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7 문명을 통틀어, 어느 경우에서도 3세대 이상 연속하는 세대가 없었다는 사실은 이런 관점에서 시간적 척도로 측정할 때 우리의 문명이 아직도 매우 젊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현재까지 절대 연령은 자매인 원시 사회의 연령에 비해 매우 젊다. 원시 사회는 인류 그 자체와 같은 나이이며 따라서 평균적인 어림을 잡아보면 대충 30만 년 동안 존속해 온 셈이 된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문명‘ 사회에서 인간의 역사인 이상 문명 속의 어떤 것이라도 ‘역사의 새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만약에 역사라는 말이 지구상에 인간이 살아온 기간을 뜻한다면 문명이 존재해 온 기간은 인간의 역사에 비해 인류 생애의 겨우 2퍼센트, 인류 생존 기간의 50분의 1을 차지하는 데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의 문명은 우리의 목적에서 볼 때 두뇌 구조의 유사성과 인간 정신의 유사성 때문에 그 기간 동안 큰 차이 없이 그런대로 지금의 우리와 서로 동시대적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하다. 우리의 비판자들은 아마 이번에는 또 시간적인 격차를 논거로 내세우는 것을 그만두고 가치의 차이라는 점을 이유로 하여 문명의 비교 가능성을 부정할지도 모른다. 문명이라고 주장해 온 것의 대부분은 거의가 무가치한 것으로, 사실은 ‘미개‘하기 때문에 그들의 경험과 ‘진짜‘ 문명(물론 우리 서유럽 문명과 같은)의 경험을 비교한다는 따위는 지적 에너지의 낭비임에 틀림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 점에 관하여 독자는 이 책을 끝까지 읽고, 우리가 독자에게 요구하려고 하는 지적 노력으로부터 대체 무엇이 나오는가 하는 것을 볼 때까지는 판단을 보류해 주기 바란다. 지금 여기서 가치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우리의 21개 사회를 모두 원시 사회를 기준으로 측정한다면 상당한 정도로 발달한 것이지만, 이상적인 표준을 기준으로 측정한다면 아직도 그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 점에서는 오십보 백보여서 도저히 그 속의 하나가 다른 것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 두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비판자ㅡ비록 여기까지 함께 따라오긴 했지만 여기서 작별하고 싶다ㅡ는 문명의 역사란 역사적 사실의 연속에 지나지 않으며 그 역사적 사실은 어느 것이건 모두 본질적으로 독자적인 것인데 어떻게 역사에 시공간적 반복이 있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답은 이렇다. 당신 말대로 모든 역사적 사실은 개인 하나하나와 마찬가지로 어떤 점에서는 독자적이며, 따라서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관점을 달리 해보면 그 역사적 사실 자체가 그것이 소속되는 부류의 구성원이며, 따라서 그 부류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한 시공간적으로 같은 종류의 다른 구성원과 비교될 수가 있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어느 생명체도 2개가 엄밀하게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리학·생물학·식물학·동물학·민족학 등의 과학이 무효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한층 더 다양하여 종잡기 어렵지만 우리는 심리학의 존재와 그 활동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오늘날까지 심리학이 성취한 업적의 가치에 대하여 아무리 의견이 다르더라도). 우리는 또한 인류학의 이름으로 불리는 원시 사회의 비교 연구를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것은 ‘문명‘이라는 사회의 종류에 대하여, 인류학이 현재 원시 사회라고 하는 종류에 관하여 행하고 있는 것과 대체적으로 같은 분류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은 이 장의 마지막 절에서 한층 더 명백해질 것이다. - P66
67-8 우리의 사고 대상 중에서도 특히 인간 생활의 여러 현상을 바라보고, 드러내 보이는 방법에 세 가지의 상이한 방법이 있다. 첫째는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하는 일이며, 둘째로는 확인된 사실의 비교 연구에 의해 일반적인 ‘법칙‘을 명백히 하는 일, 셋째로는 창작의 형태로 사실을 예술적으로 재생하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바로는 사실의 확인과 기록은 역사의 기법이며, 이 기법의 관할에 들어가 보는 일은 문명 사회의 모든 현상이다. 일반적 법칙의 해명과 정식화는 과학의 기법이며, 인간 생활의 연구에서 과학은 인류학이며, 과학적 기법의 관할에 들어가는 현상은 원시 사회의 사회적 현상이다. 그리고 최후로 창작은 극과 소설의 기법으로 이 기법의 관할에 들어가는 현상은 인간 대 인간의 개인적 관계이다. 대체로 이상과 같은 견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속에 수록되어 있다(예를 들면 「시학」 속에서, 시인과 역사가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 P67
74 문명과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원시 사회(언젠가 이 단서가 중요하다는 것이 판명된다) 사이의 하나의 본질적인 차이는 미메시스(모방)가 지향하는 방향이다. 미메시스는 모든 사회 생활 속에서 볼 수 있는 사회라는 종류 전체의 특징이다. 그 작용은 원시 사회나 문명 사회를 막론하고 영화 팬이 스타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것을 비롯하여 모든 사회 활동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사회에 있어서 미메시스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원시 사회에서 미메시스는 연장자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 있는 연장자의 배후에 서 있는 것으로 느껴져서 살아 있는 연장자의 위엄을 강하게 하는, 말하자면 죽은 조상들에게로 향한다. 이와 같이 미메시스가 과거를 향해 뒤돌아서 있는 사회에서는 습관이 사회를 지배해서 사회는 정적 상태에 머문다. 이것과는 반대로 문명의 과정에 있는 사회에서의 미메시스는 개척자이므로 자연히 추종자들이 모여드는 창조적 인물에게로 향해진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는 월터 배저트(영국의 경제학자·문예비평가, 1826~77)가 「물리학과 정치학」에서 말한 ‘관습의 껍질‘은 벗겨지고 사회는 변화와 성장의 길을 따라 다이나믹하게 움직인다. - P74
76-7 우리는 우리의 탐구의 궁극적 목적이었던 원시사회와 문명 사이의 변함없이 오래된 근본적 차이점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단원의 궁극적 목적인 문명 발생의 성질에 관하여 다소의 실마리는 얻었다. 원시 사회가 문명 사회로 전환하게 된 원인을 찾던 무리는 그 변화가 정적인 상태로부터 동적인 활동으로의 이행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와 똑같은 설명이, 이전에 존재하던 문명의 내적 프롤레타리아가 창조력을 상실한 지배적 소수자로부터 떠나감으로써 새로운 문명이 출현하는 경우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지배적 소수자는 공통적으로 정지해 있다. 성장기 문명의 창조적 소수자가 타락하거나 또는 퇴화하여 해체기 문명의 지배적 소수자가 된다는 것은 그 사회가 동적인 활동으로부터 정적인 상태로 빠져 들어갔다는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적인 상태에 대한 동적인 반동으로서 프롤레타리아는 새로운 환경을 향해 이동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지배적 소수자로부터 떠남으로써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는 것은, 원시 사회에서 고대 사회로 문명이 탄생하는 전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정적인 상태로부터 이를테면 기초체제에 대한 혁명처럼 동적인 활동으로 옮기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문명의 발생은ㅡ친족 관계가 없는 것, 있는 것을 통틀어ㅡ스마츠 장군이 말한 ‘인류는 또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가 있다. 이렇게 운동ㅡ휴지ㅡ운동이라는 식으로 정과 동이 교대로 나타나는 리듬은 여러 시대의 많은 관찰자들에 의해 우주의 본질 속에 포함되어 있는 어떤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함축성이 풍부한 비유적 표현에 뛰어난 중국 사회의 현인들은 이를 음과 양ㅡ음은 정에 해당하고 양은 동에 해당한다ㅡ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음을 나타내는 한자의 속뜻은 검은 소나기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 듯하고, 한편 양을 나타내는 한자의 핵심은 구름이 깔려 있지 않아 태양이 팔방으로 광선을 발산하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 듯싶다. 한자의 표현으로는 음을 항상 먼저 말하는데, 우리가 지금 취급하고 있는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인간이 30만 년 이전에 원시적 인간성의 ‘암반‘에 도달한 뒤 문명이라는 양의 활동을 개시하기까지 전체의 98퍼센트에 해당하는 기간을 그 암반 위에서 휴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P76
95-7 부분은 위험한 것이어서 비록 전체가 위험에 처하는 것은 아니라도 부분적으로 빠져드는 위험과 변화는 아무래도 전체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다. 신화적으로 표현한다면, 신이 이미 창조해낸 것 중의 하나가 악마의 유혹을 받으면 그것 때문에 신 자신이 세계를 다시 창조해야 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악마의 간섭은 특정한 쟁점을 놓고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ㅡ어느 쪽 결과도 가능성은 있다ㅡ신이 간절히 바라고 있던 음으로부터 양으로의 이행을 이룩한 셈이 된다. 극의 주역을 맡은 인간의 성격을 또 어떤가 하면,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예수이건 또는 욥이건 또는 파우스트, 아니면 아담과 이브이건 반드시 모두 고민하는 것이 기본 원칙으로 되어 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의 모습(즉, 인류상의 단계)은 원시인이 지구상의 다른 동식물에 대한 지배적 위치를 확립한 뒤 식물 채취 경제 단계에 도달한 음의 상태 즉, 정적인 상태의 회상이다. 지혜의 선악과를 따먹으라는 유혹에 대한 반응으로서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은, 일단 달성시킨 이 완전 상태를 저버리고 거기에서 새로운 완전 상태가 생길지도 모르고, 또는 생기지 않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변화를 향해 나아가라는 도전을 승낙했다는 것을 상징한다. 낙원에서 냉혹한 세계로 추방되어, 거기서 여자는 잉태하는 고통을 받고, 남자는 평생동안 이마에 땀 흘리며 빵을 구해야 하지만 그것은 뱀의 도전을 수락함으로써 생긴 당연한 시련이다. 그 뒤 아담과 이브의 성교는 사회 창조의 행위로, 그 결과 2개의 신생 문명의 의인적 상징인 양을 치는 아벨과 땅을 가는 가인이 그들이다. 인간 생활의 자연 환경 연구자로서 가장 유명한, 또 가장 창조적인 현대 학자의 한 사람도 같은 이야기를 전문가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옛날 옛적에 벌거벗었고 집도 없고 불도 모르던 야만인들이 봄이 시작되면서부터 여름이 끝날 무렵에 걸쳐 열대의 따뜻한 고향에서 나와 차차 북쪽으로 이동해 갔다. 9월로 접어들어 밤의 추위가 몸에 스며들어옴을 느끼게 될 때까지 그들은 언제나 여름이었던 나라를 등지고 온 데 대하여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나날이 추위는 심해져갔다. 원인을 모르는 채 그들은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일부는 남으로 갔으나 이전의 집으로 돌아온 사람은 불과 몇 명 되지 않았다. 이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거기서 전과 같은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손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원시 야만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다른 방향으로 헤매고 있던 무리들은 극히 작은 집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고 말았다. 이 작은 집단에 낀 사람들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인간의 재능 속에서도 가장 높은 의식적 발명의 능력을 사용했다. 어떤 자는 땅 속에 구멍을 파서 피난처를 찾으려 했고, 어떤 자는 나뭇가지나 나뭇잎을 모아 오두막과 따뜻한 잠자리를 만들었고, 어떤 자는 잡은 짐승의 가죽으로 몸을 감쌌다. ······잠시 사이에 이들 야만인들은 문명으로의 커다란 전진을 실현한 것이다. 벌거벗고 있던 자가 옷을 입게 되었고, 집이 없던 자가 숨을 장소를 갖게 되었고, 하루살이 생활을 하던 자들이 고기를 말리고 나무 열매를 저장하여 겨울에 대비할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열을 얻기 위하여 불을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렇게 그들은 처음에는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고 여겼던 곳에서 오래 살게 되었다. 그리고 가혹한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거대한 진보를 이루었고 열대 지방 사람들을 훨씬 뒤처지게 했던 것이다."
고전학자의 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를 현대의 과학적 용어로 바꾸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면 발명의 아버지는 고집이다. 적당히 단념하고 손쉽게 살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가는 것보다 불리한 역경 속에서 살아가겠다는 결심이 진보의 역설적 진리이다. 즉 네 번 되풀이되었던 빙하 시대의 혹독한 추위와 동식물의 이변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울창한 숲이 말라죽는 상태로 되었을 때 ‘달아난 원시인들‘은 자연의 지배를 가장 심하게 받았을 뿐 아니라 자연을 정복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난관을 뚫고 나가 인간이 된 것은, 이미 앉을 나무조차도 없어진 그 자리에 버티고 있던 무리였고, 또한 나무 열매가 익지 않자 고기로 대신 먹은 무리들, 햇볕을 쫓아가는 대신 불과 의복을 만든 무리들, 거처의 방비를 구축하고 아이들을 훈련시켜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세계의 합리성을 입증한 무리들이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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