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학파들에게 우선 공통이라 여겨지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이론 측면을 넘어서 실천 측면에 우위성을 두는 태도다. - P28

그리하여 이에 하나의 질문이 뒤따르게 된다. "만일 참됨도 거짓됨도 마지막까지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 이론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받아들이지 말지 하는 문제를 결정하게 하는가?" - P33

즉 ‘도대체 무엇이 실제로 갈릴레이로 하여금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을 뒤따르게 했고, 반대로 프톨레마이오스의 견해를 거부하도록 했기에, 그가 한편에 대해서는 참되다고 하고 다른 편에 대해서는 그릇되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질문은 분명 다음 물음을 먼저 해결할 때 가능하다고 본다. 곧 ‘객관적인 판단기준이 부재할 경우, 도대체 무엇이 그 어떤 이론이 참되다거나 그릇되다는 믿음을 결정하는가?’ 하는 물음 말이다. - P33

헬레니즘 시대의 사상가들은 물론 핵심적인 관건을 단연 인간의 실천적인 측면에 두었기에, 모든 이론적인 학문은 그들에게 그 같은 관심에 입각해서만 합당하고 절실하게 요구되었을 것이다. - P42

에피쿠로스학파에게 쾌락이 혹은 스토아학파에게 미덕이 마치 절대적인 목적이듯 생각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에우다이모니아만이 그 두 학파 혹은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가치로서 그로부터 다른 모든 가치들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다. - P50

이러한 태도에 상응하여 한 가지 확실한 경향으로서 그 발전도상에서 점차적으로 더 강하게 ‘수동적인 태도’가 부각되었다. 사람들은 가능한 한 자신의 고유한 행복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거나, 그들의 세계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주 적은 능력만을 행사할 뿐이라고 믿거나, 나아가 행복을 위해 애쓰는 경우가 오히려 행복에서 멀어지도록 만든다는 생각에 길들여졌다. 사람들은 스스로 행위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행해져야 할 여러 다그침에 기껏 순응하는 데 만족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사람들 각자 고유의 능력에 따라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다는 신뢰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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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 정신은 도덕 인격의 근거로서 이것을 소홀히 하면 모든 정신이 그 근본을 상실하게 된다. 객관 정신은 도덕 이성이 외부로 펼쳐지는 것으로서 이것을 소홀히 하면 절대·주관 정신 모두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다. 절대 정신은 모든 정신의 귀착점으로서 이것을 소홀히 하면 인류는 안식처를 잃게 된다. - P39

만약 자발성이 있다면 스스로 노력을 쌓아 선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자발성이 없다면 근본적으로 노력을 쌓으려는 의지도 없을 것이며, 또 쌓도록 억지로 시킬 수도 없음은 당연한 이치이다. - P81

맹자는 인의예지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으로 ‘내가 본래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임을 긍정하였다. 인간은 모두 선한 심성을 가지고 있으며, 배우지 않아도 아는 양지와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양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선천적으로 본래 가지고 있는 선한 심성과 양지·양능을 확충해 나가기만 하면 선한 덕행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은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으며 외부에서 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각적·자주적이며, 도덕적 역량 또한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나온다. - P81

그러므로 맹자는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람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일시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든지 혹은 ‘물욕에 빠져 있는 것’일 뿐이다. 인간의 양지와 본심은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반드시 불안해하며, ‘물욕에 빠져 있는 것’에 대해 참지 못한다. 이 불안불인한 마음이 언제나 인간에게 경각심을 촉발시키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도덕 법칙에 대해 기뻐하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함으로써 도덕을 실천하고 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 P81

이로써 볼 때, 순자가 말하는 심에 주재 능력이 있음은 분명하다. 몇몇 논자들 역시 이에 근거하여 순자가 말한 심에는 ‘자유 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심에 자유 의지가 있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심은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과 심은 스스로 법칙을 세우고 그 법칙에 의거하여 자주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전자는 인지심의 관점에서 말하는 자유 의지이며, 후자는 도덕심으로서 자주적이고 자율이며 창조적인 자유 의지다. 순자가 말하는 인지심의 자유 의지는 전자에 속하며, 맹자와 정통 유가에서 말하는 도덕심의 자유 의지는 후자에 속한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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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경_ 요즘 청년들은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뒤늦은 사춘기를 겪는다고 합니다. 소위 명문대라는 곳에서 우울이 심해진다고 하는데요. 제가 아는 한 의대 교수님은 연구실에서 캠퍼스를 내려다보면 ‘폭탄들이 걸어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걱정스럽다고 말씀하셨어요. 스스로를 해치고 남도 해칠 수 있는 상태로 내몰리고 있어서요.

최재천_ 예전에 제가 카이스트 총장님에게 뵙고 싶다고 연락한 적이 있습니다. 카이스트 학생들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였어요. 카이스트는 모든 학생이 장학금을 받으며 들어왔는데 당시에 경쟁 체제를 도입했습니다. 학점이 일정 기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에 학비 일부를 내도록 하면서 그 과정에서 두 명이 목숨을 끊었죠.
하버드대학교에서 기숙사 사감을 맡으며 경험한 제도를 말하고 싶었어요. 하버드대학교의 경우, 1학년생은 하버드 야드Harvard Yard에 있는 1학년 기숙사에서 지내고, 2학년부터 하우스House라고 부르는 고학년 기숙사에서 생활하는데요. 기숙사마다 마스터라고 불리는 책임자가 있어요. 마스터는 덕망 있는 교수님이 맡고, 부교수 정도 되는 사람이 시니어 튜터를 맡아요. 그리고 저와 같은 조교들이 튜터를 맡습니다. 분야별로 열 명 남짓 있어요.
제가 7년 동안 튜터를 맡았는데요. 튜터가 하는 일은 학생들과 함께 밥 먹는 일입니다. 제가 맡은 아이가 열네 명 정도인데, 수시로 같이 밥을 먹으면서 그 아이의 상황을 살폈어요.

안희경_ 온몸으로 아이의 일상을 느끼신 거군요.

최재천_ 별말이 아니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느낌이 오죠. ‘이 아이가 요즘 상당히 시달리고 있구나‘ ‘성적이 잘 안 나오나 보다.‘ 튜터 회의에서 "제 학생 한 명이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면, 시니어 튜터가 그 학생에게 면담을 요청해요. 시니어 튜터는 저보다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죠. 학생들은 ‘실연당했다‘ ‘성적이 떨어졌다‘ ‘가족 문제가 있다‘ 등의 고민을 풀어놓습니다. 그러면 모두가 그 아이를 도와줍니다.
코넬대학교는 목숨을 끊는 학생들이 매우 많습니다. 학교 안에 자살하는 장소가 있을 정도예요. 계곡에 있는 구름다리에서 그렇게들 뛰어내립니다. 아이비리그의 자살률이 상당히 높아요. 하버드대학교는 자살률이 비교적 낮습니다. 물론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학생도 있지만요. 저는 그 튜터 제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튜터가 부모처럼 열몇 명 학생들을 계속 살피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학교에서 대신 돌봐주니까요.
카이스트는 전국에서 학생들을 뽑아 대전에 묶어 두고 있잖아요. 튜터 시스템을 도입하시라고 권하고 싶었습니다. 학교 옆에 부지를 확보하여 서울에서 오가는 교수들이 머물 게스트 하우스를 짓고, 학생들과 어울리게 하면 서로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만남을 잡기 전에 총장님이 사임하셔서 제 의견을 전하지는 못했어요. 이제라도 여러 학교에서 튜터 제도를 도입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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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경_ ‘요즘 젊은이들의 문해력이 떨어졌어‘라고 이야기하는 대다수는 기성세대인데요. 과거의 눈으로 내린 평가라고 봅니다. 요즘은 정보의 파편을 모아서 하나의 상으로 완성할 수 있는데, 예전에는 책처럼 잘 짜인 완성본을 읽어야 제대로 봤다고 여겼잖아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떠오른 생각인데요. 젊은 세대의 접근이 백과사전식이라고 했을 때, 정보를 조각조각 취합하는 중간중간에 생각을 여는 스파크가 튀면서, 자기 생각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 싶어요.
최재천_ 네. 정확한 파악이네요. 동의해요. 문화인류학자 김정운 선생님은 "모든 게 편집이다"라고 말합니다. 상당히 의미 있는 말이에요. 지금 인터넷을 뒤지는 젊은 세대는 스스로 편집합니다. 기성세대는 명저 한 권을 붙들고 흡수했죠. ‘이 대가가 이렇게 이야기하시는구나‘라면서 쭉 읽고, ‘다 이해했어‘ 하며 책을 덮었습니다. 이해했다는 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거죠. 젊은 세대는 스스로 여러 정보를 검색해 나름대로 취사선택하고, ‘뭐 이래?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야?‘라고 판단도 하면서 그 화면은 닫고 다음 걸 읽죠. 자기가 편집을 합니다. 저는 그 방식이 결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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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아이를 업고 다닐 때부터 손으로 아이 머리를 눌러 고개 숙여 절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다가 그 아이가 아장 아장 걷게 되면, 처음으로 아버지나 형에게 존경을 표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식은 아버지에게, 동생은 형에게, 여자아이는 나이 차에 관계없이 남자 형제 모두에게 머리를 숙인다. 그것은 결코 의미 없는 몸짓이 아니다. 그것은 저희가 머리를 숙여 절하는 사람이 실은 자기 뜻대로 처리하고 싶어 하는 어떤 일에 대해 상대방 마음대로 행동할 권리를 승인한다는 뜻의 몸짓이다. 한편 절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지위에 대해 당연히 주어지는 어떤 책임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에서는 성별이나 세대 차 혹은 장자 상속권에 입각한 계층적 위계질서가 가정생활의 근간을 이룬다. 집단 내부에 있어 ‘알맞은 자리’를 취하도록 매우 엄밀한 규칙에 의해 규정된다.

예컨대 연장자가 공식적인 은퇴, 즉 은거하기 전까지는 그 연장자의 명령이 엄중히 지켜지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이미 성장한 아들이 몇 명 있는 아버지라 할지라도 그의 부친인 할아버지가 아직 은퇴하기 전이라면, 모든 일을 결정할 때 일일이 할아버지의 승인을 얻어야만 한다. 또한 아들이 서른 살, 마흔 살이 되어도 부모가 아들의 결혼 문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식사 때는 일가의 가장인 아버지에게 제일 먼저 밥상을 가져다주며, 목욕할 때도 아버지가 제일 먼저 들어간다. 가족들은 가장에게 큰절을 해야 하고 가장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 인사를 받는다. 일본에 널리 알려진 수수께끼가 있는데 그것을 우리 식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부모에게 자기 의견을 말하고 싶어 하는 자식은 머리를 기르고 싶어 하는 승려와 같다. 왜 그럴까?"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이다.

가정 내에서의 ‘알맞은 자리’는 세대 차뿐만 아니라 나이 차에도 적용된다. 일본인은 극심한 혼란 상태를 표현할 때 ‘난형난제‘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 미국인들이 말하는 "고기도 아니고 새도 아니다neither fish nor fowl"라는 표현과 비슷하다. 일본인의 사고방식으로는, 물고기가 물 속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장남에겐 언제나 장남으로서의 자리가 지켜져야 한다. 장남은 상속자인데, 일본을 방문한 여행자들은 종종 ‘일본의 장남들이 매우 일찍부터 몸에 익히는 책임감 있는 언행‘을 언급한다. 다시 말해 일본에서 장남은 아버지가 누리는 특권을 상당 부분 일본의 봉건 사회는 복잡한 계층으로 분화되어 있었으며, 각자의 신분은 세습에 의해 정해졌다. 도쿠가와 막부는 이런 세습체계를 정착해 나가면서 각 카스트의 일상 행동을 세밀히 규제했다. 예컨대 각 가정의 가장은 문 앞에 그의 계급적 지위와 세습적 신분에 관한 소정의 사실을 게시해야만 했다. 입을 수 있는 의복, 사 먹을 수 있는 음식, 거주할 수 있는 집의 종류 따위도 그 사람의 세습적 신분에 따라 규정되었다. 당시 일본에는 황실과 조정의 귀족 아래 신분 순으로 사무라이, 농민, 공인, 상인의 네 가지 카스트가 있었다.

이 사농공상 계층에 끼지 못한 채 사회 바깥으로 추방당한 천민 계급도 있었다. 그런 천민 계급 가운데 가장 수가 많고 널리 알려진 것은 ‘에타穢多’, 즉 터부시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청소부, 사형수를 매장하는 인부, 죽은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도살업자, 가죽을 다루는 가파치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일본의 불가촉천민untouchables,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 축에도 못 끼는 자uncountables‘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들 부락을 지나가는 큰길 이정표에는 해당 지역의 토지나 주민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어 아무런 정보도 표시되지 않았다. 그들은 비참할 만큼 가난했다.터부시된 직업을 가지도록 허용되기는 했지만, 정식 사회 조직의 바깥에 방치되었다.

이와 같은 천민 계급 위에 상인계급이 있었다. 이 점은 미국인들에게 일견 의외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봉건 사회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실이었다. 상인 계급이란 언제 어디서나 봉건제도의 파괴자이기 때문이다. 장사꾼들이 존경받고 번영하게 되면 봉건제도가 쇠퇴하기 마련이다. 17세기에 도쿠가와 막부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유례없는 가혹한 법률로 일본의 쇄국을 선포한 것은 바로 상인들로 하여금 설 자리가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 일본은 중국 및 조선의 연안 일대에 걸쳐서 왕성하게 해외무역을 펼쳤고, 따라서 상인 계급이 발전하는 추세에 있었다. 이에 대해 도쿠가와 막부는 일정 한도 이상의 배를 만들어 운항하는 자에게 사형이나 극형에 상당하는 엄벌을 내림으로써 그런 추세를 막고자 했다. 당시에 허가된 작은 배로는 대양을 항해하거나 상품을 싣고 다닐 수 없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국내 무역 역시 각 번의 접경에 관문을 설치해 상품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또한 상인 계급의 사회적 지위를 낮추려는 목적으로 여러 가지 법률을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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