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 성리학 성리총서 5
진래 / 예문서원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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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대 나흠순에 이르러 주희가 정립한 이론체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난다. 나흠순의 사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주자학과 차이를 보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달라진 것은 본체론이다. 즉 리(理)를 유일한 실체로 여기던 기존 관점에서 기(氣)만을 실체로 여기는 이론체계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이는 기존의 주자학에 대해 여러 학자들에 의해 지적되던 모순점들을 해결하고, 이를 기반으로 불교 및 심학에 대항하여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치고자 하는 나흠순의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전에는, 동일한 유학의 테두리 안에서 여러 이론체계가 등장하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유학의 근본 목표와 정신은 선진 시대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동일하다. 시대에 따라 달라진 것은 본질적 가치를 더욱 잘 보존 및 실천하도록 하기 위한 요구에 따라 건립되었던 이론체계일 뿐이다. 이러한 다양한 체계들은 결국 ‘시대마다 맞닥뜨린 문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유학의 핵심 가치를 보존하고 실천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각각의 시기를 살아가던 유학자들이 고뇌하여 내놓은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론 체계가 시대마다 달라진다는 점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유학은 본질적으로 어느 시대에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는 사상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대에 따른 이러한 체계 변화가 사상의 본질을 가리거나 왜곡하게 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시대정신과 본질적 가치를 조화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체계 건립은 극도의 섬세함과 정교함을 요하는 작업이어야 할 것이다.

이번 기회에 이론체계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명대 이후 현대까지 어떠한 유학 이론체계들이 등장하였는지 탐구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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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자연과 인간의 정신 작용에는 어떤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그럼에도 평정심(ataraxia)에서 살아야 할 이유는 있는가?

A.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받아들여, 세계가 기계론적으로 설명된다고 하였다. 이는 ‘과거의 어떤 사건이 원인이 되어 미래의 어떤 사건이 그 결과 사건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인과적 결정론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발생된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정신 작용에 어떤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윤리학적 물음이다. 윤리학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공하고자 한다. 나는 윤리학의 물음이 성립 가능하려면 반드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이 전제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차피 숙명론적으로 흘러가는 세계에서라면 인간도 정해진 대로 행동할 것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답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는 ‘평정심(ataraxia)‘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의 목표라고 주장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결국 에피쿠로스가 세계에 대한 목적론적인 관점을 거부한 까닭은 그가 자신의 윤리학을 주장할 때 맞닥뜨린 문제점들 때문이었다. 즉 자유의지의 존재는 에피쿠로스가 평정심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도록 그에게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그의 자연학 체계에서 자유의지의 존재를 원자의 일탈 이론에 근거하여 설명하고자 하였다.

 여기가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철학이 차이를 갖는 지점이다. 스토아학파는 결정론적 세계를 상정하고 그 세계 하에서 이성은 정해진 법칙에 따라 합목적적으로 활동한다고 하였으나, 동시에 ‘부동심(apatheia)’의 경지를 이상으로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모순이 있다. 이는 중국철학사에서 위진현학을 다룰 때 살펴보았던 왕필과 곽상의 이론적 차이와 유사하다. 왕필은 제도는 인위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당위와 목적 추구를 이야기할 수 있지만, 곽상은 애초부터 제도는 무위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성에 스스로 만족하는 것’과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하는 것’이라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동시에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스토아학파와 곽상은 결정론적 철학 속에서 이론적 근거 없이 자유의지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주장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정합적이지 못하다.

 주제로 돌아와서, 이제 에피쿠로스학파에게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은 성립 가능하다. 에피쿠로스적 삶의 목적(Telos)은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혼란에서 벗어나서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리는 일종의 평정심을 찾는 것이다. 이들에게 평정심이란 이상적인 삶의 모습으로서, 불쾌감으로부터 해방된 일종의 정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러한 평정심에서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자연과 인간의 정신 작용에 목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쾌를 좋아하고 불쾌를 싫어하는 특성상 쾌감을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도한 쾌락 추구로서의 방탕함은 역효과를 낳는다. 또 한편으로 인간은 오로지 쾌감만 경험할 수는 없으며,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도, 살면서 불쾌감 역시 불가피하게 경험할 수밖에 없다. 가령, 현실적으로 즉시 실현될 수 없는 욕구는 불쾌감을 낳는다. 이 때 에피쿠로스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보다는, 내면적인 마음가짐을 다스리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즉 고통 앞에서도 침착할 수 있게 하며, 과도한 욕구 앞에서도 안정적일 수 있게 하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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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민음사 사서四書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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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배우기를 좋아하면 지혜로움에 가까워지고, 힘써 좋은 일을 실천하면 어짊에 가까워지며, 부끄러움을 알면 용맹스러움에 가까워진다. 이 세 가지를 알면 어떻게 자신을 수양해야 할 지를 알게 된다.

40 다른 사람이 한 번에 제대로 한다 하더라도 나는 (한 번에 안 되면) 백 번이라도 하고, 다른 사람이 열 번에 제대로 한다 하더라도 나는 (열 번에 안 되면) 천 번이라도 한다. 진실로 이러한 방법대로 실행할 수 있다면, 비록 어리석을지라도 반드시 밝아지고 비록 유약할지라도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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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적 미션

제1장
하늘이 명령한 것을 본성이라 하고, 그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하며, 그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으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고 삼가며, 다른 사람이 듣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한다.
(잘못하는 일이) 은밀한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세미한 곳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드러나더라도 모두 적절한 정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가장 큰 근본이고, 화라는 것은 천하에 두루 통하는 도리이다.
중화(中和)를 지극히 하면 하늘과 땅이 바르게 되며, 만물이 제대로 생기고 자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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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민음사 사서四書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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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 무려 2,500  전에 쓰였다. 그럼에도 많이 읽힌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古典)이라   있다. 고전이 고전이라 불리는 이유는 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속에서 로운 가치를 찾아내 때문 것이다.  역시,  여름 논어를 읽으며 어렵지 않게 보석 같은 가치를 발견할  있었다. 최근 심리학계에서 널리 회자되는 ‘성장형 마인드셋(Growth Mindset)’ 통하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글에서는 『논어 정신과 성장형 마인드셋을 비교하여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논어 평가해보고자 한다.

 

 지난 학기,  전공 과목 마지막 강의 있는 날이었다. 교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영상이 있다며, 강의  슬라이드 5 남짓한 TED 강연   보여주셨다. 성장형 마인드셋을 가진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높았다는  강연의 요지였다. 강연자인 펜실베니아대 심리학과 앤젤라  덕워스(Angela Lee Duckworth)교수의 말을 빌리면, 성장형 마인드셋이란 ‘학습 능력은 타고나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노력에 의해서 바뀔  있다 믿음을 가리킨다. ‘학습 능력이 타고나거나 고정되어 있다 ‘고정형 마인드셋(Fixed Mindset)’ 대비되는 태도다. 이는 비단 학습 능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어떤 상태나 상황에 있건간에 사람은 항상 현재보다  나아질  다는 뜻까지도 내포한다.

 

 『논어 마지막 페이지 넘길 때까지,  머릿속에 성장형 마인드셋이 계속 맴돌았다.  까닭을 소개하기에 앞서, 다음의 『논어  보자.

 

1-1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때에 맞게 익혀 나가면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지 않겠는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움을 품지 않으면 군자답지 않겠는가?”

_「학이(學而)」

 

 『논어  편인 「학이(學而)」 소개글에 따르면, ‘선진(先秦) 시대 일반적인 저작 관례에 의하면  책에서 제일 중요한 내용이  편에 배열되었다.’(p21)   편의 주제인 ‘배움[]’ 『논어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는 것을   있다. 실제로 공자는 호학지사(好學之士) 알려져 왔으며(p21), 그가 묻고 배우는 것을 통한 자기 발전을 중시하였음은 『논어곳곳에서 확인할  있다.

 

7-2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묵묵히 기억하며, 배우되 싫증 내지 않고, 남을 가르침에 지치지 않는 일들이라면 내게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_「술이(述而)」

 

7-21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사람이 길을 걸을때는 반드시 여기  스승이 있으니,  가운데 좋은 점은 골라서 따르고 좋지 않은 점은 가려내어  잘못을 고친다.”

_「술이(述而)」

 

15-30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 , 이것이 잘못이다.”

_「위령공(衛靈公)」

 

 이처럼 공자는 스스로 항시 배우고 익혀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고, 제자들에게도 이같이 가르쳤다. 이에 비추어  , 그는 인간의 품성이 태어날 때부터 전적으로 고정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성장형 마인드셋과 통한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누구나 학습 통해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있다는 이러한 인간에 대한 기대를 이어받아, 후에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하는 성선설을 기초  유학의 기본 이론을 확립하게 된다. 이는  주어진 선한 바탕을 힘써 기르면 누구나 선하게   있다는 의미,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가능성 느껴진. 이러한 인간 이해는 무척 낙관적이기에, 제법 근사하다.

 

 다만,  가지 불명확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 『논어에서는 군자를 소인과 구별하여 이야기하는데, 과연  군자다움과 소인다움 타고나는 것인, 아니면 소인도 부단한 배움을 통하여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있는 것인? 학습을 강조하는 장도 있는 한편, 타고난 성품의 차이를 인정하는 듯한 장들도 일부 찾을  있다.

 

17-3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오직 상지(上知) 하우(下愚)만이 바뀌지 않는다.”

_「양화(陽貨)」

 

9-21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싹이 돋았으나 이삭이 패지 못하는 것이 있고, 이삭은 팼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있도다.”

_「자한(子罕)」

 

 17-3에서 공자는 가장 뛰어난 [上知] 가장 어리석은 [下愚] 바뀌지 않음을 말한다. 가장 어리석은 자에게는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말로도 들린다. 9-21 특정 단계에서  이상 인격적 발전이 없는 사람을 묘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공자에게 있어 인격적으로 최고로 치는 사람은 군자 또는 성인이라 불리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다. 만약 군자와 소인의 성품이 저마다 타고나는 것이라면, 학습의 의미는 다소 퇴색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나는 타고난 성품 차이를 강조하는  공자의 본뜻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인간의 가능성은 우리가 쉽게  한계를 파악할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옹야(雍也)」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선생님께서 자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군자다운 유자가 되어야지, 소인 같은 유자는 되지 마라.”(6-12)’ 여기서 유자는 오늘날의 지식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노력 여하에 따라 군자다운 지식인이  수도, 소인 같은 지식인이  수도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설령 타고난 성품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하더라, 인간은 스스로를 포기하면 밑도 끝도 없이 타락할  있음을 생각해본다, 주어진 조건하에서 노력하는  또한 충분한 의의가 있다.

 

 이상, 성장형 마인드셋 연관지어 배움이라는 논어 핵심 가치를 평가해 보았다. 앞서 논어 여러 장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성장형 마인드셋 동아시아 문화권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숙한 믿음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수양과 도덕 실천을 통해 인간의 이상적 경지인 천인합일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유학의 기본 정신이다. 완전한 인간을 상정해두고 애써 그에 다다르고자 하니, 성장형 마인드셋이 자연스레 탑재될 수밖에 없었 것이 아닐까. 실제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대표되는 동아시아의 높은 교육열 역시, 이러한 유학의 기본 사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본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나를 꿈꿀수 있도록 하는, 배움을 통한 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긍정하는 공자의 사상은 현대에도 무척 희망적이고 낙관적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논어 지혜를 받아들여 타인을 원망하기보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나은 나를 꿈꾸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분명 지금보다  평화로워질 것이라 생각한다. (서평이 쌓여갈수록 나의 필력 또한 점차 향상될 것임을 믿는다.)


(2019년 8월 2일 오전 07:59 최종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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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9-23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논어가 민음사에서도 나온 게 있는 줄 몰랐습니다.
구입한 지 오래되니 책이 누렇게 변색되고 글자가 작아서 논어를 새로운 책으로 구입하여 다시 한 번 읽을 생각이었습니다. 좋은 정보 얻어 갑니다.

베텔게우스 2019-09-24 19:00   좋아요 1 | URL
네. 저는 이 책으로 처음 논어를 접했는데, 구성이 깔끔해서 보기 좋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교수신문 선정 최고의 논어 번역본으로 뽑혔다고도 하고요. 그래서 민음사 논어를 읽어보셔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라 생각합니다.ㅎㅎ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