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터리 도킨스 VS 마투라나
도킨스는 인간의 모든 행동이 유전자의 자기 보존 본능에 따라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사실 도킨스는 플라톤에서부터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에 이르기까지 통용되던 철학적 생각을 유전자라는 과학적 발견을 이용하여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따를 때 인간 개체는 유전자라는 진정한 주체의 매체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같은 도킨스의 논리에 근거하면, 우리 개체는 이제 자신의 몸과 관련된 모든 행동들에 대해 면죄부를 받게 된다. 모든 것들이 이미 유전자가 가진 이기적 자기 보존의 욕망으로부터 나왔다고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도킨스의 생각에는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 생명체를 경시하게 되는 논리가 잠재되어 있다. ‘자기생산’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생명체에 대한 마투라나의 통찰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그도 유전자의 중요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유전자는 오직 살아 있는 생명체의 요소로서만 의미가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유전자는 생명체에게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도킨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절대적이고 유일한 요소는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생명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동적인 자기생산의 능력이었다. 물론 이런 능력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외부와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상당 부분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투라나가 이야기하는 진화 과정은 생물체가 벌이는 일종의 게릴라전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적진에 뛰어들어 적이 남긴 무기나 식량으로 삶을 영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투라나의 통찰은 스승보다 먼저 죽은 바렐라라는 제자, 그리고 바렐라와 함께 작업했던 톰슨이라는 인물을 통해 지금도 발전되고 있다. 마투라나의 통찰이 가진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중요성을 확인하려면, 톰슨이 2007년도에 출간한 대작 『삶 속의 마음』을 다시 넘겨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생명과 마음에 대한 새로운 통찰뿐만 아니라 동양사상, 특히 불교와 마투라나 사이의 대화 가능성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415

슈미트는 전체 인류를 포괄하는 세계국가라는 것은 결국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모든 인류가 동지가 된다면 이것은 결국 ‘적과 동지’라는 범주의 폐기이자 동시에 정치적인 것의 폐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적도 설정되지 않는다면 정치적인 것이 성립할 수 없고 어떤 국가도 존립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세계를 하나의 동지로 이루어진 평화적 집단으로 만들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슈미트는 "정치적 세계란 다원체이지 단일체가 결코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두 차례에 걸쳐 발발했던 세계대전으로 세계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착각을 여지없이 공격하고 있는 대목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슈미트의 비관론이 날카로움을 발한다. 그는 국가란 어떤 식으로든지 상호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주요한 양분으로 삼아 존속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슈미트의 생각 이면에는 인간이란 존재가 끊임없이 적과 동지라는 정치적 범주를 통해서 편가르기를 할 것이라는 비관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억압과 국가 사이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슈미트의 지적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은 ‘적과 동지’라는 범주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불행하게도 너무나 정치적이지 않은가? 학연, 지연, 혈연 등은 언제든지 ‘적과 동지’라는 정치적인 대립으로 점화될 수 있는 기폭제가 아닐까? 학벌을 가로지르고 지연을 가로지르며 혈연을 가로지르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적과 동지라는 범주를 폐기할 수 있단 말인가?
가령 슈미트의 통찰이 타당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국가의 고질적인 억압과 국가 간의 반복되는 전쟁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추상적으로나마 한번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정치적인 것’의 범주인 ‘적과 동지’를 해체하는 데 있다. 모든 짝 개념이 그렇지만, ‘정치적인 것’을 폐기하기 위해서는 ‘적’이란 범주나 ‘동지’라는 범주를 제거해야만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동지’로 보거나, 아니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적’으로 보면 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유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자신마저 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자신을 적으로 삼는 태도는 일종의 자살행위와 같다. 현실적으로 ‘동지’라는 범주를 완전히 폐기하려는 후자의 방법은 일체의 부정 없이 오로지 자신의 삶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형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철학사를 살펴보면 모든 사람을 ‘동지’로 보는 입장을 취했던 대표적 인물로 서양의 경우 예수를, 동양의 경우 겸애를 주장했던 묵자를 언급하곤 한다. 반면 자신의 삶을 절대적인 긍정의 대상으로 삼은 대표적 인물로 서양의 경우는 에피쿠로스나 슈티르너를, 동양의 경우는 양주나 장자를 든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나 슈티르너, 양주나 장자 역시 그들이 궁극적으로 기대했던 것은 ‘자유로운 연대’라는 공동체 형식이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 P424

너는 들어 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 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장자』,「지락」 - P436

장자는 노나라 임금의 비유를 통해 새로운 유형의 행동 원리를 제안한다. 그것은 공자처럼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라는 원리가 아니라 "남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라는 원칙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상대를 대하지 말고 오히려 나는 원하지 않더라도 상대가 정말 원하는 것으로 그를 대우하라는 말이다. 장자의 비판을 통해 우리는 공자 사상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직감할 수 있다. 그의 위대함이 타자에 대한 감수성에 있었다면, 그의 한계는 그가 제안한 행위 원리가 타자에 대한 그의 감수성에 걸맞지 않게 폭력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공자가 제안했던 최고의 가치, 즉 인이란 덕목도 결국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는 개념이 아니었을까? - P437

불교에서는 인간의 실존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를 오온이라고 부른다,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은 크게 두 가지 부분, 즉 ‘몸’이라는 물질적인 부분과 ‘감각’·‘지각’·‘성향’·‘의식’이라는 심리적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싯다르타가 인간을 종종 명색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명색이란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심리적인 통일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온이 중요한 이유는 싯다르타가 집착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이 오온을 통해 설명했기 때문이다. 먼저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실존적 괴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의 말대로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생명 과정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낙심의 감정도 괴로움이며, 불쾌한 것과 접촉하고 유쾌한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며, 바라는 것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도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그는 이런 괴로움의 기원을, 오온이란 것이 ‘자아’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이라고 집착하는 데서 찾았다. 사실 이 표현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마치 싯다르타가 오온과 무관한 자아를 인정했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미 그는 "인간을 이루는 다섯 가지 덩어리들"이라고 이야기했다. 이것은 싯다르타가 자아를 오온과 무관한 별도의 기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에게 있어 자아란 오온이 결합되어 발생한 일종의 표면 효과에 불과한 것이었다. 마치 다양한 부품과 연료가 모여서 자동차가 움직이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오온을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자아의 착각은 어디서부터 유래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몸이 건강하였을 때 오온이 결합되어 나타난 자아를 자아A로, 그리고 몸이 병들었을 때 나타나는 자아를 자아B라고 가정해 보자. 자아 A로 있을 때의 건강한 몸을 기억하고 있다면, 자아 B는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해 슬픔과 비탄의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의식’의 기능이다. 의식은 기억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자신을 구성하는 것은 병든 몸과 나머지 네 심리적 요소로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아 B는 의식이 가진 기억의 힘으로 자신이 원래 가졌던 건강한 몸을 지금 상실했다고 느끼게 된다. 싯다르타가 "몸, 감각, 지각, 성향, 의식을 나의 자아가 가진 것이라고 집착한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바로 이런 의미였다고 볼 수 있다. 자아 B가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고 있는 것은 현재 자신을 구성하는 오온이 아니라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과거의 오온, 결국 자아A라고 할 수 있다.
싯다르타가 분석하고 있는 집착의 메커니즘은 사실 아직도 유효한 면이 있다. 그의 통찰은 육체적 상해를 입은 사람, 실연을 당한 사람, 부자였다가 가난해진 사람, 권력을 잃은 사람이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유를 잘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건강했을 때, 사랑에 빠졌을 때, 부자였을 때, 권력을 가졌을 때 구성된 과거의 자아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과거의 오온 상태에서 파생되어 나온 자아에 대한 현재의 집착을 무화시키는 것밖에 없다. 싯다르타의 유명한 무아론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출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점 때문에 싯다르타의 무아론을 아지타의 경우처럼 동일한 허무주의적 발상이라고 쉽게 비판해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부정했던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불변할 것이라고 믿어진 과거의 자아이지, 현재의 오온들이 결합해 만들어 낸 자아의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직면한 실존적인 현재 자아의 모습에 대해선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싯다르타의 정신이 새로운 마주침, 그리고 그로부터 야기되는 새로운 자아의 생성을 긍정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 P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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