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들 사이에서는 필연적으로 공허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는, 어떤 센세이션도 일어나지 않는 텅 빈 간극. 반면 신화적 시간이나 역사적 시간은 어떤 공허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림과 선에는 간극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점들 사이에서만 비어 있는 사이공간이 생겨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간극들은 권태의 원인이 된다. 그것은 때로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 의도가 무에 맞닥뜨리는 곳에는 바로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점-시간은 비어 있는 간극을 제거하거나 단축하고자 하는 강박을 낳는다. 간극이 오래 지속되지 않도록(독일어로 지루함은 ‘오랜 지속lange Weile‘이다ㅡ역자) 센세이셔널한 일들이 더 빨리 연달아 일어나게 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장면과 장면, 또는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 히스테리적이라고 할 정도로 가속화된다. 이러한 가속화의 힘은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 원자화된 시간은 서사적 긴장이 없는 까닭에 사람들의 주의를 지속적으로 묶어두지 못한다. 그 대신 인간의 지각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 또는 노골적인 것을 공급받는다. 점-시간은 사색적인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 P43

원자화된 시간은 불연속적 시간이다. 그 무엇도 사건들을 서로 연결해주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연관성도 어떤 지속성도 정립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지각은 기대치 않은 것, 갑작스러운 것과 맞닥뜨리게 되고 거기서 불분명한 공포가 생겨난다. 원자화, 고립, 불연속의 경험은 또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 연속성과 지속을 보장해주던 사회적 구조물들은 점차 허물어져간다. 원자화와 고립화의 경향이 사회 전반을 지배한다. 약속, 신의, 의무처럼 미래를 구속하고 하나의 지평으로 제한하여 지속성을 확립한다는 점에서 모두 시간 관행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사회적 실천 양식들은 의미를 상실한다. - P44

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히 구속되어 있지 않거나 의무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를 주는 것은 해방이나 이탈이 아니라 편입과 소속이다. 그 무엇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롭다frei, 평화friede, 친구Freund와 같은 표현의 인도게르만어 어원인 ‘fri‘는 ‘사랑하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나 연인에게 속해 있는‘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묶여 있지 않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묶여 있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적 어휘다. 받침대 없이는 자유도 없다. - P61

오늘의 삶은 받침대가 없는 까닭에 쉽게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시간의 분산은 삶의 균형을 깨뜨린다. 삶은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개인의 시간 살림살이에서 짐을 덜어줄 안정적인 사회적 리듬과 박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의 시간을 독립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이 점점 더 다양화되는 경향이 개개인을 과도한 부담으로 짓누르고 과민 상태로 몰아간다. 따라야 할 시간 규정이 사라진 결과, 자유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 상실 상태가 초래된다. - P62

쫓긴다는 느낌이 ‘놓쳐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생겨난다는 것도 잘못된 가정이다. "(가치 있는) 뭔가를 놓쳐버릴 수 있다는 불안과 그런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삶의 속도를 더 높여보고자 하는 소망은 [......] 근대에 발달해온 문화 프로그램의 결과이다. 이 문화 프로그램의 핵심은 세계의 가능성들을 더 빠르게 맛봄으로써ㅡ다시 말해 체험 속도의 증대를 통해ㅡ각자의 삶을 더 충만하게 만들고 더 풍부한 체험으로 채워가는 것, 바로 그렇게 해서 ‘좋은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 속에 가속화가 약속하는 문화적 희망이 담겨 있다. 그 결과 주체들은 더욱더 빨리 살려고 하게 된다." 그런데 현실은 이와 정반대다. 더 빨리 살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결국 죽기도 더 빨리 죽고 만다. 삶을 더욱 충만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들의 수가 아니라 지속성의 경험이다. 사건들이 빠르게 연달아 일어나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것은 싹트지 못한다. 충족과 의미는 양적인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긴 것과 느린 것이 없이 빠르게 산 삶, 짧고 즉흥적이고 오래가지 않는 체험들로 이루어진 삶은 "체험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한들 그 자체 짧은 삶일 뿐이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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