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과 헤라클레이토스
서구 철학은 약 3천 년 전에 이오니아 제도에서 탄생한 이후로 줄곧 서로 반대되는 두 개의 자세로 분열되어 온 듯하다.
그 중 하나는 우주의 참다운 최종적인 실재는 전혀 변화하는 일이 없고 본질적으로 불변하는 형상 속에 있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서 또 다른 하나는 다름 아닌 운동과 진화 속에 우주의 유일한 실재가 있다고 말한다.
플라톤에서 화이트해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에서 헤겔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자명한 일이지만 이 모든 형이상학적 인식론은 항상 그것을 엮어낸 사상가 자신의 도덕적이며 정치적인 관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이데올로기적 구축물은 선험적인 것으로 제시되어 오기는 하였으나 실제로는 미리 품고 있던 윤리와 정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후천적 구조물이었던 것이다.
과학에서 유일한 선험적인 것은 객관성의 공준이다. 과학은 이 공준에 의해서 이러한 논쟁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고, 혹은 오히려 그것이 금지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진화를 연구한다. 그것은 우주 자체의 진화일 경우도 있으며 또 인간도 포함한 생물권과 같은 우주 속의 여러 가지 시스템의 진화일 경우도 있다. 일체의 현상, 일체의 사건, 일체의 인식은 어떤 상호작용을 의미하고 있으며, 그 상호작용 자체가 시스템의 구성요소에 어떤 변화를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과, 우주의 구조 속에는 변화하지 않는 실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관념과는 양립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모든 현상을 분석할 경우에 과학의 근본적인 전략은 먼저 불변하는 것을 찾는 일이다. 모든 물리적 법칙은ㅡ모든 수학적 전개도 마찬가지지만ㅡ불변적 관계를 명확히 서술한 것이다.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명제는 보편적인 공존이라는 공준이다. 어떠한 예를 택하든간에 거기에 보존되어 있는 어떤 불변하는 것으로 표시하지 않고는 어떤 현상을 분석하기란 실제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가장 명백한 예는 동력학 법칙의 수식화일 것이다. 그것은 즉 불변적인 것들의 말로 변화를 정의하고 있는 미분 방정식을 발명할 것을 필요로 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의문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즉 과학적 논술을 엮어 나가는 데 있어 기본요소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불변성, 보존, 대칭성 등은 모두 실재에 대한 오퍼레이셔널한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서 실체와 바꿔놓은 허구가 아니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 오퍼레이셔널한 이미지에 의하면 실체 그 자체는 부분적으로 상실되어 버리지만 완전히 추상적인 또는 단순한 ‘약속‘인 동일성의 원리에 입각한 논리는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약속 없이는 해나갈 수 없는 듯하다.
내가 여기에서 이러한 고전적 문제에 언급하는 것은 그 입장이 양자 혁명에 의해서 심각한 변화를 받은 점을 주의하기 위해서다. 동일성의 원리는 고전적 과학에서 물리학의 공준으로는 꼽히지 않고 있다. 이 원리는 고전적 과학에서는 단지 논리적 조작으로 사용되고 있음에 불과하며, 그것이 어떤 실질적인 실재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현대 물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공준의 하나는, 동일한 양자적 상태에 있는 두 개의 원자는 절대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양자론에 있어서도 원자와 분자의 대칭성은, 그것이 완전한가의 여부보다도 오히려 절대적인 표현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이미 동일성의 원리를 단순한 정신 지도상의 규칙이라는 입장에 국한시킬 수는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원리가 적어도 양자의 레벨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실재를 표현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131

화학적인 불변성
그러나 형의 다양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생물권 속에서는 상이한 수많은 거시적인 조직의 원형이 공존해 온 것은 명백히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면 남조류와 적충류(원생동물 섬모충강. 짚신벌레 등)와 문어와 인간 사이에 어떠한 공통점이 있을까? 세포의 발견과 세포 이론의 도움으로 이 다양성 뒤에 새로운 통일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생물계 전체의 매우 엄격한 단일성이 미시적 레벨에서 완전히 밝혀지기까지는, 20세기 제 24반기의 생화학의 발달을 기다려야만 했다. 오늘날에는 잘 알려져 있는 일이지만 박테리아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그 화학적 기구는 구조에서나 기능에서나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1. 구조. 모든 생물은 예외없이 어느 것이나 같은 두 종류의 주요 고분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단백질과 핵산이다. 또한 모든 생물에 있어서 이 고분자는 동일하고 유한한 종류의 잔기의 집합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단백질은 20종류의 아미노산에서, 핵산은 4종류의 누클레오티드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2. 기능. 모든 생물에 있어 기본적인 화학 조작 ㅡ 즉 화학 포텐셜의 운용과 저장 또는 세포 구성 성분의 생합성 ㅡ은 모두 동일한 반응으로ㅡ오히려 일련의 화학 반응계라고 하는 편이 좋겠지만ㅡ수행되고 있다.
확실히 대사반응의 중심 주제 위에, 다양한 기능적 적합에 대응한 많은 변주가 각각 연주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주는 거의 언제나 원래는 다른 기능에 사용되고 있던 일반적인 대사경로가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질소의 배설 방식이 새의 경우와 포유류의 경우는 다르다. 전자는 요산으로서 후자는 요소로서 배설한다. 그러나 새의 경우, 요산의 합성경로는 모든 생물의 체내에 있는 푸린 누클레오티드(핵산의 보편적 구성요소)를 합성하는 일련의 반응이 약간 수정된 것일 뿐이다. 포유류의 요소의 합성반응도 이와 마찬가지로 보편적 대사 경로ㅡ모든 단백질에 포함되어 있는 아미노산, 즉 알긴의 합성에 참여하는 반응 경로ㅡ가 약간 변한 것뿐이다. 이같은 예는 얼마든지 있다.
세포의 화학이 생물권 전체에 걸쳐 사실상 동일하다는 것은 우리 세대의 생물학자들이 밝힌 사실이다. 일찍이 1950년에는 그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새로운 발표가 있을 때마다 점차 확인되어 갔다. 가장 신념이 굳은 ‘플라톤파‘의 희망이 충분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세포 화학의 보편적인 ‘모습‘이 이처럼 서서히 나타남에 따라서, 그만큼 한편으로는 증식 떄의 불변성이라는 문제가 역설적인 곤란성을 띠게 되었다. 모든 생물의 구성요소와 그 합성경로가 화학적으로 동일하다고 하면 생물이 보여주는 형태학적, 생리학적 다양성의 원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걸음 더 나아가서 각 생물종이 다른 모든 종과 같은 재료와 같은 화학반응을 영위하면서 다른 모든 종과 구별되는, 그 종에 특징적인 구조적 규준을 각 세대를 통하여 불변한 채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오늘날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가지고 있다. 핵산의 경우에는 누클레오티드, 단백질의 경우에는 아미노산이라는 두 가지의 보편적 구성요소가 있다. 그것들은 논리적으로 말하면 단백질의 구조, 즉 그 입체특이적인 결합 능력을 나타내는 알파벳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생물권이 포함하고 있는 구조와 작용의 다양성 전부를 이 알파벳으로 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때 DNA 속의 누클레오티드의 배열이라는 형태로 쓰여진 텍스트가 각각 세포 증식 때에 불변인 채로 복제됨으로써 종의 불변성이 보장되고 있는 것이다. - P135

결국 단백질의 구조와 작용이 변경되거나 이러한 변경이 비록 부분적이나마 자손에게 전달되는 기구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다만 DNA의 어떤 부분의 누클레오티드의 배열에 표시되는 지령에 변화가 생긴 결과로써 단백질에 어떤 변경이 일어날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어떤 지령이나 정보를 거꾸로 DNA로 옮길 수 있는 기구는 머릿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지 모르나 현실적으로는 아무것도 존재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생물이라는 시스템은 전면적으로 극도로 보수적이고 또 자기 폐쇄적이며 또한 외계로부터 어떠한 지시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그 특성으로 보거나 그 미시적인 시계 장치와 같은 작용ㅡ그것은 DNA와 단백질 사이에도 그리고 생물과 환경 사이에도 일방 통행적인 관계를 수립하고 있다ㅡ으로 보아도 모든 ‘변증법적‘ 기술에 저항하고 그에 도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데카르트적인 것이지 헤겔적인 것은 아니다. 세포는 바로 그러한 것이다. - P144

그러나 물리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에 의하면(도달될 수 없는 한계온도인 절대온도 이외에서는) 어떠한 미시적 존재도 양자적인 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이것이 거시적인 계 속에서 축적되면, 서서히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구조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생물은 정확한 번역을 보증하고 있는 완벽한 보존기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다세포 생물의 노화와 죽음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번역의 우발적인 과오의 축적이라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 이 과오, 특히 번역을 정확히 행하는 일에 관계되고 있는 구성요소에 영향을 주는 과오는 과오를 일으키는 빈도를 더욱 높이고 생물의 구조를 가차없이 조금씩 붕괴시켜 가는 결과가 된다. - P145

현대 생물학 연구 중에서 방법론적 면에서나 그 중요성의 면에서나 특히 두드러진 작업은 소위 분자유전학이라 불리는 분야에서 생기고 있다(벤저, 야놉스키, 브렌너, 크릭).
이 분자유전학에 의해서 DNA 이중쇄 중의 폴리누클레오티드의 배열이 입는 여러 타입의 우발적인 변화를 분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돌연변이가 다음과 같은 원인에서 일어남을 알게 되었다.
1. 하나의 누클레오티드의 대(對, 페어)가 다른 대로 바뀐다.
2. 한 개 또는 몇 개의 누클레오티드 대가 결손되거나 부가된다.
3. 길이가 각기 다른 DNA가 도치되거나 되풀이되거나 전치되거나 융합되어 유전암호의 텍스트가 여러 모양으로 ‘뒤섞인다‘.
이 변화는 우발적인 것이며 무방향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유전의 텍스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이며, 이 텍스트가 생물의 유전적 구조의 유일한 저장물이므로, 그 결과 필연적으로 생물권에 있어서의 모든 신기한 것과 모든 창조의 원천은 다만 단순한 우연에만 있다고 할 수 있다.
진화라는 기적적인 구축물의 밑바닥에는 순수하고 단순한 우연, 즉 절대적으로 자유롭지만 본질은 맹목적인 우연이 있을 뿐이다. 현대 생물학의 이 중심 개념이 오늘날에는 이미 많은 가능성이 있는, 또는 단순히 생각할 수 있는 가설 중의 하나라고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관찰되고 실험된 제사실과 양립할 수 있는 또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가설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 우리의 개념이 장래에 수정될지도 모른다거나 수정될 게 틀림없다고 상상하게 하는(또는 희망하게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또 이 개념은 모든 과학 분야의 모든 개념 중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인간 중심주의를 파괴하는 것이며, 합목적성을 굳게 믿어온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에게는 본능적으로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생기설적, 물활설적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어떻게 해서든 추방해야 할 개념이며, 유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의 원인으로서의 돌연변이에 대해서 논할 경우에 우연이라는 말을 정확한 의미에서는 어떻게 사용할 수가 있으며,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가를 밝혀둘 필요가 있다. 우연이라는 개념의 내용은 단순하지 않으며 매우 잡다한 상황 속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해서 몇 가지의 예를 드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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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없어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인지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생각과 감정은 정해진 형체가 없으니까 언어라는 그릇에 담아야 비로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슬프다, 기쁘다, 외롭다, 고맙다. 이런 말을 모른다면 슬픔, 기쁨, 외로움, 고마움과 같은 감정을 명확하게 인지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모두 스스로 만든 게 아니라 배운 겁니다. 말로 익힌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책에서, 남이 쓴 글에서 배웠습니다. - P173

어떻습니까? 동료들의 기분을 배려하는 글쓴이의 마음이 보이나요? 제 눈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바쁘신데 번거로운 말씀 드립니다.’ ‘훈화 말씀을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런 것은 공손하긴 하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말은 아닙니다. 번거로운 일로 부탁을 할 때는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 되도록 짧고 명확하게 씁니다. 둘째, 읽는 사람이 웃을 수 있도록 씁니다. 그러려면 메시지를 최대한 압축하고 유머를 집어넣어야 하겠지요. 살짝 손을 보았습니다. 조금 나아졌나요?

선생님, 부탁 하나 들어주세요. 4층 남자화장실이 지저분해요. 학생들이 세면대, 소변기, 바닥에 휴지를 버립니다. 지키고 서서 감시할 순 없죠. CCTV를 설치할 수도 없고요. 그저 담임선생님들만 믿습니다. 조례 종례 시간에 한 수 지도해 주시기를 앙망합니다. 꾸~벅. 말 못하는 화장실을 대신해서 아무개 드림. - P233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글을 잘 쓸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정확하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으며, 중요한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가려낼 수 있을까요? 말하는 사람에게 최대한 감정 이입을 해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의 뜻과 분위기를 헤아리려고 하는 태도가 열쇠입니다. 보고서를 쓸 때와 마찬가지인 것이죠. - P240

글쓰기는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하는 작업입니다. 장르가 무엇이든, 모든 글쓰기가 다 그렇습니다. 글쓰기는 또한 타인과 소통하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일기만큼은 예외입니다. 일기는 남과 소통하려고 쓰는 게 아니라 혼자 보려고 쓰는 겁니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의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일기를 보면서 과거의 자신과 소통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일기는 어디까지나 소통보다는 자기표현을 위해 쓰는 글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정확하고 실감나게 표현해야 잘 쓴 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245

여러분은 이 세상을 위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에 살러 온 존재입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태어난 특성과 환경은 다르지만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의미 있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노력하고 분투하고 즐기면서, 각자 자기답게 살아가기를, 그런 삶을 누릴 기회가 여러분 모두에게 찾아들기를, 그리고 살아가면서 하는 생각과 느끼는 감정을 글로 자유롭게 표현하며 살아가기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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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0년간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신비의 영역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생기론자가 어떤 추측을 할 수 있는 넓은 영역이라고는 이제 주관성ㅡ즉 의식자체ㅡ의 분야 이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 P50

인간 중심주의의 환상
이러한 오류의 원천에는 물론 인간 중심주의의 환상이 있다. 태양중심설[지동설], 관성의 개념, 객관성의 원리 등만으로는 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신기루를 없애 버릴 수 없었다. 진화론은 처음에 이 환상을 소멸시키기는커녕, 인간은 전우주의 중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기대되었던 우주 전체의 후계자라는 점에서 인간에게 새로운 실체를 부여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신은 마침내 죽게 되고 그 대신 이 새롭고 장대한 신기루가 출현하였다. 그 이후로 ‘과학‘의 궁극적인 계획은, 소수의 원리에 입각하고 생물권과 인간을 포함한 실재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떤 통일적인 이론을 엮어내게 될 것이다. 19세기의 과학주의적 진보주의는 바로 이 의기양양한 확신에 의해서 길러진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자들은 이 통일 이론을 이미 만들어낸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엥겔스가 열역학 제2법칙을 부인하기에 이른 것은 그 법칙이 인간과 인간의 사상이 우주ㅓ적 진보의 필연적 소산이라는 확신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연의 변증법》의 서론에서 그것을 부인하고, 또 이 문제에 대하여 열렬한 우주론적 예언을 전개하고 있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그 예언에서 인류라고는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생각하는 두뇌‘에 대하여 영겁회귀를 약속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인류의 가장 낡은 신화로의 회귀다.(주: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즉 어떤 방식으로ㅡ어떤 방식인지 명료히 하는 일은 미래의 학자들의 임무가 될 것이다ㅡ공간으로 방사된 열은 필연적으로 다른 운동으로 전화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또한 그 운동 밑에서 다시 응축하여 활성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많은 죽은 태양이 백열 상태의 성운으로 재전화하는 것을 막는 본질적인 장애가 소멸한다."
"그러나 이 순환 현상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달성될 경우에 그 빈도가 아무리 많더라도, 또 그 엄격함이 아무리 가차없는 것일지라도, 생겨나서는 다시 죽는 태양과 지구의 수가 몇백만이 될지라도, 어떤 태양계 속에서 비록 하나의 혹성상에서만일지라도, 유기체의 생명이 생기는 조건이 갖추어지기 위해서 아무리 긴 세월이 필요할지라도, 먼저 무수히 많은 유기체가 생기고 또 사라진 뒤가 아니면, 그 속에서 사고력을 구비한 두뇌를 가진 동물이 출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또 자신의 생명에 호적한 조건을 찾아낸 것도 일순, 잠시 후에는 그들도 가차없이 전멸되어 버린다 할지라도ㅡ 우리는 다음과 같이 확신하고 있다. 즉 물질은 그 모든 변화를 통해서 영원히 동일한 그대로며, 그 속성의 어느 하나가 상실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물질이 그 자체의 최고의 개화인 사고하는 정신을 비정(非情)의 필연성으로써 어느 날엔가 지구상에서 근절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하더라도, 물질은 똑같은 필연성으로써 어떤 다른 장소, 어떤 다른 시대에 사고하는 두뇌를 재생시키고야 말 것이다."ㅡ(엥겔스, 《자연 변증법》, 보티첼리 역, 파리, 에디션 소설사간, 1952년, pp.45~46) - P64

생물권ㅡ제1원리에서 연역되지 않는 독특한 발생
진화론에 접목된 이 새로운 인간 중심주의의 신기루가 소멸하는 데는 이것 또한 20세기 후반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오늘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단언할 수가 있다고 믿는다. 즉 어떤 보편적 이론이ㅡ비록 그것이 다른 분야에서는 아무리 완전한 성공을 거둘지라도ㅡ 생물권의 구조와 그 진화를 제1원리에서 연역할 수 있는 현상으로서 포함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이 명제는 애매하게 보일지도 모르므로 그 점을 명확히 해 보자. 보편적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요컨대 상대론도 양자이론도 소립자이론도 포섭함이 마땅할 것이다. 몇 개의 초기 조건을 정식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 이론은 ‘우주‘의 일반적 진화를 예상하는 우주론까지도 포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라플라스나 그의 뒤를 이은 19세기의 과학과 ‘유물론‘ 철학이 믿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이러한 예상들은 통계학적인 것밖에는 될 수 없다. 아마도 이 이론 속에는 원소의 주기율도 포함될는지 모르나 이 이론으로는 원소 존재의 확률을 각각 결정하는 일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이론이 만들어지면 은하계나 태양계 같은 물체의 출현은 예상할 수 있겠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그 제(諸)원리에서 어떤 물체, 어떤 사건, 어떤 특수 현상ㅡ안드로메다 성운이든, 금성이든, 에베레스트 산이든, 지난 밤의 뇌우든ㅡ의 존재의 필연성을 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 이론은 유별(類別)된 물체나 사건 등의 존재나 성질 또는 상호 관계를 예견할 수는 있어도 개별적인 물체나 사건의 존재 또는 특별한 성질 등을 예견할 수는 없는 것이다. - P66

요컨대 이들 후성적 과정의 본질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즉 다분자로 되는 복잡한 구조체의 유기적인 전체성은 구성 요소의 구조 속에 각각 잠재적으로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구성 요소들이 집합하여야만 비로소 개시되고 현재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추진하여 가면, 전성론자와 후성론자 사이의 오랜 논쟁은 무의미한 입씨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미 완성된 구조는 그러한 형태로는 전에 그 어떤 곳에도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구조의 설계도는 그 구성요소 자체 속에 존재하여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외부로부터 아무런 개입도 받지 않고, 새로운 정보를 주입하는 일도 없이 자율적이며 자발적인 방식으로 현현화되는 것이다. 어떤 구조가 후성적으로 조립된다는 것은 창조가 아니라 개시인 것이다. - P116

오늘날 모든 종류의 생물에서 추출된 수많은 단백질 중의 아미노산 배열 순서는 수백 종이 알려져 있다. 이 배열 순서의 데이터와 현대적 분석과 계산 수단의 도움을 빌려서 비교 검토해서 이제 일반적 법칙을 연역할 수 있다ㅡ그것은 우연이라는 법칙이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2백 개의 아미노산 잔기를 포함하는 한 개의 단백질 속에서 199개의 아미노산 잔기의 배열 순서를 정확히 알고 있어도, 아직 분석에 의해서 동정되지 않은 나머지 1개의 아미노산 잔기의 성질을 예측할 수 있는 이론적 또는 경험적 규칙은 하나도 세울 수가 없다. 그 의미에서 이 구조들은 ‘우연‘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폴리펩티드 중의 아미노산의 배열 순서가 ‘우연‘이라고 말한대도 ㅡ그 점을 강조하여야 하겠는데ㅡ 그것은 무슨 무지를 고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실을 명확히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자면 폴리펩티드 속에서, 어떤 아미노산 잔기 다음에 다른 어떤 아미노산 잔기가 계속되는 평균적 빈도는 단백질 일반에 대해서 이 두 아미노산 잔기가 각각 포함되는 평균적 빈도의 쌓임과 같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예증할 수도 있다. 한 장 한 장에 아미노산의 이름을 하나씩 기입한 카드로 트럼프놀이를 한다고 하자. 그리고 카드 2백 장이 한 묶음으로 되어 있으며 그 묶음 속의 각종 카드의 장수는 단백질 중의 각 아미노산의 평균 함유율에 비례된다고 하자. 카드를 끊은 다음에 여러 가지 배열이 우연히 얻어질 것인데, 그것은 자연의 폴리펩티드 속에서 실제로 관찰되는 배열과 조금도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의미에서는 단백질의 1차 구조의 어느 것을 보아도 그것은 이용될 수 있는 20종의 아미노산 잔기에서 우연히 선택된 산물처럼 보이지만, 다시 한 번 똑같이 중요한 의미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현재 보여지는 이 배열이 전혀 우연히 합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한편으로는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와 똑같은 순서가 거의 틀림없이 특정한 단백질의 모든 분자 속에서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일군의 단백질 분자 중의 아미노산 배열 순서를 화학 분석으로 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각 단백질의 ‘우연‘한 아미노산 배열 순서는 각 생물과 각 세포의 각 세대마다 그 구조의 불변성을 확실히 유지하기 위한 매우 정확도가 높은 기구에 의해서 실제로 수천 번이고 수백만 번이고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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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론적 종교는 신에 대한 숭배에 초점을 맞춘다. 인본주의적 종교는 인간, 좀 더 정확하게는 호모 사피엔스를 숭배한다. 인본주의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특유의 신성한 성질이 있고 이 성질은 다른 모든 동물이나 다른 모든 현상의 성질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믿음이다. 인본주의자는 호모 사피엔스 고유의 성질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그것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믿는다. 최고의 선은 호모 사피엔스의 선이다. 나머지 세상 전부와 여타의 모든 존재는 오로지 이 종을 위하여 존재한다.
모든 인본주의자는 인간성을 숭배하지만 그에 대한 정의는 각기 다르다. 기독교의 경쟁 분파들이 신의 정확한 정의를 두고 다투는 것처럼, 인본주의는 ‘인간성humanity’의 정확한 정의를 두고 다투는 세 개의 경쟁 분파로 나뉘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인본주의 분파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다. 이 사상은 ‘인간성’은 개별 인간의 속성이며 개인의 자유는 더할 나위 없이 신성하다고 믿는다. 자유주의자에 따르면, 인간성의 신성한 성질은 모든 개별 사피엔스의 내면에 갖춰져 있다. 개개인의 내면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 된다. 만일 우리가 윤리적, 정치적 딜레마와 마주친다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ㅡ인간성의 목소리ㅡ를 들어야 한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주된 계명들은 이런 내면의 목소리가 지닌 자유를 침입이나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계명들을 통칭하여 ‘인권’이라고 부른다. - P327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인간을 신성시하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사실 일신론적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개인의 자유롭고 신성한 본성에 대한 믿음은 자유롭고 영원한 개인의 영혼을 믿었던 전통 기독교에서 직접 물려받은 유산이다. 그런데 영원한 영혼과 창조주 하느님에 의지하지 않을 경우, 자유주의자로서 사피엔스 개개인이 뭐 그리 특별한지를 설명하기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어려워진다.
또 다른 중요한 분파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다.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성’이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이 신성하게 보는 것은 개별 인간의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전체 호모 사피엔스 종이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가 개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 반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 사회주의자에 따르면 불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다.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아니라 주변적 속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령 부자가 가난한 자에 비해 특권을 누린다는 것은 우리가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 본질보다 돈을 더 중시한다는 의미가 된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일신론의 토대 위에 건설되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모든 영혼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일신론적 확신의 개정판이다. - P328

역사상 모든 지점은 교차로다. 우리가 과거에서 현재로 밟아온 길은 하나의 갈래였지만, 여기에서부터 미래로는 무수히 많은 갈래의 길이 나 있다. 이 중 일부는 더 넓고 평탄하며 이정표도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선택될 가능성도 더 크지만, 때때로 역사는 또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은ㅡ예상을 벗어나서 움직인다.
4세기가 시작할 무렵 로마 제국 앞에는 다양한 종교적 선택의 가능성이 펼쳐져 있었다. 제국은 전통적인 다채로운 다신교를 고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내란으로 갈기갈기 찢겼던 지난 세기를 돌아보면서 분명한 교리를 지닌 단일 종교를 믿으면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제국을 통합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는 당대에 있었던 수많은 종교 중 하나를 국교로 삼을 수 있었다. 마니교, 미트라교, 이시스교나 키벨레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심지어 불교도 선택할 수 있었다. - P337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지리적, 생물학적, 경제적 힘은 제약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제약 속에서도 어떤 결정론적 법칙에도 매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놀라운 일이 전개될 여지는 매우 많다.
이런 결론은 역사가 결정론적이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킨다. 결정론은 호소력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국민국가에 살며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경제를 조직하고 인권을 열렬하게 신봉하는 것은 역사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결정론적이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민족주의, 자본주의, 인권이 우연에 불과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역사는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도 없고 예측될 수도 없다. 역사는 카오스적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이들 간의 상호작용은 너무 복잡하므로, 힘의 크기나 상호작용 방식이 극히 조금만 달라져도 결과에는 막대한 차이가 생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역사는 이른바 ‘2단계level two’ 카오스계다. 카오스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1단계 카오스는 자신에 대한 예언에 반응을 하지 않는 카오스다. 가령 날씨는 1단계 카오스계다. 날씨는 무수히 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지만,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요인을 고려하는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 점점 더 정확하게 예보할 수 있다.
2단계 카오스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카오스다. 그러므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시장이 그런 예다. 만일 우리가 내일의 석유 가격을 1백 퍼센트 정확히 예측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석유 가격은 예측에 즉각 반응할 것이고, 해당 예측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가격이 배럴당 90달러인데 내일은 1백 달러가 될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옳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예측한다면 어떻게 될까? 거래인들은 그 예측에 따른 이익을 보기 위해 급히 매입 주문을 낼 것이고, 그 결과 가격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배럴당 1백 달러로 치솟을 것이다. 그러면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무도 모른다. - P340

그러면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달리,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가령 유럽인이 어떻게 아프리카인을 지배하게 되었을까를 연구하면, 인종의 계층은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세계는 달리 배열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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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도무지 통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제 대답은 내버려 두라는 겁니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을 비난하는 가족과 친지들의 생각을 바꾸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볼까요?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 경우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아마 좋지 않을 겁니다. 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바꾸기 싫은데 남들이라고 바꾸고 싶겠습니까?
사람은 저마다 다른 인격체이며 독립해서 활동하는 정보 처리 주체입니다. 이해관계, 경험, 학습, 개인적 성향에 따라 똑같은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며 똑같은 정보도 다르게 처리합니다. 이미 지니고 있는 인식과 가치관에 잘 들어맞는 정보는 쉽게 수용하지만 날카롭게 충돌하는 정보는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뇌에 ‘폐쇄적 자기 강화 메커니즘’이 있다는 말, 혹시 들어 보셨나요? 그런 것이 정말로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미 믿고 있는 것과 다른 사실, 다른 이론, 다른 해석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이나 글로 남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것이죠. 사람은 스스로 바꾸고 싶을 때만 생각을 바꿉니다. 어린아이라면 모를까, 열다섯 살이 넘어 뇌가 이미 다 자란 사람은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요? 대화하는 것뿐입니다. 강요하지 말고, 바꾸려 하지 말고, 이기려고 하지 말고, 무시하지도 말고, 그 사람의 견해는 그것대로 존중하면서 그와는 다른 견해를 말과 글로 이야기하면 됩니다. 남이 내 말을 듣고 곧바로 생각을 바꿀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중 단 한 조각이라도 그 사람의 뇌리에 남아서, 지금 가진 생각에 대해 지극히 사소한 의심이라도 품을 수 있게 한다면 그 대화는 성공한 겁니다.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납니다. 자신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도 있지만, 바꿀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죠. - P95

저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을 가진 종(種)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도 불신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이성과 욕망을 다 가진 존재입니다. 욕망은 아름답고 또한 추악합니다. 이성은 고결하지만 때로 나약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빛나는 선과 끔찍한 악을 다 저지릅니다. 저는 인간의 사악함은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악함은 누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부여서 악한 사람 자신도 스스로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회악이 생기면 그 원인을 나쁜 사람한테서 찾는 경우가 많은데, 모든 악이 악한 사람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소수의 사악함보다 다수의 어리석음이 사회악을 부르는 때가 더 많습니다. - P101

지금까지 여러 직업을 거쳤고, 서로 다른 자기소개서를 숱하게 써 본 사람으로서 자기소개서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제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노파심에서, 뱀다리가 될지도 모를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자기소개서를 쓰다 보면 조금은 비굴해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누구에겐가 잘 보이고 싶어서 애쓰는 모습 말입니다. 나는 남들과 똑같이 존엄한 인간이고 똑같이 귀한 소우주(小宇宙)인데 누구에겐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버둥거리다니, 어쩐지 비참한 기분이 들어! 그런 생각을 한 번쯤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것 역시 좋은 일이 아닐까요? 우리는 그런 노력을 하면서 존엄을 잃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확인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독립해서 살아가는 철학적 주체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군집(群集)’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동물입니다.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우리의 본성이며 운명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서로 서로 잘 보여야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그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누군가에게 자기를 제대로 소개하려고 애쓰는 모든 분들의 건투를 빌며! - P126

독서는 타인이 하는 말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책을 쓴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 그 사람이 펼치는 논리, 그 사람이 표현한 감정을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겁니다. 평가와 비판은 그 다음에 하면 됩니다. 저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글 속으로 들어가 더 많이 배우고 느끼고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읽어야 평가와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이입해서 책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다음, 자기 자신의 시선과 감정으로 그 간접 경험을 반추해 보는 작업이 비판적 독해라는 말이지요. - P153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죠. 설사 다 읽을 수 있다 해도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으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사귀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의미도 없고요. 행복하게 살려면 나하고 잘 맞는 사람, 통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교감해야 합니다. 맞지 않는 사람과 다투면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으니까요. 같은 이치로 내게 재미있는 책,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책, 내가 감동받는 책을 읽으면서 사는 게 최선입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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