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에 하버드대학 교수가 된 그는 이 학교에서 겪은 실상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학생들과 흙을 헤집으며 돌아다닐 수도 없었고, 그들을 썩어가는 동물 사체와 함께 벽장에 가둘 수도 없었다. 그저 논문과 시험, 과학책에 인쇄된 믿음들을 끊임없이 반복 암송하는 일뿐이었다. 이런 접근법을 우려스럽게 본 아가시는 "과학은 일반적으로 믿음을 싫어한다"고 경고했다. 예컨대 1850년이나 되어서도 다수의 존경받는 과학자들이 벼룩과 구더기 같은 것이 먼지 입자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는 ‘자연발생설‘을 여전히 믿고 있었고, 그보다 몇십 년 전까지도 어떤 물질이 불에 탈 수 있는지 없는지를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는 마술적 물질이 결정한다고 믿고 있었다.

나는 데이비드가 마시던 모닝커피가 코로 넘어가는 모습을 그려본다. 하지만 그게 커피였을 가능성은 없다. 그는 자신의 지각 능력에 해가 될까봐 평생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카페인까지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런 장소가 존재한다는 너무나도 믿을 수 없는 사실 앞에서, 그의 코로 넘어간 건 어쩌면 물이나 허브차, 아니면 다른 무언가였을 것이다. 그는 최대한 빨리 캠프에 지원했다. 몇 주 뒤, 아가시가 직접 서명한 합격통지서와 함께 일리노이주를 빠져나갈 티켓이 우편으로 도착했다.

일부 학생들은 경악했다. 영국 로체스터에서 온 젊은 조류관찰자 프랭크 H. 래틴은 그 섬의 고적한 위치와 태양을 막아줄 보호막조차 없다는 사실에 그 섬을 지옥 같은 곳이라고 묘사했다. "그 자체만으로 볼 때 그 섬은 가장 변변찮은 장소였고, 처음에는 내가 여기 머무는 시간을 즐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도저히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눈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감각기관이어서 사람에 따라 똑같은 것도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바로 그 똑같은 뜨거운 땅이 데이비드에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조개, 해면동물, 해초들로 반짝거리며 환영의 손짓을 보냈다. 학생들이 안면을 트고, 서로 추파를 던지고, 길게 늘어선 침대 중자기 자리를 고르는 동안, 데이비드는 슬그머니 해변으로 내려가 평생 처음으로 소금기 밴 바닷물에 손가락을 담갔다. 까맣고부드러운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이어서 녹색을 띤 돌을 집어 들었다가 하는 사이, 그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평생 그를 따라다닐 다급한 마음이 흘러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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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의 인생은 그렇게 계속될 수도 있었다. 꽃들을 수집하려는 필사적인 충동에 이끌리는 채로, 세상은 그의 소명에 가치가 있다는 걸 납득하지 못하는 채로.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는 천천히 잎사귀들만 가득한 외로움 속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들어 갔을지도 모른다.
그가 페니키스 섬에 발을 들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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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들은 이처럼 괴로운 시기에 수집이 줄 수 있는 달콤한 위안에 관해 연구해왔다. 수십 년간 강박적인 수집가들과 상담해온 심리학자 워너 뮌스터버거Werner Muensterberger는 《수집: 다루기 어려운 열정Collecting: An Unruly Passion》에서 수집 습관이 모종의 "박탈 혹은 상실 혹은 취약성이 발생한 후 급격히 심각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새롭게 하나를 수집할 때마다 수집가에게는 폭발적인 도취감을 주는 "무한한 힘의 환상"이 흘러넘친다고 말했다. 그라나다 대학에서 수년간 수집가들을 연구한 프란시스카 로페스-토레시야스Francisca López-Torrecillas는 스트레스나 불안을 겪는 사람들이 수집에 의지해 고통을 달랜다며 비슷한 현상을 지적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무력함을 느낄 때는 강박적인 수집이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뮌스터버거가 지적하듯, 유일한 위험은 여느 강박과 마찬가지로 수집 습관이 "신나는 일에서 "파멸적인"일로 바뀌는 어떤 지점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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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四구사¹⁶는 或躍在淵혹약재연¹⁷하면 无咎무구¹⁸리라.

구사는 혹 위로 뛰어오르거나 혹은 연못에 있으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16 구사(九四)는 하괘에서 상괘로 오르는 자리로 가장 어려운 때에 해당하는데, 위로 올라갈 수도 있고 제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 구사와 구삼은 같은 상황을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 두 위(位)는 자리 자체가 불안하고 위태한 자리로 늘 갈등하고 결단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계사전」에서는 "삼효(三爻)에는 흉이 많고(三多凶)", "사효(四爻)에는 두려움이 많다(四多懼)"고 말한다. 구삼(九三) 효사에서는 군자가 주어로 나타나지만 구사에서 주어는 용(龍)으로 생략되어 있다.

17 구사(九四)의 자리 자체가 불안하기 때문에 "혹(或)"자가 먼저 나오며, 안주할 수도 있고 뛰어 올라갈 수도 있다고 말한다. "혹(或)"의 의미는 분명히 두 가지 일에 관해서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말하는 두 가지의 가능성은 혹은 뛰어 오르거나 혹은 여전히 못에 머무는 두 가지 경우를 말한다. 뛰어 오른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을 의미하고, 여전히 못에 머문다는 것은 현실에 안주함을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때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나의 특수한 관점을 소개하면, James Legge(1815-1897, 서양에 완벽한 형태의 『주역』을 영어로 번역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중국학자)는 "도약을 시도하였으나 아쉽게도 여전히 못에 머물러 있지만 허물이 될 일은 아니다"라고 번역하였는데 상당히 일리 있는 해석으로 보인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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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3 현존하는 서유럽 그리스도교 제파의 상태를 훑어보고 그 생명력을 비교해 보면 그것이 이들 종파 각자가 세속적 권력의 지배에 굴복한 정도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유럽 그리스도 교 중에서 오늘날 가장 왕성한 생활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톨릭교이지만ㅡ가톨릭교를 신봉하는 근대 국가는 나라와 시대에 따라 군주가 영토 내의 교회 생활에 강한 세속적 권력의 지배를 가한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ㅡ단 한 사람 최고의 교회 권위자의 통솔 아래 단일 종교 단체로서 뭉쳐져 있다는, 이러한 커다란 강점을 아직 한 번도 잃은 일이 없다. 생존력 면에서 가톨릭 교회 다음가는 것은 세속적 정부의 지배에서 이탈한 신교 교파에 속하는 ‘자유 교회‘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현대의 어느 한 지방 국가의 정치체에 묶여 있는 ‘국립‘ 신교가 규모상 가장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마지막으로 영국 교회와 같이 많은 파로 나누어져 다양한 형태를 가지는 ‘국립 교회들의‘ 조금씩 서로 다른 종교적 사상과 실천면에서 그 활력의 다소를 굳이 구별한다면, 1874년에 ‘위장된 미사‘ 탄압을 목적으로 하는 법령이 나온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속적 법률을 경멸하며 냉담한 태도를 취해 온 영국 국교파의 앵글로 가톨릭파에게 최고의 영예를 주어야 할 것이다.
이 불유쾌한 비교의 교훈은 명백하다. 현대에 서유럽 그리스도 교회 여러 분파의 운세는 다양하다. 종교는 정치적 권력의 보호를 구하거나 그것에 굴복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것은 고사하고, 결국 마지막에는 손해를 본다는 우리의 명제가 옳다고 완벽히 증명한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런데 이 얼핏 보면 통칙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검열을 통과하여 정말로 통칙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전에 아무래도 설명을 달지 않으면 안 되는 현저한 예외가 하나 있다. 그 예외라는 것은 이슬람교이다. 이슬람교는 이때까지 조사해 온 어느 종교보다도 빠른 시기에 일견 한층 결정적인 방법으로 정치와 타협했음에도 불구하고 멸망해 가는 시리아 사회의 세계 교회가 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슬람교는 그 창시자의 생존 중에, 다름 아닌 창시자 자신이 취한 조치에 의해서 정치적 타협을 한 것이다. - P593

596-9 이러한 사실들은 ‘얼핏 보기에‘ 서유럽의 통치와는 다른 것처럼 생각되는 이슬람교의 경우를 충분히 설명한다고 보아도 된다. 서유럽의 통칙이란 또 한번 되풀이해서 말하자면 세속적 권력이 이미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는 종교를 피지배자에게 강제적으로 떠맡기는 데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는 일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나, 그러한 정치적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종교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결국 정치적으로 비호되는 종교가 직접 얻는 어떤 이익보다도 비싸다는 점이다.
정치적 비호로 얻은 직접 이익이 전혀 없는 경우에도 역시 대가를 치르는 벌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종교에 유해한 세속적 권력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철저한 손실을 입은 실례를 들 수 있다. 타우루스 산맥 저쪽의 이단설을 신봉하는 피지배자에게 가톨릭의 정통과 신앙을 강요하려고 하다가 실패한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성상 예배를 행하는 피지배자에게 가톨릭의 정통과 신앙을 강요하려고 하다가 실패한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성상 예배를 행하는 피지배자에게 성상 파괴를 강요하려다가 실패한 레오 시루스와 콘스탄티누스 5세, 아일랜드의 가톨릭을 믿는 피지배자에게 프로테스탄티즘을 강요하려다가 실패한 영국 국왕, 힌두 교를 믿는 피지배자에게 이슬람 교를 강요하려다가 실패한 무갈 제국의 아우랑지브 제 등등.
강요되는 종교가 기성 종교인 경우에도 위와 같다면 정치적 권력이 지배적 소수자의 철학을 강요하려고 하여 성공할 가망은 더욱 없다. 율리아누스(기원전 361~363. 로마 황제. 그리스도교를 탄압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로마 신을 부흥시키고 「반그리스도교론」을 썼다)의 실패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말했다. 사실 그것이 지금 탐구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완전한 실패를 한 것은 인도 사회의 피지배자에게 대승 불교(소승불교가 개인 중심인 데 반해, 대승 불교는 모든 중생의 해탈·극락왕생에 중점을 두었다)를 강요하려고 한 아쇼카 제였다. 당시의 불교 철학은 학문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전성기였기 때문에, 율리아누스의 신 플라톤 파 철학(3~6세기 그리스의 종교적·신비적·사변적 철학)보다는 오히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스토아 철학에 비할 만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쇼카의 뜻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끝으로 또 한 가지 고찰해야 할 것은 지배자나 지배 계급이 이미 민중 사이에 행해지고 있는 기성 종교나 지배적 소수자의 철학도 아닌, 자기가 고안한 새로운 ‘공상 종교‘를 강요하는 경우이다. 이미 고유의 생명력을 갖고 있는 종교나 철학조차도 그것을 강요하려고 하면 앞에 말한 바와 같은 실패를 하는 것을 보면, 이 후자의 기도는 일부러 역사적 사실을 조사할 것도 없이 어느 시대 어디서 시도되었던 실패처럼 끝날 것이라고 전적으로 단정해도 무방할 것으로 느껴진다. 아니,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이들 ‘공상 종교‘는 역사상 매우 진귀한 현상의 하나이니 별다른 이유 없이, 이 이유만으로 대충 훑어보기로 하자.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극단적인 예는 아마 이슬람교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설을 세운 알 하아킴(996~1020)일 것이다. 다른 곳에서 어떤 요소를 믿어 왔건 간에 소위 드루즈 파(신플라톤주의와 극단적 분파사상으로서 11세기 초 파티마조 칼리프 하킴의 정통성과 신성성을 주장. 1860년 기독교 마론파를 살해하는 박해로 악명을 떨쳤다) 신학의 독특한 교리는 알 하아킴을 전후 10회에 걸쳐 출현하는 신의 화신의 마지막뿐 아니라 가장 완전한 것으로서, 즉 잠시 출현한 후에 이 세상에서 신비적으로 모습을 감추었다가 곧 다시 승리자로서 자랑스럽게 돌아오는 신성한 불사의 메시아로서 신격화하고 있는 점이다. 이 새로운 전도자가 거둔 단 한 가지 성공은 1016년에 사도 다라지(드루즈파의 모체인 이스마엘파의 포교자)가 시리아의 헤르몬 산 기슭에 있는 워딜타임 지방의 한 작은 부락을 개종시킨 일이었다. 그로부터 15년 후에는 이 새로운 신앙으로 세계를 전향시키는 전도 활동은 분명히 끝났고, 그 이후부터 드루즈 교도의 사회는 새로운 개종자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또 배교자를 묵인하지도 않은 채 폐쇄된 세습적 종교 단체로서 존속해 왔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은 교단명을 그들이 숭배하는 신의 화신의 이름이 아니라, 처음으로 그들에게 알 하아킴의 이상한 복으믈 전한 전도자의 이름을 따서, 즉 다라지의 파생형인 드루즈로 칭하고 있다. 실패한 드루즈교 세계 교회는 헤르몬 산과 레바논 산계의 고지에 몸을 숨기고 ‘성채를 고수하는 화석‘의 완전한 견본이 되고 말았다. 동시에 그것은 알 하아킴의 ‘공상 종교‘가 실패로 끝났음을 뜻한다.
그래도 알 하아킴의 종교는 아직 적어도 ‘화석‘으로는 존속하고 있으나 이와 마찬가지로 시리아 태생의 배교자 바리우스 아비이투스 밧시아누스(황제 칭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가 로마 제국 공인의 판테온의 주신으로서 차마 자기 자신을 앉히지는 못했으나, 그의 조국 에메사의 태양신 엘라가발을 앉히려던 대답한 시도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그는 엘라가발의 세습 제사장으로 218년에 뜻밖의 행운을 만나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올라, 이 태양신의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하여 자신의 이름을 엘가라발루스라 칭하기도 하였다. 4년 후 그의 암살과 함께 그의 종교적 실험은 돌연하고도 최종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정치적 권력을 종교적 공상에 봉사하도록 시키려 한 엘라가발루스나 하아킴 등이 완전한 실패를 맛본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르나, 자기 개인의 기분을 만족시키고 싶은 욕망에서가 아니라, 좀더 진지한 동기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종교적 목적을 촉진시키기 위해 정치적 권력을 이용하려고 계획한 지배자도 역시 마찬가지로 완전한 실패로 끝났음을 보면, 정치적 수단에 의해 배후에서나 아니면 물밑으로 교리나 의식을 퍼뜨리는 일이 곤란하다는 사실이 아마 좀더 뚜렷하게 인식될 것이다. 공상 종교를 퍼뜨리려고 하다가 실패한 지배자 중에는 비종교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르나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또한 고매한 정치가로서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닌 국가적인 이유 때문에 시도한 경우도 있었다. 또 그들 중에는 자기 자신이 그것을 마음속으로부터 믿고 있음으로써 암흑 속에 있는 동포에게 광명을 주고 평화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자기가 이용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써서 그것을 동포에게 전할 자격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서 ‘공상 종교‘를 퍼뜨리려다가 실패한 지배자도 있다.
정치적 목적에 쓰기 위해 신종교를 계획적으로 만들어 낸 전형적인 예를 이룬 사람은 프톨레마이오스인데, 이집트에 아카이메네스 제국의 그리스도계 후계 국가를 건설하고 세라피스(고대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와 아피스를 합일시킨 혼성신)의 모습과 제식을 만들어 내었다. 그의 목적은 공통의 종교에 의해 그의 지배 아래 있는 이집트 인과 그리스도 인과의 간격을 없애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많은 전문가를 동원했다. 이 새로운 합성 종교는 목표로 한 민족의 양쪽 민족에게서 상당수의 신자를 획득하였으나 양자의 간격을 없앤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실패했다. 양 민족은 각각 다른 모든 점에 있어 그러하였듯이 세라피스 숭배도 따로따로 행동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내부의 양 민족간의 정신적 간격이 겨우 메워지게 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정권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지 꼭 1세기나 지난 뒤였으며, 그것도 이전에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의 영토였던 코엘레 시리아의 프롤레타리아가 자발적으로 일으킨 다른 종교에 의해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치세로부터 1000년 이상 이전에도 역시 이집트의 지배자 파라오 이크나톤이 정통의 이집트 사회 판테온 대신에 그 신성을 아톤, 즉 태양 원반으로서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영묘하고 유일하고 참된 신에의 숭배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생각건대 그가 기도한 동기는 프톨레마이오스를 움직이게 한 것과 같이 정치에서 모든 수단을 불사하는 마키아벨리즘적 이유도 아니고, 또한 알 하아킴이나 엘라가발루스의 기도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되는, 반은 제 정신이 아닌 과대 망상도 아니었다. 이크나톤을 움직인 것은 거룩한 종교적 신앙이며 그것이 아쇼카 왕의 철학적 신념과 마찬가지로 전도 활동으로서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크나톤을 움직인 종교적 동기는 이해를 초월한 진지한 것이었다. 그는 당연히 성공해야 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히 실패했는데, 실패의 원인은 그의 계획이 정치적 권력자가 위에서 아래로 ‘공상 종교‘를 퍼뜨리려고 하는 성격의 기도였다는 사실 속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그의 왕국 내에서 지배적 소수자의 심한 반감을 샀다. 더욱이 또 프롤레타리아의 마음에 닿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 P596

600 "그때 왕의 고문관은 이렇게 언명했다. 종교와 율법과 신조, 이 세 가지는 결코 폐하께서 논의하실 일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예언자의 관심사이지 국왕의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와 율법은 신의 계시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지 인간의 계획이나 설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종교적 일들은 예언자와 사도들의 사명이었습니다. 통치와 정치 같은 국왕의 임무를 예언자가 행한 예가 몇몇 있습니다마는, 예언자의 직무가 왕에게 귀속한 일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으며 또 금후 세계가 존속하는 한 결코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폐하께서 결코 이런 이야기를 하시지 않도록 충고드립니다." - P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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