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8 지배적 소수자의 야만에 대한 조사를 끝내기에 앞서, 근대 서유럽 세계에도 이러한 사회적 현상의 징후가 인정되는지 어떤지 생각해 보자. 얼핏 생각하면 서유럽 사회는 전세계를 그 촉수 안에 끌어안고 있으며, 이미 서유럽을 야만화할 정도의 규모를 지닌 외적 프롤레타리아는 남겨져 있지 않다는 사실에 의하여 벌써 이 문제에는 최후의 회답이 주어져 있는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유럽 인은 오늘날 서유럽 사회의 ‘신세계‘인 북아메리카 한가운데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저지대 지방 출신으로서 프로테스탄트적 서유럽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전통을 지니면서 사는데, 그들은 이미 유럽의 ‘켈트 외곽 지대‘에서 유배 생활을 끝마친 뒤 애팔래치아 산맥의 미개척지에서 고립 생활을 보냄으로써 분명 심하게 야만화된 상태로 광범한 지역에 다수의 인간이 퍼져 있다는 사실은 서유럽인을 몹시 당황케 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아메리카 변경민이 야만화된 결과에 대하여 이 문제의 권위자인 아메리카의 한 역사학자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아메리카의 식민에 있어서, 우리는 어떻게 하여 유럽의 생활이 이 대륙에 들어왔는지, 또 아메리카가 그 생활을 어떤 방식으로 바꾸어 발전시켰으며 반대로 유럽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우리의 초기 역사는 유럽에서 온 씨앗이 아메리카의 환경 속에서 발전해 가는 과정의 연구이다. ······변경 지역은 아메리카화가 가장 빠르고도 효과적으로 행하여지는 선이다. 황야는 식민지 개척자를 지배한다. 최초에 개척자가 변경 지역에 오는 때, 그는 복장·생업·도구에 있어서도, 여행 방법이며 사물을 생각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완전히 유럽 인임을 발견한다. 그런데 황야는 그를 철도 차량에서 끌어내려 자작나무 통나무배에다 태운다. 문명인의 의복을 벗기고 수렵용 셔츠에 모카신을 신게 한다. 황야는 그에게 체로키족과 이로쿼이족의 작은 통나무집에서 살게 하고, 인디언식의 울타리를 주위에 두르게 한다. 이윽고 그가 옥수수(인디언 콘)를 심어, 끝이 뾰족한 막대기로 가꾸게 한다. 또한 정통적인 인디언 방식에 따라 함성을 지르며 머리 가죽을 사냥하게 한다. 요컨대 처음 무렵의 변경 지역에서는 환경이 인간에게 너무나 강렬하다. ······ 그는 황야를 조금씩 변형시켜 간다. 그러나 결과는 자기자신도 절대로 본래의 유럽 인은 아니다. ······ 사실 이리하여 산출되는 것은 새로운 아메리카적 산물이다." - P567

571-2 언어 혼란의 전설은 이렇게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가 최대의 장해로 간주되고 있는 점에서 진실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전례 없는 사회적 위기를 앞두고 사회적 행동을 통일하는 데 언어 혼란이 최대한으로 방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의 혼란과 사회적 마비와의 관련은 위에 확실히 기록되어 있는 역사상의 몇 가지 현저한 예로써 입증할 수 있다.
현대 서유럽 사회에서는 이러한 언어의 다양성이, 1914~18년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멸망한 도나우 합스부르크 왕국의 치명적인 약점의 하나였다. 또한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유능함을 발휘했던 오스만 파디샤의 노예 세대조차도, 이 제도가 성숙기에 이르렀던 1651년에 바벨의 저주가 투르크 궁전 안에서 술탄의 근신들 위에 내려져 궁정 혁명의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을 완전히 무능한 상태로 빠뜨렸던 사실이 인정된다. 소년들은 매우 흥분한 나머지 그들이 인위적으로 배워 익힌 오스만어를 잊어버렸다. "놀라 이상하게 여기는 목격자의 귀를 울린 음향은 가지가지 소리와 언어의······떠들썩함이었다. 어떤 자는 그루지야 어, 어떤 자는 알바니아 어·보스니아 어·민그렐어·투르크어·이탈리아 어 등등 제각기 편리한 말로 소리쳤다." 오스만의 역사에 일어난 이 사건은 <사도행전> 제2장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 강림‘이라는 저 중대한 사건에 비하면 매우 사소한 일이다.
성서의 이 장면에서 나오는 말은 이야기하는 사람으로서는 미지의 여러 가지 언어, 즉 그때까지 자기 나라말인 아람어 이외의 언어를 한 번도 말한 적이 없고 들은 적도 배운 적도 없는 갈릴리 인으로서는 생소한 미지의 여러 언어였다. 그들이 돌연 그러한 방언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신이 내린 기적적인 능력 때문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수수께끼의 한 구절은 이제까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지만, 지금 여기서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점에 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도 행전>의 필자가, 여러 언어를 말하는 능력이야말로 새로이 계시된 ‘고등 종교‘에 온 인류를 귀의시키는 중대한 임무를 짊어진 사도들이 우선 첫째로 그 타고난 능력을 높여서 달성해야만 되는 필수 조건이라고 그 견해를 밝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도들이 태어났던 사회는 오늘날의 서유럽 세계에 비해 훨씬 ‘언어 혼란‘이 적었다. 갈릴리 인의 모국어인 아람어는 북쪽으로는 아마누스 산, 동쪽으로는 자그로스 산맥, 서쪽은 나일 강까지의 범위에서밖에 통용되지 못했지만, <사도행전>에 쓰여져 있는 그리스 어를 사용하면 그리스도교 전도자는 바다 건너 로마까지, 아니 더욱더 그 앞까지 가르침을 전할 수가 있었다. - P571

577-8 종교에 있어서의 통합주의(일부)
종교 분야에서는 통합주의, 즉 의식·제신·신앙의 혼합이라는 것이 사회 해체기에 있어 영혼의 분열에서 생기는 내면적인 혼효 의식의 외면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현상은 확신있게 사회 해체의 징후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성장기 문명의 역사에서는 일견 종교적 통합주의처럼 여겨지는 현상이 나타나더라도 잘 살펴보면 겉보기뿐인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헤시오도토스나 그 밖의 고대 시인들이 기울인 노력에 의하여 수많은 도시 국가의 지방적 신화가 정리 통합되어 헬라스 전체에 공통되는 하나의 체계로 완성되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신들의 이름을 이리저리 주물럭거렸을 뿐 실제로 거기에 대응하는 다른 제식의 융합이나 여러 가지 종교적 감정의 혼합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또한 라틴 민족의 신들이 여러 올림포스의 신들과 동일시된ㅡ주피터는 제우스, 주노는 헤라라는 식으로ㅡ것도 요컨대 원시적인 라틴 민족의 애니미즘(정령 숭배)이 그리스 민족의 신인동형론에 의하여 대체된 것뿐이다.
또 한 가지는, 이들과 종류를 달리하는 신들의 이름을 동일시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해체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또한 확실히 혼효 의식을 입증하는 것인데, 잘 살펴보면 실은 진정한 종교적 현상이 아니라, 단순히 종교의 가면을 쓴 정치적 현상임을 알 수 있다. 해체기의 사회가 일찍이 성장기 동안 분화함으로써, 그리고 서로 다른 지방 국가 상호간의 정보 전쟁의 결과 정치 면에서 강제적으로 통일됨으로써, 서로 다른 지방신의 명칭이 동일시되는 것이 그것이다. 예컨대 수메르 사회의 역사 말기에 니푸르 주신(벨)의 엔릴은 바빌로니아의 마르두크에 병탄되었으며, 그 바빌로니아의 마르두크 벨은 다시 잠시 동안 카르베라는 이름을 바꾸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형태로 기념된 ‘팜믹시아(범혼합)‘는 전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다. 전자의 변화는 바빌로니아 왕조의 무력에 의하여 수메르 사회의 세계 국가가 재흥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며, 후자의 변화는 세계 국가의 캇시족(인도 메갈리아주 민족)의 무장들에게 전복당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 P577

578-9 헬라스 사회의 해체기에서 포세이도니오스(기원전 135~51) 시대는, 그때까지 활발하고 신랄한 논쟁을 벌이는 것을 좋아한 철학의 여러 유파가 단 하나 에피쿠로스파만을 예외로 하고 나머지 모두 일치하여 상호 간의 차이점보다는 오히려 공통점에 주목하여 그것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첫 100년이나 200년에는 마침내 에피쿠로스파를 제외한 헬라스 세계의 모든 철학자가 어느 파이건 간에 거의 동일한 절충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철학에서 이러한 혼효 경향은 중국 사회의 해체 역사에 있어 그 대응하는 시기에 나타나고 있다. 기원전 2세기라면 한 제국의 첫 100년에 해당하는 시기인데, 그 무렵 역시 제일 먼저 궁정에서 인기가 있었던 도교의 뒤를 이어 대체된 유교의 특색도 절충주의였다.
대립하는 철학 상호 간의 절충주의 현상은, 대립하는 ‘고등 종교‘ 상호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시리아 문명 세계에서도 솔로몬 왕(기원전 960~922. 고대 헤브라이 왕국의 제3대왕. 예루살렘 출생) 시대 이후 이스라엘의 야훼 숭배와 이웃 시리아 제민족의 여러 지방적 주신과의 사이에 현저한 ‘접근‘의 경향을 볼 수 있는데, 이 연대는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솔로몬 왕의 사망이 시리아 사회 쇠퇴의 조짐이 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P578

580-1 내적 프롤레타리아의 고등 종교가 지배적 소수자와 마주칠 경우 그 고등 종교는 적응 과정에서 지배적 소수자의 예술 양식 중 외면적인 형식을 채용함으로써 지배적 소수자의 주의를 끌어 예비적인 단계에 머무는 수가 있다. 이를테면 헬라스 세계의 해체기에 그리스도교와 경쟁하여 패배한 모든 고등 종교들은 그들 신의 시각적 표현을 헬라스 사회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형태로 고침으로써 헬라스 사회 안의 전도 활동을 성공으로 촉진시키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순히 외면뿐만이 아니고 내면적으로도 헬레니즘화하는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나타낸 종교는 하나도 없었다. 자기의 교리를 헬라스 사회의 철학 용어를 빌어 표현하는 데까지 간 것은 그리스도교뿐이었다.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본래 그 창조적 본질이 시리아로부터 유래되었던 이 종교가 사상적으로 헬레니즘화하는 운명은 아람 어가 아닌 아티카 어 ‘코이네‘가 ‘신약 전서‘의 언어로서 채용되었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학자의 용어로 사용되어 온 이 언어의 어휘 자체가 이미 다분히 철학적 함축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관 복음서(<요한복음>에 대하여 ‘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서를 말함)의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런 신앙은 제4복음서(‘요한‘)의 본문에서도 지켜져 있을 뿐더러 한층 더 심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제4복음서의 서언에 보면 구세주는 하느님의 창조적인 로고스(신학에서는 하느님의 말씀, 철학에서는 이성을 뜻함)라고 하는 사상이 쓰여 있다. 따라서 뚜렷이 언명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암묵리에 하느님의 아들과 하느님의 로고스는 똑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로고스로서의 아들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지혜 및 목적과 동일시되고, 아들로서의 로고스는 아버지의 인격과 대응하는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서 실재화되어 있다. 로고스의 철학이 갑자기 종교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철학 용어를 빌려 종교를 전도하는 방법은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에서 이어받은 유산의 하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민이자 그리스도 교도였던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가 2세기 후에 거둘 수 있도록 풍부한 수확의 종자를 뿌린 사람은 역시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이었다. 그리고 제4복음서의 필자가 육체화된 하느님과 동일시하고 있는 하느님의 로고스 사상을 얻은 것 역시 아마 같은 철학자로부터였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선구자가 된 이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학자는 그리스 어라는 문호를 통하여 그리스 철학의 길로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곳에 사는 유대인이 「성서」를 이방인의 말로 번역한다는 모독적인 행위를 감히 해야 했을만큼 헤브라이 어는 물론 아람 어까지도 죄다 잊어버리고, 아티카 어인 ‘코이네‘를 자기들의 말로 삼고 있었던 마을에 필론이 살며 철학을 하였다는 것은 분명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교 자체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이 그리스도교 철학의 아버지가 된 유대인은 고립된 존재였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서 플라톤 철학을 끌어내려고 한 그의 능숙한 노력도 유대교로서는 아무 쓸모없는 곡예에 지나지 않았다. - P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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