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당장 닥친 눈앞의 현실을 살다가 다른 나라에서 나와 다른 현실을 살아가는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과 얘기를 하면, 확실히 다른 느낌을 받는다. 확실히 외국 현지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지인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만 다른게 아니라 바라보는 방식도 다르다. 그 느낌을 뭐랄까. 지금부터 표현해보려고. 잘 풀어질까 모르겠지만-
요즘은 주변에도 소위 '미국물' 먹었다는 지인들이 많다. 유학/어학연수/여행 뭐 이런저런 이유로 미국을 겪은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국적인 마인드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은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미국에서 산다지만 한인 교회라든가 한인 사회의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한국지향성이 강하고 인터넷이나 언론을 통해 한국의 정치사회적 현실이나 문화에 익숙하다. 그들에게선 별다른 영감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사촌동생은 좀 다르다.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내고, 사춘기 전에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까지도 그 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이 녀석은 녀석의 오빠가 말했듯이 소위 '재미교포'느낌 제대로 나는 유학생이다. 이제 미국생활 7년차에 접어드는 것 같은데, 가끔 페이스북을 통해 얘기하거나 한국에 왔을 때 만나보면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재미교포'라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하고 그 뜻을 몸으로 깨닫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 느낌이란게?
지난 여름이었던 것 같다. 방학때라 한국에 왔길래 한 번 만나서 밥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확실히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때 길게 얘기한 기억으로 이 녀석의 경험과 생각을 풀어보는 편이 낫겠다.
우리나라의 여름은 덥다. 뭐 그래도 마이애미에서 살았던 녀석 말로는 이 정도는 별 것 아니라면서, 날 만나던 그 날 얇은 티셔츠 하나를 입고 왔다. 하지만 그 녀석이 나를 만나 하는 얘기는 좀 웃겼다. 사연인즉, 사실은 자기가 한국 와서도 미국에서 그랬듯이 탱크톱 하나만 입고 다녔단다. 지하철에서 아무리 에어컨을 틀어제껴도 자긴 춥지가 않더라면서. 근데 어느 날 지하철을 탔는데 앉아 계시던 어떤 할머니가 자기를 톡톡 치면서 말하더란다. "학생, 그래도 옷은 입고 다녀야지." 그 말에 충격을 먹어서 자기가 그 반팔 티셔츠를 샀다고. 가슴에 토끼가 그려져 있었던가. 굉장히 심플하고 귀여운 셔츠였다.
서울에서 여름을 겪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도시의 여성들은 여름에도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고 돌아다니지 않는다. 치마를 입고, 구두를 신으며 여름에도 까만색 반팔 원피스 같은 어느 정도 official한 옷을 갖춰입고 다닌다. 화장이야, 말할 것도 없고. 어쨌거나 아무리 편하게 입고 다녀도 반팔티셔츠 하나 달랑 입는 여자들은 찾기 힘들단 말이다. 그 녀석이 그 얘길 했다. 애초에 화장이란 걸 모르거니와 더운 여름에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것도 아닌데 치마에 구두까지 신고 불편해서 어떻게 다니느냐는 말씀. 자기는 그렇게 못 다니겠다고. 하하. 시원하게 말 잘하더라. 한국에 몇 명 없는 친구들도 이제 대학생이 되었는데, 걔네들은 자기랑 그런 면에서 대화가 안 되더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걔네 말로는 그렇게 꾸미고 댕겨야 남자들이 좋아한다느니, 그런건 차치하더라도 일단 밖에 나다닐땐 신경쓰고 다녀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데 도무지 그게 이상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곤 이 나라 외모 따지는 거 정말 심한 것 같다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리고 운동을 좋아하는 녀석은 그 중에서도 마라톤을 한다. 달리기를 하면서 한 번 땀빼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나. 보스턴에 가서도 매년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고 있는데 한국 와 있는 동안 한강 시민공원에서 달리고 있으면 그 중에 운동하는 여자는 자기뿐이라고. 운동하는 여자도 없고 한국 여자들 땀흘리는거 싫어하는 것도 정말 이해가 안 된다며 열심히 말을 이어갔다. 달리기 잘 하려면 배근력도 필요하고 팔근육도 필요해서 복근운동도 한다는데, 내가 보기엔 전체적으로 말라서 빈약하기 이를데 없는 몸으로 무슨 운동을 했다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야기를 듣는 내내 즐겁게 웃고만 있었다.
근데 이 녀석이 내가 아는 미국 유학생 중에 가장 열심히 산다. 바이올린 붙들고 그렇게 씨름하면서 지금 있는 보스턴에있는 콘서바토리에 들어간 것도 중학교 때부터 미국에서 노력한 결실이다. 방학해도 바이올린 감 잃으면 안된다며 한국에 들어와서 꾸준히 들고 씨름하는 것도 그렇고, 마라톤을 한다는 것도 본인이 좋아서 한다고는 그게 결코 쉽고 가벼운 취미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기특함을 넘어 대단하기까지하다.
무엇보다도,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린 이 녀석과 얘기하다보면 내가 사는 이 곳과 다른 '저 곳'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게 된다. 그걸 분석적으로 접근할 깜냥은 안 되지만, 이 녀석의 당당함과, 차이를 고민하고 그것에 대해 '나쁘다'가 아니라 '이상하다'고 표현하는 조심스러움이 녀석이 살고 있는 현실의 색깔을 성실하게 드러내는 듯하다.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더라면 오히려 거북했을지도 모른다. 녀석은 미국에서 유학생이라는 신분이 굉장히 힘든 거라고 말하며 미국 사회의 현실에 대해 냉정하게 이야기하는 부분도 있다. 예컨대, 대학입학과 관련된 부분.
미국 대학에서 international이라고 해서 뽑는 외국 유학생의 비율은 10%쯤 된다나. 대학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어쨌든 쿼터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같은 대학이라도 유학생들끼리의 경쟁이 훨씬 치열하고 힘들단다. 한편으로 미국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우선하는 정책이 있어서, 성적이 조금 모자라도 인종적, 계급적 약자는 대학 가는데도 유리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기 가 보기엔 쟤가 저기 갈 실력이 아닌데 흑인이란 이유로, 히스패닉이란 이유로,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입학허가를 받는 일이 꽤 있다는 것이다. 자기는 어렸을 때만 해도 하버드 예일은 천재들만 들어가는 곳인 줄 알았는데, 이 시스템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또 어처구니없는건 하버드 같은 경우에 부모가 그 대학 출신이면 입학에 유리하다고. 입학지원서에 부모가 해당학교 출신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문항이 있다나. 하여튼 입시제도가 여러가지로 특이하면서도 이상한 구석이 많다는 요지의 이야기도 했다.(녀석은 SAT에서 수학을 만점 받아서 바이올린 전공인데도 일단 바이올린으로는 예일대에 갈 수 없을 것 같아 수학과로 지원했는데, 역시나 떨어졌다고.)
두서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긴 했는데, 어쨌든 이 녀석이랑 얘길 하다보면 눈앞의 현실에만 골몰하던 내가 조금 더 시야를 넓게 확보하는 기분이다. 세계일주를 한 친구랑 대화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뭐랄까, 수학이랑 경제학만 파고들면서 공부할 게 아니라 역사책도 보고 미술책도 보면서 문자로나마 다양한 세계로의 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달까? 그런 면에서 분명 영감을 주는 녀석이다. 어렸을 때 만날 내가 놀려서 울고 삐지던 여동생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컸는지. 나중에 내 결혼식 때 축하연주나 시켜야지 히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