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정으로 "나"라는 주체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식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을 사랑하고 그것에 책임을 지며 능동적으로 관심을 갖고 살 경우에만 주어진다. 이렇게 참된나로 살 때, 우리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하고 재물을 상실해도 정체성에 손상을 입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주체적인 자아를 실현하면서 자발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의 사고와 감정과 행위는 그들 자신의 표현이지 결코 자동인형의 표현은 아니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예술가는 예술을 업으로 하는 전문가 집단을 가리키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을 의미한다.
또한 현대사회의 개인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낱알과 같다. 이 낱알들은 서로 낯선 것으로 존재하면서 이기적인 이익과 서로를 이용할 필요 때문에 함께 얽혀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서로 간에 소외되어 있다. 사람들은 그 결과 고립과 고독으로 괴로워하지만, 그러한 고립과 고독을 서로 간의 연대와 사랑을 통해서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국가와 민족 또는 민중이란 추상적인 존재와 그들을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인기 정치가들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고 한다.
루터의 시대에서 히틀러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층 중산계급은 이러한 적개심과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향락에 빠져 사는 자들에 대한 적개심과 질투심을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의분으로 합리화했다. 프롬은 증오나 시기심은 ‘종교적 · 도덕적 의분‘으로 위장할 때 가장 파괴적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이는 ‘종교적 · 도덕적인 의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른바 ‘타락한‘ 인간들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은채 잔인하게 공격하고 살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양심의 소리를 천부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그것은 사회적인 요구가 내면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양심의 지배는 외적 권위의 지배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이 양심의 명령을 자기 자신의 명령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외적 권위에 거슬리는 행동을 할 경우에 죄책감을 품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양심의 명령을 어긴 사람은 평생에 걸쳐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 수도 있다.
공자의 문화에 대한 태도는 간단히 말해 ‘인간의 주재성에 관한 긍정‘이다. 이것이 인문지학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인간의 ‘주재성‘을 긍정할 때는 반드시 正·反 두 면의 문제에서 언급해야 된다. 정면에서 말하면, 인간의 주재성을 긍정하려면 반드시 이 주재성 자체에 대하여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반면에서 말하면, 인간의 주재성을 긍정할 때 일체의 객관적 제한과 주재성의 충돌에 대하여, 역시 명확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공자는 앞 부분에 대하여서는 仁, 義 두 관념을 통하여 해답하였다. 바꾸어 말해, 인간의 주재성은 인간이 공심을 세우고 올바름을 추구할 수 있는 데에서 나타난다. 이 점에 관하여는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둘째 부분의 문제에 관하여 말하면, 인간이 비록 이 주재성을 가지고 있으나 구체적인 인생의 과정 중에서는 인간이 자각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어떤 제한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제한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공자의 이 문제에 대한 견해는 그의 ‘義命分立設‘에 나타난다. 《논어》 중 공자가 命을 논한 자료는 공자의 명에 대한 견해와 의명분립의 기본 관점에 대하여 표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伯牛가 병에 걸렸다. 공자는 병문안을 가서 창너머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가망이 없는가 보다. 운명인가 보다. 이런 [훌륭한]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런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伯牛有疾, 子問之自牅執其手曰, 亡之, 命矣夫. 斯人也, 而有斯疾也, 斯人也, 而有斯疾也. <雍也> 공자는 염백우의 병이 위급하다고 여기고 그의 조우를 운명[命]에다 돌 93 렸다. 공자의 뜻은 염백우가 이러한 조우를 당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마침내 이러한 질병을 얻은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命은 뚜렷이 義와 분립된다. 명은 객관적인 제한이니 義가 자각적인 주재성을 나타내는 것과는 다르다. - P92
그런가 하면 믿음은 바뀔 수도 있다. 믿음을 바꾸는 데는 바람직한 방법이 있고 그렇지 않은 방법이 있다.대화는 바람직한 방법이다. 강압은 여러 자명한 이유로 바람직하지 않은 데다가 효과 자체도 턱없이 떨어진다. 누구나 답답하면 본능적으로 강압의 유혹을 느끼지만, 원수에게 두들겨 맞는다고 믿음을 바꿀 사람은 없다. 사람의 믿음에 깊이 다가가는가장 좋은 방법은, 거의 언제나 솔직한 대화다. 대화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행위로서(영어 단어 "conversation"에서 "con"은 라틴어로 "함께"라는 뜻이다), 부드러우면서도 효과적으로 타인의 믿음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대화란 본래 협업인지라, 상대방이 믿음을 재고하고 행동을 바꾸는 계기가 될수 있다. 남뿐만이 아니다. 대화는 나의 믿음을 되살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람의 생각을 바꾸거나 움직이고,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고, 우정을 지키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상대방에게 호의와 공감과 연민을 보여주어야 한다. 상대방을 존중해주고 품위를 지켜주어 심리적으로 안전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사람은 자기 말을 들어주고,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예의를 지키는 사람에게 우호적으로 대하게 되어 있다. 사람의 믿음을 고착시키고 분열과 불신을 부추기는 확실한 방법은 적대적이고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악의적이거나, 남의 말을 듣지 않거나, 상대를 무시하거나 예의 없는 사람은 저절로 싫어질 수밖에 없다. 여러분도 살면서 그런 사람을 한 번쯤은 틀림없이 만나봤을 것이다. 다행히도 안전하고 신뢰감 있는 소통 환경을 만드는 방법은 전혀 어렵지 않다. 한마디로, 서로 ‘대화 파트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인을 생산적 대화를 위한 협력 상대처럼 대하면 된다. 그리고 실제로 협력 상대가 맞다. 대화를 협력 작업으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대화를 예의 있게 풀어나가면서 인간관계를 망가뜨리지 않고 돈독히 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런 자세를 취하기는 의외로 쉽다.
이기는 대화에서 이해하는 대화로 가장 먼저 목표로 삼아야 할 일은 상대방의 추론을 이해하는 것이다. 적대적 사고, 즉 맞서고, 다투고, 따지고, 비웃고, 이긴다는 생각을 버리자. 그보다는 손잡고, 힘을 합치고, 듣고, 배운다고 생각하며 협력적 사고를 하자. "이 사람은 내 적이며, 내 말을 알아듣게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접고, 대신 이렇게 생각하자. "이 사람은 내 대화 파트너이며, 그에게서 무언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 가령 그가 왜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혹시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파트너로 삼고 대화할 수 있지. 하지만 인종차별주의자와는 죽어도 못해!" 아니다, 할 수 있다. 흑인 음악가 대릴 데이비스는 KKK 단원들과 예의 있는 대화를 나누어 단원들이 KKK에서 탈퇴하게끔 설득했다. 그는 그 증표로 넘겨받은 흰색 고깔 두건을 벽장 가득 보관하고 있다. 우리도 인종차별주의자와 대화할 수 있다. 아니, 어떤 신념 체계를 가진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왜 그러한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상대와도 충분히 대화할 수있다. 대화란 두 사람이 모르는 것을 서로 자연스럽게 배우는 기회다. 누군가를 파트너로 삼아 예의 있는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상대의 결론에 수긍하는 것도 아니요, 그의 추론에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교양의 척도는 수긍하지 않고도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옛말도 있다.) 상대의 사고를 따라감으로써 그 사람의 믿음과 그리 믿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이 내 추론을 이해하게 될수도 있고, 본인의 추론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내 믿음이 그릇되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다. 서로 파트너가 되어 대화하는 일은 의견의 일치나 불일치를 가리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예의와 관용을 바탕으로 서로 이해하고자 하는 활동일 뿐이다.
2. 대화를 강요하지 않는다.상대방에게 대화에 응하지 않거나 질문에 답하지 않거나 대화를 언제든 끝낼 길을 열어준다. 다시 말해, 대화를 불편해하는 상대에게 대화를 강요하지 않는다.3. 순수한 호기심에서 묻는다.‘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라는 의문을 품되, 상대방에게 그렇게 묻지 않는다. 의문을 풀기 위해 진지하게 질문한다. 의아하다는 듯이 묻지 말고 순수한 호기심에서 묻는다. 의문을 해소하려고 애쓰다 보면 대화가 험악해지지 않고 원활히 진행되는 데 도움이 된다.
8. 심각한 잘못이 아닌 한 질책하지 않는다.커지는 여기서 말하는 질책이란 상대방이 도의적인 선을 넘었음을 알리는 행위를 뜻한다. 보통 상대방이 문제의 발언을 하자마자 강하게 비판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질책 후에는 대개 "이렇게 해야한다", "그렇게 해선 안 된다" 같은 도의적인 지적이 이어진다. 상대방을 질책하는 행위는 라포르를 훼손한다. 특히 상대방의 말을 끊고 하는 경우는 더욱더 그렇다. 그러기보다는 조심스럽게 때를 봐서 우려를 표명하도록 하자. 아마도 상대방은 자기 생각을 최대한 잘 표현하려고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아무리 거칠게 표현했더라도 잘못을 질책하기보다는 논점을 이해해주고 진정성을 높이 평가해주자. 물론 상대방이 의도적으로 무례하게 굴거나 폭언을 할 때는 대응에 나서야 한다. 그럴 때는 그런 식으로 굴면 안 된다고 선을 긋거나, 대화를 끝내는 것이 좋다.9. 예의를 지킨다."해주실 수 있을까요?", "고마워요" 같은 말을 꼭 한다. 상대방이 내 말에 반론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히면 의견을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나쁜 것을 나쁜 줄 알면서도 원하는 사람은 없다『메논』에서 소크라테스는 나쁜 것을 나쁜 줄 알면서도 원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사람은 가진 정보에 따라 행동하고 믿음을 형성하며, 그에 따른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가진 정보가 다르면 나오는 결론도 다르다. 가령 옛날 의사들은 몸 안에 피가 너무 많으면 병이 난다고 믿어 병을 치료할때 거머리를 썼다. 거머리를 환자의 몸에 붙여 피를 빨게 했는데, 환자를 낫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디까지나 좋은 결과를 바라고 한 행동이었으며, 현대인과는 가진 정보가 달랐을 뿐이다. 오늘날에는 피의 양과 질병이 무관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우리는 누구나 선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상황의 전모를 보지 못해 올바른 결론에 이르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면 무지하거나, 제정신이 아니거나 혹은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 마음을 버리고, 이런 마음을 가져보자. 상대방은 문제를 나와 다른 시각에서 보고 있을 뿐이다. 혹은 자기 나름대로 최선의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무지하거나 제정신이 아니거나 악한 사람일 가능성보다는, 선의를 갖고 있으나 의사소통에 서툰 사람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우리는 대화 상대와 의견이 다르면 상대의 의도와 동기를 실제보다 나쁘리라고 짐작하는 경향이 있다. ‘보수주의자는 인종차별주의자다‘, ‘진보주의자는 애국심이 전혀 없다‘, ‘공화당 지지자는 가난한 사람들에 신경 쓰지 않는다‘, ‘민주당 지지자는 국방에 무심하다‘ 등이 그러한 짐작의 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런 결점 때문에그렇게 믿고 그렇게 주장한다고 짐작한다.대개는 잘못된 짐작이다. 상대방이 품은 의도와 동기는 내 짐작보다 좋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미국 공화당 지지자의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그보다는 부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낙수 효과‘로 인해 고용 창출 등 기회가 늘어난다는 생각, 그리고 사람은 ‘엄한 사랑‘으로 대해야 빈곤 탈출 의지를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고소득자의 세금을 감면할 경우 빈곤층에도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가는 것이 맞다. 그 생각이 정말 옳은지 그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공화당 지지자도 상황을 개선하고 싶은 마음이고, 민주당 지지자가 흔히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의도를 가졌다는 점이다. 상대가 나쁜 의도를 가졌다고 짐작하면 대화는 숨 막히게 답답해진다. 그 순간 협력은 중단되고, 대화를 통해 진실에 도달할 가망은 희박해진다. 또 상대방이 내 말에서 가시를 느끼면서 방어적으로 나오기 쉽다.설상가상으로, 방어적인 자세가 되면 믿음을 바꾸기도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대화에 더 악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따로 있다. 바로 나도 상대방의 말을 잘 안 듣게 된다는 것이다.
젊은 한의학자 두 분이 쓰셨다는데 내용이 만만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