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 명절을 쇠러 할머니 댁에 갔다가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갑자기 어쩐 일인지, 시골에 위치한 할머니 댁에도 드디어 MBC ESPN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혹 주말에 할머니 댁에 올 일이 있더라도 EPL을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기뻐했던 것도 잠시, 곧 나는 이번 시즌부터 EPL 중계권이 SBS SPORTS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었다(아, 이런 시방새!). 대단히 불행한 일이지만, 할머니 댁에 SBS SPORTS 채널은 나오지 않았고, 꽤나 불합리하기는 해도 그 실망감은 고스란히 SBS를 향한 분노로 이어졌다(아, 이런 시방새!). 뭐, 물론 그게 SBS의 잘못은 아님을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SBS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시방새'라는 비속어로 종종 통용되어 왔는데, 축구팬이 그 비속어에 진심으로 동감하게 된 것은 SBS SPORTS 채널이 EPL 중계권을 획득하게 되면서 부터가 아닐까 싶다. 물론, EPL을 반드시 MBC ESPN만이 중계해야 되는 것은 아니고, 사실 어떻게 보면 비록 중계권료의 상승을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SBS SPORTS 덕분에 그나마 EPL을 시청할 수 있게 된 국내 축구팬들로서는 오히려 SBS SPORTS에 고마워할 법도 하지만, 드디어 시작된 SBS SPORTS의 EPL 중계가 축구팬의 입맛을 맞춰주지 못하면서 축구팬들의 불만이 고조된 것이다. 그러니까 축구팬의 입장에서 보자면, SBS SPORTS 중계에 실컷 불만을 쏟아내면서도 외면하지 못하는, '적과의 동침'이 시작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SBS SPORTS는 EPL 개막전부터 제대로 헛발질을 했다. 애초에 방송해주기로 했던 경기가 현지상태로 문제가 생기면서 꽤 시간을 그냥 흘려보낸 후 다른 경기로 대체한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SBS SPORTS는 이후에도 이청용의 데뷔전을 놓친다든지, 혹은 이청용이 결장한 리그 하위팀들의 대결을 보내주느라 많은 이슈를 낳았던 맨체스터 시티와 아스날의 경기를 재방송으로 미룬다든지 하는 식으로 헛발질을 거듭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이청용의 2호골이 터진 볼튼의 생중계 대신 일찌감치 박지성의 결장이 예고된 리버풀과 맨유의 경기를 생중계 했는데, 그래놓고 이청용의 2호골이 터지자 어지간히 다급했던지 리버풀과 맨유의 경기 중 그 장면을 잠깐 보여준 것은 물론 자막으로 수차례 이청용의 2호골 경기를 재방송한다고 광고를 해댄 것은 가히 자책골이라 할 만했다. 

물론, SBS SPORTS로서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같은 시간대에 열리는 경기를 일제히 생중계해 줄 수는 없거니와, 또한 축구팬들의 선호가 각기 다른 만큼 모든 축구팬들이 만족할 만한 편성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다수 축구팬들이 느끼기에 기본적으로 SBS SPORTS에는 축구팬들의 대체적인 선호와 현재 EPL의 이슈를 짚어내는 능력 혹은 짚어내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인 듯하다. 특히 다른 것은 공교로운 일로 치부하더라도, 이청용의 2호골을 요란하게 광고해댄 것은 '조삼모사'의 전형으로서 SBS SPORTS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청용의 2호골을 알려주어서 다음에 녹화중계 되는 볼튼 경기의 관심은 한결 높아졌지만, 정작 해당경기에서 이쳥용의 2호골이 터진 초반 이후에는 이청용의 골에 대한 기대가 사그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요컨대 축구팬들은 이쳥용이 2호골을 넣은 이후 약 70분 간 결코 그가 골을 더 넣지 못할 것임을 일치감치 알게 되었다는 뜻이고, 이건 심각한 스포일러가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SBS SPORTS는 이래도 불만을 토하고 저래도 불만을 토해내는 축구팬들의 바람이 마치 하늘의 달을 따달라는 요구처럼 터무니없이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달을 따주는 일은 실상 그렇게 어렵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잠시 달과 관련한 옛날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옛날에 어느 왕국에 어린 공주가 있었는데 그녀는 왕에게 하늘의 달이 예쁘니 그 달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공주를 끔찍이 사랑한 왕은 여러 대신들을 모아놓고 달을 가져올 방도를 논의했으나 신통한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한 신하가 재치를 발휘해 공주에게 가서 직접 물어 보았다. 공주에게 달의 크기를 묻자, 공주는 밤에 자기 방에서 보면 새끼손가락 손톱 크기쯤 된다고 했고 곧 그러한 크기를 지닌, 달 형태의 보석을 만들어 주니 공주가 기뻐했더라는 게 바로 이 이야기의 줄거리다. 

실제로 이 이야기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다거나, 혹은 이야기의 세세한 부분이 조금 잘못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 이야기에서 SBS SPORTS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명확하다. 바로, 잘 모르거나 어렵거든 물어보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교훈을 적용하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SBS SPORTS에게도 유,무형의 이득을 안겨다 줄 수 있다. 이를테면, 방송 편성표가 작성되는 일주일 전에, 일주일 후에 열릴 경기 중 축구팬들이 생중계로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경기를 자사 홈페이지에서 투표를 하도록 한다면 SBS SPORTS는 축구팬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축구팬들의 바람을 직접적으로 들어주면서 축구팬들의 호감을 얻어 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축구중계 중의 자막은ㅡ스포일러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ㅡ이러한 내용을 홍보하는 유용하고도 충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결국, 관건은 달이라도 가져다 달라는 듯한 축구팬들의 바람이 '미션 임파서블'이라기보다는, SBS SPORTS에게 축구팬들을 만족시켜줄 의지와 관심이 과연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물론, SBS SPORTS가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는다 해도 축구팬들이 SBS SPORTS를 외면하기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SBS SPORTS가 '국가대표 스포츠 채널'을 자처하고자 한다면, 혹은 MBC ESPN과의 비교열위에서 도약하고자 한다면, 또한 '시방새'라는 비아냥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축구팬들이 바라는 '달'을 가져다주기 위해 좀 더 관심과 노력을 보여야 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적어도 축구팬들이 바라는 달이 지구에서 약 38만 4400km 떨어진 '진짜' 달이 아닌 한, 저 하늘의 달을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니까 말이다. 뭐, '시방새'가 꼭 마음에 든다면 달리 할 말은 없지만, 모쪼록 '시방새'가 축구팬에게만은 '파랑새'가 되기를 조금쯤 바란다. 그리고 혹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국어사전에 등재되지는 않아 정확하지는 않아도 '시방새'가 별로 칭찬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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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가진 꽤 좋은 습관 중의 하나는, 길을 나설 때면 대개 책 한 권쯤은 챙겨서 나선다는 것이다. 나는 장시간 이동을 해야 될 때 책을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고, 여행을 떠날 때도 짐을 줄이기 위한 노력과는 별개로 책 한 권에 대해서는 그 무게를 문제 삼지 않는 편인데, 이게 꽤 좋은 습관인 이유는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은 주변에 민폐를 끼칠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시끄럽게 떠들 일도 없고, 졸다가 옆사람을 머리로 받을 일도 없다). 그런데 내가 지닌 사소한 문제라면, 그렇게 들고 간 책을 실제로 안 읽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 정도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가져간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내는 것은 언감생심이려니와 심지어 어쩔 때는 들고 간 책을 손에 쥐어보지조차 않을 때도 있을 정도다. 이쯤 되면 대체 이게 웬 바보짓이냐 하겠지만, 다행히도 변명거리는 차고 넘친다. 이를테면, 장시간 이동 중에 지쳐서 잠이 들었다거나, 혹은 주변이 복잡하고 시끄러워서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었다거나, 또는 여행이 너무 근사해서 차마 책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거나, 심지어는 그저 멍때리느라 책을 읽을 수 없었다는 핑계도 가능하다. 책으로서는 유감이겠으나, '책읽기'의 우선순위는 기실 멍때리기보다도 낮다는 얘기다.

눈을 씻고 봐도 '런던스타일'과의 관련성을 찾기가 쉽지 않은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는(원제는 물론 따로 있다) 심지어 유명 작가마저도 '바보짓'을 서슴없이 한다는 데에서 일단 위로가 되는 책이다. 닉 혼비는 매달 책을 사는 일에 돈을 쓰고 휴가기간이면 느긋하게 책을 읽을 계획을 세우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산 책을 다 읽어내지 못해 쌓아두기 일쑤고 휴가기간에는 다른 일 때문에 책을 읽는 일에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지 못한다. 아기가 태어나고, 축구 시즌이 시작되고, 폭탄 테러가 벌어지기도 하는 마당이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책에서 닉 혼비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는 심각한 부부싸움을 할 때도 있었을 테고, 몸이 아픈 날도 있었을 테고, 또 좌절감에 사로잡혀 인생에 대한 회의에 빠진 날도 있었을 테니, 솔직히 그 와중에 살아남은 것만 해도 장하다고 칭찬할 일이다. 그럼 도대체 '책읽기'는 어쩌냐고? 닉 혼비의 입을 빌자면, 명백하게도 책은 레이예스(아스날 축구선수)의 30m 중거리 슛처럼 우리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게 만들지 못한다. 그러니 '책읽기'쯤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서 닉 혼비가 사 놓은 책을 읽지 못했던 이유를 무수히 나열하며 책의 가치를 폄하하려고 하느냐 하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모조리 읽어 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책을 계속해서 사서 쌓아 두거나 혹은 생각만큼 책읽기에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닉 혼비는 '책'과 '책읽기'를 열렬히 찬양하는 쪽이다. 나중에 다시 말을 번복하기는 하지만 그는 책과 다른 문화매체들, 가령 영화나 스포츠 등과 권투 시합이 벌어진다면 30번 중에 29번은 책을 응원할 것이라고 말하며, 책의 가치를 다른 어떤 문화매체보다도 우위에 둔다. 물론 아스날의 중요한 경기가 벌어질 때면 백이면 백, 책을 집어 던지고 경기장을 찾을 것임은 저자도 알고 나도 알지만, 어쩌면 오히려 그런 이유로 책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모든 일에 기꺼이 우선순위를 내주면서도 언제나 변함없이 옆을 지키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닉 혼비는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하긴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심지어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할 때조차도 축구나 연극을 보거나 혹은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가까이 놓여 있는 한 권의 책을 읽는 일은 여전히 충분히 가능한 법이니까 말이다. 뭐 물론, 어디까지나 그럴 마음이 있을 때의 얘기지만.

<빌리버>에 매달 연재된 칼럼을 모은 이 책은,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책 읽기의 즐거움'에 관한 책이다. 닉 혼비가 매달 사거나 얻은 무수히 많은 책들 중에서 선택된, 비교적 적은 수의 책들에 대한 이야기, 어떤 책을 읽은 이유나 혹은 읽지 않은 이유에 대한 이야기, 읽다가 집어 던진 책 혹은 도저히 읽을 만한 기분이 아니라 읽기를 관둔 책에 대한 이야기 등, 닉 혼비는 때로는 진지하고 열정에 가득 차서, 또 때로는 가볍고 경쾌하게, 또 종종 냉소적이고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면서 결국 책에서 얻는 즐거움에 대해 항시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물론, 가끔은 주로 그가 읽은 책을 내가 전혀 몰라서 맥락이 이해가 안 될 때도 있긴 했지만, 그런 이유로 닉 혼비의 조언대로 이 책을 집어던지기에는 역시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쪽이 내게는 더 컸다. 게다가, 가브리엘 자이드의 <너무나 많은 책들>에 나오는, "진정한 교양인이란, 읽지 않은 수천 권의 책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태연자약하게 더 많은 책을 원할 수 있는 이들이다."와 같은, 멋진 구절들을 함께 공유하게 해주는 것은 근사한 덤이다. 알고 보니 닉 혼비는 교양인이었고, 나는 차마 교양인이라고 슬며시 무임승차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책을 들고 갔다가 그냥 들고 온다고 해서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게 어딘가!

이 칼럼을 시작한 이래 적어도 열두 권의 훌륭한 책을 읽었다고 생각된다. ...(중략)... 그리고 앞으로 한 해 동안에도 그만큼을 만나게 될 것이다. 더 빨리 읽는다면, 더 많이 만날 수도 있겠다. 지난 한 해, 여러분들은 책을 읽는 것 말고 그만큼 멋진 경험을 열두 번이나 한 일이 무엇이 있는가? 거짓말은 사절하겠다.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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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와 문화
하재근 지음, 최윤진 그림 / 자인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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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방대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책 한 권에 담아내려는 시도는 일견 무모해 보인다. 적정한 분량의 한 권으로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쳐내다 보면 가지는 물론이고 자칫 줄기마저 앙상하기 이를 데 없게 될 우려가 있고, 그렇다고 책 분량을 한정 없이 늘여 놓으면 그 한 권의 책은 아무도 읽지 않기 십상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태생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만화'라는 형식의 도움을 받아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줄기를 소략하지만 비교적 명쾌하게 드러내는 한편, 종종 가지 끝에 매달린 열매의 풍성함을 맛보이는 데에도 결코 인색하게 굴지 않는다. 물론, 그로 인해 그저 '만화'라고 하기에는 컷과 글자가 적지 않은 편이지만(그렇다고 아주 많지도 않다), 중국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기록된 삼황오제로부터 시작하여 쑨원의 신해혁명에 의해 멸망된 청나라까지를 아우르면서 그 도도한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는 일련의 법칙을 추출해내고, 아울러 중국의 문화 저변에 흐르는 지극히 동양적인 가치와 사상을 짚어내면서도, 이 책은 "무조건 쉽고 재미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대원칙 아래서 시종일관 '만화' 특유의 유머와 재미를 잃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의외로 상당히 유용한 내용과 지적 만족감을 제공하는, 재미있고 유익한 '만화책'이다. 

자신의 이익에만 마음을 쏟고 타인에 대한 해악에 무관심한 사람은 천리(天理)에 의해 관용될 수 없고 인류에 의해 일치되게 증오되어야 합니다. ...... 당신네 나라가 5~6만리나 먼 곳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이익을 목적으로 상인들이 오고 그들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도리로 다시 독물을 사용해 중국 국민을 해치는 것입니까? ...... 질문을 허락한다면 묻겠습니다. 당신의 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ㅡ임칙서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 中ㅡ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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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기억력이 3초라는 금붕어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나는 종종 마치 금붕어라도 된 마냥 온갖 낚시에 번번히 걸려들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내 경우에 이런 일은 대개 인터넷에서 스포츠 기사, 특히 축구 기사를 읽을 때인데, 나는 제목을 보고 그 제목이 기사 내용과 별 상관이 없으리라고 확신하거나, 혹은 독특하고 흥미를 끄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정작 기사 내용은 허섭하기 이를 데 없으리라고 짐작하면서도, 어김없이 그 기사 제목을 클릭하고 곧 후회할 때 그렇게 느끼곤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고 보면 역시, 먹이를 먹은 사실을 잊고 끊임없이 주는 대로 먹이를 받아 먹다가 배가 터져 죽는다는 금붕어와는 사정이 다른 듯도 하지만, 인식하든 못하든 던져주는 떡밥을 언제나 날름날름 받아 먹는다는 데에서 나는 근본적으로 금붕어와 다르지 않은 기분이고, 말할 것도 없이 그 기분은 과히 유쾌한 것이 못된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을 금붕어로 만들 가능성이 높은 많은 기사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그 기사 제목에는 '박지성'이라는 세 글자가 들어갈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박지성 "테베스는 여전히 좋은 친구">라거나 <맨체스터 더비, 박지성의 운명은>이라거나, <웃음 터진 박지성> 등의 식으로. 물론, 개중에는 흥미로운 기사도 있을 테고, 또 그러한 제목이 무조건적으로 잘못됐다는 것도 아니다(언급한 기사 제목은 그저 '박지성'이 들어간 제목을 임의로 나열한 것일 뿐이다). 박지성이 웃음이 터졌고, 테베스는 여전히 박지성의 좋은 친구고, 박지성의 운명을 점쳐 보겠다면야 뭐 어쩌겠는가. 여전히 그런 내용들은 축구팬들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고, 기사의 제목이 실제로 그러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면 문제 삼을 이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이때는 기본적으로, 궁금하지 않으면 안 보면 그뿐이다, 라는 말이 유효할 테니까.

하지만 그야말로 낚시가 분명해 보이는, 그저 축구팬들의 클릭을 얻는 것으로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기사와 그 제목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이런 기사들은 축구팬에게 어떤 유용하고 흥미로운 정보를 전해 주기는커녕, 제목을 보고 기사를 선택한 축구팬들의 기대를 야멸치게 배반하면서 그저 화를 돋우기만 하기 일쑤다. 구체적으로 최근 박지성이 출전시간을 얻는 데 어려움을 겪던 와중에 나온, 소위 낚시성 기사들에 대한 기억을 대충 더듬어 보면, 주중에 A매치가 없었던 덕에 체력을 아낄 수 있었던 박지성이 선발 출전할 확률이 높다던 기사나, 박지성이 지난 경기에 쉬었기에 이번에는 선발 출전할 확률이 높다고 어느 영국 기자의 발언을 소개한 기사나, 또는 이번에야말로 체력을 아낀 박지성이 챔피언스리그에 선발 출전할 것이라고 구단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기사 등을 들 수 있겠다(여기에는 당연히 주관이 개입된다). 물론, 줄곧 박지성이 선발 출전할 것 같다고 설레발을 치던 기사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박지성이 전혀 선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기에 해당 기사가 잘못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러한 기사들이 기사로서의 자격에 미달되는 경우가 많다는 게 잘못이라는 얘기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런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조금 극단적이지만, 가령 맨유의 축구경기를 가위바위보 시합으로, 박지성을 '바위'라고 가정 해보자. 가위바위보의 주체인 퍼거슨 감독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는 '가위'와 '바위'가 있다." 그러면 반드시 어느 기사에는 <퍼거슨, 우리에게는 '바위(박지성)'가 있다>는 제목과 함께, '바위'가 선발 출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담긴다. 그리고 어느 영국인 기자나 구단 관계자가, 퍼거슨 감독이 '바위'를 사용한 적이 드물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드시 '바위'를 낼 것이라고 말하면 또 어김없이 그 발언을 인용한, <'바위(박지성)', 선발 출전 할 듯>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오곤 하는 식이다. 이런 기사들은 당연히 알맹이가 빠져있고, 더욱이 선발 출전에 대한 근거로는 심히 터무니없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사람에게 '바위'가 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바위'를 몇 번 연속으로 안 내었다고 다음번에 꼭 '바위'를 내란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당연히 축구는 가위바위보가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언젠가 반드시 나오게 마련인 '바위'와는 달리, 매번 계속해서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선수가 있는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특히나 누구도 퍼거슨 감독의 의중을 명확히 알 수 없음은, 이미 작년 모스크바에서도 절실히 증명된 바 있다.

개인적으로는 '박지성'의 이름이 들어간 기사의 범람이 그 자체로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불러도 대답 없는 허경영의 이름과는 달리, 박지성의 이름은 그저 한 번 제목에 가져다 쓰는 것만으로도 축구팬에게 상당한 영향력이 있음이 명백하니, 읽히는 것을 지상과제로 하는 기사가 박지성의 이름을 열심히 부르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기사가 읽혀야 의미가 있다고 할 때, 그 기사는 그것을 읽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해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 또한 마땅히 성립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기사의 제목이 때로는 '박지성의 웃음'일 수도 있고, 혹은 '박지성의 친구관계'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박지성의 운명'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정작 '기사'가 그 제목에 걸맞은 내용을 오롯이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저 누군가의 말 한 마디를 따와서 추측으로 일관하는 기사나 혹은 전혀 실제 내용과의 관련성이 적은 기사에 '박지성'의 이름을 마구 갖다 붙인다면, 그것은 축구팬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박지성에게도 대단한 민폐가 아닐 수 없다(나는 박지성의 안티팬 중 최대 30%는 낚시성 기사에 낚여 금붕어가 되는 일을 반복하다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분명 선발 출전하리라는 기사에도 불구하고 박지성이 경기에 나오지 않으면 괜스레 짜증이 나고, 아주 가끔은 그 짜증이 박지성에게로 향할 수 있으니).

명백하게도, 박지성의 이름을 부른다고 건강해지거나 예뻐지거나 살이 빠지거나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경우가 있을 수 있더라도, 아마도 대개는 박지성의 이름을 부르면 즐겁고 행복하고 웃을 수 있는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믿는다. 박지성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박지성의 기사가 있고 그 기사를 읽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고, 이것은 박지성이 여전히 맨유나 혹은 다른 팀에서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감히 박지성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고하노니, 그 좋은 이름을 한낱 떡밥으로 사용하지는 마시기를. 아무리 박지성의 이름의 효능이 막대하다고 해도 금붕어의 기분마저 좋게 해줄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려나 축구팬들이 금붕어는 아닐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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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공 위의 수학자
강석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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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와 야구와 농구는 물론이고 미식축구와 마라톤과 복싱 등, 스포츠라면 딱히 종목을 가리지 않고 두루 섭렵한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스포츠의 순간 순간들을 독자에게 아낌없이 펼쳐 놓는다. 마라도나의 '신의 손'이 현현한 1986년 월드컵의 순간과 최동원이 불멸의 투구를 선보였던 1984년 한국시리즈의 순간, '농구 천재' 허재가 다시 부활한 94-95 농구대잔치 결승전의 순간과 박시헌이 부끄럽지만 안타까운 금메달을 따냈던 1988년 서울올림픽 복싱경기의 순간 등, 저자는 독자들도 기억할 만한 순간이나 혹은 독자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을 놀라운 기억력으로 복원해내며, 그 순간의 감동과 위대함과 슬픔과 분노와 부끄러움과 안타까움과 추함 등의 감정들을 함께 되살려 낸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감정들이 넘쳐났던 스포츠의 순간들을 통해 스포츠의 세계를 예찬하는 한편, 그 속에서 우리 삶에 도움이 될 만한 가치들을 은근슬쩍 일러준다. 내용이 짧게 끊겨 있어서 아쉬운 점이 있지만 대신 속도감 있게 읽히고, 기본적으로 흥미로운 책이다.

* ps.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서 특히 대중의 무책임한 기대를 비판한 대목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이 대목은 최근 2009 로마 수영선수권 대회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인 박태환에게 쏟아진 비판과 충고(?)에 대한 준엄한 반론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여긴다. 그와 관련된 부분을 인용해 놓는다.

도쿄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의 츠브라야는 예상을 뒤엎고 동메달을 목에 거는 이변을 연출했다. 일본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서구 문화에 대한 뿌리깊은 열등감을 감추지 못했던 일본이 한 마라톤 선수의 동메달로 어깨를 쭉 펼 수 있게 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여 올림픽 동메달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수확해낸 것이 츠브라야에게는 비극이었다. 일본 매스컴은 도쿄 올림픽이 끝나기도 전에 '멕시코 올림픽의 금메달을 향하여' 따위의 전형적인 기사를 연일 터뜨리며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츠브라야는 자신의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일본 국민들의 기대를 어깨에 얹고 그 나름으로는 그 기대를 실현시켜보려고 몸부림치다가 결국에는 할복 자살이라는 극한적인 방식으로 그가 도저히 그러한 일을 이루어낼 수 없음을 일본 국민들에게 사과하며 짧은 생애를 끝맺고 말았다. 나는 위와 같은 일은 한 인간에 대한 대중의 무책임한 린치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p14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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