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종교에 대한 이들 세 가지 측면은 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가장 먼저 우리는 이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다. 도덕적 가치는 신의 말씀에서 비롯된다고. 신의 말씀이라고 하는 순간, 종교의 도덕적인 측면과 형이상학적 측면은 서로 연결된다. 이러한 사실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는데, 신의 뜻에 복종하고 신을 위해 봉사한다면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우주 전체와 연결돼 있으며 인간의 행동은 더 커다란 세계에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바로 이것이 감화적인 측면이다. 그러므로 이 세 측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쉽게 통합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과학이 처음 두 측면, 즉 종교의 형이상학적 측면과 도덕적 측면과 가끔 갈등을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 P63

64-8 나는 방금 종교의 도덕적 가치들이 과학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했다. 이제 그 말을 옹호하는 몇 가지 근거를 대야할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과학을 통해 도덕적 가치에 대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결정적인 이유 하나를 찾지 못하는 경우에는 자질구레한 이유 여러 개라도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내가 도덕적 가치가 과학의 범주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네 가지 이유를 여기서 밝히겠다.
첫째, 앞서 기술한 대로, 과거에 종교의 형이상학적 입장과 과학적 사실 사이에 갈등이 몇 차례 존재했지만, 종교의 형이상학적 입장이 변한 후에도 도덕적 관점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것은 그 둘이 독립적이라는 사실에 하나의 근거를 제공한다.
둘째로, 최소한 기독교적인 윤리를 실천하는 선한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아, 그런데 내가 종교에 대해 언급할 때 아주 편협한 관점을 취할 거라는 말을 미리 했어야 했는데 그걸 깜빡 잊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도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처럼 폭넓은 주제를 다룰 때에는 구체적인 예를 드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기독교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여러분이 무슬림이거나 불교도거나 혹은 여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내 말을 그에 맞게 번역한 다음 어떤지 살펴보면 되겠다.
셋째는, 내가 아는 한, 과학적인 증거를 전부 모아도 황금률(마태복음 7:12, 누가복음 6:31 의 교훈, 흔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로 요약됨: 옮긴이)이 옳은지 그른지에 관해 알려 주는 근거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과학적 연구에 기초해서 어떤 문제에 대한 "도덕적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좀 철학적인 논거를 펼쳐 보려고 한다. 이건 내가 잘 못하는 것이긴 하지만, 과학과 도덕적 가치가 왜 이론상 서로 독립적인가에 대해 약간의 철학적 논증을 해 보고 싶다. 보통 인간이 살면서 겪게 되는 중요한 문제들은 대부분 "내가 이걸 해야 할까?"와 같은 문제이다. 행동에 대한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이걸 해야 할까?"와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편리하다. 하나는 "이걸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부분인데, 그것만으로는 그 행동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두 번째 부분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건 바로 "자, 나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길 원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걸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첫 번째 부분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 사실 이 문제는 전형적인 과학적 질문이다. 그렇다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 알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결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과학은 아직 무척이나 초보적인 단계에 와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첫 번째 부분은 과학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문제를 다룰 방법을 가지고 있다. 바로 "시도해 보고 결과를 보라." 그리고 "정보를 수집해라." 등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시간에 얘기를 했다. "만약 이걸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문제는 전형적인 과학적 질문인 반면, 그 다음 질문인 "나는 이 일이 일어나길 원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으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음, 여러분은 만약 어떤 행동을 하면 모든 사람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물론 난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아‘ 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이 죽는 것을 당신이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과학으로 밝혀낼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최종적인 판단은 결국 과학을 벗어나 당신의 몫이 된다.
다른 예를 들겠다. "이 경제 정책을 따른다면 불경기가 발생하게 될 걸 나는 알아. 물론 불경기가 발생하는 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나 또한 마찬가지이고." 라고 말할 수 있다. 잠깐만! 불경기가 발생할거란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곧바로 결론에 도달할 순 없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국가가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믿음, 불경기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하더라도 그 희생에 비해 더 많은 것을 얻을수 있는지에 대한 고려, 내가 국가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자존감 등 여러 가지 측면을 함께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 하나의 경제 정책은 그로 인해 이득을 얻는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을 함께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그래서 결국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총체적으로 고려해서 궁극적인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 어떤 현상이 발생할 것인지에 대한 논증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끝에 가선 "난 이걸 원해" 혹은 "아니, 그건 원하지 않아" 중 하나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 질문은 과학적인 질문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안다는 것만으로, 다시 말해 첫 번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얻게 될 최종 결과들을 안다는 것만으로 결국 그것을 원하게 될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과학적인 방법만으론 도덕적 가치문제에 대해 아무런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고, 그래서 그 둘은 서로 독립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 P64

68-9 이제 종교의 세 번째 특징인 감화적인 측면으로 관심을 돌려 보고 싶다. 이 문제에 대해선 나도 답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 모두에게 물어보려고 한다. 종교로부터 오는 의지력이나 안정감과 같이, 오늘날 우리를 감화시켜 주는 종교적 원동력들은 종교의 형이상학적 측면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감화는 신을 위해 일하고 그의 의지에 순종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감정적인 유대감이나 당신이 무언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은 신의 존재에 대한 아주 작은 의심만으로도 약해질 수 있다. 따라서 신에 대한 믿음이 불확실해지면 때론 그런 감화를 얻는 데 실패하게 된다. 형이상학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종교적 입장보다는 과학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의와 싸울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종교의 감화적 기능을 유지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다. 이것이 가능한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여러분은 과학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 방식으로 종교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반영한 우주‘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과학과 같이 모험적이며 미지의 세계를 향해 끝없이 발전하는 분야에서 미리 질문에 대한 정답을 정해 놓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혹은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우리의 답들 중 일부가 틀렸다는 사실에 직면하지 않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적인 측면에 대해 종교가 절대적인 신뢰를 요구한다면, 과학과 갈등이 생기는 건 피할 수 없다. 종교 자체에 대한 의심에도 불구하고 감화를 주는 종교의 실제적 가치를 유지해 나간다는 것도 나는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이건 정말이지 심각한 문제이다. - P68

69-71 서구 문명은 두 가지 위대한 유산 위에 건설되었다. 하나는 과학적 정신으로서의 모험이다. 이는 진리를 향해 ‘미지의 세계‘ 를 탐험하는 모험이며 우주에 대해 답할 수 없는 미스터리들은 답하지 않은 채로 남겨두도록 요구하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의심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인간 지성에 대한 겸허함‘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 싶다. 다른위대한 유산은 기독교적 윤리인데, 여기에는 사랑의 실천, 모든 인류를 향한 형제애, 개인의 인간적 가치 등이 포함된다. 이는 ‘영적인 겸허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두 유산은 논리적으로 완전하게 일관성을 가진다. 하지만 논리가 전부는 아니다. 어떤 생각을 좇으려면 마음이 따라가야 하니까. 사람들이 종교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들은 무엇을 향해 가는 걸까? 현대 교회는 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장소인가? 더 나아가 신을 불신하는 사람에게도? 아니면 현대 교회는 그런 의심의 가치를 인정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며 장려해 주는 곳인가? 서구 문명을 지탱해 온 두 거대한 유산이 서로 일관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는 그중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힘과 안식을 다른 유산의 가치를 공격하는 데서 얻어 오지 않았던가? 이제는 이런 불행한 역사를 피할 순 없을까? 서구 문명의 두 기둥이 모두 생동력 있게, 서로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함께 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감화는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오랫동안 인간의 도덕적 규범의 근원이었으며 그 규범을 따르도록 감화를 주었던 종교를 위해, 그리고 종교와 과학과의 관계를 위해, 내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은 이 정도인 것 같다. - P69

71-2 늘 그래 왔듯이, 우리는 요즘도 국가 간의 충돌을 경험한다. 특히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이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이 강연이 진행되던 1960년대는 미국과 소련이 심각한 냉전 상황에 놓여 있던 시절이었다: 옮긴이). 나는 우리가 도덕적 가치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사람들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르다. 만약 우리가 서로 옳다고 믿는 것들이 실상 불확실한 것이라면 이 갈등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 갈등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 시장 경쟁을 통한 자본주의와 정부의 규제를 통한 사회주의 중 어느 체제가 옳은가 하는 문제가 과연 확고하고 자명한 답을 가진 문제일까?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불확실하다는 경계를 유지해야 한다. 어쩌면 자본주의가 정부 규제를 통한 경제 관리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데 거의 확신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정부 또한 규제를 하긴 한다. 엄밀히 말하면, 52퍼센트만큼 규제를 한다. 이 수치는 법인에 대한 소득세 규제를 근거로 말하는 것이다.
흔히 미국을 상징하는 한쪽에 종교, 소련을 표현하는 반대편에 무신론을 놓고, 이분적으로 갈라놓은 상태에서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서로 다른 두 개의 관점이 있을 뿐 올바른 결정을 내릴 기준은 없다. 인간과 국가는 어떤 가치를 안고 있는가, 국가를 위협하는 범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같은 문제들 역시 중요한 문제들이고 여러 해답들이 존재하겠지만 그들 역시 그저 불확실한 상태로 놓아둘 수밖에 없다. 실제로 갈등이 있긴 한 걸까? 아마도 통제적인 독재정부는 좀 더 혼란스런 민주주의 쪽으로, 또 혼란스런 민주주의는 좀 더 통제적인 독재정부 쪽을 향해 어느 정도 절충하며 진보하고 있는 것 같다. 불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연히 갈등은 없어진다. 이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믿지 않는다. 갈등은 항상 존재한다.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모든 개인적인 노력은 국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소련이 말하는 바로 그 순간, 갈등의 위험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다양성, 심각한 사회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 새로운 관점에 대한 열린 태도 등 이 모든 소중한 것들이 바로 그 순간 소련이 국가적으로 제시한 해결책과 충돌하게 되기 때문이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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