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전자상가에 가서 그 남자의 새 핸드폰을 사 왔다. 미끈한 게 잘 빠지기도 했지만 안경을 벗고 들여다보지 않아도 또렷하게 보일정도로 글자가 크게 찍히는게 마음에 든다. 하지만 내가 돌아왔을때 그는 마침 출타중이었고, 나는 또 나대로 볼 일이 있어 테이블에 상자 채 던져 놓고 집을 나왔다.   

그와 나의 소통은 늘 그런 식이다.

#. 2

내가 태어나던 날 그는 까만 수트를 입고 수술실 문 바깥에서 애 낳는 여자를 기다렸다고 했다.

“차림이 그게 뭐에요?” 라고 여자가 물었고, 그는

“첫 인상이 중요하잖아.” 라고 대답했단다.

그래, 첫 인상은 좋았다.

#. 3

내가 여섯 살 먹었던 해.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남자는 여자와 크게 말다툼을 했다. 여자는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갔고, 나와 남자만 교회에 갔다. 그나 나나 별로 예배에는 관심이 없어서 예배가 끝나자마자 바쁘게 교회를 나왔다. 나오는 길에 차가 막혔다. 마침 집에 가기도 싫었겠다. 남자는 내게 놀이동산에서 놀고 가자고 제안했다.

“응.”

싫었지만, 집에 가 봤자 별 볼일 없다는게 너무 뻔했으니까.

역시나 놀이동산은 예배만큼 재미없었다. 남자는 놀이기구를 타지 않았고, 나는 혼자 타는 놀이기구가 겁났다. 남자는 말주변이 없어 적당한 놀이 상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내가 뭐라도 마냥 좋아하는 순진한 애새끼도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저녁때까지 놀이공원을 걸어다니며 대충 시간을 때우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로서의 그는 그저 그런 편이었다. 자식으로서의 나도 썩 이상적인 편은 아니었지만.  

#. 4

나는 그에게 몇 번 얻어맞은 적이 있다. 보통 가족 간의 폭력이란 과도한 기대에서 유래하는 것인데 그의 기대는 좀 지나친 구석이 있었다. 세상에, 내가 공부 잘 하기를 기대하다니. 안타깝게도 평생 30등을 넘어보지 못한 내 역사와 전통은 제법 유구해서 역시나,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에도 학습은 심하게 부진했다. 어느 날 수학시험 열 문제 중에 두 개를 맞춰가지고 왔을 때 그는 유례없이 분노했고, 나를 막대기로 때렸다. 때린 횟수만큼 점수가 배가 된다면 오죽 좋을까. 하지만 사람이 타고난 능력이 고만하고 또, 사는게 늘 뜻같지가 않아 그 비슷한 일은 몇 번쯤 더 일어났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사실은 그는 포기가 빠른 편이었다는 것.

마지막 폭력의 기억은 열 아홉 무렵이다. 그 해 우리의 전락은 눈부셨다. 그는 사장에서, 소장에서, 백수로. 나는 학생에서 백수로. 신분이야 약간 달랐지만 나나 그나 공사판을 전전했는데 나는 번 돈을 유흥으로 탕진했고, 그는 공과금으로 탕진했다. 그런 이유로 그와 나는 집에서 거의 얼굴 맞댈 일이 없었다. 예외가 있다면 비 오는 날. 비가 오면 일이 없으니까. 

어스름한 저녁에 그는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꺼내 빈 집에서 혼자 마시고 있었다. 부엌에는 여자가 그린 100호 짜리 정물화가 걸려 있었는데, 누런 조명에 어우러진 그는 꼭 그림의 일부 같았다. 나도 맥주 하나를 꺼내 그 앞에 앉았다.

천천히 한 병을 다 비워 갈 즈음 그가 그랬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거냐.”

“내킬 때 까지.”

그가 병을 놓고 일어났고, 나도 일어났다.

“그렇게 인생 탕진하면 남는 게 뭐야.”

“탕진 안 한 사람은 뭐가 남았는데.”

그는 주먹을 들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주먹은 내 오른편 얼굴에, 내 주먹은 그의 왼쪽 턱에서 멈칫거리고 있었다. 뒤늦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닳은 우리는 정말 정물화의 오브제처럼 우뚝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건은 그 이전과 이후 사이에 커다란 단절을 만들었다. 우리는 서로 좀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이란건 생각같은 생각이라기 보단 어쩌면 수컷으로서의 본능같은 것일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우리의 이후 관계는 뭐라고 딱 꼬집어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이전과는 뭔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 5

얼마 전 그가 아팠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새벽 두시였다.

노인네는 급체를 의심해서 열 손가락을 따고, 구급약을 먹여봤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맹장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위치가 달랐다. 어쨌거나 웬만큼 아파서는 기색도 안 하는 그가 그 정도로 앓는다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그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들쳐 업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는 내 등을 밀어내고 신을 신는다. 그리고 경련하는 배를 움켜쥐고 걸어 결국 제 힘으로 차 문을 연다. 나는 다만 차를 운전해서 늘 가는 종합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그의 병명은 신장결석.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통의 크기만으로 따졌을 때 출산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핏기가 가신 그의 얼굴은 차가웠다. 진통제는 잘 먹히지 않았고 그는 밤새 앓았다.

나는 응급실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그를 얼른 뉘어놓고 입원 수속을 밟았다. 그를 옮기고, 수술을 예약하고, 싸인을 하고, 진단을 받아 보험회사에 연락을 했다. 일사천리로 수술은 무난하게 끝났고, 그제야 한 숨 돌린 나는 그를 차에 태워 집으로 옮겨왔다.  

차 안에서 내가 물었다. 

"나 고맙지." 

그는 아무말도 안 했다. 긍정을 표현하는 그의 방식은 때로 침묵이다. 나는 좀 뻘쭘해져서 음악을 틀었는데 그때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저음, 들릴듯 말듯, 음악소리에 묻힌 그의 목소리. 

"고맙다."

차라리 안 듣는게 덜 뻘쭘했겠다 싶었다. 이렇게 간질간질한 표현이라니.

#. 6

그의 인생에서 몇 가지 미스테리한 구석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미스테리한건 사범대를 졸업하고, 인천까지 가서 어울리지도 않게 빵집을 차린 일이다. 만약 우리 집 앞 빵집 아저씨가 우연찮게도 그때 그의 종업원 중 한명이 아니었다면, 난 평생 그의 인생 커리어에서 빵집 오너를 의심했을거다.

식빵 한 줄을 사러갔을때, 배가 남산만하게 나오고 턱살이 접힌 빵집아저씨는 용케 나를 알아보고 서랍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내왔다. 풍광좋은 인천 앞바다에 몇 명의 사내들. 

“이땐 나도 몸매가 죽였는데. 자네처럼.”

그는 빵을 시킨 것 보다 두배는 더 포장해 놓고 본격적으로 수다 떨 준비를 한다.

“이게 나야.”

거기엔 무슨 복고컨셉 패션 화보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너댓 사람이 서 있었다. 그가 가르키는 그 사람은 호리호리한 체격에 옆으로 흩어지는 바람머리, 허벅지가 짝 붙는 아이스진에, 빨간 셔츠를 입고 상당히 깜찍한 머플러를 매고 있었다. 나는 그 아저씨와 사진을 두어 번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실례를 무릅쓰고.. 뿜었다. 아, 그 이질감이란.

“이게 자네 아버지고.”
 
그는 가운데의 청년을 가르킨다. 그는 신화의 전진을 닮았다. 중키에 다부진 체격, 지금보다는 조금 날카로운 인상.  

"인천에서 제일 큰 빵집이었어. 자네 아버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지."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빵집 아저씨가 그런다.  

"자네 아버지 가끔 들르시면 자네 얘기 자주 하시는데 알아? 자네가 하는 일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지." 

젠장. 핀트가 어긋나는 건 늘 이런 식이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정말 싫다. 정말.

#. 7 

내 인생에서도 몇 가지 미스테리한 일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대학을 들어간 일이다. 고등학교도 못 나온 양아치, 그것도 반에서 30등도 넘어본 적도 없는 인간이 언감생심 대학이라니. 어쨌거나 나는 원서를 쓰기 위해 기웃거렸고, 의논할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도대체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서 그래도 대학 나온 그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미잘아, 네가 공부로는 안되니까 전문대를 지원해서 ‘기술’을 배워라. 집에서 ‘가까운’ 00전문대는 어떻겠니.”

나는 그의 조언을 새겨들었고. 서울특별시 지도를 꺼내서 집에서 제일 가까운 대학까지 센치미터를 쟀다. 그리고 그 학교를 갔다. 좋은 조건으로 오라고 전화 온 학교도 있었지만 그냥 그 학교를 갔다. '가까웠'으니까.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전문대를 안가서 그런지 기술도 뭣도 못 배웠긴 했지만. 

어쨌거나 학교를 다니게 된 이후로 나는 세 탕씩 알바를 뛰느라 집에 늦는 일이 잦았는데. 어느날 그가 내게 물었다.

“미잘아, 너 혹시 학교 '야간'으로 들어갔니?”

나는 뭘 하는 중이라 정신이 없어서 대답대신 대충 끄덕거리고 말았고 그는 최근까지 내가 야간대학을 나온 줄 알았다. 그렇지 뭐.

#. 8

“밥줘.”

“니가 해먹어.”

“나 호강시켜 준다면서.” 

물론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없다. 할 사람도 아니다. 그는 말 대신 몸을 일으켜  내게 돼지 두루치기를 해 줬다. 나는 말도 없이 큼직한 고기조각을 씹어먹는다. 내가 먹는 동안 그는 티비를 켰는데, 유키스의 ‘만만하니’ 노래가 나오니까 얼른 뉴스로 채널을 돌린다. 그는 대체로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건 어디서 배웠어?”

“요리학원.”

그가 말했다. 그는 빈말 하는 법이 없다. 나는 충격을 받아서 손끝이 저릴 지경이다. 세상에, 도대체 언제? 왜? 무슨 생각으로? 어쨌거나 그의 돼지 두루치기는 제법 깊은 맛이 났다.

“아빠.”

“왜.”

“젠장, 그 요리학원 어디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 

“왜.”

“우리 알고 지낸지도 수십년인데, 그냥 말 놓을까?”

그는 다시 채널을 돌린다. 공교롭게도 유키스의 만만하니.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노래가 끝날때까지 채널을 돌리지 않았을 뿐. 세상에, 이런 센스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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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2-1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땐 나도 몸매가 죽였는데. 자네처럼.”

자네처럼...자네처럼...자네처럼..자네처럼...자네처럼...자네처럼...자네처럼...

뷰리풀말미잘 2010-02-11 21:29   좋아요 0 | URL
오, 그건 진실이에요. ㅎㅎ

무해한모리군 2010-02-11 23:49   좋아요 0 | URL
네 그건 사실이예요 ㅎㅎㅎ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작은거 같아요 쳇!

무해한모리군 2010-02-11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미잘님은 아버지 닮았구나. 좋겠다.

뷰리풀말미잘 2010-02-12 00:07   좋아요 0 | URL
헉.. 닮지도 않았고 좋지도 않습니다. ^^ 저는 진지하게 생각해봐도 주워온 자식일것도 같아요. 뭔가 석연찮은 구석들이 꽤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휘모리님의 미모는 어디서 왔을랑가요. 어머니일까요. 아버지일까요.

무해한모리군 2010-02-12 09:44   좋아요 0 | URL
저희 어머니는 엄청 미인에 키도 큰데 전 아빠닮아서 슬퍼요 ㅠ.ㅠ
저보다 석연치 않으실려구요.
1. 형제들과 열살가까이 차이가 나요.
2. 가족 모두 겨울이 생일인데 저만 여름이예요.
3. 가족 모두 공부는 꽝 예체능에 재능이 있는데 전 예체능 완전 꽝이예요 --

뷰리풀말미잘 2010-02-12 11:07   좋아요 0 | URL
아버지도 평균 이상의 미모를 지니셨을 겁니다. ㅎㅎ

저는 말이죠. 문득 알게된 사실인데요. 결혼날짜와 제 생일사이의 기간이 평균적 가임기간보다 짧답니다. 제가 팔삭둥이도 아닌데 어떻게 한달이나 일찍 튀어 나온단 말입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늘 물어보고 싶은데 충격적인 얘기 들을까봐 못 물어보고 있어요.

Arch 2010-02-12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잘, 꼬옥~

뷰리풀말미잘 2010-02-12 11:07   좋아요 0 | URL
아, 아치! 남들이 봐요!

Forgettable. 2010-02-12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팡팡튀는 에피소드! 존경합니다.
어제 하루종일 생각해봤거든요, 내가 재미없게 말하는건지 재미없는 인생을 사는건지..
근데 재미없게 말하는 것 같아요. 난 엄청 재밌거든요. 그냥 혼자서 내가 살아가는게. ㅎㅎ
아, 내게도 내 에피소드를 탱글탱글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뭐, 무심함이나 참신함, 센스가 닮은듯 한걸요.


뷰리풀말미잘 2010-02-12 11:18   좋아요 0 | URL
뽀님이랑 얘기하면 늘 즐거운데요! 또 뽀님 페이퍼만큼 탱글탱글한 에피소드도 드물구요! ^^

닮았다는 건 으음.. 뭐 어떻게 생각해도 제가 좀 낫습니다. ㅎㅎㅎ

마늘빵 2010-02-12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짠하네요.

뷰리풀말미잘 2010-02-12 23:09   좋아요 0 | URL
사람 사는게 다 그렇죠. ^^ 즐거운 연휴 되세요! 귀찮다고 밥 대충 때우고 그러지 마시고.
 

 

 

 

 

 

 

 

 
 





1998년 이후로 재패니메이션을 언급할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신카이 마코토'. 미술적 완성도, 이야기의 수준, 세련된 연출. 수백억을 투자한 드림웍스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일본의 이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의 작품만큼 감동을 준 적 있었던가.  

데뷔작 이후 욱일승천하는 그와 그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은 팬의 즐거움이다. 1999년 단편 애니메이션 <그와 그녀의 고양이>로 애니메이션 컨테스트 그랑프리, 2002년 <별의 목소리>로 신세기 도쿄 국제 애니메이션 페어 21 우수상, 2004년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로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애니메이션상을 장비가 적장 모가지 따듯 쓸어담았다. 특히 2004년 당시의 경쟁작은 무려 미아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 그리고 최근작 2007년의 <초속 5센치미터>는 SICAF2007의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극찬받았다.  

신카이 마코토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빛의 섬세함이다. 램브란트의 현현인가. 리얼리즘이 살아있는 작화에 살아서 꿈틀거리는 광원효과가 가미되자 애니메이션은 그 원래의 의미대로 영혼(Anima)을 얻어 춤춘다. 차장에 어른거리는 태양빛, 유리에 얼비치는 실내등, 시리도록 투명한 창공의 빛깔, 이런 소소한 것들이 빚어내는 일상의 아름다움. 그렇게 만들어진 배경 한컷 한컷은 모두 놓치기 싫을 정도로 아름답다. 

이제는 워낙 유명해져서 다들 아시겠지만, 함께 보고 싶어서 퍼 왔다.  

1999년작 <그와 그녀의 고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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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2-0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카이 마코토 입봉 작품이군요.

뷰리풀말미잘 2010-02-04 13:59   좋아요 0 | URL
네, 메피님도 신카이 마코토 좋아하시죠? ^^

Mephistopheles 2010-02-04 20:34   좋아요 0 | URL
이 양반 작품 스케일이 점점 커지다보니 이젠 1인이 만드는 시대는 물건너갔다고 보여집니다..^^

뷰리풀말미잘 2010-02-04 16:43   좋아요 0 | URL
네 혼자 감독, 연출, 작화, 사운드 다 해먹는 건 이제 무리겠죠. 퀄리티에 대한 대중의 기대치도 무시할 수 없겠고. 그러다보면 어느 세월에 그 작업을 손가락 꼼지락거리면서 다 하겠습니까. 그러나저러나 이제 또 한편 낼 때가 됐는데 말이에요.

아포지 2010-02-09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랜 만에 다시 보았는데 역시 감동이네요...감사합니다. 예전엔 여러모로 미숙한 작품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그렇게 간단히 말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좀 있네요..아 머리야..@.@

뷰리풀말미잘 2010-02-09 13:53   좋아요 0 | URL
4분 남짓한 시간에 구축한 캐릭터 치고는 아주 단단하죠. 저는 이 애니메이션을 여러번 봤는데, 그녀든 미미든 고양이든 세 등장인물 중 누구에 감정을 이입해도 뭔가 애잔합니다. ㅎㅎ

사운드의 디테일도 아주 좋은데요. 다채로운 사운드를 사용하면서도 아주 절제가 있어요. 문 닫는 소리, 커피포트에 물 끓는 소리, 도마 치는 소리. 99년이면 아직 신인이었을땐데 신인답지않게 노련했죠.

Forgettable. 2010-02-0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 이거 왜 이제 본거죠?
전화로 이거 보고 있다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주위가 너무 시끄러워서..

신카이 마코토 찬양론을 온몸으로 이해할 수가 있게 됐어요. ㅠㅠ 아우 눈물나!! 우리 고양이 생각도 나고.. 울던 내 옆에 가만히 앉아 있어주던 기억도 나고..

뷰리풀말미잘 2010-02-09 23:07   좋아요 0 | URL
뽀님은 '그녀'에 감정을 이입하셨군요. ^^

저도 제가 키우던 고양이 생각이 났어요. 제가 키운다고 하기엔 그 놈도 저도 제멋대로였고 같이 있던 시간도 아주 짧았어요. 며칠 안 보인다 싶었는데 곧 차에 치여서 죽은 시체로 발견됐죠. 빼빼마르고, 약한 놈이 겁 없이 바깥으로 나가 된건 아마 바뀐 주인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겠죠.

다른 영상 하나 틀어드릴까요?

뷰리풀말미잘 2010-02-10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카이 마코토- "고양이의 집회"입니다.

나옹이 2010-02-09 23:3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악 귀여워!! 네네네네네네!
지금 안좋은 소식이 들려서 체한 기분이었는데 아주 굿이에요 굿! :)

뷰리풀말미잘 2010-02-10 00:04   좋아요 0 | URL
흠.. 낮선 닉네임에서 락방님 냄새가 나는데요?

Arch 2010-02-10 01:30   좋아요 0 | URL
킁킁, 완전 동감합니다. ㅋㅋ

다락방 2010-02-10 12:00   좋아요 0 | URL
이 사람들은 아직도 날 모르는구나!! 하아-

뷰리풀말미잘 2010-02-10 12:03   좋아요 0 | URL
하긴 락방님은 애니메이션을 별로 안 좋아하시죠. ㅎㅎ

다락방 2010-02-10 12:50   좋아요 0 | URL
아니. 나는 로그인하지 않고는 댓글 달지 않아요. 그게 잘못됐다는게 아니라 그저 나는 그렇다는거에요. Arch님과 말미잘님이 서로를 알듯이 나를 알 수는 없는건가봐요. 그치. 나도 모르니까.


Forgettable. 2010-02-10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데요 ㅋㅋ 아까 로긴하기 귀찮아서 ㄷ ㄷ
한아이 보다가 울다웃다 정신못차리고 시계보니 두시네요ㅠㅠ

뷰리풀말미잘 2010-02-10 10:42   좋아요 0 | URL
그게 원래 좀 그래요. ㅋㅋ 미리 경고좀 해 줄걸 그랬네요.

Arch 2010-02-10 12:24   좋아요 0 | URL
* 경고 : 늦은 시간에 읽을 경우 다음날 지각할 수 있음.

진짜 한아이 출판사에선 미잘에게 공로상이라도 줘야는거 아닐지.ㅋㅋ
 

#. 1  


 

 

 


 

 

  

 

도킨스의 근작 ‘지상 최대의 쇼’를 읽고 있다. 이 책은 생명이 어떤 경로로 진화하는가를 논구한 '에덴 밖의 강', 단지 자연선택 만으로 어떻게 생명체가 지금의 복잡성을 취할 수 있었는지를 밝힌 ‘불가능의 산을 오르다’ 반 기독교적 입장에서 진화란 의지를 가지지 않은 독립적 현상임을 논증한 ‘눈먼 시계공’에 이은 도킨스 진화론의 완결편이다. 논리와 근거는 묵직하지만 펜촉은 600여 페이지를 가볍게 내달린다.

#. 2
 




이 책에서 도킨스는 진화를 입증하는 다양한 사례를 다루는데 그 중 하나가 러시아 은여우의 가축화 과정이다. 책에 의하면 은여우는 흔한 붉은여우 불페스 불페스의 색깔 변종으로 아름다운 모피의 색깔 때문에 가치가 높았단다. 여우에 대한 사랑과 유전학에 대한 신념을 고수하던 과학자 벨라예프는 시베리아 유전학 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러시아 은여우를 유순한 품종으로 개량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품종개량법은 자연선택을 모방한 것으로 덜 공격적이고, 사람을 잘 따르며, 귀여운 표정을 잘 짓는 개체들을 골라 선택적으로 교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실험자는 여우에게 먹이를 주며 어루만지려고 했고 여우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1. 도망치거나 공격하는. 2. 손길을 허락하지만 무뚝뚝한. 3. 호의적으로 접근하고 꼬리를 흔드는. 벨라예프는 세 번째 집단만을 체계적으로 교배시켰단다.

그리고 6세대가 지나고 여우들은 크게 달라졌다. 제 4의 집단이 생겨난 것이다. 이 집단 여우들의 특징은 사람과 접촉하기를 바라고, 관심을 끌기위해 끙끙거리고, 개처럼 실험자의 냄새를 맡거나 핥았다. 이후 10세대가 지나자 4집단은 18%로 늘어났고, 20대에는 35%, 30~35대에는 전체 실험군의 70~80%가 4집단 즉, 개처럼 ‘가축화한 엘리트’가 되었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현상은 예상치 못한 부과적 효과들이었다. 길들여진 여우들이 행동만 개 같아진 것이 아니라 모습도 개를 닮아간 것. 그들은 은빛 털을 잃었고, 대신 흑백 얼룩반점을 얻었다. 여우 특유의 쫑긋한 귀도 개처럼 펄럭거리게 되었으며 탐스럽게 늘어진 꼬리가 개처럼 위로 살랑거리게 되었다. 심지어 발정기의 주기도, 짖는 소리도 개를 닮아갔다.

도킨스는 이 대목에서 유전자의 다형질 발현으로 논의를 이어가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그럴 여력을 잃었다.

#. 3

너무 슬퍼서.

#. 4

진중권은 ‘교수대 위의 까치’에서 사진학의 개념인 ‘푼크툼’을 언급한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사진의 의미에 두 개의 층위가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는 ‘스투디움(stadium)’으로,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의 틀에 따라 읽어내는 의미다. 우리는 특정한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이 뭘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하곤 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그런 일반적 해석과 관계없이, 때로는 그것을 전복하면서 보는 이의 가슴과 머리를 찌르는 효과이다. 오직 보는 이 혼자만이 느끼는 이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효과를 바르트는 ‘푼크툼’이라 부른다.

이 자국, 이 상처들은 점이다. 스투디움을 방해하러 오는 이 두 번째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 부르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찌름, 작은 구멍, 작은 반점, 작은 흠, 주사위 던지기이기 때문이다. 사진의 푼크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또한 나를 상처 입히고 괴롭히는) 우연이다.”

나의 슬픔은 푼크툼의 효과였을까?  

#. 5  

L과 차를 마셨다. 내 은여우 얘기를 듣던 L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던진 한 마디.

"미잘아 나 요새 수능 준비한다. 철학이 하고 싶어졌어. 자아를 찾아 떠날테야."

아, 이런 진화 덜된 새끼가.   

저런 놈도 10대쯤 똑똑한 여자랑 교배시키면 좀 우수한 녀석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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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02-02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진화 덜된 새끼, 아, 수첩에 적어 놨다가 써먹어야지.
우리 말로 가끔 보면 은여우같아요. 동그랗게 몸 말고 있을 때

근데, 흰여우를 은여우라고 하죠? 흰털이 펄인가?
말로 털도 햇빛 아래서 빤짝- 빤짝- 아 이 우월한 피조물 같으니라구.

집사가 고양이처럼 진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잘님의 자문을 구합니다.

뷰리풀말미잘 2010-02-02 22:54   좋아요 0 | URL
저 사진은 북극여우에요. 북극여우가 은여우인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책에 비슷한 녀석들의 사진이 나와있긴 한데 흑백이라서 알아보기가 어렵네요.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설마 펄 까지는 아닐거 같네요.

흐흠.. 집사의 고양이화라.. 저기.. 쉽게 드리기는 어려운 말씀이지만 위에 있는 L녀석이 딱 고양이 수준인데요. 혹시.. 눈 한번 딱 감고 교배 한번 안 해보실래요? 녀석에게는 똑똑한 여자의 유전자가, 말로의 집사에게는 고양이의 유전자가 필요한 것 같아서.

Mephistopheles 2010-02-02 23:38   좋아요 0 | URL
24끼니 고양이 사료를 먼저 섭취한 후 다시 이야기해보기로 하죠.
(4주후에 다시보자는 사랑과 전쟁 패러디..)

하이드 2010-02-03 08:08   좋아요 0 | URL
맥주 안주로 고양이 간식 먹는 걸로는 부족할까요? (맛있음)
캣우먼은 어떻게 캣우먼이 되었더라, 제시카 알바는 어떻게 고양이 발정 하게 되었더라,

유전자조작이 필요해요.

뷰리풀말미잘 2010-02-03 11:13   좋아요 0 | URL
헉, 고양이 통조림...

음.. 5번 염색체 단완이 결실되게 되면 묘성증후군 cat-cry syndrom이라고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게 되고, 모양도 고양이 비슷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데요. 한번 전문가와 얘기를 좀 해 볼 필요가 있겠네요.

Mephistopheles 2010-02-02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류는 교배하는 과정만 즐길 수도 있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습니다.

뷰리풀말미잘 2010-02-03 00:45   좋아요 0 | URL
에이, 부작용이랄것까지야. 그냥 치토스 먹으면 나오는 따조같은 거겠죠. 보너스랄까요. 메피님은 따조 안 모으십니까? 치토스만 드시고?

Mephistopheles 2010-02-03 10:36   좋아요 0 | URL
언제적...따조를...지금은 허접한 장난감 비행기 들어 있습니다.
(갑자기 치토스를 구입하고 과자는 저멀리 치워버리고 따조만 모으시는 미잘님을 상상해버렸어요.)

뷰리풀말미잘 2010-02-03 11:16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는 치토스 사서 치토스 먹어본 적 한번도 없어요. 오직 따조만 모으죠. ㅎㅎ 아직은 치토스를 먹을 계획조차 없습니다. 저는 평생 따조만 잔뜩 모으고 살거에요!

Forgettable. 2010-02-03 12:46   좋아요 0 | URL
저도요저도요!!ㅋㅋ

뷰리풀말미잘 2010-02-03 13:00   좋아요 0 | URL
저 닮은 치토스 나오면 그도 낭패고 말입니다. ㅋㅋ

Jade 2010-02-03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미잘님!

'철학하고 싶은'마음에 걸맞는 수단이 '수능'이라고는 별로 생각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하고싶은 것을 위해 '수능'이라도 도전하고 싶어지는 마음으로 이해되는 저는, 좀 이상한 걸까요?

뷰리풀말미잘 2010-02-03 02:24   좋아요 0 | URL
완전 쌩뚱맞잖아요. 있는 거라곤 학벌뿐인 공돌이가 갑자기 웬 철학? 게다가 제 주머니에 한 학기 등록금도 없는게 반년마다 노부모 돈 우려다가 그깟 대학에 수백씩 쏟아붙고 들뢰즈가 어떻고 랑시에르가 어떻고 겉멋이나 들어서 지젝거릴 녀석을 생각하니까 왜 있잖아요 찻잔을 확 쏱아붓고 싶은거. ㅎㅎ

물론 개인적인 이유도 있겠지요. 저는 철학이랑 대학이랑 수능을 세트로 싫어하니까요. 그래서 좀더 울컥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더 짜증났던 건 제가 그 녀석이 뭘 하든 결국은 응원해 줘야하기 때문이었을 거에요. 그 무모하고 쓸데없는 짓 하는 놈을 저라도 속 터져가면서 응원 안 하면 누가 또 응원하겠습니까.

생각해 보니까 놈에게 처음 니체 얘기를 했던것도 저였네요. ㅎㅎ

제이드님, 말씀하신대로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소중한 것일거에요. 열정 없는 제가 알기는 좀 어려운 것이지만요.

Jade 2010-02-03 02:34   좋아요 0 | URL
음;;; 미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것도 다 사연이 있었군요;; 저도 미잘님 입장이라면 똑같이, 혹은 더 모질고 재수없게 반응했을지도 모르겠어요 ^^; 적어도 미잘님이 말씀하시는 측면에서는 저는 102% 공감하니까..^^

열정없는건 저도 마찬가지 랍니다. 어쩌면, 제가 그런 열정이 없기 때문에 미잘님 친구분 행동이 마치 "열정어린"행동처럼 보이고, 또 부러웠는지도 모르죠..^^

그런데 미잘님도 불면증이신가봐 ㅋㅋㅋ

Mephistopheles 2010-02-03 10:35   좋아요 0 | URL
진정한 공돌이는 기름밥을 먹으면서 철학을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 공돌이에게는 돌뢰즈나 랑시에르, 지첵이 가르쳐주지 못하는 철학이 존재하는데 아직 그걸 발견 못하셨나 보군요.

뷰리풀말미잘 2010-02-03 11:19   좋아요 0 | URL
102% 공감하는건 뭡니까! 최고로는 아니지만 적당히는 공감 한다는 말인가요. ㅎㅎ 요새 좀 밤잠이 안와요. ^^ 우황청심환을 처방해주세요 (잠이랑은 별 관계 없나요?)

뷰리풀말미잘 2010-02-03 11:35   좋아요 0 | URL
그 공돌이의 철학이 뭡니까? 혹시 납땜 10000번 하면 저절로 터득된다는 전설의 그 철학? 인두와 사람이 물아일체하고, 일체개고를 깨우치며 기계속에서 열반에 이르는 길을 발견한다는.. 어쩐지 메피님 범상한 분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Mephistopheles 2010-02-03 12:49   좋아요 0 | URL
찾는 중입니다요. 그리고 전 범상 그 자체랍니다..ㅋㅋ (생활의 달인을 보면 전 거기 출연하는 분들 다 철학자처럼 보이더군요.^^)

무해한모리군 2010-02-03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분... 대학에서의 철학이 생각과 다를텐데.. 제 주변엔 철학박사과정까지 하고 왜 내가 이렇게 이걸 오래 공부했냐고 가끔 자문하는 인간이 있는데 친구분이 원하면 면담잡아드립니다... (주변환경이 이래서 제가 삐딱한거예요.)

저도 수능, 어려운데 재미없는 것들, 그리고 그 중에 왕 고시 이런 것들을 싫어해요 ㅠ.ㅠ

아무래도 저도 뭔가 품종개량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나봐요 휴~

아, 어떻게 하면 서재계의 귀공자님께 저런것도 받을 수 있는거예요 부럽다~

뷰리풀말미잘 2010-02-03 11:26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휘모리님 휘모리님은 우월한 미모 유전자가 있잖아요. 그건 품종개량이 우수했다는 증거입니다. 서재계의 귀공자에게 책을 협찬 받을 수 있었던건 음.. 그와 저만의 므흣한 비밀이랄까요. ㅎㅎㅎ

Forgettable. 2010-02-03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은 그 고양이 과의 꽃미남이었던가요?

전 철학공부 엄청 재밌게 했는데 왜요 (..)
좋은 선생님들도 많다고요! 암튼 전 현대철학이랑은 거리가 멀어서 들뢰즈네 랑시에르네 하며 지젝거리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ㅎㅎ

얼른 공부 더 해서 도킨스의 진화론을 좀 어떻게 반박해보고싶네요. ㅎㅎ (이 날이 올까)

뷰리풀말미잘 2010-02-03 11:33   좋아요 0 | URL
비슷한 놈들인데요 꽃미남 L이 집고양이과라면 위의 L은 길고양이 괍니다. 전자의 L이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할 리가 없죠.

음.. 역시 사람은 고전을 봐야 하나봅니다. ㅎㅎ

저는 뽀님이 이기적 유전자를 안 좋게 보신 이유중 하나가 도킨스의 거친 레토릭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데요. 이 책을 읽으시면 그와 공감대가 쌓여서 새로운 이해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ㅎㅎ 이건 뭐 싸운 친구들 중재시켜주는 거랑 비슷하네요.

Arch 2010-02-03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나는 미잘이 좋다니까 관심은 가는데 이기적인 유전자를 보면서 머리카락이 한줌 가량 뽑혔기 때문에 관심만 쭉 가져야할 것 같아요.
* 인두와 납땜의 물아일체가 오기 전에 납중독에 걸릴 확률이 커요.
* 뽀가 뭐에 관심 갖을지 난 댓글 보기 전에 알았어요.
* 아아, 승주님의 '질' 들뢰즈가 떠올랐어요.

은여우는 정말 예쁜데요.

뷰리풀말미잘 2010-02-03 16:35   좋아요 0 | URL
* 도킨스보다 아치가 더 좋아요.
* 도에는 마가 끼는 법이죠.
* ㅎㅎ 그러고보면 뽀님 좀 단순한거 같지 않아요? 쑥덕쑥덕. 지난번에는 글쎄 저랑 있으면 자기 지성이 우월한거 같으다면서 뻔뻔하게 저를 면박줬다니까요!
* 아, 정말 그 양반은.. ㅎㅎㅎㅎ

2010-02-03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10-02-03 23:18   좋아요 0 | URL
* 미잘 사랑은 제가 알죠. 좀 뻔하달까, 사랑말고 다른거해요. 뭘? ^^
* 도, 에드립 생각 안 나서 스킵!
* 뽀님 단순한데 아치 잡는 뽀라고, 저를 좀 잡는 것 같아요. ㅋㅋ 아, 비행기 탄 뽀는 귀 좀 간지럽겠지~

* 비밀댓글 말인데요. 난 벌써 도달했는데 말이죠. 히히~
 

 

밤바다는 깊어 끝을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물살을 짓혀 나가도 검푸른 하늘과 바다는 구별되지 않았고,  

하늘에 빼곡한 별들과 점점히 흩어진 고깃배의 불빛이 구분되지 않았다.  

시간은 맞바람처럼 와서 담배만 태워먹고 사라지고 

상념은 갑판에 고여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온갖 자질구레한 인생들이 파도처럼 몰려왔고  

배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 어느 소설가의 이야기와,  

생리혈이 묻은 천 조각을 아무도 모르게 폭폭 삶는 어느 소녀의 이야기와.  

내 보잘것 없는 짧은 인생의 이야기가  

그녀의 기척을 지우는지도 모르고  

나는 장승처럼 오래 서 있었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그녀는 

몽유병 환자냐, 쓸모없는 놈아 투덜거리면서  

내 귀에 이어폰 한 짝을 꽃아넣었는데  

마침 나오는 노래가 Bob dylan의 Knockin' On Heavens Door.  

아, 그때 바람에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를 쓸던 내 손이 조금 떨린 것도,  

엄지 손가락이 제 멋대로 그녀의 아랫 입술을 스쳐 더듬은 것도  

그래서 그날 조금 종류가 다른 불면에 시달린 것도.  

사실은 그 지독한 음치 가수의 이 노래 때문이었던거다.    

 

맹세코 그녀와는 한번도 자지 않았는데,  

그건 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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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1-27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무슨.. 소설이나 시 많이 읽지도 않는 사람이 어찌 이런 글을-_-
질투나네요.

2010-01-27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뷰리풀말미잘 2010-01-27 11:22   좋아요 0 | URL
아.. 뽀님 칭찬 들으니까 기분 좋은데 2탄도 쓰고 3탄도 쓰고 그럴까봐요. ㅎㅎㅎ 2탄은 imagine으로 하겠습니다.

2010-01-27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7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1-27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미잘님이 서경덕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뷰리풀말미잘 2010-01-27 11:26   좋아요 0 | URL
메피님 알라딘 3절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저와 메피님과 락방님이지요. 호호호.

Mephistopheles 2010-01-27 14:05   좋아요 0 | URL
그....그럼...내가 박연폭포...???

뷰리풀말미잘 2010-01-27 14:52   좋아요 0 | URL
죄송해요. 배역이 그것밖에 안 남았네요.

다락방 2010-01-2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무슨... 메세지가 있는 것 같은데요.....아 뭐지뭐지? 무슨 메세지가 들어있는 걸까요?

뷰리풀말미잘 2010-01-27 11:27   좋아요 0 | URL
미잘은 사실 성 불구다. 으흑.

다락방 2010-01-27 11:38   좋아요 0 | URL
아!

무해한모리군 2010-01-27 11:51   좋아요 0 | URL
아아아!!!

이 사람들의 주거니받거니 개그는..

다락방 2010-01-27 11:58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 저 깊게 깨닫고 고개 끄덕이는 중이에요. 아, 미잘님은 성 불구셨구나, 하고요. 그 메세지를 저는 읽지 못한게 아니겠습니까, 글쎄!!

뷰리풀말미잘 2010-01-27 12:03   좋아요 0 | URL
제 마음이네요. (스피커가 들리셔야 할 텐데요. ㅎㅎ)


Forgettable. 2010-01-27 12:3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머니를 열고 돌돌 감긴 이어폰을 풀러서 재생한 보람이 있네요. ㅋㅋㅋ

다락방 2010-01-27 12:44   좋아요 0 | URL
성 불구자가 된다는건 46초의 절규를 동반하는 것이로군요!

뷰리풀말미잘 2010-01-27 13:41   좋아요 0 | URL
결코 쉬운 일은 아닌것이죠.

다락방 2010-01-27 13:53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말미잘님은 성 불구자인데
성 불구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므로
말미잘님은 지금 꽤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계시다는거군요!

Mephistopheles 2010-01-27 14:27   좋아요 0 | URL
육체적인 걸까요 심리적인 걸까요..??

뷰리풀말미잘 2010-01-27 14:56   좋아요 0 | URL
너, 너무들 몰입하지 마세요.;

Mephistopheles 2010-01-27 20:20   좋아요 0 | URL
둘....다...였을 줄이야.....

다락방 2010-01-27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클났다. 어떡해요. 이거 화제의 서재글에 떴어요. 어떡해요!!

뷰리풀말미잘 2010-01-27 14:55   좋아요 0 | URL
말미잘 고자라고 소문나겠네요. ㅎㅎㅎㅎ

Mephistopheles 2010-01-27 15:34   좋아요 0 | URL
즐찾과 서재방문자수가 순식간에 곤두박질 칠지도 몰라요....

다락방 2010-01-27 15:40   좋아요 0 | URL
아 그러게 어떡해요. 저도 즐찾 빼고싶어졌어요!!

=3=3=3=3

뷰리풀말미잘 2010-01-27 16:35   좋아요 0 | URL
밤금 하나 빠졌는데 아마 다락방님인듯. ㅠ_ㅠ

무해한모리군 2010-01-27 17:27   좋아요 0 | URL
으흐흐흐 으흐흐흐
전 아닙니다...

Forgettable. 2010-01-27 17:29   좋아요 0 | URL
접니다.. 실망이에요!

무해한모리군 2010-01-27 17:42   좋아요 0 | URL
뽀 측은지심도 없이!

뷰리풀말미잘 2010-01-27 19:58   좋아요 0 | URL
젠장, 이걸 보여드릴수도 없고.. ㅠ_ㅠ

Mephistopheles 2010-01-27 20:08   좋아요 0 | URL
이쯤에서 말미잘님은
유키스의 "만만하니"를 부르고 있을까요?
시비블루의 "외토뤼야~"를 부르고 있을까요?

2010-01-27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7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7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Jade 2010-01-27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미잘님. 미소년 얼굴 뒤에 그런 아픔이 ㅜㅠ

뷰리풀말미잘 2010-01-27 20:00   좋아요 0 | URL
ㅠ_ㅠ

Mephistopheles 2010-01-27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칭얼칭얼 거리며.."괜히 고자라고 그랬어.....괜히 고자라고....억울해..억울해.."
이러고 있으실지도 모르겠군요. 안성기 아저씨 주연의 "내시"를 보시고 분발하시기 바랍니다. (내시임에도 불구하고 할껀 합니다.)

뷰리풀말미잘 2010-01-27 23:38   좋아요 0 | URL
자꾸 이러시면 인증샷 올려버릴지도 모릅니다. 흐..

그런 영화가 다 있었군요. 검색해봤는데 꽤 재미있을거 같아요.
 

#. 0  



 

 

 

 

 

 

룰 대로 해서는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이빨로 글러브의 찍찍이를 물어 뗐다. 내가 벗어 던진 16온스 글러브는 아무도 없는 체육관 링 밖으로 풀썩 떨어졌다. 열여덟 살의 나는 채 영글지도 않은 맨주먹을 을러대면서 아마 이렇게 말했을 거다.

“꼬우면 너도 벗어.”

그도 글러브를 벗었던가. 어쨌거나 유혈이 낭자한 시합으로 기억한다. 불행한 것은 내 쪽에서 조금 더 낭자한 편이었다는 것,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더 심하게 낭자해지기 전에 퇴근한 줄 알았던 관장이 들이닥쳤다는 사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는 것은, 내가 그 길로 체육관에서 쫒겨났다는 거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다시 링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의치 두 개에, 눈가에 흉터가 몇 개 더 늘기는 했지만 이제 더 주먹이 오고 가는 것 따위에 자존심을 걸지도, 상대의 도발에 평정심이 흔들리지도 않게 되었다. 마음을 비운 것이 주효했는지 엇비슷한 체급에서 져 본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제까지는 말이다.

#. 1

흐릿한 시야로 상대를 가늠한다. 키는 5센치, 무게는 한 체급 정도 높다. 녀석은 바싹 가드를 올린다. 쌔고 쌘 크로스 암 가드. 공이 울리고, 고등학생이라는 그 애송이는 팔을 뻗어 내가 내민 글러브를 툭 치고, 다시 얼굴을 감싼다. 겁을 먹은 걸까. 나는 아무 의미 없는 견제용 잽을 던지고 느긋하게 스텝을 밟았다. 예상대로 애송이의 왼 주먹이 들어온다. 내 턱을 노리는 레프트 더블. 느리다. 이어지는 레프트 바디. 다시 백 스텝. 시합 나간다는 녀석 치고는 너무 느린 주먹이다. 이봐 고삐리. 그 주먹으로는 동네 중학생 주머니도 못 털어먹겠는데? 나는 씩 웃었다. 

가드도 하는 둥 마는 둥 사뿐사뿐 백스텝을 밟는데 아차, 어느새 등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로프의 감촉. 정식 규격보다 훨씬 작은 사이즈의 연습용 링이라는 걸 깜빡했다. 어쨌거나 빠져 나가면 그만이다. 가볍게 녀석의 바디에 잽을 넣어 주고 왼편으로 돌아 나가는데.

쾅. 하고 뭔가 묵직한 충격이 내 얼굴을 오른편으로 돌린다. 라이트 훅? 위험을 감지한 건 눈이 아니라 몸이었다. 반사적으로 끌어올린 가드에 다시 쾅 하고 충격이 느껴진다. 레프트. 그리고 이어지는 바디 연타. 그리고 순간 허술해진 안면 가드 사이를 송곳처럼 뚫고 올라오는 어퍼컷. 피 냄새가 훅 나면서 머리가 핑 하고 돈다. 침에서 찜찌름한 맛이 난다. 뭐야 도대체. 가까스로 소낙비처럼 쏱아지는 펀치를 뚫고 들어가서 녀석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찔러 넣었다. 이빨 끝이 깨져 나갔는지 작고 딱딱한 조각들이 입 안에서 버석거린다. 이런 젠장.

너 어디서 좀 놀아봤니? 

#. 2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김윤식의 명대사.

“한 번! 두 번도 아니야! 딱 한 번만 삐끗하면 씨발, 인생 나가리야. 어? 정신 빡세게 차리고! 항시 가드 올리고! 상대 주시하고!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상대가 씨발, 어떤 타이밍에 어떻게 들어오는가!”

왕년에는 잘 나가던 복서였던 노가다 꾼의 눈에, 세상은 링이다. 그래서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아들 동구의 취향은 그에게 너무나 허술한 약점으로 보이는 거다. 물론 영화에서야 동구는 놀라운 의지로 가부장의 절대적 세계관을 극복하지만, 만약 그것이 크레딧 올라갈 일 없는 현실이라면, 통통하고 귀여운 이반의 삶은 끊임없이 시험받고, 끊임없이 고달플 것이다. 종국에는 정체성을 감추고 일반에 섞여들거나 다른 성적 소수자들처럼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 가드 올리고 불안한 눈빛으로 상대 주시하며 살아가게 되겠지.

삶이 고달프고 시험받는 것이 비단 성적소수자 뿐은 아닐거다. 느낌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정치적 지향이 달라서, 돈이 없어서, 반푼어치도 안되는 권력에 휘둘려서 우리는 얼마나 높고 단단한 가드를 올리고 살아가는가. 진한 화장이, 딱딱한 수트가, 비싼 악세사리가, 짙은 선팅이, 귀에 꽃은 이어폰이 내겐 그런 가드의 일종으로 보인다.

#. 3

복싱의 Box는 실제로 정육면체의 그 박스를 의미한다고 한다. 경기가 시작하고 레프리가 Box를 선언하는 순간 서로를 노려보던 두 명의 파이터는 가상의 박스를 만든다. 어떤 박스? 길이는 쭉 뻗은 팔을, 높이는 자신의 배꼽에서 이마의 간격을 닮은 박스. 대충 새우깡 박스 정도의 크기쯤 되는 그런 박스. 문제가 생기는 건 링 중앙에서 둘의 박스가 부딪히는 순간이다. 경기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배타적이고 강경한 물리적 권한의 행사. 그것이 바로 복싱Boxing이다.

종종 링은 세계의 작은 시뮬레이션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보면 어떨까? 주먹은 권력을, 박스는 영토나 영역을, 다운은 실패를, 패배는 죽음이나 멸망을 상징한다고. 사회학자 김명진도 한국 사회를 ‘사각의 링’에 빗대어 설명한다. 지금 이 사회는 정말이지 단 한순간도 방심하기 어려운 위험사회라는 것이다. 정말로 대한민국의 사회는 링을 닮았다. 수 없이 많은 박스가 서로의 박스를 위협하고 갉아먹는. 어린 내가 가끔 링과 현실을 혼동했던 건 그런 이유지 싶다.

그렇게 보면 실제의 복싱 경기는 매우 신사적이지 않은가. 최소한 링에서는 슈퍼 헤비급이 동네 애송이를 두들겨 패는 법은 없으니까.

#. 4

내가 1라운드의 데미지를 회복 한 건 2라운드 중반 이후였다. 그 때까지 나는 거의 유효타 없이 완전한 수세에 몰려있었다. 승기를 잡은 스파링에서 이럴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녀석은 1라운드 초반 이후 거칠게 연타를 퍼부어댔다. 저돌적으로. 나는 그게 좀 얄미웠나보다.

2라운드 후반에 내가 일부러 주먹을 크게 휘두른 건 단지 녀석을 도발하기 위해서였다. 생각대로 녀석은 3라운드에도 날 코너로 몰아붙였다. 고등학생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경기 운영이었다. 내 몸뚱아리를 두들기는 콤비네이션은 아주 빠르고 리듬감이 있었다. 주먹에 힘만 좀 더 붙었다면 2라운드를 넘기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였으니까.

교과서적인 복싱을 구사하는 녀석의 유일한 문제점은 폭력 자체에 너무 도취된다는 점. 나도 그 터질 것 같은 아드레날린을 안다. 내 박스가 상대의 박스를 다 먹어 치울 때의 그 흥분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종류다. 상대가 침몰하는 그 순간 링 안의 위너는 정복자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나는 녀석이 더 도취할 수 있도록 침몰하는 상대를 연기했다. 단지 내게 더 큰 충격을 주기 위해 큰 궤도로 주먹을 휘두를 수 있도록. 그리고 3라운드 후반, 조바심을 내던 녀석은 일격을 날렸고, 큰 동작으로 턱 밑이 훤히 비었다. 사실 좀 치사하기는 했다. 회심의 라이트 어퍼. 아프냐.. 나도 아프다.

경기가 끝난 후 나는 정확히 이틀간 두통을 앓았고 아직도 오른쪽 턱이 좀 욱씬거린다. 아까는 다 읽은 책을 냉장보관하려고 했는데 그날 데미지의 영향이지 싶다. 으윽. 빌어먹을 고삐리.      

#. 5 



 

 

 

 

 

  

 

“왼손을 곧게 뻗어 봐 그 상태로 한 바퀴 돌아라. 지금 네 왼손이 그린 원의 크기가 대략 너라는 인간의 크기다. 말하는 의미를 알겠냐? 꼬마야. 그 원의 가운데 앉아서 닿는 곳에만 손을 뻗으면 넌 상처 없이 살 수 있어. 복싱이란 뭐냐, 그 원을 네가 주먹으로 뚫어서 밖에서 무언가를 빼앗아 오는 행위다. 밖에는 강한 녀석들로 가득 차 있지. 그리고 그들은 네  원 속으로 치고 들어오려고 한다. 맞으면 아프고 때리면 그들 또한 널 때릴 것이다. 그래도 하겠느냐? 원 속에 있는 게 안전한데도?”

언젠가부터의 내 삶은 영화 ‘GO’의 터프가이 아버지 야마자키 츠토무가 말 하는 것처럼 그리 진취적인 것이 아니다. 조금만 구부리고 살자고 결심한지가 벌써 2년 전인데 구부린 허리가 펴질 날이 요원하다. 혹시 벌써 굳어서 영영 못 펴게 된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올해 내가 세운 목표는 ‘살아남는 것’. 

좀 멀리 가게 되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바쁠 거다. 5년 만에 서재 리뉴얼한 보람도 없이 글 남길 짬도 없을지 모른다. 세상은 끊임없이 나의 박스를 물어뜯으려고 들 테고, 링 밖의 복싱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내 것을 빼앗길까봐 매일을 스트레스와 불면에 시달릴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열 여덟살의 나 처럼 글러브를 벗어 던지지 못할거다. 단지 가상의 마우스피스를 질끈 깨물 뿐.  

당신이 그렇듯, 나도 내 박스 안의 자질구레한 삶을 지키기 위하여 싸울테다. 비루하고 때론 남루하지만 그게 지금의 대한민국. 이 거친 삶의 자리에서 투쟁하는 복서들의 숙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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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1-19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미잘님의 복싱형태는 일보일까요. 아니면 일랑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마모루..(이건 절대 아닌 것 같고.)마사루나 타츠야는 아니고...설마...마시바 료..??

인생이 링이고 내가 링에 오른 복서라면 난 어떤 타입일까나 잠시 좀 생각 좀 해봐야 겠습니다.(오래가는게 쎈거라고 생각하면 전 포먼 같은 복서가 되고 싶겠군요.)

뷰리풀말미잘 2010-01-19 14:47   좋아요 0 | URL
더 파이팅 얘기죠? 그거 아직 못봤습니다. 아주아주 예전에 챔프인가 어디에서 연재할때 아, 이런 만화가 있구나 했었고, 애니메이션으로는 한 3화까지 봤는데 솔까말 좀 재미가 없었어요. ㅠ_ㅠ 뒤로 갈수록 더 재미있어지나요?

저는 별로 누구한테 배운 적도 없고, 별로 스탠스에 집착하는 편도 아니고 해서 특별히 이렇다 얘기할만한게 없습니다. 대충 조지 포먼의 크로스 가드와 타이슨 비슷한 피커부의 어중간한 형태일 것 같네요. ^^

인생이 링이라면 메이웨더의 약삭빠른 스타일이 좋을 거 같아요. 보기는 별로 재미가 없어도 유연하고 순발력 있고 맞지 않으면서 실리를 취하는. 용감하고 터프한 인파이터들은 대체로 선수 생명이 짧더라구요. ㅎㅎ

Mephistopheles 2010-01-19 15:13   좋아요 0 | URL
책으로 보시는 것이 백만배 더 재미있습니다. 왠지...스트리트 파이터 기질이 다분히 존재할 것 같은 말미잘님....^^(글러브 벗고 한 판! 이었을 때 알아 봤어야 하는데..^^)

뷰리풀말미잘 2010-01-19 16:50   좋아요 0 | URL
에이 전혀요. ㅎㅎ 그냥 좀 도도하고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하던 시절이 있었죠.

Mephistopheles 2010-01-19 20:01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말미잘님은 일랑 스타일 같습니다.^^

뷰리풀말미잘 2010-01-19 22:03   좋아요 0 | URL
일랑이라.. 기회 닿는데로 구해봐야겠습니다. ^^

Arch 2010-01-22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싱이라니, 흥미없어요.'라고 미뤄뒀는데...
미잘, 링 밖으로 나가는군요.
부디 살아남아요!

짙은 화장을 해도, 썬팅을 아주 근사하게 해도 난 단박에 어줍 미잘 알아보니까 다 소용 없어요^^

2010-01-22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뷰리풀말미잘 2010-01-22 16:03   좋아요 0 | URL
저 위 영화들 다 봤어요? 완전 강추인데. ㅎㅎ 저걸 다 보면 어쩜 쪼끔은 복싱에 흥미가 생길지도.

2010-01-22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