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 하는 육신의 울타리를 쳐 놓고 나와 남을 가르고, 나와 다른 생명 및 세계를 나누어 보는 우리들의 삶은 한마디로 자기 중심적인 삶이요 욕심 부리고 성내며 어리석은 이른바 탐진치 삼독의 삶이다. 나와 남, 나와 대상을 둘로 보면, 내 앞에 무엇을 더 놓으려 하고,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되면 성내고 짜증 부리게 된다. 이런 자기 중심적 삶은 개인적으로는 이기적인 삶으로 나타나고, 다른 생명이나 자연과의 관계에서는 비좁은 인간 중심적 삶으로 나타난다. 즉, 인간만을 중심으로 보아 다른 생명이나 자연을 인간의 편의를 위해 정복하고 착취하는 삶인 것이다. 이런 삶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사람과 다른 생명 및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괴로운 삶일 수밖에 없다. - P343

한국의 다종교 상황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견해도 없지 않다. 사실 논리적 귀결을 기대한다면, 한국 사회는 다종교 상황의 문제점이 그 어느 사회보다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할 만큼 전형적인 다종교 사회이고, 다종교 현상이 심하면 심할수록 종교간의 알력과 반목도 증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다종교 사회의 전범(典範)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은 극단적인 종교 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이에 대한 종교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그러나 주요한 이유는 2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 사회는 동일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 민족에 의해 형성된 국가로서 강력한 사회 통합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단위 공동체 간에 분쟁의 소지가 적다. 종교 분쟁이 심각한 사회와 달리 한국은 종족이나 지역 공동체가 종교 공동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남북한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심각한 분쟁을 겪고 있지만, 양 진영이 종교를 한 가지씩 나누어 갖고 있지는 않다. 한 쪽에서는 종교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있고 다른 한 쪽 역시 하나의 종교가 압도하고 있지 못하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지만, 만일 남북한이 각각 하나씩의 신앙을 나누어 가진 채 대립하고 있다면 분쟁의 정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이며 통일을 향한 전망도 그만큼 어두울 것임에 틀림없다.
두 번째 이유로는, 한국의 문화나 한국인들이 종교적 심성이 분열이나 개성보다는 통합과 총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체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비롯해서 인간 관계를 포함하는 모든 사회생활을 유교적 가치관과 질서에 따르고 있다. 특히 조상 제사는 전적으로 유교의 것이지만 대다수의 한국인이 이를 실천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고수하고자 하는 기독자들조차 한국에서는 조상 제사를 점차 수용해 가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기독자를 포함하는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인생을 무상하게 여기거나 윤회나 인과응보를 믿는 등, 인생관이나 가치관에서 다분히 불교적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자신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든 간에 합리적 이성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들에 맞닥뜨리게 되거나 일생의 중요 고비에 당면하면 대체로 점 치는 집을 찾거나 굿거리를 마련한다. 한국인들은 새로 들여온 점보 제트기나 슈퍼 컴퓨터 앞에서도 고사를 지내야 안심한다. 대규모 관급 공사의 기공식에서 해당 부서의 수장(首長)이 돼지머리에 지폐를 얹거나 막걸리를 올리는 광경 역시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무속적이다. 요즈음은 예수를 몸주 혹은 귀신으로 모시는 무당들이 등장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인들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기독교 공동체에 기꺼이 합류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구성상의 성격과 한국인의 심성이나 문화적 성격 때문에 종교간의 갈등이나 알력이 억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심각한 종교 분쟁을 겪어 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이 한국 사회에서는 전혀 염려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과 알력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다종교 상황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심리적인 긴장과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가정을 비롯해서 학교나 직장 등 모든 단위 사회 속에서 알력과 반목의 요인으로 기능하고 있다. 한국의 종교인들은 누구나 이러한 갈등과 알력에서 비롯되는 불쾌와 불안을 느끼고 있다. 다종교 가정에서 장례 의식 문제로 가족 구성원들끼리 불안을 겪거나 다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다툼은 심각한 가정 불화로 비화되기도 한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갈등과 알력을 분쟁 직전의 수준까지 경험하기도 한다. 불교와 기독교간의 알력 때문에 종종 저질러지는 방화 사건은 어쩌면 조상 대대로 물려 내린 팔만대장경 같은 민족의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 단숨에 잿더미로 변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여러 가지 요인들 때문에 이러한 갈등과 알력이 집단적인 분쟁으로 표출되지 않았을 뿐, 암묵적인 차원에서는 분쟁의 잠재력으로 포진하고 있다. 이러한 잠재력은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가연성(可燃性)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P390

우리는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에 실재하지도 않는 주인공의 희로애락에 공감하여 웃고 울고 성내고 기뻐한다. 타종교인을 위한 헌신은 타종교인을 위한 ‘공감적 이해’에서 출발한다.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내가 그 주인공이 된 듯이 느끼는 것이다. 타종교에 대한 공감적 이해란 내가 타종교의 신자가 된 듯이 느껴야 하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 없는 헌신이란 있을 수 없다. 만일 공감적 이해도 없이 사랑이나 자비를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결코 사랑이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공감적 이해 없이는 드라마 한 편도 온전히 볼 수 없다. 사랑이나 자비야말로 진정한 공감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성실하고 온전한 불자나 기독자는 공감적 이해를 가지고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을 추구해야만 한다. - P401

4) 고정적 실체를 부정하는 종교
독자들은 지금 한 권의 책을 손에 들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 책이 언제 어디서나 책일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불교는 실체적 존재로서의 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책이란 존재는 사용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책으로 존재한다. 즉, 종이와 활자로 이루어진 물체에 담긴 내용을 ‘읽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책이 존재한다. 그 물체를 베고 누우면 그것은 책이 아니라 베개이다. 그 물체 위에 그릇을 올려놓으면 그것은 그릇 받침이다. 찢어서 오물을 닦으면 휴지가 된다. 틀어쥐고 때리면 무기가 될 것이다. 심지어 뜯어먹는 염소에게는 음식이 된다. 종이와 활자로 이루어진 그 물체가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에 의해서 책이 되는 것이다. 그 물체 자체가 언제나 스스로 음식인 것이 아니라 뜯어먹는 염소에 의해서 음식이 되는 것이다.
불교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이처럼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 따라서 불교는 자신을 어떤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는다. 이것을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연기의 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드러나는 것이 불교의 자기 개방성이다. 자신을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폐쇄적으로 갇혀 있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를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은 자기 앞에 놓인 모든 존재에게 자기를 열어 놓는 것이다. 이 자기 개방성은 자신을 절대시하거나 완결시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 놓인 상대에게 영원히 열려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종교간의 대화에 정직하고 진지하게 임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있다. - P407

5) 상대적 한계를 고백하는 종교
불교는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성격을 대체로 4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눈·귀·코·혀·피부의 5가지 감각 기관이 각각 그 상대인 색깔·소리·냄새·맛·사물을 감지하는 인식으로서 전오식이라 하고, 둘째는 의식이라는 여섯 번째 감각 기관이 이 5가지의 감각적 인식들을 통합하여 모든 존재들에 내재하는 원리를 인식하는 제6식이다. 셋째는, 제7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모든 사물과 사물의 원리를 자기 중심적으로 보는 성격을 갖는다. 넷째는, 제8식이라고 하는데 이는 과거의 행위에 영향을 받아서 인식하거나, 현재의 행위가 미래에 영향을 끼치도록 현재의 행위의 결과를 간직하여 미래로 전달해 주는 씨앗과 같은 역할을 하는 성격을 갖는다.
우리는 인식 과정의 성격을 파악하는 이러한 불교의 입장에서 역시 불교의 자기 개방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은 분명 사물을 자기 중심적으로 인식한다. 술이 반쯤 담긴 술병을 앞에 놓고 ‘이제 반병밖에 안 남았구나’와 ‘아직 반병이나 남았구나’로 전혀 다른 인식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모든 인간이 자기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은 인간 자신의 상대적인 한계를 역설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인간은 반드시 과거의 영향을 받아 성립하며 미래의 인간은 현재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다는 사실 역시 인간의 상대적 한계를 고백하는 것이다. 불교는 인간 존재가 이러한 이상 인간의 종교 역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어떠한 계시도 그것의 절대성을 믿지 않는다. 계시 역시 구체적이며 상대적인 역사적 환경의 산물이라고 본다. 불교는 모든 종교가 각자 특수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성립한 자기 자신의 역사적 한계 속에 놓여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입장을 우리는 흔히 역사적 상대주의라고 부른다. 불교는 자신의 역사적 한계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또 한 번 불교가 철저한 자기 개방성을 갖고 있으며, 그로부터 종교간의 대화에 정직하고 진지하게 열려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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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가끔 영화 속 인물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 잘못하고 있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사람들, 제각기 자신만 아는 상처를 품고 있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걸어가는 사람들, 즉 ‘우리‘를 말이다. - P235

영화 속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1968년에 일본 여가수 이시다 아유미가 발표한 노래)‘의 가사처럼, 걸어도 걸어도 우리는 작은 배처럼 흔들린다. 살아도 살아도 인생이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도 마찬가지로 알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걷는 것뿐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걸어가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 P241

예전에는 이런 할머니가 없었다. 보나 마나 독거노인 냄새가 풀풀 나겠지. 내일 이 시간에 오면 다시 같은 얼굴을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도 남들과 대화하지 않을 것이다. 이유도 없이 기운이 솟아났다. 역사상 최초의 장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에게는 생활의 롤모델이 없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거리며 어떻게 아침밥을 먹을지 스스로 모색해 나가야 한다. 저마다 각자의 방식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_사는 게 뭐라고 - P247

칙칙해지지 말자.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자.
크게 소리 내어 웃어라.
먹고, 마시고, 흥겨워해라.
순간에 충실해라.
삶은 계속된다.
이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말을 되뇌어라.
‘그렇다고 별 수 있나?‘
여기,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다.

_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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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기술적으로 만들어진’ 것과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은 자명한 대립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이오테크놀로지가 발전하면서 우리가 직감적으로 하던 구별에 혼란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게다가 하버마스는 이 혼란이 "결국에는 인격체가 자신의 신체적 실존에 대해 갖는 자기 관계에까지 영향을 줄 것이다"라고 보았습니다.

이 말을 할 때 하버마스가 마음속에 떠올린 개념이 있습니다. 출산을 통해 인간의 자기 독자적인 생명이 시작된다는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출산성Natality입니다. 하버마스가 생각하기에, 복제 인간에게는 이 출산성이 없었습니다.

하버마스의 논의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이오테크놀로지의 탄생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사고방식이 전복될 거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자명했던 자연-기술의 대립항이 현대에서 비구분화되며 혼란을 야기한다는 말이죠. 특히 인간이 기술의 대상이 될 때, 이 비구분화는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지금까지 기술이 향하는 지점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이오테크놀로지가 발전하면서 그 기술이 인간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을 변화시켜온 기술이 이제 인간이라는 자연(본성: Nature)을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상황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우리에게 도래하는 현실을 똑똑히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제 인간 문제는 이제 막 현대의 역사적 상황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 P132

그린에 따르면 상황 A를 판단하는 뇌 부위는 전두전야 배외측부입니다. 이 부분은 냉정하고 지적인 추론을 할 수 있습니다(다섯 명 > 한 명). 이와 달리 상황 B를 판단하는 뇌 부위는 전두전야 복내측부입니다. 여기에서는 감성과 감정이 크게 작용합니다. 인간은 감성이 움직이는 탓에 뚱뚱한 남자를 떨어뜨릴지 말지를 물으면 대개 떨어뜨리지 않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게이지처럼 이 부위에 손상을 입으면 살찐 남자를 밀어서 떨어뜨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로써 뇌의 활동이 도덕적 태도와 연관되어 있음이 증명됐습니다. - P146

세계화의 트릴레마
아탈리가 예언하듯이 미국 제국이 세계화된 시장에 의해 쓰러질지는 나중에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이쯤에서 다시 세계화에 관한 논의로 돌아가봅시다. 세계화에는 아주 심각한 패러독스가 숨어 있고, 그런 이해 없이 미래를 전망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터키 출신 경제학자로 지금은 프린스턴고등연구소의 교수인 대니 로드릭은 2011년에 《자본주의 새판짜기》란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세계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논의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다음의 세 가지 길(트릴레마)이 있고 우리는 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국민민주주의와 세계시장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타협 지을 것인가? 우리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국제적 거래비용을 최소화하는 대신 민주주의를 제한하고 세계경제가 때때로 낳는 경제·사회적 손해를 무시하는 것. 세계화를 제한하고 민주주의적 정통성 확립을 바라는 것. 혹은 국가주권을 희생하고 세계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 이 세 가지가 세계경제를 재구성하기 위한 선택지다.
이 선택지는 세계경제의 정치적 트릴레마를 보여준다. 초세계화Hyper globalization, 민주주의, 그리고 국민적 자기결정이라는 세 가지를 동시에 충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 가지 중 두 가지밖에 실현할 수 없다.

즉 ① 만약 초세계화와 민주주의를 바란다면 국민국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혹은 ② 만약 국민국가를 유지하면서 초세계화를 바란다면 민주주의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③ 만약 민주주의와 국민국가의 통합을 바란다면 세계화의 심화와는 안녕이라는 것이죠. 로드릭은 이 세 가지 선택지를 위와 같은 표로 나타냈습니다.
문제는 이 세 가지 선택지(트릴레마) 중, 무엇이 바람직한 선택이냐는 점입니다. ①번은 세계연방주의를 지향해 국가주권을 크게 훼손합니다. ②번은 네오리버럴리즘(신자유주의)을 추진하는 정책으로, 이것은 민주주의를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야만 가능합니다. 이에 비해 ③번은 초세계화를 희생하는 정책인데 민주정치의 중심적 장인 국민국가를 남기죠.
그러면 로드릭은 어떤 선택지를 골랐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③번을 선택하고 그 정책을 건전한 세계화Sane globalization라 불렀습니다.

내 선택을 말하자면, 민주주의와 국가주권을 초세계화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각국의 사회를 지킬 권리를 갖고 있으므로 세계화 실현을 위해 이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면, 후자를 포기하는 게 낫다.
이 원칙이 세계화의 종언을 의미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중략) 우리에게는 최대한의 세계화가 아니라 건전한 세계화가 필요하다.

확실히 ①번의 세계연방주의는 국가의 다양성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고, 동시에 불가능해 보입니다. 또 ②번의 네오리버럴리즘 정책은 세계적 금융위기나 격차 확대 등 세계화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다만 ③번에서는 어떻게 해야 건전한 세계화가 가능할지 다시 한번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P186

‘자본주의에서 공유형 경제로’라는 리프킨의 발상을 지지하는 것은 현대의 디지털기술을 통해 경제학의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워졌다는 상황 인식입니다.

자본주의경제의 최종 단계에 이르면 치열한 경쟁으로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그에 따라 생산성이 최고점에 달해 ‘한계비용’, 즉 재화를 1단위 추가 생산하거나 서비스를 1유닛 늘리는 데 드는 비용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진다.

예를 들어 출판업을 생각해봅시다. 출판사, 인쇄업자, 도매업자, 운송·창고업자, 소매업자 등을 거치면 많은 비용이 들죠. 그런데 작가가 인터넷에 직접 책을 올리면 독자는 저렴한 가격으로(혹은 무료로) 그것을 입수할 수 있습니다. 리프킨에 따르면 전자책은 한계비용 제로로 제작·유통이 가능합니다. 이런 예는 현대사회에서 너무 많아서 일일이 셀 수조차 없습니다. - P196

그렇다면 현대사회를 오히려 ‘포스트 세속화의 시대’라 부르는 편이 적절하지 않을까요? 종교의 역할이 차츰 축소되고 있다는 기존의 세속화이론은 유럽의 기독교만 놓고 보면 타당합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보면 종교로의 회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베버가 근대를 규정할 때 ‘세계의 탈마술화’를 제창했다면 현대에는 오히려 ‘세계의 재마술화’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세계의 탈마술화일까요, 아니면 재마술화일까요? 현대사회가 그야말로 이 분기점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현대사회의 난점은 이 둘이 서로 얽혀 있어서 명확하게 나눌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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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은 몰래 집을 나왔다고 했다. 엄마도 모르게, 변소에 가는 척 입은 그대로. 맏딸인 자신이 공장 가 돈 벌어 오면 동생들이 배곯지 않고 살지 않을까 싶어서.
"엄마가 막내를 낳았는데, 배 속에 가졌을 때 먹지를 못해서 쥐새끼 같았어. 할머니가 그러더라구, 애기 낳은 여자가 속이 비면 미친다구…… 그래서 내가 함지박 하나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구걸을 해다 어머니를 먹였잖아."
간호사 시켜준다는 말만 믿고 만주까지 온 소녀가 수옥 언니였다. - P39

위안소에 있을 때 그녀는 몸뚱이가 하나인 것이 가장 원망스러웠다. 하나인 몸뚱이를 두고 스무 명이, 서른 명이 진딧물처럼 달려들었다.

하나인 그 몸뚱이도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의 것이 아니던 몸뚱이를 부려 그녀는 이제껏 살아왔다. - P40

그녀는 울고 싶은데 울음이 안 나온다. 아귀처럼 입을 한껏 벌리고 목을 늘어뜨려도 눈물 한 방울 안 난다. 자매들이 죽었을 때도, 오빠가 죽었을 때도 그녀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니까, 친인척들은 흉을 보았다. 독해서 시집도 안 가고 평생 혼자 살더니만 울지도 않는다고. 그녀는 너무 지독하게 살아서 눈꺼풀을 쥐어뜯어도 눈물이 안 나는가 보다 했다. 평생에 걸쳐서 두고두고 울 걸 소싯적에 다 울어버려서 그런가 보다고.
큰오빠가 죽었는데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자기 자신이 야속해서, 그녀는 자신이 짐승만도 못하게 되어버렸다고 자책했다. 짐승도 우는데 인간인 자신이 못 울게 되었으니.
짐승만도 못하게 되었는데 살아서 뭐하나 싶었다.

- P96

경남 합천이 고향이던 순덕은 인천에 식모 살러 가는 줄 알고 온 곳이 만주 위안소라고 했다.
"열두 살 먹어서부터 집 떠나 일본 장교 집에서 식모를 살았어. 집에 땟거리도 없으니 어떡해. 청소하고, 빨래하고, 심부름하고, 시장도 보고…… 장교 이름이 다케시였어. 3년 살고 나니까 다케시가 나보고 인천에 식모 살러 가지 않겠냐구 묻지 뭐야. 인천에 가면 한 달에 8원을 준다잖아. 그러겠다고 하니까, 석 달치를 미리 주는 거라면서 24원을 쥐어주지 뭐야. 20원은 엄마 주고, 4원은 내가 가졌어. 4원으로 원피스도 사 입고, 흰 고무신도 사 신고 얼마나 좋던지…… 떠날 때 어매가 역까지 따라와 능금을 사주더라. 이럴 줄 알았으면 4원도 엄마한테 줄걸 그랬어. 내가 안 갖고 엄마한테 줘버릴걸."
하하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뻐꾹새가 울었다.
"저놈의 뻐꾹새가 왜 자꾸 운대냐."
순덕이 그녀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녀도 라디오에서 뻐꾹새가 울어대니까 엄마 생각이, 고향 생각이 그렇게나 났다. 뻐꾹뻐꾹 그 소리 들으니까 눈물이 절로 났다.
키가 크고 얼굴이 너부죽하던 동숙 언니도 찔끔찔끔 눈물을 짰다.
"형제간도 못 보고 죽으면 어쩔까, 어쩔까."
한옥 언니가 복도 바닥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한탄했다. 동생 하나 있는 거 못 보고 죽을까봐. 바늘공장에서 돈 벌어 돌아와 송아지를 두 마리 사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못 보고 죽을까봐. - P97

군인들에게 돈을 받은 적이 없는데 돈을 받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쌀로도, 옷으로도, 고무신으로도 바꿀 수도 없는 군표가 화대였다는 이들이.
위안소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녀 자신이 원해서 군인을 받은 적이 없었다. 돈을 벌 목적으로 군인을 받은 적도. 그녀가 송장처럼 누워 있으면 군인들은 알아서 다녀갔다. 그녀의 몸에 들어오자마자 싸는 놈, 기다리다 싸는 놈, 방문을 덜컥 열고는 그녀의 몸 위에 있는 놈을 끌어내고 들어오는 놈…… 별별 놈이 다 있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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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둘을 낳고 키우면서 나는 애초부터 아이들을 대한민국의 비정상적인 입시 전쟁에 내몰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사교육 시장에 던져 넣고 싶지도 않았으며 하기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시키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내 경우를 돌이켜 볼 때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건 오직 하루하루 즐거운 마음을 갖고 자신의 뜻대로 살면서 주위 사람들과 정답게 지내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 삶이 얼마나 불행한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못하거나 꿈 없이 살아가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아이들이 자기 마음속의 속도계에 맞춰 배우고 익히고 만나며 살아가는 삶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랐다. 조금 부족하고 뒤처질지언정 언제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만 하면서 살지는 않기를 바랐다. - P197

사는 건 원래 카티가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살덩어리처럼 힘에 부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아침 그 덩어리들과 함께 힘겹게 몸을 일으켜야 한다. 모든 걸 내 잘못으로 돌리면 사는 게 힘들어진다. 내가 뚱뚱해서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라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다고, 되는 일이 없는 거라고 생각해 봤자 좋을 게 뭐가 있나. 그럴 때는 그저 카티처럼 지독히도 나쁜 운을 탓하는 수밖에 없다. 이번엔 운이 나빴어. 그렇지만 다음엔 좀 나아지겠지. - P205

과거의 것들은 여전히 우리의 인생을 좌우한다. 하지만 까밀이 물리 수업에 들은 이야기처럼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의 빛은 현재 존재하는 별이 아니라 40억 년 전의 것이다. 지금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이라 지목하는 과거의 상처 역시 이미 지나간 것일 뿐이다. 기시미 이치로의 책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어떤 경험도 성공이나 실패의 원인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40대의 까밀은 엄마가 돌아가신 아픔 때문에 알코올 중독에 빠진 것이 아니라, 그저 술을 마시고 싶었기 때문에 마신 것이다. 남편이 떠난 것은 남편이 바람을 피우며 가정을 소홀히 했다기보다는, 술에 빠진 까밀이 남편을 밀어냈기 떄문이다.
그래서 까밀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용기다. 바꿀 수 있는 걸 바꿀 수 있는 용기, 바꿀 수 없는 걸 받아들이는 마음의 평정. 그리고 그 차이를 아는 현명함. 다시 10대가 된 까밀이 남편과 사랑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애썼던 이유는 그가 떠나버린 후의 삶이 황폐해지고 망가질 것이라 믿어서였다. 하지만 40대의 삶으로 다시 돌아온 까밀은 망가지지도, 황폐해지지도 않는다. - P213

어른으로서 혼자 살아가는 일은 추위 속에 집을 잃고 맨몸으로 내던져지는 것과 같다. 하지만 엄마의 말대로 우리는 곧 따뜻한 곳을 찾아낼 것이다. 그건 행운이 필요한 일이지만, 우리는 반드시 행운이 찾아올 것이라 믿고 힘을 내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제는 전남편이 된 남편과 다시 만나 처음으로 그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홀로 씩씩하게 눈 덮인 길을 걸어가는 까밀처럼. ‘슬픔‘과 ‘기쁨‘의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어낸 진짜 어른, 까밀처럼 말이다. - P215

사실 나는 미니멀리즘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한때 텅 빈 아파트에 작은 스탠드 조명 하나 두고 생활했던 스티브 잡스가 떠오른다. 불필요한 물건을 떠안은 채로 살지 않는 것, 내게 정말로 필요한 물건들을 아껴 가며 오래오래 쓰는 건 중요한 일이다. 쉴 새 없이 돈을 써야 하는 소비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이 많은 것들이 다 필요한 게 아니었구나‘ 하고 자각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무슨 ‘이즘‘의 세계로 들어간다면 지나치게 의식적이거나, 또는 유행을 따라가는 일이 아닐까 싶어서 나로서는 어쩐지 실소가 나오는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고 보여 주기 위해 매순간 노력해야 하는 생활은 조금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어쩌면 ‘미니멀리즘 스타일‘의 가구나 가전제품이나 소품, 패션 같은 것들도 비슷한 맥락이겠지.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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