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대하기 직전, 그러니까 2012년 2월에는 많은 시간을 한윤형의 블로그에서 보냈다. 그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와는 7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비교적 젊은 성실한 글쟁이에게 끌렸다. 뭔 글을 읽고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가 균형감 있게 글을 쓴다는 생각을 했다. 입대 후 그런 것들은 한동안 잊혀졌다.

  나중에 그의 블로그가 생각나서 검색해 찾아들어갔을때 그는 누군가와 넷상으로 논쟁중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블로그에 들렀을 때, 블로그는 폐쇄되어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글을 읽을 길이 없어진 셈이다. 그 후 「안티조선운동사」를 사 보았고, 이 젊은 글쟁이에 대한 신뢰가 쌓여갔다.

  그리고 얼마 전 인터넷을 헤집다가 팀블로그 리트머스(blog.ohmynews.com/litmus)를 발견했고, 그 곳에 한윤형의 글이 포함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읽었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부지런히 읽어제꼈고,(그의 글만 읽은 것은 아니다. 이진경의 글들이 가장 이해하기 편했다.) 결국 아흐리만의 과거 글들이 모여있는 사이트를 찾아냈다.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의 저자 김민하가 주인장으로 있는 홈페이지의 한 켠에 그의 글들이 쌓여 있었다. 장장 천삼백몇개가. 읽고, 또 읽었다.(물론 다른 글쟁이들의 글도 함께)

  독해력이 부족한, 혹은 무식한, 혹은 난독증인 독자들의 엉성한 댓글에도 그는 성실(?)하게 답글을 달아주곤 한다.(모든 댓글에 그런건 아니지만.) 나는 한윤형의 글을 읽으면서 독해력이 부족한, 무식한, 혹은 난독증인 독자들의 기분을 이해한다. 그의 글을 읽는다는건 한 편의 논술문을 읽는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많은데, 이런저런 주장과 근거들을 아주 촘촘하게 전개하는 실력은 과거 전국 논술경시대회에서 1등 수상자의 위엄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쨌든 어렵다. 주장과 근거는 때로 생략되기도 하며 그것 자체로 비유적이거나 풍자적인 경우가 많은데, 글쓴이의 필력과 독서력에서 비롯하는 그 많은 문장들을 따라가기가 버겁다. 물론 독해력이 부족하고 무지한 내 탓을 해야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의 문장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뻘댓글을 다는 독자들의 기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행위는 모르겠다. 자신감 탓인가. 가끔은 댓글의 내용도, 댓글에 대한 답글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동의하고 안하고의 수준이 아니라 이게 뭘 가지고 하는 소린지 모르겠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글을 읽든 댓글을 읽든 끝없이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보면 글이라는게 알고 모르고의 문제만도 아니고, 책을 많이 읽고 못읽고의 문제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글에 '수준'이라는게 있다면, 그건 읽어서만은 모르겠고 나도 뭔가 써봐야지만 알 수 있을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읽다보면, 더 잘 읽기 위해서라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가장 쉽게 하는 건 '필사'다. 마음에 드는 글을, 문단을, 문장을 베끼다 보면 읽을 때보다 더 깊이 글에 다가가는 기분이 든다. 뿐만 아니라, 글쓴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글을 썼는지 깨닫게 된다(-_-). 필사에 30분 걸린 글이라면, 지어내는 데만 최소한 곱절의 시간은 걸렸을 것이 아닌가.

  그 다음이 이렇게, '쓰는' 것이다. 내 생각 써내려가기. 부끄럽지만 이 초보적인 글쓰기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라도 할 수밖에 없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내가 쓰는 글에 나의 수준이 드러난다. 그걸 숨기려다보면 코미디가 된다는 게 지금까지의 짧은 내 글쓰기 경험의 교훈이라면 교훈이다. 밑바닥까지 숨김없이 쓰려고 노력해도 은연중에 허세로 흐르는 게 나라는 인간인데, 대놓고 '멋있는 글'따위의 분에 넘치는 시도를 하다보면 얼마나 오글거리는 글이 나올 것인가.(그런 글을 싸지를 능력은 되나?ㅋㅋㅋ)

  그래서 뭐라고 주절주절 지껄이고 써보는데, 그게 숨겨진 허세나 모자람을 진찰하기 위해서는  삶과 결부된 것이어야만 한다.

 

  물론 이따위 말들은 어쩌면 다 거짓말이거나 상황논리일지도 모른다. 실은 요즘 책읽는게 너무 싫어서 인터넷에서 소위 '논객'들의 글을 찾아 읽은 맥락이 있고, 그것도 지쳐서(내공이 후달려서) 뭐라도 지껄이려고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지금 막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씨부리고있는 것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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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eirdhat.net/xe/ahri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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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ohmynews.com/litmus/177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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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들어 '진보의 도덕성'에 대해 문제삼는 논의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정치와 도덕의 분리'와 같은 근대정치학의 기본 전제도 함께. 후마니타스의 대표 박상훈의 글에서 그런 문제의식을 인상적으로 접했던 것 같다. 정치를 도덕과 분리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스틱한 이야기가 충격적이거나 새로운 건 아니다. 아마 나 자신의 삶과 결부된 지점때문에 머릿속을 맴도는 듯.

 

  어머니는 윤리적인 분이다.(전에는 이런 말이 칭찬같았는데 요즘은 그렇지가 않다.) 도덕적이라는 건 예컨대 남을 위하길 마다하지 않으신다든가 아버지와 나에 대한 헌신이 남다르다든가 길가에는 절대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남들에게는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정도가 대한민국 평균보다 높다는 말이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나는 줄곧 정중하고 공손한 예절을 배웠고 남에게도 포용력있게 베푸는 것이 좋은 인생이라 배웠다. 좋은 인생. 그런 것이 몸에 밴채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은 얼마나 기본적인 '상식'인가? 나는 그런 어머니의 교육방침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내 대가리가 크기 전까지는.

  그렇지만 이제 나는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그런 태도를 종종 윤리적 결벽 내지 강박이라고까지 부른다. 과도한 예절이 강제하는 조심성은 삶을 소극적으로 만들고 적극적이어야 할 타이밍을 놓치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타인에 대한 윤리를 과도하게 주장하다보면 집단의 공적인 사안에 대해서 어떤 결정도 쉽게 하지 못하게 된다. 10명이 소속된 동아리가 단 하나의 집단선택만이 가능하다고 할 때, 극단적인 윤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결정도 할 수 없다. 나의 이해가 타인의 이해와 엇갈릴 때,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방법은 내 주장대로 하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다. 이래가지고서야, 무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극단적인 가정이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 중엔 그런 도덕주의의 세례를 받은 친구들이 많았다. 그들은 매사에 신중하고 예의발랐는데,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데는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개인적인 삶에서는 자기억압적인 윤리다. 배려의 윤리가, 자기억압적이고 타인지향적인 윤리로 변해가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남녀 할 것 없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예의없는 인간을 가장 싫어한다.

  왜 나는 열정보다 예절을 먼저 배웠을까? 권력이 윤리를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불만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나는 '예의바름'에 대해 회의적으로 변해갔다. 이타적으로 행동했더니 착취만 당하더라는 세상의 이치는 모두가 서로 돕고사는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예절은 화합에 기여하되, 갈등에 대해 체념을 기르는 윤리다. 군신유의 부자유친 하던 시절에 임금에게 복종하고 아버지에게 복종하며 남편에게 복종하는 윤리가 예절인 것이다. 효나 예와 같은 도덕적 개념들은 내 세대까지만 해도 강박적인 것으로 수용되어왔다.(미디어에서는 패륜사건이 넘쳐나고, 점점 말세가 되어간다고 하지만.)

 

  삶이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어떤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도덕적인 관점으로 그런 것들을 달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성실한 삶에는 마키아벨리스틱한 구석이 있다. 적극적이라는게 얼마간 다른 사람보다는 '나'를 우선한다는 말인만큼. 나부터 살고 보자는 말은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현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한다는 건 도덕적인 존경을 받는다는 것만을 함축하지 않는다. 권력과 재력을 갖춘 사람이 도덕적이기까지 하면 모두에게 칭송받겠지만, 가난한 도덕군자보다는 야심찬 권력가나 재력가가 더 인정받는 사회라는 말이다. 그런 사회에서 그저 열정보다 윤리를 내세워 산다는 건 고분고분 착취당하겠다는 말과 같다.

  뭔가를 이뤘다는 사람들의 삶에는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욕망이 도덕에 우선해왔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후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살아생전 효도하지 못한 것, 앞만 보고 달린 삶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챙겨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모습을 보며 도덕적 가책을 엿보곤 한다.

 

  야심찬 사람은 많아도 예절바른 사람은 드문 시대에 이런 말을 꺼내는 것부터가 시대착오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에는 도덕주의자가 야심가보다 더 안타까운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야심차게 자신의 삶을 꾸려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곤 한다. 아무래도 내가 엄마 인생을 착취해왔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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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고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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