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은 소환장이나 반대 심문에는 응답하지 않는다. 영혼은 고요하게 그를 받아들이며 신뢰할 만한 상황에서만 자신의 진실을 말한다. - P24
우리 인생의 의미를 헤아리도록 도와 주는 것은 언제나 침묵이다. 또한 말로는 결코 건드릴 수조차 없는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것도 역시 침묵이다. - P25
소명이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주어지는 선물이다. 소명의 발견이란 얻기 힘든 상을 바라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참자아의 보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P32
"신은 내게 ‘왜 너는 모세 같은 사람이 되지 못했느냐?‘라고 묻는 게 아니라, ‘왜 너는 주즈야답게 살지 못했느냐?‘라고 물을 것이오." - P33
참자아의 선로를 벗어났을 때, 어떻게 하면 그 흔적을 다시 찾아갈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타고난 재능에 좀더 근접하게 살았던 어렸을 때의 기억에서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 P35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기 전에, 인생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에 귀 기울여라.‘ ‘당신이 어떤 진리와 가치관에 따라 살 것인지를 결정하기 전에, 당신이 어떤 진리를 구현하고 어떤 가치를 대표해야 할지 인생이 들려 주는 목소리를 들어 보아라.‘ 젊은 시절, 나는 ‘네 인생의 목소리를 들어 보아라‘라는 말을 이렇게 받아들였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 내어 그것이 내 것이든 아니든 우격다짐으로 나의 인생에 꿰맞추어야 하는 것으로 말이다. 혹시 이 책을 읽는 당신도 가치란 원래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극단적으로 단순한 도덕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은 도덕적인 삶이란 베스트셀러 처세서의 차례를 뒤적여 목록을 만들고, 그 목록을 일일이 체크해 가며 교양 있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것쯤으로 여긴다. 살다 보면 우리가 너무 미숙한 나머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어떤 가치를 버팀목처럼 세우고 그것에 의지해야 하는 순간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자주 되풀이된다면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남의 인생을 살려고 하거나 추상적인 규범에 의존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실패하게 마련이다. 나아가 아주 치명적인 손해를 입게 될 수도 있다. - P16
나는 한때 소명을, 자기 인생이 원하든 원치 않든 따라야만 하는 단호한 의지의 행동이자 인생의 방향을 선택하는 엄숙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죄의식과 강박증에 사로잡혀 진리와 선의 길을 따른다면 소명에 대한 그런 접근법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믿고 있는 것처럼 진정한 우리의 자아가 추구하는 것이 완전함이라면, 마음에도 없는 소명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아무리 숭고한 비전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내부에서 길러진 것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부여된 강제의 것이라면 그것은 심각한 폭력이다. 우리 안의 참자아는 침범을 당하면 우리에게 저항할 것이다. 진실을 인정할 때까지 때로는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면서 우리 인생을 방해할 것이다.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듣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는 인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 참모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참모습이 내가 원하는 인생의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은 내 의도가 아무리 진지하다 할지라도 결코 참된 의미를 갖지 못한다. - P17
인생의 표면적인 경험 아래에 더 깊고 진실한 인생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며 고생도 해봐야 한다. - P19
흔히 우리는 입에 담아 말했다는 이유로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특히 이성이나 에고보다 더욱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할 때, 우리 내면의 스승이 진실을 말하고자 할 때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는 그런 종류의 말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럴 때는 우리의 인생이 해 주는 말을 잘 듣고 받아 적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진실을 잊지 않고, 그것을 들은 적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물론, 인생은 꼭 언어를 통해서만 말하지는 않는다. 행동과 반응, 직관과 본능, 감정과 몸의 상태를 통해서 어쩌면 말보다도 더욱 심오한 표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에게도 식물처럼 어떤 특정한 경험의 방향으로 스스로를 끌어당기고 도움이 되지 않는 다른 것들을 멀리하려는 지향성이 있다. 만약 우리가 자기 경험에 대한 스스로의 반응을 읽어낼 수만 있다면(매일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써 내려가는 그 텍스트를), 더욱 진정한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생으로 하여금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 남들에게 기꺼이 해 주고 싶은 말을 하게 해야 한다면, 또한 내가 듣기 싫은 말, 남들에게 결코 하고 싶지 않은 말도 하게 해야만 한다! - P22
이 책에서 나는 내 실수들을 자주 언급할 것이다. 내가 잘못한 선택들, 내 실체에 대한 오해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 순간에 속에 숨겨진 진실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일을 찾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때로 그런 실수 때문에 고통받기도 했지만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는 않는다. 우리 인생은 간디의 자서전 부제를 빌어 말하자면 ‘진실의 실험‘이다. 실험에서는 나쁜 결과도 성공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나의 진실과 소명을 깨달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랬다간 내가 훨씬 더 긴 책을 써야 했을 수도 있지만! - P24
파커 J. 파머,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종종 제목만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원제 《Let Your Life Speak》는 '퀘이커 공동체에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경구'(8쪽)다. 직역하면 "너의 삶이 말하게 하라."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표제)나 "네 인생의 목소리를 들어 보아라"(15쪽)처럼 의역될 수 있겠다. 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주 조바심을 내곤 했다. 그 과정에서 큰 괴로움을 겪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성취는 당연하게도 다른 무언가의 희생을 필요로 하며, —호사가들의 오랜 얘깃거리인 노력과 행운을 위시한— 여러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 맞닥뜨렸던 문제들도 어느 부분이 키 포인트고 어떤 방법을 적용하면 해결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아닌 경우도 있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직접 해보면 할 수 없거나 해결을 시도할수록 점점 복잡해지는 문제도 있었다. 어쩌면 진짜 실마리는 다른 데 있었던 것이 아닐까? 라캉은 인간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통찰했다. 나는 그가 인간이 가진 절대불변의 특성을 표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식은 으레 변화의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데도 무의식에 이끌려 그것을 좇지 않도록 하려면, 행운이 오기를 빌거나 노력을 쏟기에 앞서 '삶이 내게 걸어오는 말'을 듣는 게 우선이다. 다만, 삶은 언어로만 말하지 않는다.
긍정사회는 변증법과 해석학에 작별을 고한다. 변증법의 바탕은 부정성에 있다. 그리하여 헤겔의 "정신Geist"은 부정적인 것에 등을 돌리지 않고, 부정적인 것을 감당하고 그 속에서 자기를 보존한다. 부정성은 "정신의 생명"에 양분을 준다. 자기 속의 타자는 부정의 긴장을 촉발하며, 이로써 정신의 활력을 유지한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이 "힘"이 되는 것은 오직 "부정적인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곁에 머무를 때"뿐이다. 이러한 머무름이야말로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역전시키는 마법"이다. 반면 오직 긍정적인 것 사이에서만 뛰어다니는 자는 정신이 없다. 정신은 느리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며 그것을 소화하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투명성의 시스템은 스스로를 가속화하기 위해 모든 부정성을 폐기 처분한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보다 긍정성 속에서 질주하는 것이다. - P20
긍정사회는 부정적 감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괴로움과 고통을 대하는 법, 그러한 감정을 형식에 담는 법을 잊어버린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 영혼의 깊이, 위대함, 강인함은 바로 부정적인 것에 머무름으로써 나온다. 인간 정신도 산고의 결과이다. "영혼에 강인함을 심어주는 저 불행에 빠진 영혼의 긴장, [.......] 불행을 견디고, 버티고, 해석하고, 이용하는 영혼의 예민함과 용기, 그리고 예로부터 비밀, 가면, 정신, 계략, 위대함으로부터 영혼에 주어져온 것ㅡ그것을 영혼은 괴로움 속에서, 엄청난 괴로움의 훈육 속에서 받은 것이 아니었던가?" 긍정사회는 인간 영혼을 완전히 새로 조직화하려는 참이다. 영혼의 긍정화 흐름 속에서 사랑 역시 안락한 감정들, 복잡하지 않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흥분들의 평면적인 배합으로 전락한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싱글 거래소 미틱Meetic의 슬로건에 주의를 환기한다. "사랑에 빠지지 않고 사랑하세요!" 또는 "괴로움 없이 사랑하기, 참 쉬워요!" 사랑은 길들여지고 긍정화되어 소비와 안락의 상투형이 된다.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아야 한다. 고뇌와 정열은 부정성의 형상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부정성 없는 향락에 밀려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진, 피로, 우울과 같이 긍정성의 과잉에서 생겨나는 심리적 장애에 의해 대체된다. - P21
정치는 전략적 행위이다. 이미 이 이유 때문에라도 비밀스러운 영역은 정치와 잘 어울린다. 전면적인 투명성은 정치를 마비시킨다. 카를 슈미트는 이렇게 말한다. "공개주의 원칙과 특수한 적대 관계에 있는 것은 [......] 기밀, 즉 정치기술적 비밀이 모든 정치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관념이다. 사유재산과 경쟁에 바탕을 둔 경제활동에서 사업과 경영 상의 비밀이 필수적인 것만큼이나 정치기술적 비밀도 절대주의의 필수 요소이다." - P23
긍정사회에서 일반화된 판정의 형식은 ‘좋아요‘이다. 페이스북이 ‘싫어요‘ 버튼을 도입하는 데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고수해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긍정사회는 모든 종류의 부정성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정성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는 오직 정보 교환의 양과 속도로만 측정된다. 커뮤니케이션의 대량화는 경제적 가치의 증가로도 이어진다. 그런데 부정적인 판정은 커뮤니케이션을 손상시킨다. ‘좋아요‘가 ‘싫어요‘보다 더 빠르게 후속 커뮤니케이션을 유발하는 것이다. 거부에 담긴 부정성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효용성이 없다. - P26
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한다. 그 점에서 진리는 부정성이다. 정보의 증가와 축적만으로 진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에는 방향, 즉 의미가 없다. 진리의 부정성이 결여됨으로 인해 긍정적인 것이 마구 증식하고 다량화된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진리의 결핍, 존재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전체의 근본적인 불명료함을 제거하지 못한다. 더 많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불명료함은 오히려 더욱 첨예화된다. - P26
반면 조급성의 시대는 "영화적" 사회, 즉 시각의 영향이 두드러진 시대이다. 이 시대는 "사물들의 영화적 흐름"이 이루어질 때까지 가속화된다. 시간은 단순히 현재들의 연속으로 해체된다. 조급함의 시대는 향기가 없는 시대이다. 시간의 향기는 지속성의 현상이다. - P81
"즉각적인 향락"은 아름다울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것의 아름다움은 "한참 뒤에야" 다른 것의 빛 속에서, 귀중한 추억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기 떄문이다. 아름다움은 지속성에, 사색적 종합에 의존한다. 순간적인 광휘나 자극이 아니라 사물들의 잔광, 사물들의 여운이 아름다운 것이다. "사물들의 영화적 흐름"은 아름다움의 시간성이 아니다. 조급성의 시대, 점적인 현재들의 영화적 연속은 아름다움과 진리에 접근하지 못한다. 사색적인 머무름, 금욕적인 자제 속에서 사물은 그 아름다움을, 그 향기로운 정수를 드러낸다. 그 정수의 구성 성분은 잔광을 발하는 시간의 침전물이다. - P84
존재의 신비 속에 참여하는 "최소한의 아니마"란 궁극적으로 가장 단순한 모나드의 영혼, 어떤 의식도, 어떤 정신도 거느리지 못하는 무성적 영혼이다. 그것은 오직 두 가지 상태만을 알 뿐이다. 공포와 희열, 죽음의 위협에 대한 경악과 거기서 벗어났다는 안도나 기쁨. 후자를 기쁨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기쁨은 의식 활동의 성과이기 때문이다. - P92
중국에서는 향인香印이라고 불리는 향시계가 19세기까지 사용되었다. 유럽인들은 향인을 20세기 중반까지도 보통 향꽂이인 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향불의 연기로 시간을 잰다는 생각, 더 나아가서 시간이 향기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는 관념 자체가 아마도 낯선 것이었으리라. 이 시계가 향인이라고 불린 이유는 향으로 이루어져 태울 수 있게 된 부분이 도장과 같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향인에 대해 좌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도장 문자와 같은 형태의 문양이 나무에 새겨져 있는데, 주연이 진행되는 동안 또는 부처 상 앞에서 그 속에 들어 있는 향이 타들어가면서 모양이 드러난다." 향인은 불이 다 타면 완전한 문양이 드러나도록 한붓그리기가 가능한 형태를 취한다. 주로 문자의 본이 담겨 있는 틀에 향 가루를 채워 넣는다. 그 틀을 들어 올리면 향으로 된 글자 모양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한 글자일 수도 있고(‘福‘ 자인 경우가 많다), 여러 글자일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 하나의 공안公案(공안은 선사가 제자들에게 정신적 훈련을 위해 제시해주는 매우 압축적인, 종종 수수께끼 같은 경구를 말한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내가 나의 꽃들을 얻기 전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이것은 어떤 향인에 새겨져 있는 수수께끼 같은 공안이다. 인장의 가운데 있는 꽃 그림은 "나의 꽃들"이라는 단어를 대체한다. 향인 자체도 자두꽃 모양을 하고 있다. 불을 붙이면 불꽃이 인장에 새겨진 글자들을 한자 한자 따라 돌아다니며, 정확히 말하면 태워가며, 마치 글씨를 써가는 것처럼 보인다. 향인은 원래 여러 부품으로 이루어진 향시계 장치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향으로 만들어진 도장은 화려한 장식의 통에 담겨 있고, 바람을 막아주는 덮개에는 다시 글자나 다른 상징적 이미지의 구멍이 나 있다. 통에는 철학적인 혹은 시적인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시계 전체가 향기로운 단어와 그림으로 에워싸여 있는 것이다. 새겨져 있는 시의 충만한 의미가 벌써 향기를 발산한다. 덮개에 꽃 모양의 구멍이 나 있는 어느 향인은 통의 한쪽 면에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그대 꽃을 보라그대 대나무를 들어라그대의 마음 평화로워지리그대의 괴로움 씻어지리바닥은 향기로운 음악을태우고그대는 가지리라...... 시간 측정 수단으로서 향은 많은 점에서 물이나 모래와 구별된다. 향기가 나는 시간은 흐르거나 새어나가지 않는다. 아무것도 비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향냄새가 공간을 채운다. 향기는 시간을 공간화하고, 그리하여 시간에 지속성의 인상을 준다. 물론 불꽃이 계속해서 향을 재로 만들어버리기는 한다. 하지만 재도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재는 글자의 형태로 머물러 있다. 그리하여 향으로 된 인장은 재가 되어서도 그 의미를 전혀 잃어버리지 않는다. 재를 남기며 계속 전진하는 불꽃이 환기할 수도 있는 무상성은 지속성의 느낌에 자리를 내준다. 향인은 정말로 향기를 발산한다. 향냄새는 시간의 향기를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도 이 중국 시계는 대단히 정교하다. 향인은 흘러가지도, 새어나가지도 않는 시간의 향기로운 분위기 속에서 때를 알려준다.나는 평온히 앉아 있다ㅡ향인을 태우면서,향인은 잣나무, 삼나무의 향기로 방을 채운다.향이 다 타고 나면, 또렷한 그림이 떠오른다.비석에 새겨진 글귀 위의 푸른 이끼처럼. 향은 잣나무와 삼나무의 향기로 공간을 채운다. 향기로운 공간이 시인의 마음을 평온하고 평화롭게 만든다. 재 또한 무상성을 환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글씨를 더 또렷하게 부각시키는 "푸른 이끼"다. 잣나무와 삼나무의 향기 속에서 시간은 가만히 서 있다. "또렷한 그림"이 된 시간은 마치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은 그림의 틀 속에 넣어진 채, 새어나가지 않는다. 시간은 향기 속에, 그 한동안의 머뭇거림 속에 붙들려 있다. 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구름도 다양한 형상으로 지각된다. 온정균은 다음과 같이 쓴다.꿈속에서처럼 나비들이 나타나네,용처럼 꿈틀거리고 빙글 도는가 하면,새 같기도 하고, 봉황 같기도 하고,봄의 벌레 같기도 하고, 가을의 뱀 같기도 하네. 온갖 형상이 만들어지며 시간을 한 폭의 그림으로 응고시킨다. 시간은 공간이 된다. 봄과 가을의 병존도 시간을 멈춰 서게 한다. 시간의 정물화가 나타난다.시인 이청조에게 향인의 연기구름은 깊은 지속의 감정을 전하는 옛글처럼 보인다.부풀어 오르는 비단 같은, 물결치는 구름 모양의연기가, 타버릴 향의 마지막 재로고대의 문장을 쓰네.나의 소중한 단지에는 온기가 머뭇머뭇 남아 있고,바깥뜰의 연못달빛은 벌써 사라졌건만. 이것은 지속성에 관한 시다. 뜰의 연못에 비치던 달빛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재는 완전히 식지 않았다. 향을 품은 단지는 여전히 온기를 발산하고 있다. 온기는 지속된다. 이 한동안의 머뭇거림이 시인을 행복하게 한다. 시인 해진은 피어오르는 향인의 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향인에서 나오는 연기로향기로운 오후가 흘러갔음을 아네. 시인은 여기서 아름다운 오후가 지나갔음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시간은 각자 고유의 향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왜 오후가 지나가는 것이 아쉽겠는가? 오후의 향기 뒤에는 저녁의 좋은 냄새가 따라올 것이다. 그리고 밤은 또 그만의 고유한 향기를 발산한다. 이러한 시간의 향기들은 서사적이지 않고, 사색적이다. 이들은 선후관계로 짜여 있지 않다. 오히려 이들은 모두 스스로 자기 안에 머물러 있다.봄의 백화, 가을의 다르여름의 서늘한 바람, 겨울의 눈.정신에 쓸데없는 일이 매달려 있지 않다면그게 바로 사람에게 좋은 때라네. 좋은 시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쓸데없는 것"을 비워낸 정신이다. 바로 이러한 비움이 정신을 욕망에서 해방하고 시간에 깊이를 준다. 시간의 깊이는 모든 순간을 온 존재와, 그 향기로운 영원성과 결합한다. 시간을 극도로 무상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욕망이다. 욕망으로 인해 정신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구 내달리는 것이다. 정신이 가만히 있을 때, 정신이 자기 안에 편안히 머물러 있을 때, 좋은 시간이 생겨난다. - P94
하이데거의 사유는 예시의 선택이나 운, 발음, 어원과 같은 언어적 특수성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층위에서 그의 사유 속에 들어가보면 해체의 위협 앞에 노출되어 있는 심각한 취약성이 드러난다. "항아리Krug"라는 예는 무엇보다 그 언어적 특성 덕택에, 이를테면 Kanne(주전자)보다 사물의 이론 또는 사물의 신학을 예증하는 데 훨씬 더 적합하다. 이미 발음의 측면에서 (마지막에 폐쇄자음과 중간에 폐모음을 가진) "Krug"은 (하나의 개모음에다가 마지막에 모음이 하나 더 추가된) "Kanne"에 없는 폐쇄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폐쇄성 덕택에 "Krug"이라는 단어는 실제로 공기를 먿게 한다. 게다가 Kanne의 어원(라틴어 canna, 즉 수로)은 Krug과는 반대로 멈춤이가 붙들기Halt를 암시하지 못한다. 이 단어는 오히려 흐름, 흘러감을 연상시킨다. 언어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형태의 측면에서도 Krug은 위쪽으로 가면서 가늘어지기 때문에 Kanne보다 더 닫혀 있는 느낌을 준다. ‘volle Kanne‘와 같은 관용구(본래 ‘가득 찬 주전자‘ 라는 뜻으로 ‘전력을 다하여‘ ‘전속력으로‘등의 숙어적 의미를 지닌다)도 이 단어가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에 본질적인 의미를 지니는 사색적 평정과 느긋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음을 보여준다. - P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