을 읽고 나서는 오히려 책의 저자인 요네하라 마리에게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물론, 책에 대한 만족과 저자에 대한 호감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지만, 요네하라 마리의 경우에는 좀 더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책 속에서 한결같이 느껴지는 따뜻함과 올곧음, 그리고 간간히 드러나는 엄격함과 엉뚱하고 싱그러운 유머감각까지. 이런 매력들이 글로 오롯이 나타난다는 점도 대단하지만, 이런 매력들이 전적으로 요네하라 마리 본인에게서 기인한다는 점은 더욱 대단하다. 설령 책에서 큰 만족을 얻지 못했을지라도 이런 저자에게는 역시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이런 저자의 글이 만족스럽지 않기도 어렵겠지만). 앞으로 요네하라 마리의 다른 책을 만나는 일에 대한 기대가 크다.

끝으로 오타니 준코의 글에 오타니 에이지의 사진을 실은 <다이고로야, 고마워>는 괜찮은 책이었다. 장애를 안고 태어난 원숭이 다이고로가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생애를 있는 힘껏 살아내는 모습도 적지 않은 감흥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특히 그런 다이고로를 가족의 일원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한 가족의 모습은 더욱 감동적이었다. 곧 죽을지 모르는 다이고로를 집으로 데려와 아들로 받아들이는 아버지 오타니 에이지로와, 자신의 몸조차 힘든 와중에도 다이고로에게 애정을 다하는 어머니 오타니 준코, 그리고 장애를 지닌 다이고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주는 아이들. 그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엮어내는, 의지와 애정이 가득한 삶의 모습을 보는 건 실로 마음이 따스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사 읽은 데에는 무엇보다도 반값 할인이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나는 160여 페이지에 큼지막한 글자 크기를 자랑하는 이 책의 본래 가격에 대해서는 조금 불만이 있다. 生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시켜 준 다이고로가 고맙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얇은 책들이 그 몸집을 불릴 요량으로 양장을 입는 건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적어도, 그게 다이고로를 더욱 기리기 위함이나 혹은 다이고로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함이 아닌 한. 

그나저나 연초에 세웠던 세심하고 사려 깊은 내 '독서계획'에 따르면, 본래 지난 7월과 8월에는 각각 <슬픈 미나마타>와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를 읽어야 했다. 하지만 역시나 '계획'이 본래 그렇듯, 6월에 어긋나기 시작한 올해의 '독서계획'은 태풍과 함께 완전히 방향을 틀어버리고 말았다. 이래서야 과연 애초 계획의 절반 수준이나마 달성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데, 이제서야 말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관심을 끄는 책들은 계속해서 늘어나게 마련이니 연초의 '독서계획'이란 건 태생부터 사뭇 미련하고 융통성 없는 어리석은 짓에 다름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다고 이제부터 '독서계획'을 대놓고 무시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역시 '독서계획'은 그저 거들 뿐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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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그런 의도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헤아려 보니 월드컵이 임박했던 5월과 월드컵이 개막했던 6월, 이 두 달 동안에는 특히 축구 관련 서적을 주로 읽었던 것 같다. 사놓고 계속 쌓아두기만 했던 <축구장을 보호하라>를 마침내 읽었고, 꽤 만만치 않은 값을 치르고 <월드컵 1930-2010>을 사 보았으며, 계속해서 관심만 두고 있던 <일본인과 천황>(이 책은 사실 '축구'라는 카테고리로만 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도 드디어 사 보았다. 게다가 장원재의 <유럽축구에 길을 묻다>는 심지어 두 권을 사기까지 했으니ㅡ물론 그 이유는 이 책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들고 간 이 책을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 가방에 넣은 채 홀연히 작별을 고하고 돌아 온데다, 다행히 책값이 비싸지 않았기 때문이지만ㅡ확실히 이런 자세는 월드컵을 맞이하는 축구팬으로서 매우 적절했다고 자평할 만하다(와중에 박상의 야구소설 <말이 되냐>를 읽은 것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일단 물량으로 압도하는 형국이니 지난 두 달 간 읽은 몇 안 되는 책들 중에서 탁월했던 건 역시 축구 관련 서적으로, 정윤수의 <축구장을 보호하라>와 헤르만 악셀의 <월드컵 1930-2010>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정윤수의 책 같은 경우에는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 책이 월드컵을 비판적으로 다루지 않을까 짐작했었는데, 정작 이 책은 몇몇 월드컵의 비순수성을 지적하기는 해도 대체로 여전히 계속되는 월드컵의 순수성을 예찬하고 있었고, 놀랍게도 이것은 기존의 내 마음마저 바꾸어버렸다. 덕분에 나는 월드컵을 꽤나 못마땅해 하면서도 은근히 즐기는 태도에서 벗어나, 월드컵을 마음껏 즐기되 비판의 시선을 놓지 않는 쪽으로 선회했고, 이것은 결국 같은 말인 것 같지만 의외로 월드컵이 훨씬 즐거워지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알려준 건, '월드컵은 일단 즐길 만한 세계적인 이벤트다'라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 책은 2002년 월드컵을 다양한 문화적,역사적 관점으로 해석해내며 2002년 월드컵을 다채롭고 풍부하게 재생해 놓고 있기도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풍성한 수사에 대한 약간의 강박관념과 환원주의적 오류(비록 저자가 이를 경계함에도 불구하고)에 대한 일말의 의구심이 느껴지는 듯도 했지만, 감히 말하건대 2002년 월드컵에 관한 책들 중에서는 세계를 둘러봐도 이보다 더 나은 책을 찾기란 어렵지 않을까 싶다.

한편, <축구장을 보호하라>가 다양한 스펙트럼과 세심히 쓴 듯한 문장으로 즐거움을 주었다면, <월드컵 1930-2010>은 흥미로운 시선과 재기 넘치는 그림으로 즐거움을 주었다. 특히 이 책의 출판사에서는 책을 사자마자 곧 책 가격이 떨어진 걸 조금 억울해 하던 내게, 알지도 못했던 이벤트에 당첨되었다며 '박지성 사인본'으로 한 권을 더 주겠다고 연락을 해 와서 나를 기쁘게 했는데, 사실을 말하면 나는 박지성 사인본을 받게 되는 것과 책값이 2분의 1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점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욱 마음에 드는 건지는 명확하게 말할 수가 없다. 이건 실제로 사인본 책을 받아봐야 알겠는데, 불행히도 이후 출판사에서는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가타부타 말이 없고, 들리는 소식으로는 박지성이 한국에 들어왔다지만 그게 내가 받을 책에 사인을 해주기 위한 목적은 아닌 것 같으니, 과연 내가 해답을 얻을 수 있을지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출판사에서는 박지성의 사인을 이제부터 어떻게 받아내야 할지를 고민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는데, 만약 정말로 그렇다고 한다면 아무쪼록 그 일에 행운이 따르기를 바랄 뿐이다.

장원재의 <유럽축구에 길을 묻다>는 책보다도 저자가 <100분 토론>에 나온 것이 더욱 인상 깊었다. 장원재는 지난 6월 10일, "다시 월드컵! '광장'을 말하다"를 주제로 한 <100분 토론>에서 패널로 출연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어퍼컷>의 저자인 정희준이 함께 출연하면서 나는 당시 근자에 읽었던 두 책의 저자의 모습과 육성을 TV로 확인하는 셈이 되었다. 그런데 장원재는 정희준과 나란히 앉은 진중권의 반대편에 앉아서 꽤나 유감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진중권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반대편에 앉은 사람은 '언제나' 악당이었다(고 내가 생각한다)는 게 문제다. 그 토론에서 장원재는 악당의 역할을 주도적으로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역시 악당이군 하는 생각이 드는 발언을 하기도 했고, 덕분에 장원재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사라져버렸다. 물론 저자의 정치적 성향(그것도 극히 부분적인)으로 저자의 책을 예단하는 것이 정당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건 이후에 장원재의 신간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가 나온 걸 알았을 때 나는 간단히 그 책을 외면했다. 뿐만 아니라, 실은 알라딘에서는 그 책의 저자를 '정원재'라고 잘못 표기해 놓고 있었는데, 나는 이걸 결코 신고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인지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다!). 장원재든 정원재든 이제 아무래도 좋으니까 말이다(하지만 내가 앞으로 장원재의 책을 절대로 보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까지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그는 제법 많은 축구 관련 서적의 저자다).

마지막으로, <맛의 달인>의 원작자인 카리야 테츠가 쓴 <일본인과 천황>은 솔직히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사실 이 책은 예전에 축구잡지에 소개되어 관심을 가졌었는데, 줄거리만 보자면 '축구 관련 서적'이라고 할 수도 있고, 더욱이 일단은 '만화책'이다. 간략한 줄거리를 말하자면, 일본 도토 대학 축구부의 스미카와 준이 전 일본 대학축구대회 결승전에서 국가 제창과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고 있는데, 실제로 책을 읽어보면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주인공도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들의 역할은 주로 천황제의 해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교 이사장의 말을 '들어' 주는 것으로, 가령 이사장이 "'교육칙어가 일본인을 속박해왔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마치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리라도 들은 듯이 깜짝 놀라서는 앵무새처럼 이사장의 말을 되풀이한다. 또한 질문은 언제나 이사장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질문만 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럴 바에야 그냥 이사장이 혼자 질문하고 혼자 답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언뜻 들기도 했다. 물론, 기실 이 책의 목적은 천황제의 해악에 대해 저자가 이사장의 입을 빌어 비판하는 것이고, 그러니 이런 방식인 건 한편으로 당연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개성 없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스토리가 그닥 중요하지 않은 만화에 재미를 기대하기란 확실히 어려운 것도 또한 당연하다. 더욱이 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일본의 역사적 사건과 제도 등에 관련된 각주들도 대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만화책'이 맞는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내용의 진정성을 따지자면 이 책은 한 번 읽어 볼만한 책임에는 틀림없다. 일본의 젊은 세대가 천황제의 위험성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바라고 썼다는 이 책은 천황제와 관련해서 중요한 점들을 거듭 짚어주면서 최대한 독자들이 쉽게 그리고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애를 쓰고 있는 게 느껴진다(그럼에도 그게 쉽지 않다고 느끼는 건 독자 탓도 있겠지만). 더욱이 기본적으로는 이 책의 대상이 당연히 일본인들, 특히 천황제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일본의 현 젊은 세대들이겠지만, 저자의 비판은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과 관련해서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가령, 사회 내에 만연한 엄격하고 기계적인 상하관계라든지, 인맥과 학연이 무시 못 할 힘으로 작용한다든지, 혹은 천황으로 대변되는 어떤 '상징'을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을 손쉽게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든지 등의 모습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만은 않거니와, 특히 '천황'을 '국가'로 대치해서 보자면 결국 그러한 시스템과 제도가 '개인'의 건강하고 자유로운 의식과 행동을 의도적으로 통제한다는 점에서 이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추천사에서 김규항이 지적하듯이, "천황제의 특징은 천황을 신처럼 떠받들면서도 정작 천황이 누구인가는 상관이 없다는 데 있고", 따라서 "우리 안의 천황제"를 직시하고 경계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의문 하나는 왜 천황제가 없는 우리나라가 '천황제'의 해악을 그대로 답습하는가가 아닐까 싶은데, 이와 관련해서는 <포포투>의 한 구절을 곱씹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온 <포포투>는 이제 내게 마치 밥상의 김치와 비슷하고, 그런 이유로 <포포투>를 보았다고 굳이 언급하는 건 오늘 점심에 김치를 먹었다고 말하는 것만큼 불필요한 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포포투>를 읽고 나서도 가끔은 그 안의 몇몇 대목을 굳이 어딘가에 옮겨 적어 놓고 싶은 때가 있고, 바로 지금도 그러하다. <포포투>에 칼럼을 연재하는 사이먼 쿠퍼는 '왜 잉글랜드를 응원하나'라는 제하의 칼럼(<포포투> 6월호)에서 케냐의 작가 은구기와 티옹오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는데, 그 작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나 또한 그의 말로 이 글을 끝내는 게 꽤나 적절할 듯하다. 물론, 그의 말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우리 안의 천황제"를 마주하는 데 있어서 티옹오의 말이 중요한 밑그림은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정복이란 피지배자가 지배자의 가치에 대해 칭송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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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 무협 단편집 -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
진산 지음 / 파란미디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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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8할이 축구였다면, 나머지 2할 중 1할은 필히 무협지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무료하고 지루한 수많은 시간들, 특히 고등학교 시절의 답답하고 억압된 시간 속에서 무협지는 구원이자 해방이었고, 무엇보다도 즐거움이었다. 더욱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주옥같은 가르침은 언제나 남의 나라 언어나 복잡한 공식 속이 아니라, 오직 무협지 속에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가령 "언제나 3푼은 감추어 두어라."라거나 "안심하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라거나, 혹은 "칼에는 흑도 백도 없다."라는 가르침은 실로 얼마나 소중한 것들인가. 당시에 배웠던 그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었더라면, 아마도 내가 지금쯤 조그만 방파의 수장이 되는 일쯤은 우습지도 않았으리라.

어쨌거나 그렇듯 당시에 무협지의 세계를 신봉했던, 나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이 서로 이곳저곳의 책방에서 무협지를 빌려와서 돌려 읽는, 일종의 '무협 계'를 형성한 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빌려온 무협지를 대체로 작가의 이름으로 통칭했고, 그것으로 그날 하루의 운이 결정되곤 했다. 이를테면, 거의 빨간책을 방불케 하는 '와룡강'을 누군가 빌려오면 잠깐의 자극이야 있겠지만 대체로 식상한 하루를 보내야 했고, '금강'이라면 한편 웅장하지만 또 한편으로 전형적인 하루를 보내야 함을 의미했다. 그런가 하면 '설봉'이나 '용대운'을 누군가 빌려올 참이면 그날은 무협의 멋을 제대로 느낄 하루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고, 실험성이 두드러진 '좌백'은 꽤나 독특한 하루를 선사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말하려는 '진산'이라면, 그날의 운은 사뭇 유려하면서도 잔잔하게 흐르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무협작가 '진산'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는 먼저 진산이 무협작가로서는 굉장히 드물게도 여성 작가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런 이유에서인지 진산의 글은 무엇보다도 '유려'하고 '서정'적이다. 진산의 무협 속에는 여타의 무협에서 한결같이 되풀이되곤 했던 '협(俠)'의 이미지가 옅은 대신 '정(情)'의 이미지가 도드라지고, 그 무대는 '도산검림(刀山劍林)'이라기보다는 오히려ㅡ수록된 단편의 제목이기도 한ㅡ'청산녹수(靑山綠水)'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요컨대 진산의 무협은, 칼과 검이 난무하는 호쾌한 영웅의 대서사시가 아니라 산처럼 혹은 물처럼, 그렇듯 변함없거나 혹은 변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이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서정시인 셈이다.

아마도 유일한 무협 단편집일 거라는 이 책에서 '서정시'와 같은 진산의 스타일은 꽤나 맞춤한 듯 어울린다. 물론 단편의 태생적 숙명상, 기인이사들과 뭇 군웅들은 차치하고라도 주인공의 신세내력만 읊는 데에도 상당한 분량이 필요한, 장편이 지닌 광활한 강호의 호쾌한 매력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대신 개인과 가족 그리고 동료 혹은 연인 사이의 내용으로 범위를 좁히고 있는 각 단편은 소박하지만 응축된 테두리 안에서 정갈하고 단정한 이야기들의 매력을 뽐낸다. 그러면서도 가족애와 사랑 그리고 복수와 무인의 자기완성 등,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은 주제들을 십분 녹여내는 솜씨는, 조금 과장하자면 가히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라고 할 만하다. 

더욱이 각 단편들은 다양한 형식으로 각각의 소재를 변주하며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가령, 역사적 소재를 가져와 노랫말과 이야기를 병치시킨다거나('청산녹수'), 한 단체 속 동료를 각기 주인공으로 삼는 연작을 쓴다거나('고기만두' 외 3편), 또는 2인칭 시점을 도입하는('잠자는 꽃') 등, 진산은 소재의 소소함과 형식의 다양함으로 이 단편집을 풍성한 매력으로 채워 넣고 있다. 뿐만 아니라, 책 뒤에 수록된 '작품해설'에서 진산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작품과 이 단편집의 의의에 대해 해설한 것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거니와, 무엇보다도 한 문장을 떠올린 후 그 문장의 마침표에서 다음 문장을 이어나가는 식으로 글을 쓴다는 진산의 글은 실로 유려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저 문장을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선사한다.

다만, 꽤나 오랜만에 강호로 돌아와 '진산'의 무협을 읽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유감스럽게도 여기저기에 발표했던 단편무협을 모은 이 책이 적어도 당분간은 진산의 마지막 무협이 될 것이라고 한다. 진산은 작품해설에서 수록된 단편 '날아가는 칼'의 마지막 문장, "그 후, 어떤 칼도 날지 않는다."가 작별 인사가 되었다고 전하며, 이러한 진산의 결심은 이 책의 제목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에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진산 무협의 팬들은, 역시 책 속 단편 '고기만두'의 마지막 문단을 인용해 이렇게 화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단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그에게 내가 등을 보이면서 떠날 수 있다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소원인 모양이다. 그 불가능이 이렇게 기쁠 수가." 단편 '청산녹수'의 '희'처럼, 그렇게 물처럼 흘러가려는 '진산'이 그 불가능한 소원의 기쁨을 깨달아 언젠가 돌아오기를, 그리하여 어느날 문득 강호를 추억하고 찾아오는 이들을 산처럼 굳건하게 맞아주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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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 지식여행자 5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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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누나가 나를 붙잡고 뭔가에 대해 하소연을 할 때, 이성과 객관을 유지한 채 자못 냉철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결코 현명한 대처법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지난 경험에서 터득한 다분히 훈련된 깨달음으로, 무심코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에 따른 대꾸를 했다가 원망과 탄식이 뒤섞인 한소리를 듣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성을 집어던진 채 마냥 넋놓고만 있어도 곤란하긴 마찬가지여서, 가령 "뭐 그런 어이없는 경우가 다 있대!"랄지 혹은 "그거 정말 웃기는 짬뽕이군!"과 같은, 상대의 말에 감정적으로 완벽히 동조하는 모습을 입으로나마 적극적으로 웅변하지 않는 한, 역시 한소리를 들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한소리'란 이 책의 제목과 사뭇 유사해서, 약간의 변주가 가능하긴 해도 핵심은 언제나 같다. "인간수컷은 필요없어!" 아, 필요 없어서 슬픈 짐승, 그 이름은 인간수컷이어라!

그런데 '인간수컷'이라는 생태계 내의 한 종으로서 내가 그 무용함을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얄밉게도 종종 그 존재 자체만으로 매력을 인정받는 종이 있다. 이견의 여지가 없지는 않겠으나 바로 고양이가 그렇다. 온몸으로 주인에 대해 충성과 애정을 표현하는 개와는 달리, 그 도도한 몸짓과 시크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사랑받는 고양이는 실로 얼마나 축복받은 종인지. 하느님이 있다면 찾아가 한바탕 항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책의 저자인 요네하라 마리의 신빙성 있는 가설에 따르면 고양이는 하느님의 창조물이 아니다. 그녀의 명쾌하고 유쾌한 분석에 따르면, 고양이는 페리네 혹성인들이 지구를 정복할 목적으로 지구인들이 매료될 만한 종으로 변신한 것. 과연 인간이 고양이의 매력에 굴복한 데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이 대목에서 반론을 제기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거나, 덕분에 아직 지구가 정복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인간과 개와 고양이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에서 고양이가 주연인 건, 그러므로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버려진 새끼 고양이 무리와 도리의 조그마한 행동 하나 하나에도 전전긍긍하는 인간, 요네하라 마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양이들을 만나자마자 대책 없이 꼬리를 흔들며 반가움을 표시하고, 그러다가 낯선 존재를 경계하는 고양이에게 얻어맞아 피를 보고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개, 겐도 역시나 주연이라 하기엔 약하다. 사랑과 질투와 반항과 우정에서부터 심지어 가출과 공주병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감정상태와 행동양태를 표출하며 요네하라 마리의 집에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을 선사하는 고양이야말로 이 책의 주연으로 손색이 없고, 그렇듯 손쉽게 집 하나를 점령한 자타공인 서열 1위 고양이 도리는 아마도 자신을 파견한 페리네 혹성에 이렇게 교신을 보냈을 게 틀림없다. "고양이 제176524839호, 임무완료!"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덧붙였을지도. "추신. 멍청한 개 하나 포함"

하지만 비록 이 책에서 고양이에게 주연 자리를 기꺼이 내어 주었을지라도,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의 '행복함'은 무엇보다도 그 모습을 항시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간' 요네하라 마리의 '따뜻함'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콘크리트 바닥 위의 개집에 언제나 개를 묶어두기만 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고, 유기견을 손쉽게 살 처분하는 일본의 유기견 관리 시스템에 날 선 비판을 하기도 하며, 버려진 동물들의 처지에 진심으로 슬퍼하기도 하며, 그러다가는 또 재미있는 발상을 떠올리는 등의 재기 넘치는 유머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 모든 모습들의 기저에는 언제나 따뜻함이 넘치도록 느껴진다. 특히 냉소와는 거리가 먼 요네하라 마리 특유의 유머 감각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나는 일찍이 이처럼 따뜻한 유머가 있을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요네하라 마리를 두고 시인 황인숙은 "의롭고 명민하고 온화하고, 무엇보다도 그 싱싱한 유머감각!"이라고 평하는데, 나는 시인의 언어가 표현하는 그 적확함을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따뜻함은 전염되는 까닭인지, 아니면 요네하라 마리의 시선이 따뜻함만을 바라보는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이 책에서 요네하라 마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따뜻하다. '잡종'이라는 말에 정색하며 '비순종'이라는 말로 정정해주는 수의사가 있고(그는 밥먹듯이 동물병원의 상호를 바꾸는데,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게 사기나 의료사고와 같은 어두운 사건과 연루되어서는 아니다), 요네하라 마리의 고양이들에게서 죽은 자신의 고양이들을 떠올리고는 펑펑 우는 중년의 사내가 있고(다만, 그의 며느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악독한데, 이건 비단 지구 정복을 꿈꾸는 고양이들의 시선에서만이 아니라 같은 인간의 시선에서도 그러하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아픈 고양이들을 위해서 함께 문을 연 동물병원을 찾아나서주는 이웃이 있으며, 불쑥 찾아 온 개에게 기꺼이 먹을 것을 챙겨주며 그 개의 안위를 염려해 주는 친구가 있다. 그리고 동물에 대한, 나아가 생명에 대한 이들의 따뜻함은, 미국인과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이 고양이의 잠든 모습을 보며 "행복해 보여"라고 일제히 말한 것을 굳이 통역해 줄 필요가 없었다고 요네하라 마리가 적고 있듯, 독자에게도 오롯이 전달되는 듯하다.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는 아무 어려움 없이 '따뜻함'과 '행복함'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던 게 그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요네하라 마리가 처음에 그러했던 것처럼, 반려동물과의 필연적인 이별을 겪은 후에 새로운 동물을 입양하는 일은 이제 의식적으로 피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런 두려움이 많이 희석된 것 같다. 동물들과 함께 하는 삶에서 겪는 슬픔과 고달픔과 어떤 소동들의 난처함은 이 책에도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조차도 결국 요네하라 마리의 따뜻한 시선 속에서 행복한 일상으로 귀결될 수 있다고 느끼는 덕분일 테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개와는 함께 살아봤으니 이제는 고양이와 함께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는데,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인간수컷의 위치는 더욱 위험해지겠지만 그 이유가 고양이 때문이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고양이에게 정복되어 모두가 고양이와 함께 사는 지구란,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따뜻하고 행복한 행성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를 테니까. 마치 고양이와 함께 사는 이 책 속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아무튼 뭐 그런 이유로, 나는 고양이의 지구정복 계획을 반대하지 않는다. 아무쪼록, 빠른 페리네 혹성인들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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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축구에 길을 묻다 - 장원재의 한국 축구 산업화 제안 SERI 연구에세이 73
장원재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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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K리그'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최종전을 장식했던 이 카드섹션의 문구는, 그러나 월드컵이 끝나고서 공허한 메아리로만 남았다.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거리 곳곳을 채웠던 수많은 팬들은 월드컵이 끝남과 함께 일상으로 복귀했고, 그 일상에 K리그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또 다시 맞이한 남아공 월드컵. 태생적인 속성상 충성스런 팬들을 보유하지 못해 텅비기 일쑤인 광주 월드컵 경기장에는 스크린에 펼쳐진 대표팀의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모처럼 수만의 관중이 몰렸고, 전국의 거리 곳곳에도 다시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축구를 향한 조촐하고 썰렁하던 응원은 순식간에 다시 장엄하고도 열정적인 응원으로 바뀌어 버렸다.

물론,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축구팬은 아니고, 또한 그들이 모두 축구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아님은 자명하다. 국가 대항전이라는 월드컵의 특성상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는 이들은 그저 '대한민국'이라는 이유만으로 대표팀을 응원하기도 하고, 더욱이 그것이 지구촌 축제라는 점에서 기꺼이 동참하여 즐기기를 원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함께 같은 장소에서 같은 화면을 보며 자유롭고 열정적으로 응원한 신명났던 경험이 사람들을 더욱 불러 모으는 원동력으로 기능한다. 사람들이 바라고 응원하는 건 축구 그 이상의 것이고, 이것은 K리그에서는 얻을 수 없는, 단지 월드컵에서나 가능한 것들이라고 종종 사람들은 단정하곤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K리그와 월드컵이 같은 '축구'를 전제로 하는 것이 명백한 이상, 그러한 섣부른 단정에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꽉 찬 관중석과 열정적인 응원, 팀이 이기고 짐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리는 환희와 슬픔, 상대에 대한 적대적 반응과 경기에 대한 순수한 찬탄, 기실 이 모든 것들이야말로 바로 축구를 묘사하는 '모든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같은 유럽의 일부 축구리그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요컨대, 축구를 향한 열정적인 응원과 열광은 결코 월드컵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K리그의 과제는 분명해지고, 아울러 유럽리그 중에서도 특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모델로 하여 K리그 발전의 길을 모색하는 이 책의 작업도 의의를 지닌다. 많은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들 수 있는 콘텐츠인 축구. 산업화에 따라 하나의 상품으로 기능하는 축구. 이러한 축구를 좀 더 예쁘고 매력적으로 포장하고 거기에 '드라마'라는 소스를 더하여 축구팬들을 만족시키고, 나아가 축구 그 이상의 것을 원하는 잠재적인 '구매자'에게도 어필해야 한다는 건, 월드컵에서 펼쳐졌던 축구 그 이상의 아름다움이 여전히 선연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한 당연한 수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년에 고작 한 달뿐인 그 특별한 환희를 일상으로 끌어오려는 노력이 한국축구의 당면과제이자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가 잘 '알고만' 있다는 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선순환'의 구조를 마련하여 열정을 '일상화'하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알지만, 막상 그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면 여기저기서 난관과 맞닥뜨리게 마련이다. 마냥 유럽의 열정적인 리그를 모델로 하고자 하여도 많은 해법들이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하기에 섣불리 시도하기가 만만치 않다. 가령, 대기업에 기생하는 형태인 현 '기업' 프로팀은 시민을 기반으로 자생하는 '지역' 프로팀으로 가는 것이 백 번 옳겠지만, 매년 적지 않은 적자를 감수하는 각 팀들이 기업의 품에서 벗어나는 순간 재정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또한 몇년 전 거의 모든 내셔널리그 팀들이 K리그로의 승격이 불가하다고 밝힌 데서 보듯, 승강제는 강등하는 팀과 승격하는 팀 모두에게 현실적으로 '부담'이기만 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 책의 제안도 특별히 새삼스러울 것은 없고, 더욱이 '현실적'이라고 하기에도 사실 무리가 있다. 동남아의 선수를 영입해 K리그의 시장을 아시아로 확대하자거나, 대학팀들을 리그로 끌어들여서 K리그와 N리그를 각각 16-16 혹은 그 이상의 숫자로 편제하자는 제안들은 일견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과연 현실적으로 동남아의 선수들이 K리그에서 선호되는 남미와 동유럽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란 회의적이고, 또 16-16 이란 편제는 단지 숫자에 불과할 뿐 그것이 곧 K리그의 경쟁력을 제고시키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우리와는 제반환경이 사뭇 이질적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거의 유일한 모델로 삼은 것도 '현실적인 취사선택'의 범위를 좁히는 요인 중 하나로 지적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언급한 몇몇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논의들은 그 시도 자체로 반가운 내용임에는 틀림이 없다. 비록 이 책이 한국축구가 나아갈 '길'을 명확히 제시한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내용 자체도 소략한 편이지만, 적어도 월드컵의 열광만을 기대하며 가능성이 희박한 월드컵 단독 개최를 위해 눈먼 돈을 쓰려는 한국축구협회나 혹은 단발성 이벤트에 대한 환호만을 기대하며 K리그의 일정까지도 바꿔주며 유럽의 유명팀과의 친선경기를 환영하는 프로축구연맹에 비하면, 이 책의 제안은 차라리 현실을 바꾸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이라고 할 법도 하다. 무엇보다도 4년마다 온탕과 냉탕을 왕복하는 한국축구의 미래를 위한 진지한 고민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노력만큼은 박수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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