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구연에게는 양간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양간은 부양현의 주부를 맡고 있었다. 육구연이 부양을 지날 때, 양간은 그에게 "본심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육구연은 맹자가 말했던 ‘사단‘이 바로 본심이라고 대답하였다. 또다시 양간은 "사단이 본심이라는 점은 어려서부터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본심인가"라고 묻다가 때마침 부채 장수가 관아에 분규를 고발해오자, 양간은 즉석에서 그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였다. 이 때 육구연은 "방금 그대가 송사를 판결할 때, 옳은 것에 대해 그 옳음을 알고, 그른 것에 대해 그 그름을 아는 것이 바로 그대의 본심이다"라고 말했다. 양간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 P277

주희와 육구연이 논쟁했던 초점은 학문 공부에서 심성의 도덕 함양과 경전의 연구,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처리할 것인가에 있었다. 육구연이 볼 때 학문하는 목적은 오직 도덕 경지를 실현하는 것인데, 경전의 학습이나 외부 사물의 연구는 이러한 목적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의 본심은 도덕의 근원이므로 사람의 양심 구조를 확대해 나가서 완벽하게 한다면, 이러한 목적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육학의 체계에서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고, 마음을 보존하는 공부는 독서와 궁리를 수단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 육구연은 요순 이전에 책이나 경전이 없었는데도 요순이 성현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성현이 되는 데 독서가 반드시 필요한 방법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하였다. - P288

육구연은 ‘의로움‘과 ‘이로움‘의 문제를 중심으로 강연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사상은 그들의 일상적인 습관에 의해 결정되고, 사람들의 습관은 그들의 지향과 동기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한 사람의 지향과 동기가 ‘의로움‘에 있다면 그의 습관과 깨달음은 ‘의로움‘에 있게 되고, 그 지향과 동기가 ‘이로움‘에 있다면 그의 습관과 깨달음도 ‘이로움‘에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군자가 되고자 하며 소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면, 우선 자신의 ‘뜻‘을 검사하여 자신의 추구와 지향이 ‘의로움‘인가 ‘이로움‘인가를 살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모름지기 우선적으로 자신의 정신 세계 속의 가치를 정확하게 수립해야만 하는 것이다.
육구연은, 어떤 사람이 도덕적인 사람(군자)인가, 아니면 부도덕한 사람(소인)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주로 그 사람의 표면적인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내심의 동기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어떤 사람이 종일토록 머리를 싸맨 채 성현의 책을 공부한다면, 이러한 행위는 매우 훌륭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공부하는 동기가 단지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날리기 위한 것이라면,그를 군자로 부를 수 없다. 육구연이 제시한 예는 그 자리에 있던 많은 학자들의 속마음을 정확히 꿰뚫었다. 그래서 듣는 사람들 모두가 가슴이 뜨끔했던 것이다. 나중에 육구연도 "나는 사람을 판단할 때, 언행을 보지도 않고, 공과를 보지도 않는다. 직접적으로 심장과 간을 도려 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요컨대 어떤 사람이 소인인지 혹은 군자인지는, 주로 ‘뜻을 변별하는‘ 것 즉 행위를 결정하는 동기 원칙을 변별하고 살피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 P300

여기서 조단이 말한 『어록』이란 주희의 어록을 가리킨다. 조단이 볼 때 주돈이의 『태극도설』이나 주희의 『태극해의』에서는 태극 자체가 동정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 반면, 『주자어류』에서는 태극 자체는 운동하지 못하고 다만 운동하는 기에 편승하여 동정할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마치 사람이 말을 탈 때 그 자신은 결코 달리지 않으면서도 말의 질주에 따라 상대적인 운동을 하는 사실과 같다는 것이다.
조단은 사람이 말을 타는 것에다가 태극의 동정을 비유한 주희의 견해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할 때 사람이 말을 타듯이 리가 기의 움직임에 편승할 뿐이라면, 리의 작용은 전혀 표현되지 못할 것이고, 리는 완전히 피동적인 존재로 전락하여 사물의 운동 과정에서 아무런 작용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그는 사람이 말을 타는 비유를 들더라도 마땅히 산 사람이 말을 타는 경우와 죽은 사람이 말을 타는 경우를 구분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죽은 사람이 말을 탄다면 그저 피동적으로 말 위에 앉아 말의 동정에 따라 동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산 사람이 말을 탄다면 주동적으로 말의 나아감과 멈춤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희는 이 두 상황을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조단이 생각할 때, 사람이 말을 타는 경우에 대한 주희의 이해는 사실상 죽은 사람이 말을 타는 경우에 불과할 따름이다.
조단이 강조하려 했던 점은 사물의 운동에 대한 리의 능동적인 작용이다. 이러한 능동성은 결코 태극이 시공 안에서 기계적으로 위치를 변동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가 이해한 리의 능동성이란 산 사람이 말을 타는 것과 유사하다. 리는 기 위에 편승하면서도 나아가 기를 주도하고 제어하는 작용도 한다. 따라서 조단이 "태극 자체는 동정하지 않는다"는 주희의 주장에 반대한 이유는, 태극 자체가 운동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의 운동에 대해 태극이 동정의 소이연으로서 능동적인 작용을 한다는 점을 돌출시키기 위해서였다. 조단의 말로 표현하자면 ‘죽은 리‘를 ‘살아있는 리‘로 변화시킨 것이다. 리학사에서 조단의 이러한 사상은 그 연유가 있다. 이정도 리를 기 동정의 소이연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재적으로 기의 운동을 지배하고 있는 리는 결코 죽은 리가 아니다. 그러나 주희가 태극의 동정을 논하면서 사용했던 ‘편승‘ 관념으로 리 또는 태극이 기 동정의 소이연이라는 사상을 반영해 낼 수 없다. 그러므로 주희의 이론이 지닌 문제에 대한 조단의 수정은 식견이 있는 것이었다. - P317

"공자와 안연이 즐거워한 것을 추구한다"는 말은 본래 도학이 창립된 초기에 사장과 훈고의 학문을 겨냥하여 사용했던 구호로서, 학문은 마땅히 화려한 문사나 번잡한 훈고를 벗어나 정신의 자유와 발전을 추구해야 함을 뜻한다. 그러나 유가 문화의 궁극적 경향을 살펴볼 때, ‘즐거움‘은 결코 정신 발전의 목표가 아니다. 즐거움은 단지 유학자가 최고의 인격적 경지(仁)에 도달하여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내심의 한 상태에 불과하다. 인은 즐거움을 포괄할 수 있지만, 즐거움은 인을 포용할 수 없다. 만약 정신의 화락과 기쁨을 평생토록 정신 발전의 유일한 목표로 생각한다면, 이는 여전히 안일을 좇는 동기를 전제하는 것이 되어, 궁극적으로 감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쾌락주의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또 불교나 도가와의 경계선도 분명치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조단이 인의 본원성을 견지하면서 인을 유학 최고의 원만한 경지로서 견지한 점은 유가의 전통에 부합된다.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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