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인류사의 위대한 발견과 대면하게 될 때마다 우주에서 인류의 지위는 점점 강등됐다. - P386

390 모래를 한 줌 움켜쥐면 그 속에서 약 1만 개의 모래알들을 헤아릴 수 있다니,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의 개수보다 더 많은 수의 알갱이들이 내 손에 들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볼 수 있는 별은 실재하는 별들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맑은 날 밤하늘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별들은 가장 가까운 것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우주에는 별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또 많다. 지구상의 해변이란 해변 모두에 깔려 있는 모래알들보다 우주에 있는 별들이 훨씬 더 많다. - P390

394-5 오리온자리는 황도 12궁에 속하지 않는 별자리이다. 오리온자리는 사냥꾼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네 개의 밝은 별과, 별자리 전체를 사선을 그리며 둘로 나누는 사냥꾼의 벨트 같은 세 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이다. 허리띠에 매달려 있는 듯한 약간 흐릿한 세 계의 별이 실은, 천문학적 전통에 따르면, 오리온의 칼이다. 하지만 세 별들 중에서 가운데에 있는 것은 별이 아니라 오리온성운이라 불리는, 별들이 태어나고 있는 거대한 가스 구름이다. 오리온자리에 있는 많은 별들은 표면 온도가 높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매우 젊고 무거운 별이다. 이들은 빠르게 진화하여 초신성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폭발 현상을 일으키면서 자신들의 생을 마감할 것이다. 이렇게 무거운 별들이 태어나고 죽는 주기는 몇 천만 년 정도이다. 만일 컴퓨터에서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진행시킨다면, 많은 수의 별들이 태어나고 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오리온자리의 별들이 마치 밤의 반딧불과 같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 P394

396 금년이 1980년이고 특수 상대성 이론이 태어난 해가 1905년이니, 지금 막 우리에게 도착한 광자가 안드로메다자리 베타별을 떠났을 때쯤, 지구에서는 스위스 특허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당시로는 지극히 획기적인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고 있었을 것이다. - P396

405 빛보다도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있다는 주장을 우리는 종종 듣게 된다. 예를 들면, ‘생각의 속도‘ 같은 것인데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주장이다. 왜냐하면 우리 뇌의 신경 전달 신호는 당나귀가 수레를 끄는 것과 같은 느린 속도로 뉴런 사이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상대성 이론을 궁리해 낼 정도로 영리하기는 하지만 그리 빠르게 사고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현대 컴퓨터의 전기 회로 속에서는 전기 신호가 거의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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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 "여기서 인간은 위대한 혁명의 일보 직전에 있으며 마침내 얼마 안 있어 가축을 소유하고 곡식을 경작함으로써 식량 공급을 스스로 관리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 혁명은 북쪽의 빙하가 녹고, 그 결과 유럽을 뒤덮고 있던 북극성 고기압이 후퇴하고 대서양 저기압의 진로가 남지중해 연관으로부터 현재의 중부 유럽을 통과하는 진로로 바뀜으로써 생긴 위기와 관련이 있따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은 확실히 지난날의 초원 지대의 주민들에게도 그 창의성을 극도로 발휘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유럽의 빙하 지대가 작아짐에 따라 대서양 온대성 저기압대가 또다시 북쪽으로 퍼졌기 때문에 서서히 진행되는 건조화에 직면하여 그때까지 수렵 생활을 해 오던 주민들에게는 3개의 길 중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익숙하던 기후대를 따라 먹이가 되는 짐승과 함께 북쪽 또는 남쪽으로 이동하든지, 아니면 살던 땅에 머물러 건조에도 살아남는 새나 짐승을 잡으며 그럭저럭 비참한 생활을 이어나가든지, 아니면ㅡ역시 고국을 떠나지 않고ㅡ동물을 사육하고 농사를 지음으로써 변덕스러운 환경에 의존하는 상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야 했다."

결국 거주지도 생활 양식도 바꾸지 않은 사람들은 건조화의 도전에 응하지 않은 셈이어서 그 때문에 절멸이라는 벌을 받았다. 생활 양식을 변경하여 수렵자로부터 양치기로 전업함으로써 거주지를 옮기지 않은 사람들은 아프라시아 대초원 지대의 유목민이 되었다. 이들의 업적과 운명에 대해서는 다른 부분에서 논한다.
생활 양식을 바꾸지 않고 거주지를 변경하는 길을 택한 사람들 중에 북쪽으로 이동하는 저기압대를 따라감으로써 건조를 피한 집단들은 뜻밖에도 북쪽의 계절적 차가운 공기라는 새로운 도전과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도전에 굴복하지 않는 자 사이에 새로운 창조적 응전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남쪽의 몬순(계절풍) 지대로 후퇴함으로써 건조를 피한 집단들은 열대의 변화 없는 기후가 발산하는 최면적 영향을 받아 게으르게 잠자는 일로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다섯 번째, 즉 마지막으로 건조화의 도전에 응하여 거주지와 생활 양식 양쪽을 다 바꾼 집단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보기 드문 이중의 반응이야말로 소멸해 가는 아프라시아 초원지대에 자리한 몇 개의 원시 사회로부터 이집트 문명과 수메르 문명을 창조한 사람들의 동적인 활동이었던 것이다.
이들 창조적인 사회 집단의 생활 양식에 일어난 변화는 식물 채취자나 수렵자의 생활로부터 경작자의 생활로 완전히 전환한 일이었다. 변화가 일어났던 거주지는 거리상으로는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내버리고 온 초원과 이주해 온 새로운 자연 환경과의 성격의 차이를 재어 본다면 매우 큰 것이었다.
나일 강 하류 유역을 내려다보고 있던 초원이 리비아 사막으로 변화했고, 유프라테스·티그리스 두 강의 하류 유역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는 초원이 룹알할리 사막(아라비아 동남부의 사막)과 루트 사막(이란 고원 중앙부의 사막)으로 변화했을 때, 이들 영웅적인 개척자들은 용감성인지 자포자기인지 아니면 이 지역에도 수분이 줄어드는 변화가 올 것이라는 예측때문인지 모르지만 일찍이 아무도 발을 들여 놓지 않은 골짜기 밑바닥의 늪지에 뛰어들었다. 그들의 동적인 행동은, 버려진 그곳을 이집트 땅과 시나이 땅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다른 길을 택한 그들의 이웃들이 볼 때 그들의 모험은 뻔히 알면서도 사지로 뛰어드는 무모한 행동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아프라시아 대초원 지대로 변화하기 시작한 지역이 아직도 지상 낙원이었던 그 옛날, 나일강과 메소포타미아의 정글 늪지대는 사람이 가까이 가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얼핏 보아 한 발도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의 황무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 모험은 개척자들이 품었던 어떤 낙관적 기대보다도 더욱 큰 성공을 거두었다. 변덕스러운 자연은 인간의 힘으로 정복되었다. 일정한 형태를 갖추지 못하던 정글 늪지대는 모습을 갖추었고 정연하게 배치된 수로와 제방과 논밭으로 나타났다. 개간된 황무지는 이집트와 시나이의 국토가 되었고, 이집트와 수메르 사회가 그 위대한 모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 P100

103-4 나일 강 유역, 한 지방의 옛날 모습과 다른 지방의 오늘날의 모습이 유사하다는 데 착안하여 잠시 가정을 해보자. 나일 강 유역의 현재 적도 강우권 밖에 있는 지방의 주민들에게 건조화라는 도전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삼각주와 나일강 하류 유역은 본디의 자연 상태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을까. 그래도 이집트 문명이 결국엔 출현했을까? 이 지역의 주민이 현재 실루크족과 딩카족이 바르알 자발 강변에 웅크리고 있듯이 야성인 채로 지금까지 나일 강 하류 유역 주변에 웅크리고 있었을까?
또 한 가지, 이번에는 과거가 아니고 미래에 관한 가정적 문제를 생각해 본다. 우주의 시간적 척도는 말할 것도 없이 지구·생명·인류의 시간 척도로 재어본다 해도 6000년이라는 세월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바로 어제에 해당하는 빙하기의 끝 무렵에, 나일 강 하류 유역의 주민 앞에 나타난 도적과 같이 감당하기 어려운 도전이 내일 6000년 아니 그 보다 몇천 년이 더 지난 뒤에 나일 강 상류 유역의 현재 ‘살아 있는 박물관 부족‘ 앞에 나타난다고 하자. 그들이 그 도적에 대하여도 역시 창조적 결과가 생기는 동적인 행위로 응전할 능력이 없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이 실루크족과 딩카족 앞에 나타나는 가정의 도전이 이집트 문명의 창시자 앞에 나타난 도전과 같은 성질의 것이어야 한다고 조건을 붙일 필요는 없다. 그 도전이 자연 환경에서 일어난 것, 즉 기후의 변화가 아니고 다른 문명의 침입에 의해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현재 실제로 우리 눈앞에서 서유럽 문명의 침입ㅡ이것이 현대에 있어서 지구상에 남아 있는 모든 문명과 모든 원시 사회에 대하여 신화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역할을 담당하는 인간적 요인이다ㅡ에 의해 아프리카의 원시인에게 나타나고 있는 도전이 아닐까?
이 도전은 극히 최근에 시작된 것이어서, 도전을 받고 있는 나일 상류 지대의 어느 사회인가가 결국 행하고야 말 응전이 어떤 것인지 아직 지금으로서는 예측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선조가 하나의 도전에 응하지 못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자손도 그들의 차례가 왔을 때 다른 도전에 응할 수 없다고는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 P103

109-10 원시 사회의 어둠 상태에서 출현하여 ‘어버이‘ 문명을 갖지 않는 문명을 잠시 접어두고, 그 뒤에 출현한 선행 문명과 다양한 형태, 또는 다양한 정도로 관계를 갖는 문명에 눈을 돌려보면, 이들 ‘자식‘ 문명은 자연환경의 도전이 또한 어느 정도 자극을 주었겠지만 중요하고 본질적인 도전은 ‘어버이‘ 사회와의 관계로부터 생긴 인간 환경의 도전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도전은 ‘어버이‘ 사회와의 관계 자체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분화로부터 시작되어 분리에서 정점을 이룬다. 분화는 선행 문명이 일찍이 그 성장기에 있어서 하층의 사람들이나 외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복종시키는 창조력을 잃기 시작하자 그 내부에서 일어난다. 이 창조력은 문화가 성장기에 있을 때는 하층 사람이나 국경 밖의 사람들에게 자발적 충성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창조력을 잃은 병에 걸린 문명은 체력 감퇴라는 휴우증으로 이미 민중을 지도할 능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차차 폭압의 도수를 높여 지배하는 소수 지배자와 이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서 자기 영혼의 존재를 자각하고 그 영혼을 잃지 않으려고 결의하는 프롤레타리아(내적외적 프롤레타리아트)로 분열된다. - P109

115 그런데 실론에 인도 문명을 전파한 사람들은 원래 계절풍이 몰아치는 고지의 메마르고 황폐한 자연상태에 있던 평지에 물과 생명과 부를 강제로 부여한다는 기발한 행위를 이행헀다.
"골짜기의 물이 모아져 산기슭의 거대한 저수지ㅡ개중에는 크기가 16평방킬로미터나 되는 것도 있었다ㅡ로 모아졌다. 거기서부터 수로가 연장되어 구릉지대에서 좀 떨어진 더 큰 저수지까지 이르고, 거기서 또 더 먼 다른 저수지로 갈려 나가고 있다. 대저수지와 대수로의 아래쪽에는 수백 개나 되는 소저수지가 있어 그 하나하나가 마을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저수지 모두가 결국은 비가 많은 산악지대로부터 공급을 받고 있던 것이다. 고대 실론 인은 이렇게 하여 서서히 현재에는 인적이 드문 평야 지대의 전부 또는 거의 전부를 정복했었다."

본디 불모지였던 이 평지를 인간이 만든 문명을 위해 유지하려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거듭해야 했는가를 나타내는 것은 오늘날 실론 섬의 경관에서 볼 수 있는 두 가지 현저한 특색이다. 그 하나로서 예전에는 관개 사업이 잘 이루어지고 다수의 인구를 수용하고 있던 지역이 원시 그대로의 불모지로 되돌아가버린 사실이며, 또 하나는 현대의 차·커피·고무 재배자들이 불모지를 피해 비 오는 이 섬의 절반에 이르는 다른 부분에 집중해 있다는 사실이다. - P115

119-20 카푸아의 배신
지금까지 우리는 실제로 문명의 발생 또는 기타 눈부신 인간 업적의 무대가 된 몇 개 환경들의 특성을 고찰하고, 그 환경이 인간에게 제공한 조건은 결코 다루기 쉬운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 반대였음을 발견했으므로 이번에는 보충적인 연구를 하기로 하자. 즉 쉬운 조건을 제공한 다른 몇 개의 환경들을 보고, 이들 환경이 인간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초래했나 하는 것을 조사해 보자. 이 연구를 시도함에 있어, 두 가지 경우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는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생활한 뒤에 용이한 환경으로 인도되는 경우이다. 둘째는 익숙한 환경 속에서만 살아왔으며, 우리가 아는 한 그 인간 이전의 선조가 인간이 된 이래 한번도 어려운 환경에 마주친 적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이다.
다시 말해 용이한 환경이 문명화 과정에 있는 인간에게 끼친 영향과 원시인에 끼친 영향을 구별해 보자는 것이다.
고전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로마와 대조되는 곳이 카푸아(이탈리아 남부 캄파냐 자치주에 있는 도시)이다. 카푸아 평원은 로마 평원이 사람에게 꽤 까다로웠던 만큼 인간에 대해 인정이 많았다. 그리고 로마 인은 그 살기 어려운 고국 땅을 벗어나 차례차례 이웃 나라를 정복한 데 비해, 카푸아 인은 그들의 향토에 주저앉은 채 이웃 나라에 차례차례 정복당하고 있었다. 최후의 정복자인 삼니움 인(이탈리아 중부에 있었던 고대의 나라 삼니움의 주민)으로부터 카푸아가 해방된 것은 카푸아 자신이 간청한 로마의 간섭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그 뒤 로마 역사상 가장 중대한 전쟁의 가장 중대한 순간, 즉 칸나에 전투(기원전 216년에 로마 군이 한니발 군에게 패한 곳) 다음 날에 카푸아는 한니발에게 성문을 열어 줌으로 해서 로마의 은혜에 배반했다. 로마도 한니발도 카푸아의 거취가 대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결과이며, 또 전쟁 그 자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보는 점에선 일치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카푸아에 입성하여 그곳을 동계 영지로 정했다. 그러자 참으로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한겨울을 카푸아에서 보낸 한니발 군은 완전히 사기가 해이해져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그전처럼 승리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아르템바레스의 진언
12월 헤로도토스의 「역사」 속에 이 점과 관련된 참으로 적절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르템바레스라는 사람이 친구와 함께 키로스(키로스 2세, 재위 기원전 559~30, 페르시아의 아카이메네스 조의 왕)를 찾아가 다음과 같은 진언을 했다.
"이제야말로 제우스신께서 아스티아게스(메디아 왕 키로스의 옛왕에 해당됨. 키로스는 옛 왕을 체포하고, 메디아 왕국을 멸망시킴)를 왕좌에서 쫓아내고 그 영토를 페르시아 국민과 폐하 한 분께 주셨는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좁다란 바위투성이의 국토에서 떠나 더 좋은 토지로 이주하면 안 된다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바로 가까운 곳에도, 또 조금 먼 곳에도, 알맞은 토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좋은 곳을 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그렇게 하면 현재 이상으로 세계에 우리 국위를 빛낼 수가 있습니다. 이야말로 우리 제국 국민이 당연히 취해야 할 방책이며, 더구나 우리 제국이 많은 국민을 지배하고 아시아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습니다."
일체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이 진언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키로스 왕은 청원자들에게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지금의 피정복자들과 자리를 바꿀 각오를 하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그들에게 유순한 땅은 반드시 유순한 인간을 만들어낸다고 덧붙였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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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9 목성 주변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매우 위험한 고에너지의 하전 입자들이 두껍게 둘러싸고 있다. 목성과 목성의 위성들을 가까이에서 관측하고 토성과 그 너머로까지 항해하려면 우주선이 우선 목성의 이 위험한 복사 벨트의 외곽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 그런데 고에너지의 하전 입자들은,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관측 장비들을 망가뜨리는 것은 물론이고 전자 장비들을 완전히 태워 버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고에너지 하전 입자는 보이저 호에게 매우 위험한 존재이다. 그리고 또 넉 달 전에, 보이저 1호가 목성 주위에 고체 입자들로 이루어진 고리 구조를 발견해 알렸는데, 보이저 2호는 이 고리 구조를 가로질러 가야 했다. 만약 보이저 2호가 목성 고리에 있는 돌멩이에라도 부딪쳐 우주선이 심하게 흔들린다면 안테나의 방향을 지구에 고정시킬 수 없게 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자칫하면 소중한 탐사 자료를 영원히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 결과로 자칫하면 소중한 탐사 자료를 영원히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목성 통과 직전에 지상 통제실의 연구팀은 안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상에 자리한 인간과 우주에 떠 있는 로봇이 서로의 지능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그동안 몇 차례 발생했던 비상사태를 모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 P278

279-81 보이저 2호는 1977년 8월 20일에 우주의 바다에 진수되었다. 보이저 2호는 화성 궤도를 커다란 호를 그리면서 통과하고 소행성대를 지난 후 목성권에 접근했다. 그리고 목성과 목성의 열네 개 남짓한 위성들을 한 줄로 꿰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보이저 2호가 목성 곁을 지날 때 목성은 보이저를 가속시켜서 토성을 근거리에서 통과할 수 있는 길목으로 보이저를 슬쩍 밀어 넣었다. 토성 중력의 도움으로 보이저는 다시 천왕성을 향해 힘차게 달리게 된다. 천왕성을 지나 해왕성을 뒤로하면 보이저는 태양계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 후에는 별들 사이의 광막한 바다를 영원히 떠돌아다녀야 할 새로운 운명이 보이저 우주선을 기다리고 있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탐험과 발견이야말로 인류사를 특징지은 인간의 가장 뚜렷한 속성이었으며, 인류사를 장식한 일련의 탐험 중에서 보이저 계획이야말로 가장 최근의 사건이다. 15, 16세기에는 스페인에서 아조레스 제도까지 항해하는 데 며칠이 걸렸다. 지금은 이 시간에 지구와 달 사이에 놓인 우주의 해협을 훌쩍 건너뛸 수 있다. 또한 당시에는 대서양을 횡단하여 이른바 아메리카 신대륙에 도착하는 데 몇 개월씩이나 필요했다. 오늘날에는 이 시간이면 태양계의 내해를 가로질러 화성이나 금성에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다. 그렇다면 화성과 금성이야말로 현대판 신대륙으로서 우리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외로운 섬인 셈이다. 17, 18세기에는 네덜란드에서 중국까지 가는 데 1년 내지 2년의 세월이 필요했지만, 오늘날 보이저는 이 시간에 지구에서 목성까지 갈 수 있다. 과거의 여행 비용이 오늘날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좀 더 비쌌다고는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총생산 대비 1퍼센트에도 채 못 미치는 미미한 수준임에는 변함이 없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현대 우주선들의 행성 탐사는 행성들의 유인 탐사를 알리는 선구자이며 선두주자이다. 인류의 탐사는 늘 이렇게 진척돼 왔다.
인류는 15세기와 17세기 사이에 중요한 전환기를 맞으면서 지구의 모든 곳을 탐험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래서 유럽의 대여섯 국가들에서 대규모 함대를 세계 곳곳으로 용감하게 파견하기 시작했다. 물론 함대마다 그 모험의 동기는 다양했다. 분수에 넘치는 야망, 재화에 대한 탐욕, 국가적 자존심과 국가 간의 경쟁심, 종교의 맹목적 광신, 죄수의 대량 사면, 과학적 탐구심의 발동, 모험에 대한 심한 갈증,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의 고용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 등에서 우리는 탐험대를 유럽 밖으로 내밀었던 압력의 요인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항해가 항상 좋은 결과만 가져온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지구를 하나로 묶고 지역주의의 문제를 일부 해소하여 인류를 하나의 종으로 통합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무엇보다도 행성 지구와 인류 자신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이다. - P279

284-6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는 네덜란드의 전통에서 라이덴 대학교는 지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고문의 위협을 받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버리라고 강요받던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에게 교수직을 제의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네덜란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갈릴레오는 네덜란드 사람이 설계한 스파이글라스를 개조하여 그의 첫 번째 천체 망원경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망원경을 통해 태양의 흑점, 금성의 위상 변화, 달의 운석공 그리고 목성 주위의 네 위성 등을 관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성들은 "갈릴레오의 위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천문학적 주장과 관련된 종교적 갈등을 1615년 크리스티나 대공비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털어놓고 있다.

대공비 전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몇 년 전에 소인은 천체 관측을 통하여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발견들은 매우 색다른 것이었고 또 거기서 유도되는 결론이 학계의 공식 입장과 모순되었기 때문에 소인은 적지 않은 수의 학자들로부터 (그중에는 성직자들이 많기는 합니다만) 감내하기 어려운 비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제가 자연과학의 지식 체계를 뒤집으려는 모종의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마치 제 손으로 그러한 것들을 하늘에 올려다 놓은 양, 많은 이들이 저를 극렬하게 매도했습니다. 새로운 발견이 과학의 연구, 성과, 성장의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갈릴레오는 (그리고 케플러도) 지동설을 지지하며 이를 주창했다. 그러나 그런 용기를 그 당시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교리를 따르는 데 있어 비교적 덜 광신적인 지역의 유럽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1643년 4월에 데카르트가 쓴 편지를 보자. 당시에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에 거주하고 있었다.

물론 당신도 최근에 갈릴레오가 종교 재판을 받았고, 지구의 움직임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이단으로 단죄되었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입장을 차제에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논문에서 제가 밝혀 설명한 모든 것들은 지구의 움직임에 관한 가설을 포함하여 너무도 상호 의존적입니다. 그러므로 그중 하나가 틀렸음을 알면, 나머지 것들도 모두 그 논리가 어긋남을 어렵지 않게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저의 소견이 명확하고 확실한 준거에 의거하였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만, 교회의 권위에 맞서서 이를 고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 저는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아니하며, "편히 살려면 남의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라는 제 좌우명대로 지금껏 조용히 지내 왔습니다. 원컨대 앞으로도 조용히 살기를 바랍니다. - P284

359 데모크리토스는 어떻게 보자면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여자, 아이들, 성性과 담을 쌓고 살았다. 자신이 사고할 수 있는 시간을 그러한 것들에게 빼앗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우정을 소중하게 여겼고, 즐거움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으며, 열정의 정체와 기원에 관한 철학적 고찰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런가 하면 소크라테스를 만나러 아테네까지 갔지만 부끄러운 나머지 자기 소개도 하지 못했다. 그는 히포크라테스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물질계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경외했다. 데모크리토스는 독재 아래의 부유한 삶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가난한 삶을 택하겠노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지배하던 종교들을 모두 악이라고 판단했으며, 불멸의 영혼이나 불멸의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원자와 빈 공간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 P359

375 종교와 정치 분야는 그렇지 못하지만 과학 분야에서는 이오니아의 자유로운 탐구 정신에 뿌리를 둔 바람직한 면면을 오늘날에도 여기저기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가 미신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인류 전체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몇몇 윤리적 문제들에 대해서 현대인들은 아직도 모호한 태도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고대 사회가 안고 있었던 내재적 모순의 상당 부분을 아직도 그대로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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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7 문명을 통틀어, 어느 경우에서도 3세대 이상 연속하는 세대가 없었다는 사실은 이런 관점에서 시간적 척도로 측정할 때 우리의 문명이 아직도 매우 젊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현재까지 절대 연령은 자매인 원시 사회의 연령에 비해 매우 젊다. 원시 사회는 인류 그 자체와 같은 나이이며 따라서 평균적인 어림을 잡아보면 대충 30만 년 동안 존속해 온 셈이 된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문명‘ 사회에서 인간의 역사인 이상 문명 속의 어떤 것이라도 ‘역사의 새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만약에 역사라는 말이 지구상에 인간이 살아온 기간을 뜻한다면 문명이 존재해 온 기간은 인간의 역사에 비해 인류 생애의 겨우 2퍼센트, 인류 생존 기간의 50분의 1을 차지하는 데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의 문명은 우리의 목적에서 볼 때 두뇌 구조의 유사성과 인간 정신의 유사성 때문에 그 기간 동안 큰 차이 없이 그런대로 지금의 우리와 서로 동시대적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하다.
우리의 비판자들은 아마 이번에는 또 시간적인 격차를 논거로 내세우는 것을 그만두고 가치의 차이라는 점을 이유로 하여 문명의 비교 가능성을 부정할지도 모른다. 문명이라고 주장해 온 것의 대부분은 거의가 무가치한 것으로, 사실은 ‘미개‘하기 때문에 그들의 경험과 ‘진짜‘ 문명(물론 우리 서유럽 문명과 같은)의 경험을 비교한다는 따위는 지적 에너지의 낭비임에 틀림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 점에 관하여 독자는 이 책을 끝까지 읽고, 우리가 독자에게 요구하려고 하는 지적 노력으로부터 대체 무엇이 나오는가 하는 것을 볼 때까지는 판단을 보류해 주기 바란다. 지금 여기서 가치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우리의 21개 사회를 모두 원시 사회를 기준으로 측정한다면 상당한 정도로 발달한 것이지만, 이상적인 표준을 기준으로 측정한다면 아직도 그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 점에서는 오십보 백보여서 도저히 그 속의 하나가 다른 것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 두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비판자ㅡ비록 여기까지 함께 따라오긴 했지만 여기서 작별하고 싶다ㅡ는 문명의 역사란 역사적 사실의 연속에 지나지 않으며 그 역사적 사실은 어느 것이건 모두 본질적으로 독자적인 것인데 어떻게 역사에 시공간적 반복이 있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답은 이렇다. 당신 말대로 모든 역사적 사실은 개인 하나하나와 마찬가지로 어떤 점에서는 독자적이며, 따라서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관점을 달리 해보면 그 역사적 사실 자체가 그것이 소속되는 부류의 구성원이며, 따라서 그 부류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한 시공간적으로 같은 종류의 다른 구성원과 비교될 수가 있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어느 생명체도 2개가 엄밀하게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리학·생물학·식물학·동물학·민족학 등의 과학이 무효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한층 더 다양하여 종잡기 어렵지만 우리는 심리학의 존재와 그 활동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오늘날까지 심리학이 성취한 업적의 가치에 대하여 아무리 의견이 다르더라도). 우리는 또한 인류학의 이름으로 불리는 원시 사회의 비교 연구를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것은 ‘문명‘이라는 사회의 종류에 대하여, 인류학이 현재 원시 사회라고 하는 종류에 관하여 행하고 있는 것과 대체적으로 같은 분류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은 이 장의 마지막 절에서 한층 더 명백해질 것이다. - P66

67-8 우리의 사고 대상 중에서도 특히 인간 생활의 여러 현상을 바라보고, 드러내 보이는 방법에 세 가지의 상이한 방법이 있다. 첫째는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하는 일이며, 둘째로는 확인된 사실의 비교 연구에 의해 일반적인 ‘법칙‘을 명백히 하는 일, 셋째로는 창작의 형태로 사실을 예술적으로 재생하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바로는 사실의 확인과 기록은 역사의 기법이며, 이 기법의 관할에 들어가 보는 일은 문명 사회의 모든 현상이다. 일반적 법칙의 해명과 정식화는 과학의 기법이며, 인간 생활의 연구에서 과학은 인류학이며, 과학적 기법의 관할에 들어가는 현상은 원시 사회의 사회적 현상이다. 그리고 최후로 창작은 극과 소설의 기법으로 이 기법의 관할에 들어가는 현상은 인간 대 인간의 개인적 관계이다. 대체로 이상과 같은 견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속에 수록되어 있다(예를 들면 「시학」 속에서, 시인과 역사가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 P67

74 문명과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원시 사회(언젠가 이 단서가 중요하다는 것이 판명된다) 사이의 하나의 본질적인 차이는 미메시스(모방)가 지향하는 방향이다. 미메시스는 모든 사회 생활 속에서 볼 수 있는 사회라는 종류 전체의 특징이다. 그 작용은 원시 사회나 문명 사회를 막론하고 영화 팬이 스타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것을 비롯하여 모든 사회 활동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사회에 있어서 미메시스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원시 사회에서 미메시스는 연장자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 있는 연장자의 배후에 서 있는 것으로 느껴져서 살아 있는 연장자의 위엄을 강하게 하는, 말하자면 죽은 조상들에게로 향한다. 이와 같이 미메시스가 과거를 향해 뒤돌아서 있는 사회에서는 습관이 사회를 지배해서 사회는 정적 상태에 머문다. 이것과는 반대로 문명의 과정에 있는 사회에서의 미메시스는 개척자이므로 자연히 추종자들이 모여드는 창조적 인물에게로 향해진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는 월터 배저트(영국의 경제학자·문예비평가, 1826~77)가 「물리학과 정치학」에서 말한 ‘관습의 껍질‘은 벗겨지고 사회는 변화와 성장의 길을 따라 다이나믹하게 움직인다. - P74

76-7 우리는 우리의 탐구의 궁극적 목적이었던 원시사회와 문명 사이의 변함없이 오래된 근본적 차이점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단원의 궁극적 목적인 문명 발생의 성질에 관하여 다소의 실마리는 얻었다. 원시 사회가 문명 사회로 전환하게 된 원인을 찾던 무리는 그 변화가 정적인 상태로부터 동적인 활동으로의 이행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와 똑같은 설명이, 이전에 존재하던 문명의 내적 프롤레타리아가 창조력을 상실한 지배적 소수자로부터 떠나감으로써 새로운 문명이 출현하는 경우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지배적 소수자는 공통적으로 정지해 있다. 성장기 문명의 창조적 소수자가 타락하거나 또는 퇴화하여 해체기 문명의 지배적 소수자가 된다는 것은 그 사회가 동적인 활동으로부터 정적인 상태로 빠져 들어갔다는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적인 상태에 대한 동적인 반동으로서 프롤레타리아는 새로운 환경을 향해 이동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지배적 소수자로부터 떠남으로써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는 것은, 원시 사회에서 고대 사회로 문명이 탄생하는 전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정적인 상태로부터 이를테면 기초체제에 대한 혁명처럼 동적인 활동으로 옮기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문명의 발생은ㅡ친족 관계가 없는 것, 있는 것을 통틀어ㅡ스마츠 장군이 말한 ‘인류는 또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가 있다.
이렇게 운동ㅡ휴지ㅡ운동이라는 식으로 정과 동이 교대로 나타나는 리듬은 여러 시대의 많은 관찰자들에 의해 우주의 본질 속에 포함되어 있는 어떤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함축성이 풍부한 비유적 표현에 뛰어난 중국 사회의 현인들은 이를 음과 양ㅡ음은 정에 해당하고 양은 동에 해당한다ㅡ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음을 나타내는 한자의 속뜻은 검은 소나기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 듯하고, 한편 양을 나타내는 한자의 핵심은 구름이 깔려 있지 않아 태양이 팔방으로 광선을 발산하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 듯싶다.
한자의 표현으로는 음을 항상 먼저 말하는데, 우리가 지금 취급하고 있는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인간이 30만 년 이전에 원시적 인간성의 ‘암반‘에 도달한 뒤 문명이라는 양의 활동을 개시하기까지 전체의 98퍼센트에 해당하는 기간을 그 암반 위에서 휴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P76

95-7 부분은 위험한 것이어서 비록 전체가 위험에 처하는 것은 아니라도 부분적으로 빠져드는 위험과 변화는 아무래도 전체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다. 신화적으로 표현한다면, 신이 이미 창조해낸 것 중의 하나가 악마의 유혹을 받으면 그것 때문에 신 자신이 세계를 다시 창조해야 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악마의 간섭은 특정한 쟁점을 놓고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ㅡ어느 쪽 결과도 가능성은 있다ㅡ신이 간절히 바라고 있던 음으로부터 양으로의 이행을 이룩한 셈이 된다.
극의 주역을 맡은 인간의 성격을 또 어떤가 하면,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예수이건 또는 욥이건 또는 파우스트, 아니면 아담과 이브이건 반드시 모두 고민하는 것이 기본 원칙으로 되어 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의 모습(즉, 인류상의 단계)은 원시인이 지구상의 다른 동식물에 대한 지배적 위치를 확립한 뒤 식물 채취 경제 단계에 도달한 음의 상태 즉, 정적인 상태의 회상이다. 지혜의 선악과를 따먹으라는 유혹에 대한 반응으로서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은, 일단 달성시킨 이 완전 상태를 저버리고 거기에서 새로운 완전 상태가 생길지도 모르고, 또는 생기지 않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변화를 향해 나아가라는 도전을 승낙했다는 것을 상징한다.
낙원에서 냉혹한 세계로 추방되어, 거기서 여자는 잉태하는 고통을 받고, 남자는 평생동안 이마에 땀 흘리며 빵을 구해야 하지만 그것은 뱀의 도전을 수락함으로써 생긴 당연한 시련이다. 그 뒤 아담과 이브의 성교는 사회 창조의 행위로, 그 결과 2개의 신생 문명의 의인적 상징인 양을 치는 아벨과 땅을 가는 가인이 그들이다.
인간 생활의 자연 환경 연구자로서 가장 유명한, 또 가장 창조적인 현대 학자의 한 사람도 같은 이야기를 전문가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옛날 옛적에 벌거벗었고 집도 없고 불도 모르던 야만인들이 봄이 시작되면서부터 여름이 끝날 무렵에 걸쳐 열대의 따뜻한 고향에서 나와 차차 북쪽으로 이동해 갔다. 9월로 접어들어 밤의 추위가 몸에 스며들어옴을 느끼게 될 때까지 그들은 언제나 여름이었던 나라를 등지고 온 데 대하여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나날이 추위는 심해져갔다. 원인을 모르는 채 그들은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일부는 남으로 갔으나 이전의 집으로 돌아온 사람은 불과 몇 명 되지 않았다. 이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거기서 전과 같은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손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원시 야만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다른 방향으로 헤매고 있던 무리들은 극히 작은 집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고 말았다. 이 작은 집단에 낀 사람들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인간의 재능 속에서도 가장 높은 의식적 발명의 능력을 사용했다. 어떤 자는 땅 속에 구멍을 파서 피난처를 찾으려 했고, 어떤 자는 나뭇가지나 나뭇잎을 모아 오두막과 따뜻한 잠자리를 만들었고, 어떤 자는 잡은 짐승의 가죽으로 몸을 감쌌다. ······잠시 사이에 이들 야만인들은 문명으로의 커다란 전진을 실현한 것이다. 벌거벗고 있던 자가 옷을 입게 되었고, 집이 없던 자가 숨을 장소를 갖게 되었고, 하루살이 생활을 하던 자들이 고기를 말리고 나무 열매를 저장하여 겨울에 대비할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열을 얻기 위하여 불을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렇게 그들은 처음에는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고 여겼던 곳에서 오래 살게 되었다. 그리고 가혹한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거대한 진보를 이루었고 열대 지방 사람들을 훨씬 뒤처지게 했던 것이다."

고전학자의 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를 현대의 과학적 용어로 바꾸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면 발명의 아버지는 고집이다. 적당히 단념하고 손쉽게 살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가는 것보다 불리한 역경 속에서 살아가겠다는 결심이 진보의 역설적 진리이다. 즉 네 번 되풀이되었던 빙하 시대의 혹독한 추위와 동식물의 이변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울창한 숲이 말라죽는 상태로 되었을 때 ‘달아난 원시인들‘은 자연의 지배를 가장 심하게 받았을 뿐 아니라 자연을 정복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난관을 뚫고 나가 인간이 된 것은, 이미 앉을 나무조차도 없어진 그 자리에 버티고 있던 무리였고, 또한 나무 열매가 익지 않자 고기로 대신 먹은 무리들, 햇볕을 쫓아가는 대신 불과 의복을 만든 무리들, 거처의 방비를 구축하고 아이들을 훈련시켜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세계의 합리성을 입증한 무리들이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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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3 그러나 때때로 나는 이런 의문을 품고는 한다. 탄소와 물을 좋아하는 것은 내가 주로 이 두 물질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탄소와 물을 기초 물질로 하는 생물인 것은 생명이 처음 태어날 즈음 지구에 탄소와 물이 가장 흔했기 때문은 아닐까? 지구 이외의 행성에서는, 예를 들어 화성에서는 생명이 물과 탄소가 아닌 다른 물질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나 칼 세이건은 물, 칼슘 그리고 각종 유기 분자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도 나와 거의 동일한 분자들로 구성된 집합체이면서, 단지 나와 이름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을 전부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이상하다. 분자가 나의 전부란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고 언짢아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나는 우주가 분자들로 구성된 하나의 기계를 인간과 같이 복잡 미묘한 존재로 진화하게끔 허용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고양된다. - P262

266-7 하지만 이 계획에는 역오염이라는 새로운 위험이 따른다. 미생물을 찾기 위해 화성의 토양 표본을 지구에 가져와 조사한다면 당연히 표본을 미리 살균시켜서는 안 된다. 그 탐사의 목표는 그것들을 산 채로 가져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지구로 가져온 화성의 미생물들이 공중 보건에 위협을 초래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H. G. 웰스나 오선 웰스의 화성인들은 버른마우스와 저지 시의 점령에만 몰두하다가 그들의 면역 체계가 지구의 미생물에 대하여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것은 심각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화성 미생물들은 없을지도 모른다. 존재한다 해도 그것들 1킬로그램을 섭취하고도 아무 일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인 데다 엄청난 도박일 수 있다. 살균이 안 된 화성의 표본을 지구로 가져오고 싶다면 지독하게 엄격한 격리 절차를 갖추어야 한다. 세균 무기를 개발하고 비축하는 국가들이 있다. 간혹 그 나라들에서 사고가 일어나는 듯싶지만 내가 아는 한 아직 전 세게적으로 전염병을 발생시키지는 않았다. 어쩌면 화성 표본들을 지구로 안전하게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 같으면 표본을 채집해서 회수해 오는 탐사를 고려해 보기 전에 먼저 확신할 수 있는 안전 대책부터 강구할 것이다. - P266

269-273 화성의 표면적은 지구의 육지 넓이와 거의 같다. 철저하게 답사하려면 분명히 몇 세기 동안 꼬박 이 일에만 매달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화성 탐사가 완료되는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로봇 비행선으로 공중에서 지도를 다 작성하고 이동 차량으로 표면을 샅샅이 조사하고 표본을 지구로 안전하게 가져오고 인간이 화성의 모래 위를 걸어본 후에 말이다. 그런 다음엔 화성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이 지구를 잘못 사용한 수많은 사례가 있다 보니 이 질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만약 화성에 생명이 있다면 화성을 그대로 놔둬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경우라면 비록 화성 생물이 미생물에 불과할지라도 화성은 화성 생물에게 맡겨 둬야 한다. 이웃 행성에 존재하는 독립적 생물계는 가치 평가를 초월하는 귀중한 자산이다. 그런 생명의 보존은, 내 생각이지만, 화성의 다른 용도에 우선돼야 한다. 그렇지만 화성에 생명이 없다면 어떨까? 화성은 원자재의 공급원으로는 적당치 않다. 앞으로도 수세기 동안은 화성에서 지구까지 화물을 운송해 오는 데 드는 비용이 비현실적으로 비쌀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화성에 가서 살 수는 있지 않을까? 어떻게든 인간이 거주할 수 있도록 화성을 변형시킬 수 있지 않을까?
분명히 아름다운 세계이기는 해도 화성은 편협한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구인에게는 주로 낮은 함량의 산소, 액체 상태에 있는 물의 결여 그리고 많은 양의 자외선 복사 등이 해결해야 할 큰 문제들이다.(저온이라는 악조건은 연중 내내 운영되는 지구의 남극 과학 기지가 입증하듯이 극복하기 힘든 장애는 아니다.) 이 모든 문제들은 공기를 더 많이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대기압이 높아지면 물이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또 산소가 많아지면 지구인도 화성 대기를 직접 호흡할 수 있을지 모르고, 자연스럽게 오존이 형성되어 태양의 자외선 복사로부터 화성의 표면을 보호하게 될 것이다. 구불구불한 운하들, 계단처럼 겹겹이 쌓인 극지 지형, 그 밖의 다른 증거들이 화성의 대기 밀도가 한때 높았음을 시사한다. 이 기체들이 화성에서 모조리 탈출했을 것 같지는 않다. 화성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중 일부는 지표면의 암석과 화학적으로 결합했고 또 일부는 지표면 아래 얼음 안에 갇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현재 극관의 얼음 덩어리 속에 모여 있을 것이다.
극관을 증발시키려면 열을 가해야 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극관에 검은색 가루를 뿌려서 태양 광선의 흡수를 조장할 수도 있다. 이것은 지구에서 숲과 초지를 없애 버리는 경우와 반대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러나 극관의 표면적이 엄청나게 넓어서 극관 전체를 검은색 가루로 뒤덮으려면 새턴 5호의 추진 로켓 1,200대 분의 먼지를 지구에서 화성까지 실어 날라야 한다.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화성 표면에 자주 이는 강풍이 일껏 덮어 놓은 극관의 먼지를 흩어 버릴지도 모른다. 더 좋은 방법은 자기 복제가 가능한 어떤 종류의 검은 물질을 이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까무잡잡한 소형 기계를 화성에 보내서 극관 전역에 걸쳐 토착 물질로부터 자기와 같은 소형 기계들을 복제하도록 한다. 사실 그런 기계들이 있기는 하다. 우리는 그것을 식물이라고 부른다. 적응과 생존에 아주 능한 식물들이 있다. 적어도 지구 미생물들 중 몇몇은 화성에서 생존할 수 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훨씬 혹독한 화성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는 어두운 색깔의 식물ㅡ예를 들어 이끼ㅡ을 인위적으로 선택해서 유전공학의 기술을 가하는 것이다. 그런 식물이 번식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현상을 기대해도 좋다. 먼저 화성의 광대한 얼음 극관에 그와 같은 이끼류의 씨를 뿌린다. 씨가 뿌리를 내려 번창하면서 극관을 어둡게 변색시킬 것이다. 그러면 태양 광선이 아주 효율적으로 흡수된다. 따라서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장구한 세월 동안 갇혀 있던 태고의 화성 대기가 밖으로 방출되는 극적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심지어는 화성판 조니 애플시드(미국의 과수 개척자. 후세 사람들을 위해 미국 각지를 다니면서 사과씨를 뿌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사과씨와 묘목을 나눠 주었다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ㅡ옮긴이)를 상상할 수 있다. 화성의 애플시드는 인간이거나 로봇일 수 있다. 화성의 애플시드가 미래 인류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겠다는 일념으로 얼어붙은 극지의 황무지를 종횡무진으로 휩쓸고 다니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이러한 작업을 일반적으로 지구화라고 부른다. 외계 행성의 환경을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바꾸는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온실 효과와 반사도의 변화를 통해서 지구의 기온을 약 1도 정도 교란시켰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속도로 화석 연료를 소비하고 산림과 초지를 파괴한다면, 불과 한두 세기 안에 지구의 기온은 1도 이상 더 변할 것이다. 이런 지구의 환경 변화와 함께 다른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할 때 화성이 적정 수준으로 지구화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아마 수백 년에서 수천 년에 불과할 것이다. 훨씬 기술이 진보된 미래에는 화성의 대기압을 증가시키고 물을 액체 상태로 존재하도록 할 뿐 아니라 극관에서 녹아 내리는 물을 따뜻한 적도 지대로 운송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할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운하망 건설이다.
운하들의 거대한 연결망을 통하여 지표면과 그 아래에서 녹은 얼음을 적도 지방으로 수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상은 100년도 채 못 되는 가까운 과거에 퍼시벌 로웰이 화성에서 실제로 진행 중이라고 착각했던 바로 그 생각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로웰과 월리스 모두 화성에서 인간이 거주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로 물 부족을 들었다. 운하 연결망이 구성된다면 물 부족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화성에서의 인간 거주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로웰은 극히 어려운 시상 조건에서 관측했다. 로웰이 화성과의 평생에 걸친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스키아파렐리 같은 사람들도 운하 비슷한 것들을 관측한 적이 있다. 스키아파렐리는 그것을 가냘픈 홈이라는 뜻으로 "카날리"라고 불렀다. 하지만 로웰은 그것을 행성을 대규모로 개조하고 있는 지적 생명의 흔적으로 해석했다. 인간은 감정이 연루되면 스스로를 기만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웃 행성에 지성을 갖춘 존재가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보다 더 인간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없지 않겠는가?
이 시점에서 나는 굳이 로웰의 생각에 큰 무게를 실어 주고 싶다. 그의 생각을 나는 하나의 훌륭한 예언으로 간주하고 싶기 때문이다. 로웰의 운하망은 정녕 화성인이 건설한 것이 될 터이다. 화성인이 없으니 로웰의 생각이 틀린 것이라고 당신은 나무라겠지만, 이 틀린 생각마저 나는 하나의 정확한 예언이라고 믿고 싶다. 언젠가 화성의 지구화가 실현된다면 화성에 영구 정착해서 화성인이 된 인간들이 거대한 운하망을 건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바로 우리가 로웰의 화성인인 것이다. - P269

275-6 처음에 섬사람들은 자기네가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다른 데 어디엔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라도, 망망대해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으므로 외부 세계와의 교역 따위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후에 그들은 선박을 발명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달로 갈 수 있는 어떤 방법이 발명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 현재 우리 주위에 이런 탐험을 감행해 줄 드레이크 선장도 콜럼버스도 없고, 공중을 헤쳐 나갈 여행편을 발명해 줄 다이달로스도 없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진리의 아버지인 시간은 우리 조상들이 알지 못했던 많은 사실을 우리에게 밝혀 주었던 것처럼 현재 우리가 알고자 갈구하나 알지 못하는 것을 우리 후손에게 드러내 보일 것이다.
- 존 윌킨스, 『달세계의 발견』, 1638년 - P275

276-278 1979년 7월 9일 보이저 2호라는 이름의 로봇과 목성권의 회우가 이루어졌다. 행성 간 공간을 항해하기 시작한 지 거의 2년 만의 사건이었다. 조립에 들어간 개별 부품의 개수만 수백만 개에 이르는 대단히 복잡한 기능의 이 우주선이 그 먼 거리를 아무 탈 없이 무사히 항해해 낸 것이다. 하나의 부품에 이상이 발생한다면 다른 것이 그 부품의 역할을 완전히 대신할 수 있도록,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부품을 여러 개씩 중복 조립한 덕을 단단히 본 것이다. 보이저 2호는 총질량이 0.9톤이고 전체 크기가 큰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이다. 태양에서 멀리 떨어진 태양계의 외곽 지대를 탐험하는 것이 이 우주선의 임무였기 때문에 보이저 2호는 다른 우주선들과는 달리 태양의 빛 에너지를 동력원으로 직접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보이저 2호는 추진력을 태양전지 대신 소형의 자체 핵 발전소에서 공급받도록 했다. 플루토늄 펠릿의 방사능 붕괴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이 핵 발전소는 수백 와트의 발전 용량을 자랑한다. 우주선 중심부에는 3대의 통합 컴퓨터와 함께 온도 제어 시스템과 같은 자체 유지용 설비들이 탑재돼 있다. 지구에서 보내는 명령을 수신하고 탐사 결과들을 지구로 송신하는 일은 지름 3.7미터의 접시형 안테나의 몫이다. 우주선이 고속으로 항해하는 동안 주사 플랫폼이 목성과 목성의 위성을 계속해서 추적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과학 장비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 플랫폼 위에 설치돼 있다. 주요 과학 장비에는 자외선 분광 측정기, 적외선 분광 측정기, 하전 입자 검출기, 자기장 측정기, 목성 전파 수신기 등이 포함돼 있다. 보이저 계획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장비는 두 대의 텔레비전 카메라로서 이것들이 태양계 외곽에 외로이 떨어져 있는 행성들의 생생한 모습을 수만 장의 화상에 담아 우리에게 전해 준 장본인이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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