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50 그래도 우리는 결정론적 철학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자신에 가득 차고도 훌륭히 성공할 수 있는 활동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이 된다고 추론해도 좋을까? 아니,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되리라는 신앙 때문에 이와 같이 커다란 자신과 자극을 부여받은 예정설의 신봉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들 자신의 의사가 신의 의사나 자연의 법칙 또는 필연의 계율과 합치함으로써, 처음부터 틀림없이 승리를 거두기로 되어 있다는 대담한 가정을 세웠던 것 같다. 칼뱅주의자의 여호와는 그 선민을 옹호하는 신이고, 마르크스주의자의 역사적 필연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실현하는 수단인 비인격적인 힘이다. 이와 같은 가정은 전쟁의 역사가 가르치듯이, 사기(士氣)의 원천의 하나인 필승의 신념을 주었고, 따라서 머리부터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고 예상했던 결과를 달성하기 때문에 역시 옳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라는 말이 베르길리우스가 「아에네이스」 속에 그린 보트 경주에서 승리를 거둔 성공의 비결이었다. 요컨대 필연을 유력한 동맹자라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유력한 동맹자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가정은 물론 하나의 ‘휴브리스‘(과거를 우상화함으로써 빠지는 오만)ㅡ그것도 가장 교만한 휴브리스의 행위여서 결국은 믿었던 사실이 논리에 의해 무참하게도 부정당하는 쓰라림을 맛보아야 한다. - P549

551 표류 의식은 수동적인 감정이지만 그것과 한 쌍을 이루면서도 정반대의 능동적 감정인 것이 죄의식인데, 그것은 도덕적 패배의 자각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반응이다. 그 본질이나 정신에 있어서 죄의식과 표류 의식은 두드러진 대립을 보인다. 표류 의식이 마약 역할을 하여 표류자의 힘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외적 환경 속에 깃들어 있다고 여겨지는 악을 묵인하는 태도를 영혼 속에다 몰래 주입하는 데 비해, 죄의식은 자극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죄를 범한 인간에 대하여 악은 결국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것이므로, 신의 목적을 수행하고 신의 은총을 받을 생각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의 의사에 따라 제어할 수 있음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저 크리스챤(「천로역정」의 주인공)이 얼마 동안 바르작거렸던 ‘절망의 늪‘과 그를 ‘저 멀리 보이는 좁은 문‘을 향해 달리게 한 최초의 충동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굉장한 차이가 있다. - P551

554-5 죄의식은 분명히 근대 서유럽의 허약하고 왜소한 인간들에게 가장 익숙한 감정이다. 거의 강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의식은 우리가 이어받은 ‘고등 종교‘의 가장 주요한 특색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침은 멸시를 낳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이 경우 너무나 지나치기 때문에 요즈음에는 멸시 정도가 아니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같이 보인다. 그리고 근대 서유럽 세계의 기풍과 정반대인 기원전 6세기 헬라스 세계의 기풍을 대조해 보면 인간성 안에 있는 어떤 비뚤어진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야만적인 여러 신밖에 몰랐고, 빈약하고 시원치 않은 종교적 유산을 받아 그 생애를 시작한 헬라스 사회는 자기의 정신적 빈곤을 자각하고 오르피즘이라는 형태로 다른 몇 개의 문명이 선행 문명으로부터 이어받은 ‘고등 종교‘와 같은 종류의 종교를 만들어 내어 그것으로 공허감을 메우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르페우스교의 의식과 교리의 성격상 죄의식이, 6세기 경의 헬라스 인이 우선 그 정상적인 배출구를 찾아내기 위해 열중한 것 같은 울적한 종교적 감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유럽 사회는 헬라스 사회와는 대조적으로 ‘고등 종교‘의 비호를 받아 세계 교회라는 번데기 속에서 성장하여 풍부한 유산을 이어받은 문명의 하나이다. 그리고 서유럽 인은 아마도 항상 그리스도교 유산을 이을 권리를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가끔 그 가치를 얕보아 거의 그것을 내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이후 헬레니즘(그리스 문화, 그리스 정신) 예찬이 서유럽 사회의 세속적 문화에 있어 대단히 유력한 구성 요소가 되었고 여러 방면에서 풍부한 성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이 헬레니즘 예찬이 육성되어 살아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헬레니즘이 근대 서유럽 사회의 모든 장점과 재능을 구비하고 있는데다가, 서유럽 인이 오늘날 열심히 그리스도교에서 이어받은 정신적 전통으로부터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죄의식에서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태어났던 때부터 헬레니즘을 지극히 멋있는 해방된 생활 태도라고 여지껏 여겨왔기 때문이다. 최근에 출현한 여러 프로테스탄트파가 천국의 개념을 보존하면서 지옥의 개념은 말없이 버렸고 악마의 개념을 풍자가와 희극 작가에게 양도해 버린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 P554

555-6 오늘날 헬레니즘은 자연과학 예찬 때문에 궁지에 몰려 있으며, 이런 사실로 죄의식의 회복 가능성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사회개량가와 자선사업가는 빈민 계급의 죄를 외면적 환경에 기인한 불운으로 간주하기 쉽다. "어쨌든 그 사람은 빈민굴에서 태어났으니 별 수 없지 않습니까?" 또 정신분석가도 마찬가지로 환자의 죄를 정신적 콤플렉스나 노이로제 등의 내면적 환경에 기인하는 불운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짙다. 즉 죄를 설명하되 죄를 병으로 치고 발뺌하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선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새뮤얼 버틀러의 「에리휜」 속에 나오는 철학자들인데, 독자들도 기억하듯 불행한 노스니보어는 공금 횡령이라는 병에 걸렸기 때문에 단골 ‘교정사(straightener)ㅡ의사‘를 불러야 했다.
근대 서유럽 인은 ‘아테(만용)‘라는 보복을 받기 전에 ‘휴브리스(과거 생각에서 오는 오만)‘를 회개하고 그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으로서는 뭐라고 예측할 수 없지만 우리는 현대의 정신 새왈을 바라보고, 어떡하든 지금까지 짓누르는 일에만 온통 기울여 오던 정신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는 희망을 품을 만한 징조를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 P555

565-7 예민한 사람들의 정체성 찾기
4세기 중간 무렵에 로마군에 복무 중인 게르만인 병사들이 고유의 게르만 이름을 그대로 보존하는 새로운 관습이 시작된다. 급속히 일어난 듯한 이런 습관의 변화는 그때까지 무조건 로마 인의 흉내를 내는 데 만족을 느끼고 있던 야만인 ‘병사들‘의 영혼 속에 돌연 자부심과 자신감이 대두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새로운 야만족의 문화적 개성 주장에 대해, 로마인 측에서는 야만인을 배척하는 대항 수단을 쓰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마침 그 무렵부터 로마군에 복무 중인 야만인은 황제가 주는 최고 영예인 집정관직에 임명되기 시작했다.
야만인은 이와 같이 로마의 사회적 계급에서도 가장 높은 단계로 올라간 데 비해, 로마 인 자신들은 그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가령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비속광이라기보다 야만광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도착적 취향에 골몰하여 야만인 풍의 의복을 걸치고 야만인의 야외 경기에 빠져들었다. 그러고 나서 100년 뒤에는 지배에 복종하지 않는 야만인 대장이 독립적으로 이끄는 전투 단체에 로마 인이 입대하게 된다. 예를 들면 507년에 부이에에서 서고트족과 프랑크족이 서로 갈리아 지방을 점유하려고 싸웠을 때, 서고트족의 전사자 중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의 손자가 전투에 가담했다. 조부 대에는 아직 이럭저럭 교양 있는 고전 문인의 생활을 보냈던 데 비하면 대단한 변화였다.
6세기 초엽 로마 속령 주민의 자손이 ‘퓌러(지도자)‘의 명령에 응하여 팔팔하고 힘찬 전투 태도를 보인 점에서, 이 시대로부터 과거 몇 세기 동안이나 전쟁놀이를 가장 큰 삶의 보람으로 여겨 온 야만족 자손보다 활기가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이 무렵에는 이미 양자 모두가 세련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 대등한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우리는 앞에서 4세기 무렵부터 야만족 출신의 로마군이 야만족일 때의 이름을 그대로 보존하는 관습이 시작되었던 일을 서술한 바 있는데, 그 다음 세기에는 갈리아 지방에서 반대로 순수한 로마 인이 게르만 이름을 짓는 경향의 가장 초기적인 예가 나타나서, 이 관습은 8세기 말엽 이전에 이미 보편적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샤를마뉴 시대의 갈리아 주민은 선조가 누구이든 너 나 할 것 없이 득의양양하게 게르만 이름을 따서 지었다.
이로써 로마 죄국 쇠망의 역사와 그와 유사한 중국 문명 세계의 야만화 역사ㅡ그 중요한 연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로마에 비하여 200년이 앞서 있다ㅡ를 비교하여 보면, 중국 문명의 경우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사회에 세계 국가의 여러 후계 국가를 건설한 야만족은 그 야만스러운 소지를 감추고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올바른 형태의 중국 이름을 채용했다. 일견 하찮아 보이는 이 점에 있어 관습의 차이를 극복한 중국 사회의 세계 국가가, 그에 대응하는 샤를마뉴에 의하여 초청된 로마 제국의 ‘망령‘보다 훨씬 효과적인 형태로 재흥되었던 사실 사이에 연관을 찾아내는 일은 반드시 전혀 근거 없는 망상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P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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