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기술적으로 만들어진’ 것과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은 자명한 대립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이오테크놀로지가 발전하면서 우리가 직감적으로 하던 구별에 혼란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게다가 하버마스는 이 혼란이 "결국에는 인격체가 자신의 신체적 실존에 대해 갖는 자기 관계에까지 영향을 줄 것이다"라고 보았습니다.
이 말을 할 때 하버마스가 마음속에 떠올린 개념이 있습니다. 출산을 통해 인간의 자기 독자적인 생명이 시작된다는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출산성Natality입니다. 하버마스가 생각하기에, 복제 인간에게는 이 출산성이 없었습니다.
하버마스의 논의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이오테크놀로지의 탄생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사고방식이 전복될 거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자명했던 자연-기술의 대립항이 현대에서 비구분화되며 혼란을 야기한다는 말이죠. 특히 인간이 기술의 대상이 될 때, 이 비구분화는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지금까지 기술이 향하는 지점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이오테크놀로지가 발전하면서 그 기술이 인간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을 변화시켜온 기술이 이제 인간이라는 자연(본성: Nature)을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상황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우리에게 도래하는 현실을 똑똑히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제 인간 문제는 이제 막 현대의 역사적 상황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 P132
그린에 따르면 상황 A를 판단하는 뇌 부위는 전두전야 배외측부입니다. 이 부분은 냉정하고 지적인 추론을 할 수 있습니다(다섯 명 > 한 명). 이와 달리 상황 B를 판단하는 뇌 부위는 전두전야 복내측부입니다. 여기에서는 감성과 감정이 크게 작용합니다. 인간은 감성이 움직이는 탓에 뚱뚱한 남자를 떨어뜨릴지 말지를 물으면 대개 떨어뜨리지 않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게이지처럼 이 부위에 손상을 입으면 살찐 남자를 밀어서 떨어뜨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로써 뇌의 활동이 도덕적 태도와 연관되어 있음이 증명됐습니다. - P146
세계화의 트릴레마 아탈리가 예언하듯이 미국 제국이 세계화된 시장에 의해 쓰러질지는 나중에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이쯤에서 다시 세계화에 관한 논의로 돌아가봅시다. 세계화에는 아주 심각한 패러독스가 숨어 있고, 그런 이해 없이 미래를 전망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터키 출신 경제학자로 지금은 프린스턴고등연구소의 교수인 대니 로드릭은 2011년에 《자본주의 새판짜기》란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세계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논의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다음의 세 가지 길(트릴레마)이 있고 우리는 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국민민주주의와 세계시장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타협 지을 것인가? 우리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국제적 거래비용을 최소화하는 대신 민주주의를 제한하고 세계경제가 때때로 낳는 경제·사회적 손해를 무시하는 것. 세계화를 제한하고 민주주의적 정통성 확립을 바라는 것. 혹은 국가주권을 희생하고 세계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 이 세 가지가 세계경제를 재구성하기 위한 선택지다. 이 선택지는 세계경제의 정치적 트릴레마를 보여준다. 초세계화Hyper globalization, 민주주의, 그리고 국민적 자기결정이라는 세 가지를 동시에 충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 가지 중 두 가지밖에 실현할 수 없다.
즉 ① 만약 초세계화와 민주주의를 바란다면 국민국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혹은 ② 만약 국민국가를 유지하면서 초세계화를 바란다면 민주주의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③ 만약 민주주의와 국민국가의 통합을 바란다면 세계화의 심화와는 안녕이라는 것이죠. 로드릭은 이 세 가지 선택지를 위와 같은 표로 나타냈습니다. 문제는 이 세 가지 선택지(트릴레마) 중, 무엇이 바람직한 선택이냐는 점입니다. ①번은 세계연방주의를 지향해 국가주권을 크게 훼손합니다. ②번은 네오리버럴리즘(신자유주의)을 추진하는 정책으로, 이것은 민주주의를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야만 가능합니다. 이에 비해 ③번은 초세계화를 희생하는 정책인데 민주정치의 중심적 장인 국민국가를 남기죠. 그러면 로드릭은 어떤 선택지를 골랐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③번을 선택하고 그 정책을 건전한 세계화Sane globalization라 불렀습니다.
내 선택을 말하자면, 민주주의와 국가주권을 초세계화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각국의 사회를 지킬 권리를 갖고 있으므로 세계화 실현을 위해 이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면, 후자를 포기하는 게 낫다. 이 원칙이 세계화의 종언을 의미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중략) 우리에게는 최대한의 세계화가 아니라 건전한 세계화가 필요하다.
확실히 ①번의 세계연방주의는 국가의 다양성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고, 동시에 불가능해 보입니다. 또 ②번의 네오리버럴리즘 정책은 세계적 금융위기나 격차 확대 등 세계화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다만 ③번에서는 어떻게 해야 건전한 세계화가 가능할지 다시 한번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P186
‘자본주의에서 공유형 경제로’라는 리프킨의 발상을 지지하는 것은 현대의 디지털기술을 통해 경제학의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워졌다는 상황 인식입니다.
자본주의경제의 최종 단계에 이르면 치열한 경쟁으로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그에 따라 생산성이 최고점에 달해 ‘한계비용’, 즉 재화를 1단위 추가 생산하거나 서비스를 1유닛 늘리는 데 드는 비용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진다.
예를 들어 출판업을 생각해봅시다. 출판사, 인쇄업자, 도매업자, 운송·창고업자, 소매업자 등을 거치면 많은 비용이 들죠. 그런데 작가가 인터넷에 직접 책을 올리면 독자는 저렴한 가격으로(혹은 무료로) 그것을 입수할 수 있습니다. 리프킨에 따르면 전자책은 한계비용 제로로 제작·유통이 가능합니다. 이런 예는 현대사회에서 너무 많아서 일일이 셀 수조차 없습니다. - P196
그렇다면 현대사회를 오히려 ‘포스트 세속화의 시대’라 부르는 편이 적절하지 않을까요? 종교의 역할이 차츰 축소되고 있다는 기존의 세속화이론은 유럽의 기독교만 놓고 보면 타당합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보면 종교로의 회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베버가 근대를 규정할 때 ‘세계의 탈마술화’를 제창했다면 현대에는 오히려 ‘세계의 재마술화’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세계의 탈마술화일까요, 아니면 재마술화일까요? 현대사회가 그야말로 이 분기점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현대사회의 난점은 이 둘이 서로 얽혀 있어서 명확하게 나눌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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