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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을 통제하는 두뇌조직 이상으로 사랑이나 공포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통사고, 질병, 방사능오염, 유전성 질환 등의 이유로 뇌 손상을 입은 그들은 논리와 인지추론능력이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감정을 관장하는 두뇌조직만 손상을 입은 사람들이다. 『사이콜로지컬 사이언스』에 최근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금융, 투자, 도박 같은 일에서 정상적인 사람보다 훨씬 월등한 능력을 발휘한다. 그들은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투자 위험이 매우 높은 상태에서도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베팅에 임할 수 있 때문이다. 실제로 월스트리트에서 이름을 날리는 투자가들 중에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고 한다. 

- 김언수, 『캐비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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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방학이다. 

참 지난한 학기였는데, 이렇게 끝나주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학기 끝나기 4주 전쯤부터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무언가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다는 느낌, 지쳐가고 있고 회복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 

그런 씁쓸한 뒷맛으로 기말고사를 마무리했고, 시험에 대한 욕심은 버린 상태다. 

잘 보고 싶다는 욕심조차 들지 않았던 시험이었다. 

입학 후 3학기동안 치렀던 6번의 시험 중 가장 무의미해보이는 시험이었다. 

중간고사까지도 이렇지 않았다. 

이번 학기부터 철학과 복수전공을 처음 시작했고, 

경제학도 이제 본격적인 전공수업이 시작되었다. 

학기가 시작하면서 의욕이 넘쳤고, 공부도 학회활동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했다. 

철학 전공과, 경제학 전공은 그 스타일상 많이 달랐지만 

괜찮았다. 일이 많다고 다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고 

나로 말미암은 선택이었기에, 힘들어도 즐겁게 해낼 수 있었다. 

그게 중간고사까지였다. 

아니다. 중간고사 이후에도 한동안은 괜찮았다. 

학기가 끝나기 한 달 전, 그 때부터 뭐랄까, 슬럼프같은 게 찾아오기 시작했다. 

원래 슬럼프따위는 믿지 않는 나였는데, 

내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예민해지면서부터는 

슬럼프의 존재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재작년 이래로 이런 경험을 잊은 지 오래 되어서, 

아직도 이런 내 모습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고3 재수 2년동안은 참 익숙했던 내 모습인데 

작년 1년은 이런 자신과는 너무 달랐다. 

원래 어떠하다고 할 만한 '나'의 존재는 없다. 

어쩌면 지난 몇 년의 시간은 그 모든 것들이, 내 열정과 의지의 산물이었으니까. 

하자면 할 수도 있는 내 모습들이었고,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구성해왔다. 

 

그 시간들은 지금 이 순간, 개인사적인 과거가 되어 있다. 

현재는 그것들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으나, 어딘가 모를 전환점에 가까워있다. 

아니, 

달라지지 않고서는 

계기를 마련하지 않고서는 

흐르기를 멈춰버린 내 개인사적 시간인지도. 

 

나는 더 성장할 수 있을까? 

퇴행은 불가능한 나이다. 언젠가는 이것조차도 조심해야 할 때가 오겠지만. 

그러나 정체는 찾아올 수 있다. 단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삶의 궤적. 

나는 그것을 죽음이라 불러왔고 그런 사람들을 살아있다고 보지 않는다. 

아니, 살아 있으되 무의미한 반복을 거듭하는 그런 삶.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의 원리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명제를 '증명'했지만 

삶은 무의미한 반복이 가능하다. 

그런 삶은, 도처에 '좀비'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역사는 흐르지만 어떤 시간의 한가운데에 멈춰있는 삶. 

얼마를 살든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삶이기도 하다. 

 

폭발적인 열정으로 살아왔던 2009년. 

돌이켜보면 슈퍼맨이 따로 없다. 

공부하고 사랑하고 어울리고 

그땐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의 어설픔마저 잊혀질 정도로 

매 순간의 모든 것들이 의욕적으로 충만했다. 

2009년의 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의 내가 생경할 것이다.

 

2009년 하반기부터 2010년 상반기까지는 일기를 별로 쓰지 않았다. 

일기장으로 삶을 지탱했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중요한 변화였다. 

어느덧 시간 가는줄 모르고 자백하듯 써내려갔던 나에 대한 기록이 

귀찮다고까지 생각되었다. 

물론, 이제 다시 일기장을 부여잡은 채 다시 나를 토해내는 시기가 오고 있지만. 

 

2009. 

그 어느때보다 많은 책을 읽었다. 

경제학, 철학, 역사, 문학 

그게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읽었다. 

책을 읽기 위해 지하철로 등하교했고 

약속시간에 사람이 늦어도 책을 붙잡고 있으면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많은 영화를 보았다. 

이 시기 파스빈더와 맞대면하였고, 

영화 관련 교양을 두 개나 들었으며 

고다르, 트뤼포, 리펜슈탈, 스탠리 큐브릭, 폴커 슐렌도르프 등 많은 감독들과 가까워졌고 

시네큐브와 아트하우스 모모를 쉬이 드나들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그런 영화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도 하였고, 

이런 나를 신기하게도 보았으나 전혀 괘념치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삶은 행복을 향해 존재한다는 신념은 깊어져갔다. 

 

많은 공연을 보았다. 

이모 덕분에 대학로에서 무수한 연극들을 접할 수 있었고 

연극열전을 비롯, 많은 지인들에게도 문화생활 전도사가 되었다. 

 

여행도 많이 다녔다. 

홀로 떠나는 정처없는 방황에서부터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에 이르기까지 

7월의 뉴욕은 매력적이었고, 마이애미는 생애 최고의 휴가였다. 

그렇게 달콤한 휴가는 분명, 열심히 살아왔던 일상, 학기에 대한 보상이었으리라. 

 

식사는 거침없었고, 많은 것들이 왕성한 식욕만큼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술도 겁나게 퍼먹었고, 늦게까지, 심지어 밤도 새어 가며 놀았다. 

그러고도 수업은 다 들었고, 피곤한 하루도 보람있게 느껴졌다. 

 

물론, 돌이켜보면 화려했던 그 때에도 삶의 미시적인 방황과 굴곡은 있었지만. 

 

모든 것들이 그냥 기억속에 내멋대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 하나. 

지치지 않고 달려왔던 1년.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잠깐 멈춰 선 것 같은데, 발을 떼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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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에서 동원으로 

제3세계와 반서구적 근대화론으로서의 사회주의 

 

임지현 

 

주변부 사회주의와 주의주의(Voluntarism)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사상사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다양한 형태의 주의주의적 해석이 제3세계 혹은 주변부를 풍미했다는 점이다. 주의주의의 흔적은 러시아의 레닌주의로부터 쿠바와 탄자니아를 거쳐 북한의 주체사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를 겪은 주변부 국가들에서, 주의주의는 단순히 하나의 편향을 넘어 사상적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19세기 말 서유럽 마르크스주의의 주류를 이루었던 실증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 편향과 날카롭게 비교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사회주의 블록에서 소련이 행사한 확고한 헤게모니에도 불구하고, 유독 사상 부문에서는 스탈린의 조야한 실증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제3세계의 토착 혁명가들이 지닌 주의주의를 압도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특별한 고찰을 요구한다. 왜 제3세계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주의주의적 경향이 그토록 완강하게 지속되었는가? 

   이 질문은 복합적인 양상을 드러내는 제3세계의 사회주의적 근대화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사실상 주변부 국가들이 취해 온 사회주의적 근대화는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전형적으로 드러내 준다. 제3세계의 경우 전근대적 구조와 근대적 구조가 병존하는 물적 토대, 민족주의적 선전과 사회주의적 수사의 접합, 반제국주의적 심성을 지닌 토착 엘리트와 제국주의 교육을 받은 근대적 엘리트의 갈등과 결합, 민족의 전통적 원초성에 대한 강조와 근대적 국가 기구의 발전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근대성'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주변부 마르크스주의에서 예외 없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주의주의는 사상사의 측면에서 일단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으로서의 제3세계 근대성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그것은 비단 사상사적 이해를 넘어서, 인간 해방의 정치적 프로젝트로서의 사회주의민중 동원의 이데올로기로 전화된 제3세계 사회주의의 독특한 메커니즘을 밝히는 계기가 된다. 

  마르크스주의를 주의주의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경향은 동아시아의 사회주의 담론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마오주의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객관적 실재에 대해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마르크스의 교리를 틀어 놓았다는 데 있다. 샬리앙(Gerard Chaliand)의 완곡어법을 빌면, "마오주의의 개념들은 스탈린의 개념보다 훨씬 덜 경제주의적이었으며, 인간이라는 요소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베트남의 마르크스주의에서도 주의주의적 요소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북베트남 공산당이 견지한 레닌주의 당 원칙에 대한 주의주의적 해석은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 불가결한 원칙이었다. 주의주의의 철학적 원칙이 가장 명쾌하게 드러나는 것은 1963년 초 '버마 사회주의강령당'(Burma Socialist Program Party)이 공포한 당의 철학 강령이었다. 

 

   "인류 사회는 인간들 스스로가 자신의 행동 법칙에 따라 조직한 인간들의 기관에 불과하다. ...... 인간의 성격과 인간의 발전 법칙이 이해된다면 사회의 성격과 법칙 또한 이해될 수 있다. ...... 인간은 역사의 지배자이자 지도자이다." 

 

  미얀마보다는 시기적으로 늦지만, 주의주의가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북한의 주체사상에 이르러서이다. 1972년 공포된 논문에서 주체사상은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 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 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으로 규정되었다. 또 1982년 발표된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는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과 "사람은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는 두 가지 테제로 구성되어 있다. 

  표현과 강조점의 차이는 인정되지만, 이들 동아시아 사회주의는 한결같이 주의주의에 경도된 모습을 보여 주어 흥미롭다. 그것은 제도적인 측면에서 근대적인 정치적*경제적 기제가 결여된 주변부의 역사적 조건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인간, 즉 노동력이 유일한 가용 자원인 상황에서 주변부 엘리트에게 대중을 동원하는 것 이외의 대안은 사실상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것은 이 과정에서 인민의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한 이론적 수사였을 뿐이다. 제3세계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주의주의적 해석이 경제주의적 편향을 압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물적 토대가 결여된 상황에서 토대를 강조하는 경제주의적 해석은 설 땅이 없는 것이다. 주변부 사회주의의 역사적 합리성은 인민의 의지가 토대를 대체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경제주의의 대기론이나 수동적 태도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서구의 주의주의와도 또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한편 인간 의지에 대한 주의주의적 강조점은 개인의 차원에서 쉽사리 집단의 차원으로 옮겨 가는 경향이 있었다. 대개의 경우 그 집단 의지는 사회주의 공동체의 의지라기보다는 민족의 집단적 의지였다. 노동자 계급이 갓 생성하고 있고 계급 의식조차 미숙한 상황에서, 민족주의는 대중을 동원하는 데 사회주의보다 효율적이었다. 대부분의 인민 대중에게 사회주의의 원칙은 여전히 추상으로만 남아 있었던 반면, 종족, 모국어, 민속, 관습, 피부색 등의 원초적 요소는 일상 생활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실재였다. 주변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서 "민족의 구원"이라는 슬로건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렇게 해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주의주의적 해석에서 도출된 집단 의지는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투쟁하려는 민족의 의지로 전화되었다. '민족적 사회주의'라는 사회주의의 모순어법을 푸는 열쇠는 바로 이 점에있다. 

  요컨대 주변부 사회주의자들은 각국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에 맞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창조적 적용"이라는 구호를 애용했지만, 창조적 적용의 결과는 인간 해방의 정치적 프로젝트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인민 동원의 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나타나곤 했다. 주의주의는 결국 두 개의 기본 개념을 축으로 인민을 동원하는 이데올로기적 기제였다. 식민지 시기의 민족 독립이 그 하나라면, 독립 이후의 근대화 혹은 산업화가 다른 하나였다. 식민지 국면에서 그것은 반제국주의 투쟁에 인민을 동원하여 민족 해방 운동에 기여했다. 반면에 독립 이후에는 근대화 과정에서 정치 엘리트와 민족 관료의 정치 권력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 두 번째 국면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건강한 긴장은 해소되고 민족주의가 사회주의에 승리를 거두었다. 사회주의는 결국 민족주의의 종속적 동맹자로 전락하였다. 

  주변부에 이르러 사회주의는 사실상 노동 대중의 희생을 대가로 선진 자본주의를 따라잡고 추월하려는 급속한 산업화의 발전 전략으로 역사적 내용을 바꾸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주변부 사회주의는 사회 해방이라는 거추장스러운 목표를 내던지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창조적 적용"이라는 슬로건 아래 자신을 민족 해방 운동의 수단이자 근대화를 위한 정치,사회적 공학으로 탈바꿈시켰다. 마르크스주의의 제3세계적 변용이라는 관점에서, 인간 해방의 정치적 프로젝트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대중 동원의 이데올로기로 전화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이 글의 일차적인 목표이다. 물론 "왜"라는 질문이 항상 따라올 것인데,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폭넓은 비교사적 관점에서 제기될 것이다. 

 

두 마리 토끼: 근대화와 민족적 정체성 

 

  자본주의 세계 체제가 유럽을 넘어 본격적으로 그 외연을 넓혀 간 19세기 이래, 주변부 지식인의 고민은 결국 서구적 근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착되었다. 서구 식민주의가 주도하는 세계 체제에 포섭된 이상, 부강한 근대 민족 국가를 수립하고 급속한 근대화를 실현한다는 것은 이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주변부의 주된 국가적, 사회적 목표가 되어버렸다. 독자적인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하면 서구 열강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역사적 목표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그것이 서구의 자본주의적 근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승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근대화에 대한 열망의 이면에는 서구적 근대성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구적 근대성을 본격적으로 회의하고 비판한 주변부 최초의 지식인 집단은 러시아의 슬라브주의자들이었다. 키르예프스키(Ivan Kireevski), 호미아코프(Aleksei Khmiakov) 등으로 대변되는 슬라브주의는 서구의 합리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러시아 민족은 피터 대제의 서구화 정책으로 파괴된 슬라브적인 공동체 생활의 원리로 되돌아가야만 진정한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내면적 진리"를 구현한 "진리와 사상의 유기체"인 러시아 농민 공동체야말로 "외면적 진리"를 추구하는 서구의 원자화된 개인적 합리주의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이들의 신념이었다. 서구적 근대에 대한 슬라브주의자들의 비판적 시각은 게르첸(Aleksander Herzen)이나 체르니셰프스키(Nikolai Chernyshevski)같은 러시아 사회주의의 선구자에게 이어졌다. 이들은 러시아가 서구와 같은 자본주의적 과거의 부담이 없기 때문에 농촌 공동체를 기반으로 합리적인 사회주의적 집단주의로 이행할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을 탐색했다. 이들의 사상은 19세기 후반 비자본주의적 발전 방식을 추구했던 러시아 인민주의자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서구적 근대에 대한 러시아 지식인의 비판은 일반적으로 주변부 지식인이 공유하는 것이었다. 이슬람의 이데올로그들은 물밀듯이 밀려 오는 서구적 근대화에 대한 반명제로서 연대 의식, 상호 부조, 공동체 생활 등을 이슬람의 전통 덕목으로 제시했다. 예컨대 시리아의 무스타파 아스 시바이(Mutafa as-Sibai)는 유럽이 자본주의적 근대의 대안으로 제시한 사회주의가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미 14세기 전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연대'의 원칙은 위대한 예언자가 이미 코란에서 제시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슬람 세계는 자유 경제의 전통과 시장 체제에서 이익을 얻는 사회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모델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약하고, 따라서 자본주의를 건너뛸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들에게 사회주의는, 인민의 복지와 국가의 힘을 최대화하면서 동시에 이슬람 고유의 생활 방식을 영위할 수 있는, 서구적 근대와는 다른 이슬람적 근대를 향한 길이었다. 

  아시아로 눈을 돌려도 서구적 근대에 대한 의식의 갈등 구조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인도 민족주의의 이론적 선구자라 평가되는 반킴찬드라(Bankimchandra Chattopadhyay)는 서구의 과학과 기술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신적 측면에서는 힌두 문명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인도판 '중체서용'론 혹은 '동도서기'론이라 할 그것은 서구적 근대의 과학적 성과를 인도 정신의 바탕 위에서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간디(Mahatma Gandhi)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인도인들이 근대 문명의 겉모습에 현혹된 이상, 독립이 된다고 해도 "영국인이 없는 영국의 지배"가 지속될 것이라고 보았다. 인도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을 소비, 탐욕, 사치, 기계의 노예로 만드는 근대 산업 문명을 거부해야 할 것이었다. 간디가 서구적 근대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운 것은 놀랍게도 사회주의였다. 동양의 제도를 잘 연구하면, 지금까지 세계가 꿈꾸어 온 그 어떤 것보다 더 진정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서구의 사회주의가 대중의 빈곤 문제를 해결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간디에게서 러시아 인민주의의 논리가 느껴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결국 러시아와 이슬람 그리고 인도의 이들 지식인은, 서구의 자본주의적 근대에 대한 대안으로 자신들의 전통 속에서 사회주의적 대안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낭만적 믿음을 공유했다. 그러나 이 낭만적 믿음은 조만간 근대성의 도도한 물결 앞에서 곧 붕괴되고야 말 것이었다. 

  그것은 서구적 근대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오랜 논란 끝에 중국 지식인이 도달한 결론이기도 했다. 이들의 논쟁은 대체로 3단계의 지적 발전 과정을 거쳐 왔다. 전통적 민족주의가 그 발전 과정의 첫 단계에 속한다. 웨이유안으로 대변되는 이들 지식인은 중국의 도덕적, 정치적 원칙이 서구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서구의 기술조차 단지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만 수용할 수 있다는 최소한의 양보 조치가 이들이 양보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곧 서구의 기술을 전근대 사회에 효과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중국 지식인들 자연스럽게 둘째 단계로 이끌었는데, 캉유웨이 등의 개화파 지식인은 중국의 사상과 관습을 버리고 서양의 것을 채택해야 한다며 급진적 서구화를 역설했다. 그것은 근대화를 위해 중국 사회를 완전히 재구성하려는 야심찬 기획이었다. 서구의 군사적, 경제적 압력을 이겨 내기 위해 서구를 모방해야 한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도 이 지점에서였다. 마지막으로는 혁명적 민족주의의 물결이 나타났다. 서구의 지배에 저항하고 중국의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서구적 근대를 모방한 중국의 근대화가 강조되었지만, 민중의 적극적인 참여를 역설했다는 것이 새로운 점이었다. 

  거칠게 말해서 동아시아의 사회주의 운동은 혁명적 민족주의의 마지막 단계에서 역사 무대에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부는 서구적 근대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민족적 정체성을 고수해야 한다는 모순된 과제 앞에서 심각한 자기 분열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대화가 곧 서구화를 의미하는 한, 이들은 서구의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서구 열강이 자신들에게 강요하는 길을 따라야만 하는 역사적 역설에 직면해야만 했다. 그래서 민족적 정체성을 잃는다면, 그것을 위해 근대화를 수행하고자 했던 가장 소중한 목표를 잃는 셈이었다. 그 위험성에 볼구하고 서구의 모델을 모방하여 자신들의 전통 사회를 개혁하고 근대화하는 것 이외의 대안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서구화와 민족적 정체성 사이의 심각한 자기 분열, 그것은 비단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주변부의 혁명적 민족주의자들이 공통으로 부딪친 고민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이 만성적 분열증의 치유책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었을까?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발발한 직후 소비에트 정부는 짜르 러시아와 피억압 민족 사이에 맺은 모든 불평등 조약을 무효화한다고 선언하였다. 레닌의 민족 자결 이론과 더불어 이 선언은 제3세계의 혁명적 민족주의자들에게 볼셰비즘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저개발국 혹은 주변부 자본주의 사회인 소련의 혁명적 실험은, 주변부 사회가 자본주의를 건너뛰어 곧장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들이 사회주의로의 직접적인 이행을 탐색하고 후기의 마르크스가 자수리치(Vera Zasulich)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은 것처럼, 아시아를 포함한 주변부의 혁명적 민족주의자들도 서구적 근대를 부정하는 사회주의로의 직접적인 이행을 끊임없이 모색했던 것이다. 1923년 1월, 죽기 직전 쓴 논문에서 레닌은 러시아가 자본주의를 피하여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길을 제시함으로써, 식민지 및 반식민지 나라에서 민족 발전의 새로운 유형과 역사적 선례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레닌의 이 주장은 자본주의를 뛰어넘겠다는 러시아 인민주의자의 기획이 역사에서 버려진 카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인민주의의 기획은 레닌에 이르러 다시 살아났다. 한 영국 연구자의 표현을 빌면, "레닌은 인민주의의 이론적, 정치적 전통과 결코 단절된 적이 없으며,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다른 인민주의의 틀 속에 동화시킴으로써 플레하노프의 기획을 완성시킨 것이었다." 그것은 볼셰비즘을 비자본주의적 근대화의 길로 파악한 제3세계 혁명가들의 독해가 그리 틀리지 않은 것임을 드러내 준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물적 토대가 결여된 러시아의 상황에서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극히 제한된 것이었다. 그들은 급속한 산업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혁명 소련의 국가적 생존이 당면 문제가 된 상황은 '포위된 요새' 신드롬을 강화시켰으며, 그것은 다시 급속한 산업화를 더욱 절실한 과제로 느끼게 만들었다. 홉스봄의 표현을 빌면, 이로써 볼셰비즘은 "자본주의 발전의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들에서 급속한 경제 발전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전화된 것이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볼셰비즘이 제3세계에서 호소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홉스봄이 지적한 이 이유 때문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은 저개발국 지식인에게 비자본주의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근대화와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만 하는 역사적 딜레마를 일거에 해결해 준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서양 제국주의가 강요하는 자본주의적 방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유한 방식으로 근대화와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다면, 서구 문화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전통을 지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근대화와 민족적 정체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자연히 해결될 것이었다. 볼셰비키의 비자본주의적 발전 전략이 서구가 아닌 비유럽 세계에서 사회주의자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자에게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레닌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가 아시아에 이식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연 최초의 인물이었다"는 슈랍(Stuart Schram)과 당코스(Helene d'Encausse)의 평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서구적인 것'과 '민족적인 것' 사이에서 갈등을 겪던 주변부 지식인에게 사회주의는 사실상 제3의 대안이었다. 주변부 사회에서 그것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한다는 명제와 동일시되었다. 이 점에서 볼셰비즘은 서구적 근대화 방식을 넘어선 민족적 근대화의 대안을 찾던 주변부 지식인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 "사회주의는 전통주의도 아니며 서구화도 아니다"라는 인도의 개혁 사상가 비버카난다(Swami Vivekananda)의 주장에서 그것은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이렇게 해서 서구에 기원을 갖는 사회주의 사상은 유럽의 제국주의 문명을 부정하는 비서구적이며 반서구적인 사상으로 주변부에 착근되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민족적 전통과 유산 속에서 사회주의의 전사를 찾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전근대적 공동체의 유제는 쉽사리 사회주의적 전통으로 비약되었다.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들이 농촌 공동체 미르(Mir)의 전통적 집산주의에서 사회주의의 미래를 보았듯이, 주변부의 혁명적 민족주의자도 민족의 과거에서 집산주의적 전통을 발굴해 내고 그 속에서 사회주의의 전망을 얻고자 하였다. 요컨대 사회주의는 '반서구적 서구화'의 이데올로기로서 주변부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 민족주의가 "산업의 국유화에 기초한 사회주의의 한 형태"라는 스미스(Anthony D. Smith)의 지적은 이 점에서 일정한 타당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반서구적 서구화 혹은 전근대적 근대화 

 

  주변부의 사회주의 운동은 그 출발에서부터 민족주의적 수사와 더불어 나아갔다. 종교 경전이나 민족 문화의 구전된 전통 등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제3세계 사회주의의 이념적 지평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코란에서 사회주의의 원리를 찾고자 했던 이슬람 사회주의자나 불교 경전에서 사회주의의 원칙을 재발견했던 버마의 불교 마르크스주의 등이 그러한 예이다. 또 고대와 중세의 몇몇 사상가가 과학적 사회주의의 선구자라고 평가받기도 했다. 그것은 민족적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뿐만 아니라,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고유한 언어로 사회주의를 전파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근대적 민족 전통과 사회주의가 연결됨으로써, 사회주의는 근대적인 것 못지 않게 고색 창연한 이미지를 띠게 되었다. 요컨대 사회주의는 '전근대적 근대화'로 가는 길이었다. 집산주의적 공동체의 유제와 전통적 연대감을 접목시켜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사실상 사회주의라기보다는 인민주의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주변부의 반제국주의 전선을 형성한 힘의 역학 관계에서 볼 때, 인민주의의 경향은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성장하지 못한 상황에서, 예컨대 말리, 가나, 수단 등의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부족적 혈연 관계 같은 전통적 유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근대적인 국가, 당, 군사 기구 등을 움직이는 원칙은 전근대적이고 자연적인 연줄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며, 근대적인 국가 기구 등은 관료화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이들의 문제는 급진성이 부족했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그 급진적 문제 의식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대적인 기반이 부재한다는 점에 있었다. 그 결과 말과 행동, 슬로건과 현실 사이에 메울 수 없는 큰 간격이 존재했으며, 그것은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퇴조를 촉진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 아프리카 사회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은 결국 부족적 틀에 묶여 있는 농촌 공동체를 동원하는 이념적 기제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혁명의 농민적 뿌리를 강조하고 이슬람의 도덕적 가치를 역설한 알제리 혁명이나 촌락공동체의 전통적인 집산주의와 생산의 근대화를 접목시킨 탄자니아의 우자마(ujamaa) 계획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제3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큰 축을 형성했던 중국 공산주의도 이 점에서 예외는 아닌 듯싶다. 1921년 창당된 중국 공산당은 이미 그 초기부터 첸투슈가 이끄는 서구파와 리타차오의 반서구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서구파는 공산주의야말로 중국 사회를 근대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 반면, 비서구파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에서 자신들의 민족주의적 경향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계기를 발견했다. 이들의 대립은 중국 공산주의의 특색인 '반서구적 서구화'라는 모순 어법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리타차오가 '반서구적'인 것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첸투슈의 초점은 '서구화'에 놓여 있었다. 중국 공산주의의 이념적 지형은 '반서구적인 것'과 '서구화' 사이에서 초점이 어디로 이동하는가에 따라 끊임없이 동요했다. 중국 공산주의의 이념적 동요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1935년 1월 대장정 기간중에 개최된 춘의대회였다. 춘의 대화를 계기로 토착 공산주의를 대변하는 마오쩌둥이 확고하게 당을 장악하였다. 중국 공산주의는 이제 마오의 노선에 따라 움직일 것이었다. 그것은 권력 투쟁에서 마오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개인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 정치국은 코민테른의 결의에 따라 왕밍과 28인의 볼셰비키가 주도한 '진격과 공세'노선이 실패했다고 선언하였다. 마오 노선의 승리는 곧 도시에서의 대규모 대중 공세 전술에 대한 농촌에서의 게릴라 전술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유럽 중심적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에 대한 아시아 중심적 농민 공산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 간부들은 왕밍을 사실상 친러시아파의 두목으로 간주하였다. 왕밍은 러시아인들의 "편협한 민족적 편견"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코민테른의 마누일스키(Dmitry Manuilsky)에게 "극단적 지방주의"라고 호되게 비판받은 리리산을 대신하여 모스크바가 지지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왕밍의 실각과 마오의 집권은 중국 공산주의의 민족적 색채가 진해지고 중국 중심적 성격이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제 중국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축은 사회 해방에서 민족 해방으로 옮겨 갈 것이었다. 

  우선은 마오쩌둥의 개인적 심성 자체가 철저하게 중국적인 것이었다. 1917년 가을, 장사 사범학교 시절, 조국을 구할 수 있는 길에 대한 학생들과의 토론에서 마오가 제시한 해결책은 "량산포의 영웅들을 닮으라"였다. 이것은 단순한 학창 생활의 에피소드로 끝나지 않았다. 이로부터 정확히 10년 뒤 마오는 칭캉샨에 올라 『수호전』의 영웅들과 유사한 모험을 시작하였다. 마오의 집권으로 강화된 중국적 색채는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한층 강화되기에 이르렀다.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전쟁의 국면에서 민족주의적 색채는 강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38년 개최된 제6차 당 중앙위원회 전원총회에서 마오는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우리의 또 다른 임무는 우리의 역사적 유산을 공부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방법을 이용하여 그것을 비판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자부터 쑨원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를 정리하고 귀중한 유산을 취해야 한다. ...... 위대한 중국 민족의 일원이며 민족의 살이자 피인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 중국의 특성과 유리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언급은 단지 추상적인 마르크스주의일 뿐이며 진공 상태의 마르크스주의일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마오는 "계급 투쟁의 이해는 저항전쟁(중일전쟁)의 이해에 종속되어야만 한다"고 못박았다. 이보다 앞서 1937년 미국의 언론인 스메들리(Agnes Smedly)와 가진 인터뷰에서 마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어느 특정 시기에 자신의 관점을 절대 단일한 계급의 이해에만 묶어두지 않으며, 중국 민족의 운명, 더 나아가 영원히 지속되는 민족의 운명에 가장 열정 어린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국,공 연합이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계급 투쟁을 포기하고 단순한 민족주의자로 전환한 것이냐는 스메들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마오의 이 대답은 민족 통일 전선의 문제를 넘어서 그의 민족관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준다. 마오에게 중국 민족은 역사적 현상이 아니라 영원한 운명이었다. 그것은 마오의 민족관이 마르크스주의의 민족 개념으로부터 일탈되어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 공산당이 농민을 대상으로 전개한 민족주의적 선전 또한 당시의 이념적 지형을 잘 드러내 준다. 1937년 이후 계급 투쟁과 소유의 급진적 재분배 같은 낡은 슬로건은 "구국"의 슬로건으로 대체되었다. 동시에 "민족 반역자" 또는 "일본의 앞잡이" 등 농민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는 용어가 농민의 의식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곧 인텔리겐챠에 한정되었던 민족주의를 농민 대중에게 확산시킨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문맹자 당원을 위한 독서 카드 또한 흥미로운 자료가 된다. 가장 쉬운 단계인 "사람. 남자와 여자. 모두 중국 사람이다. 모두 중국을 사랑한다"(카드 1)에서 시작하여, "반동 분자. 반동 분자는 반일 무장 투쟁을 방해한다. 그들은 일본에 반대하는 젊은 남자와 여자를 죽인다"(카드 20)에 이르기까지, 글을 배운다는 것은 곧 민족주의적 감정을 배우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에 고통받던 농민들은 당의 민족주의적 선전에 기꺼이 호응하였다. 농민의 계급 의식에 호소하고자 했던 기왕의 선전이 별 효과를 가져 오지 못한 데 비해, 민족주의적 선전은 농민 대중에게 큰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공산당이 민족주의적 선전을 통해 농민 대중을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동안, 국민당은 여전히 엘리트 민족주의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서구화되고 교육받은 중국 지식인의 민족주의였다. 엘리트 민족주의에 머물러 있는 한, 국민당은 민족주의의 헤게모니를 공산당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국민당에 대한 공산당의 승리는 민족주의에 대한 공산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것이 아니었다. 국민당의 서구 지향적 엘리트 민족주의가 공산당의 중국 중심적 대중 민족주의에 패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었다. 그것은 서구화된 엘리트 집단에 대한 중국적 공산주의자-농민 연합의 승리였다. 가치관과 역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곧 "자본주의적 근대화에 반대하는 근대화론"의 승리이기도 했다. 마오주의의 승리는 곧 서구적인 것을 거부하고 중국적인 것을 중심으로 근대화를 이룩한다는 청조 말기 이래 중국 사상의 주류였던 '반근대성의 근대화론'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자본주의적 근대를 극복이 아니라 거부하였으며 또 민족적인 것을 계급적인 것에 우선하였다는 점에서 사실상 마르크스주의를 물구나무 세운 것이었다. 

  이론적 긴장은 약간 떨어지지만,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도 중국과 유사한 양상을 드러낸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에게 제국주의는 곧 자본주의라는 등식으로 다가왔고, 따라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는 손쉽게 반제국주의 투쟁 이념과 결합되었다. "민족주의는 사회주의의 근원이며,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의 본류"라는 신간회 초대 회장 이상재의 주장에서 그것은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1922년 1월, 혁명 러시아에서 개최된 제1차 '극동노역자대회'에 많은 민족주의 지도자가 참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 대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한 민족주의자김규식은 피압박 민족의 민족주의적 대의를 배반한 미국에 분노를 터뜨리고 볼셰비즘의 도움으로 조선의 독립을 되찾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한 보고서도 이를 잘 말해준다. "고려공산당의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는 독립 달성의 단계적 수단에 불과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아울러 독립을 고취하는 것이 필경 독립 사상을 왕성케 하는 첩경이면서도 보편적인 방법이라는 근본의에 입각해서 계획된 것이다. ...... 공산주의는 결국 일시적인 가면임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결국 주변부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전통에 붙들려 있는 농민 대중을 반제국주의 민족 해방 운동에 동원하려는 이데올로기적 무기였다. 또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이 서구 제국주의의 가치 기준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상황에서,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로서 사회주의는 주변부의 민족주의적 인텔리겐치아에게 중요한 이념적 탈출구였다. 사회주의는 이들에게 민족 해방과 비서구적 사회주의 근대화의 전망을 동시에 제시함으로써, '비서구적 서구화'가 가질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딜레마를 단칼에 해결해 주었다. 주변부 마르크스주의는 이 과정에서 사회 해방을 민족 해방으로 대체했으며, 마르크스주의는 '인간 해방으로서의 근대성'이라는 보편적 자산을 잃게 되었다. 탈식민화는 보편적인 어떤 것에 대한 담론이 아니라 민족적 특수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긍정하는 것이라는 파농(Frantz Fanon)의 확신이 주변부 마르크스주의의 비극을 잘 웅변해 준다. 민족의 영속성을 강조하고 민족적 특수성을 절대화함으로써 주변부 마르크스주의는 결국 자율적 개인을 민족이라는 유기체적 전체에 종속시켰다. 그것은 민족 사회주의의 건설 과정에서 전체적 국가주의로 귀결될 것이었다. 

 

민족 스탈린주의: 해방이 배제된 동원 

 

  스탈린은 1931년 2월 급속한 공업화에 반대하는 세력을 공격한 유명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속도를 늦추는 것은 뒤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뒤쳐지는 자는 짓밟히게 된다. ...... 구러시아 역사의 한 특징은 그 후진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짓밟혔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몽골의 칸, 터키의 총독, 스웨덴의 봉건 영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가, 일본의 귀족에게 짓밟혔다. 러시아는 그 후진성 때문에 즉 군사 문화 정치 산업 농업의 후진성 때문에 모두에게 짓밟혔다. ......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 내지 100년 정도 뒤쳐져 있다. 우리는 10년 내에 이 격차를 따라잡아야 한다. 우리가 해내든가 아니면 굴복하든가 둘 중 하나이다." 

 

  소비에트 정부의 거시적 발전 전략 속에서 제1차 5개년 계획의 의미를 논하며, 스탈린은 선진국의 경제를 따라잡고 추월하는 것이 계획의 주된 목표라고 선언하였다. 이론적으로는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의 '사회주의 본원적 축적론'이, 물적 토대가 허약한 상태에서 발전된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겠다는 스탈린의 이 야심찬 목표를 뒷받침했다. 경제적 자급 자족 체제가 '포위된 요새'로서의 소련에 남겨진 유일한 선택인 상황에서, 스탈린은 농민을 착취하고 농민의 여유 자원을 국가의 수중에 집중함으로써 산업화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프레오브라젠스키의 견해에 동의했다. 실제로는 농민뿐 아니라 노동자도 국가의 착취 대상이었다. 노동조합을 당에 종속시킨 레닌의 조치 이래 노동조합은 당의 명령을 생산 현장에 전달하는 명령의 컨베이어벨트로 전락했다. 스탈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를 시민 사회에 대한 국가의 강압적 지배, 그리고 다시 국가에 대한 당의 강압적 지배라고 정의 내렸다. 사회주의는 이로써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자본주의 선진국의 부와 권력을 따라잡는 것으로 우선회했다. 산업화에 더하여 강압적 지배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핵심 교리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소련이 5개년 계획에서 거둔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은, 민족 해방 운동을 거쳐 독립 이후 근대적인 민족 국가 건설을 우선 목표로 삼고 있던 제3세계의 지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네루(Jawaharlal Nehru)는 인도가 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없는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인도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가 취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 및 속도로 진보를 이룩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영국, 프랑스 혹은 미국의 길을 따라야만 하는가? 목표를 달성하는 데 100년 내지 150년이라는 충분한 시간이 우리에게 있는가? 그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 경우에 우리는 단지 멸망할 뿐이다." 탄자니아에서 농업 사회주의를 주창한 니예레레(Julius Nyerere)는 "그들이 걷는 동안 우리는 뛰어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마오쩌둥이나 김일성도 급속한 산업화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1958년 대약진운동의 슬로건은 "15년 안에 영국을 추월하고 미국을 따라잡자"는 것이었다. 같은 해 김일성은 "우리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가 세 번의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이룩한 것을 두 번의 5개년 계획으로 완성할 수 있다"고 연설했다. 

  독자적 민족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제3세계 사회주의는 이데올로기의 초점을 민족 해방에서 사회주의 자주 경제의 건설이라는 과제로 옮겼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이제 저개발국의 급속한 산업화를 위한 도구로 해석되었다. 저개발국이 당면한 지극히 낮은 경제 발전 수준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결코 성숙한 자본주의 경제의 과실을 이용할 수 없었다. 오히려 혁명 그 자체가 경제 발전의 수단으로 전화해야 했다. 더욱이 대부분의 신생 사회주의 국가는 오랜 기간의 민족 해방 투쟁, 내전, 외국 열강의 간섭 전쟁 등을 겪어야 했으며, 그로 인해 엄청난 인명 손실과 가뜩이나 부족한 물적 자원의 파괴를 감내해야만 했다. 또 이들 대부분은 식민지, 반식민지 혹은 종속 국가였으며, 강력한 전제 왕권 혹은 반봉건적 정체를 역사적 유산으로 물려받고 있었다. 시민 사회의 전통은 거의 전무했으며, 구 봉건 지배 계급과 결탁한 국가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여 인구의 대부분인 농민을 수탈하고 억압하는 국가주의의 정치적 전통이 깊이 뿌리 박고 있었다. 이것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꽃피울 수 없는 조건들이었다. 

  스탈린이 근대화라는 역사적 사명을 달성한 것도 비슷한 조건하에서였다.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기 위한 물적인 전제 조건이 결여된 상황에서는 토대가 상부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 정권이라는 상부 구조가 사회주의에 걸맞는 생산력을 구축해야만 했다. 그것은 마르스크의 생각을 전적으로 뒤집어 놓는 실험이었다. 이 실험의 성공을 위해서 스탈린은 대중 동원과 국가에 의한 자본 축적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채택했다. 사실상 스탈린주의 근대화의 성공 여부는 볼셰비키들이 경제 발전과 근대화라는 목표를 위해 대중은 동원하는 데 얼마나 성공할 수 있는가에 달린 것이었다. "볼셰비키가 부수지 못할 요새는 없다"는 슬로건 아래 진행된 스타하노프(Stakhanov) 캠페인은 그들이 대중 동원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예이다. 스탈린 주도의 급속한 산업화는 강제적 산업화의 집단화를 축으로 진행되었지만, 대중이 사회주의적 근대화의 대의명분에 전적으로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수동적 복종만을 요구하는 전근대적 전제정과 비교할 때, 스탈린주의의 강제적 산업화는 그 목표에 맞추어 사회를 재편성하는 데 혁명적 메커니즘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대중의 적극적인 참여와 동원이 없었다면, 사실상 사회주의적 근대화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1929년부터 러시아에서는 중공업과 군수 산업의 눈부신 성장이 있었다. 스탈린은 중공업이 근대화 계획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그것만이 군사적 방어의 우선적인 필요성을 보장해 주고, 또 때가 되면 경제의 다른 부문도 중공업의 혜택을 입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중공업의 급속한 발전은 노동자와 농민 등 러시아 대중에게 엄청난 대가를 요구했다. 식료품을 비롯한 소비재 생산이 중공업의 성장 목표에 종속됨으로써, 인민의 생활 수준은 급속한 경제 성장만큼이나 악화됐다.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 도시 주민의 육류 소비량은 1928년의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혁명 소련 도시민의 빵 소비량은 1900년 제정 러시아 도시민의 반 정도에 불과했다. 비단 스탈린뿐만 아니라 볼셰비키의 사회주의 건설 노선의 핵심은 '노동의 군사화'에 있었다. 그것은 총력전 체제에서 독일이 실험한 전시 경제의 모델을 따른 것이었다. "산업화의 성공은 모두 군사적 방식이 적용될 수 있는 부문에서 일어났다"는 카우츠키(Karl Kautsky)의 지적은 이 점에서 타당하다. 소련의 사회주의가 "삶 전체를 전반적으로 단순화하는 데 기반한 참호 군대식 사회주의"라는 마르토프(Martov)의 비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노동을 군사화하는 방식으로 대중을 동원하는 데에는 정치적 억압과 공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스탈린주의는 인민에게 레닌이 모든 당원에게 요구했던 바로 그러한 종류의 헌신과 규율을 요구했다. 그것은 인민의 자발적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 했다. 스탈린식 근대화에는 공포 정치뿐만 아니라 인민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스타하노프 캠페인에서 보듯이, 스탈린주의의 잔인한 성공은 당이 간부와 평당원 그리고 지지자에게 요구했던 희생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자본주의 열강의 간섭에 맞서 싸우고 행복한 미래를 실현한다는 약속은 실제로 그것에 동감하는 적지 않은 '호모 소비에티쿠스'(Homo Sovieticus)를 양산해 냈다. 사하로프(Andrei Sakharov)와 같은 지식인조차 체제의 요구에 최선을 다하고 스탈린이 죽었을 때는 애도의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악화되는 생활 수준을 감내하면서도 기꺼이 최선의 노동력을 국가적 목표에 제공하는 프로메테우스적 노동 영웅의 이미지는, 푸코의 용어를 빌면 사회주의 '규율 권력'의 산물이었다. 

  국가적 목표에 대한 인민의 자발적인 헌신을 끌어 내는 데는 사회주의적 청사진뿐 아니라 민족주의적 선전이 크게 작용했다. 특히 1924년 '일국 사회주의' 테제가 정립된 이래, 당은 러시아 인민 대중에 뿌리 박은 반서구주의적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공산주의적 메시아주의와 전통적인 러시아 메시아주의를 결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코민테른이 '제3의 로마'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소련은 사회주의 모국으로 승격되었다. 볼셰비즘은 전통적인 러시아 국가주의와 결합되었으며, 인민 대중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그들을 동원하고 국가적 목표의 달성을 요구하였다. 동시에 물질적 생활 수준을 높여 줄 것을 요구하는 인민의 요구는 미국식 생활 방식을 동경하는 비애국적 요구라고 간단히 무시되었다. 소련의 사회주의적 근대화 자체가 이미 '반서구적 서구화'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던 것이다. 

  제3세계의 신생국들이 '반서구적 서구화'의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수용했을 때 주의주의적 경향은 더 강화되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창조적 적용 또는 마르크스주의의 토착화"라는 슬로건 아래 손쉽게 정당화되었다. 제3세계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인정했지만, 때때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모두 인간의 세속적이고 물적인 이해만을 추구하고 더 높은 인간의 정신적 욕구를 무시한다고 비판되기도 하였다. 서구 사회주의는 서구 문명의 물질주의적 편견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되었으며, 동방의 정신전 인민은 그들 고유의 민족 사회주의를 발전시켜야만 할 것이었다. 주변부 사회주의의 이와 같은 반물질주의적 편향은 주의주의적 해석의 철학적 근거를 제공했다. 

  마오쩌둥의 경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주의주의적 해석은 사회주의 건설의 추진력이었다. 그는 "사상 개혁이야말로...... 우리 나라의 철저한 민주 변혁과 점진적 산업화의 가장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1958~1960년 사이의 대약진운동에서 고조된 마오의 주의주의는 기술적 능력보다는 정치적 열의를, 그리고 합리적 경제 계획보다는 대중 동원을 강조했다. 인민공사 체제는 부족한 기계 대신 인간의 노동력을 조직하여 농촌의 발전을 가속화하려는 시도였다. 마오는 혁명적 열정과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이 기술과 물자의 부족을 보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김일성 역시 경제 발전에서 인간적 요소에 우선권을 두었다. 주체 사상은 "혁명과 건설의주인은 인민 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 대중에게 있는 사상"이라고 정의되었다. 그는 노동자의 물적 보상을 강조하는 입장을 우경 기회주의라고 매도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추동하는 힘은 물적 자극이 아니라 사람의 혁명적 열의임을 분명히 하였다. 탄자니아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 또한 경제적 요소보다 인간의 요소가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미얀마의 불교 사회주의에서도 엿보이는 인간 중심적 해석은 추상적 휴머니즘으로,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합"리나느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인간관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소련에서와 마찬가지로 제3세계에서도, 민족주의는 주의주의적 해석과 더불어 대중을 동원하는 주요한 이념적 기제였다.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민족 해방 운동의 경험은 민족주의적 선동의 호소력을 자연스레 증대시켰다. 더욱이 민족 해방 운동 과정에서 민족 구성의 원초적 요소를 강조하는 선전은 민족이 실체적 본질이며 영속하여 흐르는 생명이라는 민족 유기체론과 결합되었다. 그 결과 개인의 존재가 민족의 특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민족의 특성이 개인의 존재를 규정하였다. 유기체적 민족 이론은 민족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구체적 삶을 민족 자체의 추상적 삶으로 대체하였다. 그것은 영속적인 민족과 국가의 고유 정신을 강조함으로써, 무한한 힘을 가진 국가 권력 아래 개개인을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국가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시민 사회가 결여됨으로써 민족주의 담론으로 무장한 국가주의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민족 스탈린주의라고 이름할 만한 것이었따. 

  제3세계 사회주의는 이렇게 해서 근대화라는 민족주의적 목표를 위해 노동 대중을 사회적으로 동원하는 이데올로기로 전화되었다. 저개발국의 현대사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바는 사회주의라는 선언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중을 동원하는 데 민족주의에 호소하지 않는 순수한 계급 투쟁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주변부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근대 사회주의와는 아무 연관성도 없는 전통적 공동체주의와 도덕률을 끌어들였다. 러시아의 인민주의자, 이슬람의 원초적 사회주의자, 인도의 급진적 민족주의자에게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이러한 경향은 동아시아의 마르크스주의에서도 발견된다. 마르크스주의가 유교를 뒤집어엎은 것이 아니라 유교가 마르크스주의를 전복시켰으며, 그 결과 전투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유교의 정치적 도덕주의를 재빨리 받아들였다는 평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들은 "시민간의 평등과 우애"를 "국가와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충성 그리고 부모에 대한 효도"로 바꿔친 것이다. 그 결과는 '동양적 전제주의'의 사회주의판이었다. 

  주의주의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이제 민중은 주체가 아니라 민족울 구성하고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존재하였다. 1969년 잠비아의 급진적 민족주의자 카운다(Kenneth Kaunda)가 민족평의회에서 행한 연설은 민족 담론이 어떻게 대중 동원의 기제로 사용되었는가를 잘 드러내 준다. "이제 정부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산업도 여러분의 것입니다. 경제 전체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 내가 차후의 조처가 있을 때까지 임금 동결과 ...... 파업 금지를 선언하는 것이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 바로 이러한 배경 아래서 ......(그것들을) 효율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관리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니의 급진적 민족주의자 투레(Sekor Toure)는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파업은 정당하지만 아프리카인의 정부에 대한 파업은 역사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며 노조 지도자들을 질타했다. 그는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파괴하고 그 지도자들을 투옥함으로써 자신의 말을 실천에 옮겼다. 이와 더불어 모든 경제 활동을 국가가 지도하는 자급자적 경제 이론 또한 국가주의를 강화시켰다. 그 결과 좌파조차 신식민주의에 저항한다는 명분 아래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 축적 과정을 지지하고 옹호했다. 민족 해방은 국가의 해방이라는 이념으로 대체되었고, 민중의 삶의 질을 높이는 문제는 곧 국가적 힘의 강화라는 논리에 종속되었다. 

  한편 대중 동원에 입각한 발전 전략은 전례가 없는 규모로 인적 자원과 천연 자원을 낭비하는 외연적 경제 발전을 초래했다. 그것은 창의적인 노동을 요구하는 형태의 내실 있는 경제 발전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민주집중제의 이름으로 가장한 독재 권력은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조작된 참여'로 바꾸었다. 노동자의 자발적 참여와 창의성을 배제하는 조작된 참여는 오직 군사적인 방법으로밖에 유지될 수 없었다. 그것은 원시적 산업화의 단계에서는 그런 대로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대중의 동원 과정에서 경제적 합리성은 '과시적 생산'이라는 정치적 목적에 종속되었다. 소련의 관료들은 지상에 세워진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큰 공장과 발전소를 건설하고자 했다. 제3세계의 사회주의 지도자들도 최소한의 투입으로 최대한의 산출을 거둔다는 합리적 전략을 거부했다. 쿠바의 기동대 돌격 방식에서 보듯이, 그들은 최대의 인력을 투입해 최대의 산출을 얻는 방식을 선호했다. 외연적 경제 발전을 위한 대중 동원 전략은 결국 노동력을 급속히 소모시켰으며, 물적 보상이 결여된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약속은 더 이상 탈진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없었다. 주변부 사회주의의 실체는 결국 해방이 배제된 동원이었다. 

 

다시 해방으로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서 폴란드 출신의 유대계 볼셰비키 라덱(Karl Radek)이 중국 공산주의자의 '유교적 심성'을 비판했을 때, 그 비판이 반드시 근거가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라덱은 서유럽 사회주의자들이 볼셰비즘에 대해 비슷한 조소를 보낸 것은 잊은 것 같다. 볼셰비키들이 러시아와 같은 후진적인 나라에서 혁명을 시도했을 때, 서유럽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우려와 회의의 눈길을 보냈다. 볼셰비키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주의주의적 해석을 통해 서유럽 사회주의자들의 회의를 반박했지만 그들의 우려는 적중했다. 

  돌이켜보건대 볼셰비키 혁명을 비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그것은 러시아를 돕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에 대해서 죽을 죄를 짓는 것이라던 레비(Paul Levi)의 지적은 정당한 것이었다. 러시아에서 현실화되어 주변부에서 수용된 것은 인간 해방의 계몽적 프로젝트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개발 독재와 대중 동원으로 타락한 마르크스주의였다. 주의주의의 인간 중심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창조적 적용"이라는 슬로건의 실재는, 마르크스주의를 '비서구적 근대화'의 방편으로 축소 해석한 것이었다. 그 결과 주변부 마르크스주의는 '해방의 근대성'을 잃어버리고 '기술의 근대성'으로만 남게 되었다. 

  서유럽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인 프롤레타리아 유일주의로 회귀하는 것이 상실된 해방의 근대성을 되찾는 길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유럽 중심주의와 결함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부의 지배*피지배 관계, 즉 성적 불평등이나 인종적 차별 등의 문제에 눈을 감았다. 그 결과 서유럽 마르크스주의는 젠더 인종 민족 신분 언어 문화 등의 측면에서 종속되어 있는 주변부의 하위 주체들을 중심부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서유럽 마르크스주의가 견지한 해방은 중심부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국한된 것이었다. 주변부 인민의 해방은 여기에서도 실종되었다. 

  이 글에서 주변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더듬어 본 것은 잃어버린 해방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희망에서였다. 해방의 이데올로기에서 동원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주변부 마르크스주의가 은폐하고 있는 권력 담론을 벌거벗기는 것이 이 글의 의도였다. 그것이야말로 잃어버린 해방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작업은 근대성과 근대화의 역사적 의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명사적 고민과 맞닿아 있다. 그것은 앞으로의 화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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