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출, 향유, 무계산적인 구매(‘사는 것은 지금, 지불은 나중에‘)라고 하는 주제가 절약, 노동, 유산이라는 기존의 ‘청교도적‘인 주제들을 대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체는 외관상으로만 인간의 혁명일 뿐이다.……소비자의 욕구와 그 충족은, 오늘날에는 다른 생산력(노동력 등)과 마찬가지로 강요되고 합리화된 생산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소비의 사회』

철학적으로 볼 때 20세기 후반부터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정신보다는 몸을, 동일성보다는 차이를, 그리고 정착민보다는 유목민을 강조하는 지적인 경향이 보다 강하게 대두하였다. 흔히 이러한 일련의 경향들을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해체주의라고 부른다. 이런 새로운 사유 경향은 기존의 낡고 억압적인 사유를 극복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 같은 사상적 흐름은 인문학적으로 볼 때 분명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데리다나 들뢰즈의 철학에 열광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대목에서 보드리야르의 차가운 진단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산업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공동체적 소비보다 파편화된 개인적인 소비가 더 많은 잉여가치를 남기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심지어 산업자본은 다양한 광고 전략을 통해 하나의 개인마저도 다양한 소비 주체들로 분열시키기까지 한다. 엄마로서 소비해야 할 때가 있고, 직장 여성으로서 소비해야 할 때가 있으며, 동창회 일원으로서 친구들 앞에 과시하기 위해 소비해야 할 때도 있다. 이처럼 어떤 개인이 상품들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서로 상이한 취향과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산업자본은 통일된 한 개인의 경우에서보다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산업자본이 개인적 욕망과 그 충족의 자유를 선전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가 결코 아니라고, 오직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매우 두려운 일이 아닌가? 모든 억압적인 중심을 공격해서 삶을 해방시키려고 했던 인간의 사상적 노력마저도, 자본주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이토록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 P374

갓난아이에게 최초의 타자는 곧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최초의 타자가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일 필요는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최초의 타자가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돌보아 주느냐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타자로부터 지속적인 사랑을 받기 위해서 갓난아이는 자신을 돌보는 타자가 자신에게서 욕망하는 것을 행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자신이 김치 먹는 것을 좋아한다면, 갓난아이는 김치에 대한 자신의 불쾌감을 무릅쓰고 그것을 먹으려고 한다. 비록 괴롭긴 하지만 김치를 먹었을 때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갓난아이가 최초로 만난 어머니가 아주 느끼한 파스타를 좋아했던 경우라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지속적인 사랑을 얻기 위해서 파스타를 기꺼이 먹을 테니까 말이다.

어른이 되었을 때, 인간은 자신이 타자가 욕망했던 것을 욕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음식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김치찌개나 파스타를 먹고 싶어하는 자신의 욕망은 사실 어머니의 욕망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타인의 욕망에 입각해서 욕망하는 것은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불행은 언제든지 찾아오는 법이니까.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그러니까 어머니의 욕망을 수용하느라고 억압되었던 자신의 욕망이 분출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대립 혹은 갈등은 이로써 보면 매우 자연스런 현상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의 욕망은 어머니의 것이지 우리의 것은 아니다. 언젠가 우리는 진정한 주체로서 다시 태어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될 것이다.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회복할 수 있다면 결국 진정한 주체가 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라캉의 말대로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 - P379

하나의 달팽이 개체를 넘어서는 거시적 생명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촉각, 나아가 이 촉각을 가진 달팽이라는 생명체 자체가 이미 생명의 문제 해결의 한 가지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달팽이는 지금 현존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엄밀하게 보면 과거의 존재 혹은 과거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문제 해결의 결과로 주어진 한 생명체에게 있어 그 해결된 문제가 이미 회복 불가능한 흔적으로만 남게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시력을 가능하게 하는 기관으로서의 눈은 분명히 어떤 것에 대한 문제 해결, 즉 해법으로서 등장하게 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흔히 눈이란 기관은 보기 위한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탄생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설명이 아닐까? 도대체 무엇을 보기 위해 이것이 만들어졌으며, 또 봄으로써 어떤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가령 본다는 것이 어떤 문제의 해결이라면 도대체 보기 이전에 그 생명체가 조우했던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왜 생명은 보는 기관인 눈을 만들어 냈는가? 이곳이 바로 유전자의 논리로 대표되는 현대의 자연과학적 탐구가 근본적 한계에 부딪혀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지점이며, 생명에 대한 철학적 숙고가 다시 필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 P401

결론적으로 도킨스는 유전자와 생명체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유전자는 자기 복제자이고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인 것이다." 그의 생각이 타당하다면, 인간의 모든 사유와 행동의 진정한 주인은 우리 자신이라기보다 영원히 살려고 하는 이기적인 책략가인 유전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지점은 그동안 인간을 주체로 정립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수많은 철학적 노력이 일순간 와해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 삶의 진정한 목적은 자신의 삶의 향유가 아니라 자신을 만든 유전자를 안전하게 보존해서 가장 건강한 상태로 후세에 물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 인간은 스스로 욕망을 억제할 수 있고 심지어는 후손을 낳지 않으려고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레로 들어 도킨스를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후손을 낳지 않는 것이 실패한 생존 기계라는 증거가 될 뿐 그것으로 인해 유전자가 끊어진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진화와 관련된 도킨스의 다음 이야기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겠다.

어떤 유전자는 100만 년을 살 수가 있으나 많은 새로운 유전자는 최초의 세대조차 다 살지 못한다. 소수의 유전자가 성공을 거두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운이 좋아서이지만, 대개는 그 유전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곧 그들의 유전자가 생존 기계를 만드는 데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 예컨대 ‘우세한’ 유전자는 자기가 붙어 살고 있는 몸에 긴 다리를 주어 그 몸이 포식자로부터 도망가기 쉽게 하므로 자기의 생존을 확실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개별적인 예이지 보편적인 예는 아니다. 즉 긴 다리는 반드시 이점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두더지에게는 긴 다리가 핸디캡일 수밖에 없다. 『이기적 유전자』

도킨스에 따르면 유전자는 우리를 만드는 원초적인 정보이자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유전자가 만든 모든 생존 기계들이 적응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다면, 유전자들은 자신이 만든 생존 기계와 함께 숨을 거두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에 대한 도킨스의 이해 방식이다. 도킨스는 소수의 유전자들만이 100만 년에 걸쳐서도 생존하는 데 성공했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생존에 불가피한 생명체를 환경에 적응하도록 잘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말해 생존 기계를 잘 만든 유전자들만이 영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살하거나 굶거나 성관계를 회피하는 개체들은 유전자가 잘 만들지 못한 생존 기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유전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도킨스의 논리는 일견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도킨스는 잘 만든 생존 기계의 사례로 "긴 다리"를 가진 생명체를 이야기한다. 그는 "‘우세한’ 유전자는 자기가 붙어 살고 있는 몸에 긴 다리를 주어 그 몸이 포식자로부터 도망하기 쉽게 하므로 자기의 생존을 확실하게 할 것"이라고 해석한다. 도킨스의 논리는 사실 거대한 동어반복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여 존재한다면, 그는 이것이 모두 유전자가 생존 기계를 만드는 데 탁월했다는 증거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유전자에게 지나치게 전지전능한 힘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도킨스의 생각이 옳다면, 유전자는 환경의 변화마저도 예측하면서 가장 합리적인 생존 기계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르원틴은 『이데올로기로서의 생물학: DNA 독트린』에서 진화의 과정에서 생명체에게는 적응과 무관해 보이는 속성들이 자주 생긴다는 사실을 강조했던 적이 있다. 르원틴의 말대로 우발적인 환경 변화가 일어난다면, 적응에 무관해 보이는 속성들이 오히려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반대로 환경이 변화되기 이전에 적응에 유리했던 속성들은 새로운 적응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유전자는 앞날을 내다보고 미리 합리적 계산에 따라 생존 기계를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유전자의 새로운 교차와 배열 과정에서 고려하지 않았던 요소들이 생명체의 차원에서 부각될 수 있다. 이런 우발적 요소들에 의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성공한 유전자는 운이 좋아 생존할 수 있게 된 것일 뿐이다. 결국 ‘우세한’ 유전자가 미리 존재하여 적응에 유리한 새로운 생존 기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운 좋게 적응에 성공했던 생명체의 유전자만이 생존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이에 대해 우리는 사후적으로 ‘우세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 뿐이다. - P406

그렇다면 이제 마투라나가 진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차례이다. 도킨스는 다윈의 자연선택 개념을 받아들여서 진화를 이해하였다. 자연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체를 만든다면, 유전자는 그만큼 잘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 도킨스의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자기생산’을 강조하는 마투라나에게 있어 자연선택 개념은 생명체의 능동성과 부합되지 않는 발상으로 보였을 뿐이다. 그가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자연 표류’라는 개념을 제안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하나의 거대한 산꼭대기 가운데에 물을 부으면, 그 물은 다양한 방향으로 표류하면서 흘러내려 가게 된다. 어느 경우는 물이 더 흐르지 못해서 물길이 차단될 수도 있고, 다른 경우는 나름대로 길을 찾아서 지금까지 물길이 계속 이어져 올 수도 있다. 전자가 지금은 모습을 감춘 어느 생명종이라면, 후자는 우리가 지금도 확인하고 있는 식물들이나 동물들의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자기생산을 하는 생명은 자연 표류를 하면서 다양한 생명종들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투라나는 진화를 다음과 같이 ‘방랑하는 예술가’에 비유하게 되었다.

진화란 오히려 방랑하는 한 예술가와 비슷하다. 그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서 실 한 가닥, 깡통 한 개, 나무 한 토막을 주워 그것들의 구조와 주위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그것들을 합친다. 그가 그렇게 합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저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서로 어울리게 연결해 놓은 부분들이나 형태들로부터 온갖 복잡한 형태들이 생겨난다. 여기에는 어떤 계획도 없으니, 그저 자연스럽게 표류하는 가운데 생겨날 뿐이다. 『앎의 나무』

유전자들이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생존 기계를 만든다는 이미지는 마투라나에게서는 찾아보기 매우 힘들다. 세상에 떠도는 예술가들처럼 생명은 자신의 경로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들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형태로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흥미로운 것은 마투라나의 진화 이미지가 알튀세르의 유고에 등장하는 짧은 글「유물론 철학자의 초상」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알튀세르가 다음과 같이 묘사한 진정한 유물론자는 마투라나의 생명체와 너무도 닮아 있다.

이 사람의 나이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아주 늙었을 수도 있고, 아주 젊을 수도 있다. 핵심적인 것은 그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언제나 그는 미국 서부영화에서 그런 것처럼 달리는 기차를 탄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기원), 어디로 가는지(목적) 전혀 모르면서. 그는 도중에 아주 조그만 어느 역 부근 오지에 내린다. 「유물론 철학자의 초상」

알튀세르는 진정한 유물론자에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데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나이란 사회적인 분류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직접 그 사람을 보게 된다면, 누군가는 그가 자신보다 늙었다거나 혹은 젊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유물론자는 이런 평가를 귀담아듣지 않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는 자신보다 늙은 사람을 맹목적으로 존경하지도 않고, 혹은 자신보다 젊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 자신과 마찬가지로 단독적인 삶을 영위하는 주체로서 대우할 뿐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르는" 진정한 유물론자는 "도중에 아주 조그만 어느 역 부근 오지에 내리는" 사람이다. 그렇다. 유물론자는 자신의 출발지나 도착지를 의식하지 않는 진정한 여행가와 같은 사람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여행 도중에 마주치는 우발적인 사건,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기쁨 혹은 슬픔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반면 출발지와 도착지를 의식하는 여행가는 여행을 즐길 수 없다. 출발지와 도착지에 연연하는 여행가는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혀 현재를 긍정할 수 없는 자와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는 알튀세르가 들뢰즈와 공명하는 멋진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스피노자: 실천철학』에서 들뢰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중간으로 미끄러져서 들어간다. 우리는 리듬들을 취하거나 아니면 리듬들을 부여하기도 한다"라고 말이다. 여행 도중에 우발적으로 어느 작은 오지에 내려선 유물론자는 "중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는 자신만의 리듬을 갖고 있고, 이 작은 오지에 살고 있는 미지의 사람들도 그들만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리듬은 이곳 사람들의 리듬과 상호작용할 것이고, 마침내 두 가지 리듬은 하나의 새로운 리듬으로 결합하게 될 것이다. 알튀세르의 유물론자는 점점 더 들뢰즈의 유목민에 가까워진다. 『천 개의 고원』에서는 "유목민들은 단지 생성과 상호작용 속에서만 존재한다"라고 설명되고 있다. 말년의 알튀세르는 우발성의 유물론, 다시 말해 우발적인 마주침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새로운 생성을 꿈꿨고, 들뢰즈 역시 새로운 연결을 통한 생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기억한다면, 마투라나를 통해서도 마주침과 생성의 철학에 대한 중요한 생물학적 기초 하나를 더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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