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순은 몰래 집을 나왔다고 했다. 엄마도 모르게, 변소에 가는 척 입은 그대로. 맏딸인 자신이 공장 가 돈 벌어 오면 동생들이 배곯지 않고 살지 않을까 싶어서. "엄마가 막내를 낳았는데, 배 속에 가졌을 때 먹지를 못해서 쥐새끼 같았어. 할머니가 그러더라구, 애기 낳은 여자가 속이 비면 미친다구…… 그래서 내가 함지박 하나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구걸을 해다 어머니를 먹였잖아." 간호사 시켜준다는 말만 믿고 만주까지 온 소녀가 수옥 언니였다. - P39
위안소에 있을 때 그녀는 몸뚱이가 하나인 것이 가장 원망스러웠다. 하나인 몸뚱이를 두고 스무 명이, 서른 명이 진딧물처럼 달려들었다.
하나인 그 몸뚱이도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의 것이 아니던 몸뚱이를 부려 그녀는 이제껏 살아왔다. - P40
그녀는 울고 싶은데 울음이 안 나온다. 아귀처럼 입을 한껏 벌리고 목을 늘어뜨려도 눈물 한 방울 안 난다. 자매들이 죽었을 때도, 오빠가 죽었을 때도 그녀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니까, 친인척들은 흉을 보았다. 독해서 시집도 안 가고 평생 혼자 살더니만 울지도 않는다고. 그녀는 너무 지독하게 살아서 눈꺼풀을 쥐어뜯어도 눈물이 안 나는가 보다 했다. 평생에 걸쳐서 두고두고 울 걸 소싯적에 다 울어버려서 그런가 보다고. 큰오빠가 죽었는데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자기 자신이 야속해서, 그녀는 자신이 짐승만도 못하게 되어버렸다고 자책했다. 짐승도 우는데 인간인 자신이 못 울게 되었으니. 짐승만도 못하게 되었는데 살아서 뭐하나 싶었다.
- P96
경남 합천이 고향이던 순덕은 인천에 식모 살러 가는 줄 알고 온 곳이 만주 위안소라고 했다. "열두 살 먹어서부터 집 떠나 일본 장교 집에서 식모를 살았어. 집에 땟거리도 없으니 어떡해. 청소하고, 빨래하고, 심부름하고, 시장도 보고…… 장교 이름이 다케시였어. 3년 살고 나니까 다케시가 나보고 인천에 식모 살러 가지 않겠냐구 묻지 뭐야. 인천에 가면 한 달에 8원을 준다잖아. 그러겠다고 하니까, 석 달치를 미리 주는 거라면서 24원을 쥐어주지 뭐야. 20원은 엄마 주고, 4원은 내가 가졌어. 4원으로 원피스도 사 입고, 흰 고무신도 사 신고 얼마나 좋던지…… 떠날 때 어매가 역까지 따라와 능금을 사주더라. 이럴 줄 알았으면 4원도 엄마한테 줄걸 그랬어. 내가 안 갖고 엄마한테 줘버릴걸." 하하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뻐꾹새가 울었다. "저놈의 뻐꾹새가 왜 자꾸 운대냐." 순덕이 그녀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녀도 라디오에서 뻐꾹새가 울어대니까 엄마 생각이, 고향 생각이 그렇게나 났다. 뻐꾹뻐꾹 그 소리 들으니까 눈물이 절로 났다. 키가 크고 얼굴이 너부죽하던 동숙 언니도 찔끔찔끔 눈물을 짰다. "형제간도 못 보고 죽으면 어쩔까, 어쩔까." 한옥 언니가 복도 바닥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한탄했다. 동생 하나 있는 거 못 보고 죽을까봐. 바늘공장에서 돈 벌어 돌아와 송아지를 두 마리 사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못 보고 죽을까봐. - P97
군인들에게 돈을 받은 적이 없는데 돈을 받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쌀로도, 옷으로도, 고무신으로도 바꿀 수도 없는 군표가 화대였다는 이들이. 위안소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녀 자신이 원해서 군인을 받은 적이 없었다. 돈을 벌 목적으로 군인을 받은 적도. 그녀가 송장처럼 누워 있으면 군인들은 알아서 다녀갔다. 그녀의 몸에 들어오자마자 싸는 놈, 기다리다 싸는 놈, 방문을 덜컥 열고는 그녀의 몸 위에 있는 놈을 끌어내고 들어오는 놈…… 별별 놈이 다 있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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