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스티븐 킹은, 재능이란 엄청난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자르지 못하는 무딘 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 생각도 그와 같다. 언젠가부터 나는 노력이야말로 진정한 재능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해도 이것보다는 낫겠다!"고 불평을 터뜨린다.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그 감독이나 작가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는 웬만해선 그 사람들처럼 영화를 만들거나 책을 쓰는 수고를 감내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기발한 아이디어에서 완벽한 결과물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은 영화감독 봉준호가 <괴물>을 찍으면서 했다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고생시키다니 ‘나는 분명 지옥에 갈 것‘이라는 괴로움의 웅덩이에 수백 번은 빠지고 나서야 지나가는 것이다. 또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와 그의 영화 <버드맨>의 주인공 리건 톰슨처럼 자신이 가진 재능을 뛰어넘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정신병자처럼 환청에까지 시달리는 각오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하는 건 쉽지만 그걸 현실에서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만들어 내는 데는 거의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 노력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뭔가를 해낸 사람과 하지 못한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자신이 가진 재능을 결국 꺼내보지도 못한 채 살다가 죽을 거라는 사실 말이다. 그것도 운명의 장난이나 시대적 한계가 아니라 게으름과 의지박약이라는 한심한 이유 때문에. 그래서 세상은 우리에게 ‘당신이 가진 재능의 100%를 발휘하라!‘며 등을 떠민다. ‘이것만 따라하면 당신도 ㅇㅇㅇ가 될 수 있다!‘ 류의 성공에 이르는 수많은 공식들은 그저 노력만 한다면 우리 몸 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재능을 모조리 끌어내서 쓸 수 있을 거라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영화 <위플래쉬>에서 최고의 재즈 드럼 연주자가 되겠다는 야심으로 가득 찬 열여덟 살 청년 앤드류는 음악학교 최고의 교사인 플레처의 밴드에 보조 드러머로 뽑힌다. 그런데 이 플레처라는 인간이야말로 지독한 선생의 표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의 수업은 한마디로 살벌 그 자체. 플레처는 폭언을 퍼붓고 폭력을 휘두르는 식으로 학생들을 거세게 압박하면서 자신의 템포에 맞출 것을 주문한다. 심지어 그는 비열하기까지 하다. 상대를 추켜세우다가 한순간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 짓이겨 버리는 것이 그의 특기다. 자신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한 제자의 죽음을 교통사고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눈물까지 보이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런데 제자 또한 만만치 않다. 반드시 최고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앤드류는 메인 드러머의 자리를 따내기 위해 말 그대로 피땀을 흘리며 연습한다.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일방적인 이별을 고하는 이유도 그녀가 성공에 방해되어서다. 도무지 열정이라고는 없는 그녀와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한몫을 했다. 그렇게 아등바등하다 불운의 연속으로 연주를 망치고 플레처의 밴드에서 쫓겨난 앤드류는 드럼을 포기하고 살아간다. 얼마 후 그는 우연히 재즈 바에서 플레처와 마주치는데 플레처는 그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언제나 내 학생들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를 바랐다. (중략) 세상에서 가장 쓸 데 없는 말은 ‘그만하면 잘했다‘는 말이야." 사실 나는 일찌감치 성공 같은 건 포기한 사람이다. 나도 내게 영 재능이 없지는 않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최소한 대한민국 남쪽 끄트머리의 시골 도시 백일장에서 최우수상을 탈 정도는 됐다. 20년 평생을 갑갑한 모범생으로 살다가 이제 한 번 사는 것처럼 살아 보자는 마음에 서울에 있는 대학의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것만 해도 내 인생 전체를 돌이켜 볼 때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야 나 정도의 재능이야 시장 바닥에 널렸고 이걸 제대로 갈고 닦으려면 비상한 머리와 기이할 정도의 집념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는데, 동시에 내게는 그런 게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그걸 결정적으로 깨닫게 해준 것이 그 남자였다. 20대 중반에 잠깐 만난 그 남자는 콤플렉스만큼이나 집념도 대단했다. 정상적인 인간의 눈으로 보자면 상종을 말아야 할 찌질이, 콤플렉스덩어리에 쓰레기 같은 놈인데, 눈에 뭐가 씌어도 단단히 쓰인 내 눈에는 대단한 재능의 아티스트로 보였다(과거에 사귄 남자들을 회상할 때는 언제나 문체가 과격해지는 걸 보면 내가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놀다 보면 나는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며 자 버리는 인간이었지만, 그는 밤을 새고서라도 굳이 해야 할 필요가 없는 일, 자신의 미래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만한 일들을 기어코 하는 인간이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아, 저렇게 독한 놈이 성공하는 거구나. 그러니까 나는 성공을 못하겠구나. 그러나 동시에 이런 것도 깨달았다. 그는 정말 불행한 남자였다. 그는 영혼 깊숙이에 뿌리박힌 결핍과 트라우마와 콤플렉스 따위를 호소하면서 이 여자 저 여자를 쑤셔 대느라 바빴다. 그럼에도 그가 진정으로 관심 있는 것은 자기 자신, 그리고 성공 뿐이었다. 그는 우리 중에 가장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행복해 보이지가 않았다.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에게 진실한 친구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사람들은 그를 떠올릴 때마다 미간부터 찌푸렸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들 특히 예술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대개 성격에 모가 났거나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뭔가를 대단히 열심히 한다는 건 제정신으로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반 고흐처럼 단 한 장도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거나, 도스토옙스키처럼 우울증과 발작에 시달리면서 글을 쓰는 일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정도의 수준이다. 사실은 침대에 누워서 리모컨을 드는 게 훨씬 쉽고 훨씬 기분 좋으며 건강에 보탬이 되는 일일 것이다. 그들에게 ‘그만하면 잘했어‘의 순간은 웬만해서는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 순간이 쉽게 찾아왔더라면 그들이 잔인할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고통스러웠던 덕분에,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남기다가 고립되면서 더더욱 고통스러워지는 바람에, 우리는 그들이 신의 눈으로 만들어 낸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사실 진짜 행복한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일지도 모른다. 코엔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은 <위플래쉬>가 들춰내는 야심의 다른 면을 그린 이야기다. 무명의 포크 가수 르윈 데이비스는 한겨울에 코트 한 벌 없이 기타 하나와 우여곡절 끝에 맡게 된 남의 집 고양이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오늘 밤 자신을 재워 줄 소파를 찾아 거리를 떠도는 처지다. 성공의 순간은 언제나 그가 손을 뻗어 보기도 전에 달아나 버린다. 자꾸만 도망치는 고양이처럼. 성공에 필요한 것이 재능과 노력과 운이라면 그는 지질이도 운이 없는 남자다. 어쩌면 그 자신이 자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파에서 신세를 지다 눈이 맞아 함께 사고를 친 전력이 있는 동료 여가수 준은 그에게 임신을 했는데 네 아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청나게 기분이 더럽고 너는 살 가치도 없는 쓰레기 루저이니 당장 아이를 지울 돈을 마련해 오라며 욕설을 퍼붓는다. 사람들은 그가 부르는 어둡고 궁상맞은 노래보다는 준의 애인인 짐이 부르는 가벼운 사랑 노래를 더 좋아한다. 그는 거의 마지막이다시피 한 기회에 자신의 운을 건다. 유명한 프로듀서 버드 그로스맨을 만나기 위해 시카고로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남의 차를 얻어 타고 겨우 도착한 시카고에서 하루 종일 벌벌 떨며 버드를 기다려 겨우 오디션을 볼 기회를 잡은 르윈이 부른 노래는, 끝내주는 노래로 이 프로듀서를 넉다운시켜 주기를 바랐던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 것도 아니고 충족시킨 것도 아닌 어정쩡한 것이다.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곡 선택에 ‘미스‘가 있었다고나 할까. 창법이 ‘올드‘하다고나 할까. ‘한 방‘이 없었다고나 할까. 자신만의 매력을 찾지 못했다고 할까. 본인이 잘할 수 있는 노래와 잘하고 싶은 노래 사이의 간극이 크다고나 할까. 그냥 네 노래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한없이 처진다고나 할까. 르윈이 부른 노래의 가사는 제인 왕비의 이야기다. 임신한 왕비는 아이를 낳지 못한 채 며칠 동안 진통을 앓는다. 괴로워하다 못해 왕비는 헨리 왕에게 배를 갈라서 아이를 꺼내달라고 애원하지만 결국 낳지 못하고 죽는다. 이 뜨악한 노랫말 속에 인사이드 르윈, 즉 르윈의 내면이 있다. 르윈은 그런 사람이다. 아니, 수많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다. 그 사람들은 세상이 말하는 실패자, 그러니까 루저들이다. 그들 모두가 허황된 꿈을 꾼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버드가 말했듯이 르윈에게도 재능이 전혀 없지는 않다. 노력도 안 한 게 아니다. 그런데 별로 운이 없었다. 듀엣으로 좀 잘나가나 했더니 파트너가 다리에서 몸을 던져 자살해 버렸다. 솔로로 서자니 어쩐지 매력이 부족하다. 그건 그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그의 운명은 결국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포크의 시대라는 파도에 휩쓸려 사라져 갈, 세월이 흐르면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그저 그런 무명 가수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르윈은 그런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재능을 꺼낼 수가 없다. 저절로 나올 생각도 않는다. 그런 상태가 계속되다 보면 누구라도 지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뉴욕으로 돌아가는 고속도로에서 르윈은 애크론이라는 이정표를 지나친다. 그곳은 르윈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사라진 옛 여자 친구의 고향이다. 저 멀리 불 켜진 집들이 보인다. 그곳은 눈보라 치는 어둡고 황량한 고속도로보다 따뜻해 보인다. 어쩌면 저 집에서 그의 아이가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침대에 누워 엄마에게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조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도 여자 친구와 함께 아이를 키우며 자동차 수리를 하거나 전자제품 외판원으로 착실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인생도 어쩌면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가 살 수도 있었을 인생은 지나가 버린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야 한다. 그의 앞날은 막막하기만 하다. 1960년대의 미국, 포크의 시대에 밥 딜런이라는 걸출한 스타의 그림자에 가린 얼마나 많은 르윈 데이비스들이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포크송에 인생을 바치고 그것에 걸려 넘어졌을까.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로 나이 들었을까. 성공하지 못할 것을 예감하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르윈이 아버지에게 불러 주는 노래의 가사처럼, 청어 떼를 잡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밤낮으로 바다와 싸워야 할 것이다. 바람이 불어도, 잔잔해도, 돌풍이 불어도, 땀에 젖어도, 추워도, 나이 들어 늙어가도, 결국 죽을 때가 되어서도 우리는 청어 떼를 꿈꾸며 살아갈 것이다. 청어 떼를 만날 수 있든 없든.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나를 쥐어짜지 않았더라면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희미하게 떠오르는 깨달음은 그 쥐어짬의 과정에 어떤 희열이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지점에 도달했을 때, 그로 인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었을 때의 희열 말이다. 등산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바벨을 들어 올리는 것이나, 달리기와도 비슷한 일일 것이다. 매일 만원 전철에 오르는 것이나, 보고서의 마감 기한을 맞추는 것이나 비슷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앤드류가 언제나 동경하던 전설적인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 일명 ‘버드‘는 그의 엉망인 연주를 듣다 못한 드러머가 던진 심벌즈에 맞을 뻔한 사건을 겪은 후 수치심을 못 이겨 강물에 몸을 던지거나 전화기를 끈 채 잠수를 타는 대신, 이를 악물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래서 버드는 최고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성공 뒤의 공허함을 이기지 못해 약물에 찌들어 살다 이른 나이에 죽었다. 정말 위험한 것은 그런 것이다. 한계를 뛰어넘을 때 엄청난 쾌감을 맛보게 된다. 하지만 쾌감은 언제나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다시 조금 더 강한 쾌감을 원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중독된다. 쾌감과 자극으로 가득 찬 특별한 인생과 밋밋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인생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쉽지 않다. 젊어서 산화해 버리고 싶지도, 늙어서 회한에 젖고 싶지도 않다. 천재도 아니고 배짱도 없다.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지만 여전히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다. 유명해지거나 부자가 되는 것보다는 하루하루의 소박한 행복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 싶다. 반 고흐도, 도스토옙스키도 필요 없다. 그런 내가 ‘그만하면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패자의 섣부른 자기 합리화인 걸까? <위플래쉬> 속 앤드류의 아버지는 아들이 열정과 욕망에 사로잡혀 산화해 버리는 대신, 특별하지도 않고 무의미해 보이지만 소소한 삶의 기쁨을 누리다 조용히 사라지는 보통 사람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실패했든 성공했든 우리를 안아 주고 다독여 줄 것이다. 그는 우리가 패배했을 떄 돌아갈 곳이다. 그러나 또 우리에게는 플레처처럼 사회적인 아버지도 필요하다. 그는 우리가 쉽게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가 가진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낼 수 있도록 이끌고 채찍질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두 명의 아버지가 필요하다. - P88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행동 목표다. 다시 말하면 불건전한 영혼은 또 건전한 육체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_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무라카미 하루키) - P132
어쩌면 사람들이 달리는 이유는 자기만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파에 퍼져서 TV 채널이나 돌리거나 두둑한 뱃살을 부여잡고 치킨을 뜯는 나태한 인간이 아니라, 고된 정신노동을 마친 후 달리기로 육체를 단련하는 금욕적 지성인이라는 자기만족. 이유야 뭐든 과하지만 않으면 됐다. 달리지 않는다고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좀처럼 몸 쓸 일 없는 현대인이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는 이유는, 머리는 완전히 방전되었지만 몸은 조금도 에너지를 소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부조화가 각종 질환과 정신적 피로, 우울증, 망상 등을 낳지 않았을까? 마음이 복잡할 때, 까닭 없이 우울할 때, 에너지가 정체된 기분이 들 떄 나는 운동화 끈을 묶고 달리러 나간다. 에너지를 완전히 방전시키자는 마음으로 달린다. 그 에너지는 몸속에 남아 출구를 찾지 못하고 마음을 병들게 한다. 달리고 나면 그것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흙탕물로 뒤덮인 유리창을 말끔히 씻어 낸 것처럼 개운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인생이 조금 가벼워진다. 내 두 다리로 이고 달릴 수 있을 정도로. - P134
"좋아 보여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거"라는 마사코의 말에 사치에는 야무진 답을 내놓는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뿐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안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으려면 좋아하는 일을 정말로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 P168
만약 장사를 시작하기로 했다면 어떤 분야가 되었든,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일은 상상 이상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이런 부분은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만으로 해 나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미칠 정도로 좋아하는 마음 하나가 있어야, 나머지 수백, 수천 가지의 어렵고 힘든 부분을 견뎌 낼 수가 있어요. 또 그렇게 미쳐서 힘든지도 모르고 해 나가야 성공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본성이 악착 같은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자연스럽게 악착같이 버티게 됩니다. _회사 가기 싫은 날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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