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워프(Time Warp), 버뮤다 삼각지대, 엘도라도, X-파일, UFO. 나열한 단어들의 공통점은 무얼까? 그렇다. 불가사의다. 인간의 변덕도 이 단어로 규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날 밤, 또 잠이 오지 않았다. 커피 탓이 아니었다. 문 두들기는 소리와 현선이를 찾는 절규가 들리지 않자 이번에는 불안해서 잠이 안 오는 것이었다. 현선 엄마는 백합방에서 뭘 하며 지내려나? - P140

나는 혼란에 빠졌다. 승민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으나 거기에서 온 혼란은 아니었다. 내 안에서 고개를 드는 혼란이었다. 시계를 주웠을 때부터 나를 괴롭혀온 그 혼란이었다. 땅거미가 질 때 찾아드는 불안감과 비슷한 혼란이었다. 승민 옆으로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낯선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 와락 열려버릴 것 같은 막연하고도 불길한 육감이었다. - P146

한이는 백합방으로 갔다. 보호사가 꽂은 주사에 정신을 잃고 이동 침대에 실려 갔다. 이는 병원의 문제 해결방식이었다. 당사자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방식. 한이의 해결방식이 한이가 병원에 들어온 이유를 설명하는 거라면, 간호사실의 해결방식은 한이가 병원을 나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생각할 능력을 상실한 자가 바깥세상에서 생존할 길은 없는 것이다. - P185

"물품 트럭이 자주 와요?"
"한 달에 한 번, 특별히 주문하는 게 있으면 중간에 오기도 하고. 우리가 제법 큰 손님이라 소홀히 못하거든."
나는 웃었다. 그도 따라 웃었다. 웃고 나서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왜 웃었어?"
"정신병원 덕에 먹고사는 사람도 있다 싶어서요."
"있는 정도겠어. 많아. 조리실에 물건 대는 업자, 사식 대주는 업자, 보일러실에 기름 대는 업자. 봉투차도 있고." - P246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게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말하려 애쓰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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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출신 좋은 사람들에게는 경우가 다르다. 그들은 가장 깊은 심연에 의해 민중들과 유리되어 있고, 이러한 점은 <출신 좋은 사람>이 갑자기 외부적인 상황에 의해 이전의 특권을 상실하고 민중들과 생활을 같이 해야만 하는 변화가 주어졌을 때에만 <완벽히> 지각할 수 있다. 비록 평생을 민중과 일한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 조건으로 제약을 받는 행정적인 형식 때문에 비록 40년 동안이나 매일같이 그들과 일 속에서 접한다 하더라도, 또는 은인의 모습이나 어떤 의미에서 아버지의 모습으로 우호적으로 지낸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결코 민중과 합치될 수 없다. 모든 것은 단지 시각적인 기만일 뿐이고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나의 견해를 읽으면서 모든 사람들이 내가 과장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옳다고 확신한다. 나는 책이나 사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것을 확신했고, 이 확신을 검증할 매우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것이 얼마만큼 옳은 것인가는 뒷날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 P373

이미 오래 전부터 나의 마음속에 불분명하게 생겨나 나를 따라다녔던 하나의 상념이 이제서야 처음으로 확실하게 밝혀졌고, 나는 지금까지 막연하게 추측했던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설사 내가 흉악범이거나 종신형을 받은 죄수거나 특별 감옥의 죄수라도, 그들은 나를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특히 이 순간에 보았던 뻬뜨로프의 모습은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당신들이 어떻게 우리의 동료입니까?> 하는 그의 질문에는 너무도 꾸밈 없는 소박함과 솔직한 의아스러움이 스며 있었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그 말 속에 어떤 비꼼이나 악의나 조소가 있는 것은 아닌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동료가 아니다. 그것뿐이었다. 너희는 너희 길로 가라. 우리는 우리의 길이 있다. 너희에겐 너희의 일이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일이 있다는 것뿐이다. - P390

이 부류는 완전히 무관심한 죄수들이었다. 완전히 무관심하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살든 감옥에서 살든 그들에겐 마찬가지란 말이다. 물론 우리에겐 있지도 않은 일이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아낌 아끼미치는 예외였다. 그는 심지어 마치 평생을 감옥 안에서 살 것처럼 갖추어 놓고 살고 있었다. - P391

그러나 그들이 보여 주는 반목의 중요한 요인은 편견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을 대하며, 죄수들의 야만성만을 보고 어떠한 장점이나 인간다운 면을 발견하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이 또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그들은 환경의 힘과 운명에 의해 이러한 불행한 관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감옥에서의 우수가 그들을 질식하게 했다는 것이다. - P394

작업은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 한 달 동안 소령은 우리 모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완전히 바꾸었고 우리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갑자기 J-끼를 감옥에서 자기에게 오라고 부른 일까지 있었다.
「J-끼!」 그는 말했다. 「내가 너를 모욕했다. 나는 너를 이유 없이 태형에 처했어. 나도 그것을 알고 있지. 나는 후회하고 있어. 너는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나? 나, 나, 나는 후회하고 있다고!」
J-끼는 이해한다고 대답했다.
「너 이해할 수 있어? 나, 너의 상관인 내가, 너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서 너를 불렀단 말이다. 이것을 느낄 수 있나? 내 앞에 있는 <너는> 누구냐? 벌레! 어쩌면 벌레만도 못할지 몰라! 너는 죄수란 말이야!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자비로 된 소령이야! 너, 이것을 이해하겠는가 말이야?」
J-끼는 그것도 이해한다고 대답했다.
「자, 그런데 지금 나는 너랑 화해를 한다. 그러나, 너는 이것을 완전히 모두 느낄 수 있는가? 너는 이것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가? 단지 상상이라도 해봐. 나는, 나는 소령이란 말이야…….」
J-끼는 이 모든 장면을 직접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결국 주정뱅이에 부조리하고 무뢰한 같은 이 사람에게도 인간다운 감정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생각과 교양 정도를 고려해 보면, 그런 행동은 거의 위대한 일이라고까지 여길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술기운이 많이 작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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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항상 긴장하지 않고, 밝고 분명한 인식도 없는 지각에 대해서는, 그 지각기관은 마치 말이 주인을 대하듯 유순하지 못하다. 그러나 항상 긴장하고 밝고 분명한 인식이 있는 지각에 있어서는 모든 감각기관이 마치 잘 길들여진 말이 주인을 대하는 것처럼 유순하다.’
「카타-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항상 긴장된 마음’이라고 하는 한 구절이 바로 요가의 실천 내용을 나타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밝은 인식 혹은 지각은 주인에, 마음은 고삐에 비유되고 있는 것처럼, 긴장된 마음은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고삐와 같은 상태를 말한다. 고삐를 잠시라도 늦추면 말은 다른 곳으로 달아나고 마는 것처럼, 마음을 잠시라도 놓지 말고 한 곳을 집중하여 항상 긴장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말하자면, 요가라는 말의 의미는 ‘말이 제멋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말고삐를 말뚝에 꼭 묶어 두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산란된 마음을 어떤 하나의 대상에 연결시켜서 사유하고 명상하며,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안하게 하는 정신통일의 수행을 말하고 있다. - P273

선불교에서는 경전의 주장을 문자상의 이해로 끝나지 않고 직접 선의 수행으로 깨달아 자기의 것으로 만들도록 하는 것이 선사상인 것이다. 즉, 각자의 불성을 깨닫는 견성은 각자의 마음에 구족되어 있는 붓다의 지혜와 덕성을 개발하여 각자의 생활사엥 그대로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선불교를 생활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마조 도일이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평상심이 그대로 도(道)’라고 단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설법은 조사선의 선불교가 일상생활의 종교로 전개된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평상심’은 몰자각적이고 경계에 집착하여 차별과 분별을 일으키는 범부심, 중생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의 수행과 깨달음의 철저한 체험을 통하여 자각된 근원적인 마음이며, 일체의 번뇌나 분별·차별심의 미혹이 없는 본래심인 불성을 말하고 있다.
즉, 일체의 경계나 주위의 분위기에 매몰되어 자기를 잃어버린 범부심(凡夫心, 衆生心)이 아니라, 자각된 주체인 본래심으로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거나 매몰(埋沒)되지 않고 또 걸림 없으며, 일체의 번뇌나 망념이 없는 근원적인 마음이며, 일상의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는 일상심인 것이다.
이러한 평상심이 그대로 부처이며, 평상심으로 전개하는 그 모든 일상생활의 매사가 그대로 진실된 도의 삶이 된다. 각자의 자각된 평상심(본래심, 불성)으로 지혜로운 삶을, 진실에 계합된 평상의 매사를 전개하는 이것이 선의 수행이며 선사상인 것이다.
자각된 평상심에서 전개되는 지혜가 붓다와 똑같은 반야의 지혜인 것이며, 이러한 반야의 지혜로 인간의 평범한 일상의 모든 일을 걸림 없이 무애자재하게 살아가는 생활의 종교가 다름 아닌 평상심이 도인 조사선의 선사상인 것이다. - P282

진리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그 진리의 세계로 가는 올바른 길을 확실히 알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자기의 갈 길과 목적지를 향해 수행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각자가 오로지 좌선의 수행에 전념하며 좌선의 한 가지를 실참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좌선 한 가지를 중심으로 닦는 수행을 일행삼매라고도 하며, 혹은 각자의 몸으로 직접 연마하고 수행하는 것이기에 임제선사는 체구연마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일행삼매의 좌선 수행과 깨달음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하여 붓다나 조사들이 설한 불법의 세계를 자각하여 붓다의 말씀을 직접 확인하고 더 이상 추호의 의심도 없는 확신을 갖게 된 자각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깨달음은 지금까지 경전이나 조사의 어록을 통하여 알고 있던 지식적인 불교의 이해와 한계성을 각자의 수행과 체험으로 확신을 얻고, 그러한 불법의 사실을 확인하고 확신을 얻음으로써 각자가 자기의 생활종교로 만들고 확립한 것을 말한다. 즉, 불교 정신을 직접 몸으로 갈고 닦아 깨닫고 익힌 불법을 자기화한 것이며 혈육화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깨달음은 관념적인 이해나 사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몸으로 연마하고 익힌 것이기에, 철저한 확신으로 불법의 정신이 자기의 인격과 일상적인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승화되고 전개되는 것이다.
즉, 불법의 정신이 생활의 지혜와 인격으로 이루어진 삶이 전개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신·해·행·증은 불교의 가르침을 각자가 직접 믿고 수행하여 깨달아 자기의 종교로 확립하게 하는 자각적인 종교의 수행구조를 체계 있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불법을 배우는 것은 불법을 알기 위한 것이며, 불법을 수행하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선사 도우겐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기고 있다.
불도를 닦는 것은 자기를 수행하는 것이며, 자기를 수행한다는 것은 자기를 무아로 만드는 것이다. 자기를 무아로 하는 것은 자기가 만법으로 실증되는 것이며, 자기가 만법으로 실증된다는 것은 자기의 신심 및 타인의 신심까지도 모두 함께 탈락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수행해 갈 때 깨달음의 자취도 없어지며 그 없어진 깨달음의 자취로 오래오래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불교는 진리에 대한 단순한 관념론이나 인식론에서 주장된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수행과 실천을 통한 체험으로 자각하여 생활의 체험과 지혜로 되살리는 것이다. - P286

인연 따라 얻고 배우고 익힌 것은 결국 때가 되고 인연이 다하면 나가고 없어지게 마련이다. 참되고 다함이 없는 무진장한 무가보의 보물은 자기의 불성으로 철저한 수행을 통한 체험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말인데, 이러한 선 수행의 구조를 무문 혹은 무문관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종의 공안집인 「무문관」에서는 ‘대도에는 문이 없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 P290

사실 인간은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살기는 쉬워도 단순한 한 가지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일행삼매의 좌선을 수행이라고 한다. 과학자가 연구와 실험에 몰두하는 일이나, 예술가가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자기의 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도 일종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가가 좌선의 한 가지 일에 전력투구하는 것이 선 수행이다. 이러한 좌선의 수행을 통해서 진리의 자각과 지혜가 체득되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나 행위라고 할지라도 그 일과 행위에 전심전력하여 주관과 객관이 끊어지고 대상이 끊어진 절대적인 경지가 되도록 하는 행위가 일행삼매인 것이다.
선에서는 이를 ‘한 가지 일에 절대적인 수행으로 행한다.’라고 말한다. 즉, 지금 행하고 있는 한 가지 일에 자기 자신의 힘을 다 쏟는 수행을 말한다. 선에서는 ‘대나무잎 하나하나가 시원한 바람을 일으킨다.’ 혹은 우리들 ‘인간의 생활에 있어 행동 하나하나, 행위 한 걸음 한 걸음에 청풍을 일으킨다.’라는 의미이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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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일이나 성공, 행복은 운명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때로 우리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정신이 팔린다. 야심만만하던 20대 초반에, 나는 내가 이렇게 살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좀 더 중요하고 멋진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나 잘나가는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 하지만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채로 30대가 되고 말았다. 슬픈 일이지만 이게 내 인생이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고,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 P170

나는 여전히 ‘책과 빵‘에 있다. 작년까지는 이곳에서 장사를 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으니, 올해부터는 그 사람들과 재미있는 일들을 많이 해 보려고 한다. 카페를 열 떄 이상할 만큼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 떠오르던 말이 있었다.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지만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고립되지 않기 위해 카페를 열었고 고독하기 위해 카페를 닫았다. 지금 나는 고독하지만 고립되어 있지는 않다. 생각해 보면 카페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이득을 본 셈이다. - P177

바르데츠키를 비롯한 많은 심리상담가들은 우리가 과거에 받은 상처부터 스스로 달래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런 시간도 필요하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면 그 상처는 이제 내 일부가 된다. 조제의 장애처럼 말이다. 벗어날 수도 덜어 낼 수도 없다. 그렇다면 끝도 없이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자신을 미워하기보다는, 상처와 장애를 안고도 어떻게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할머니 없이, 츠네오 없이 혼자 살아 나가는 조제처럼. 전동 휠체어를 타고 혼자 장을 보고 조용한 집에서 묵묵하게 요리를 하는 조제처럼. 요리가 끝난 후에는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의자에서 쿵 하고 담담하게 떨어지는 조제처럼. - P187

그리하여 나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완전히 헛짚은 남자에게도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 남자는 아직 나를 버리지 않았다. 아, 이게 다 《따귀 맞은 영혼》 덕분이다. - P189

임혜지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대가로 학력에 비해 적은 보수와 실력에 비해 낮은 사회적 위상을 떳떳하게 감수한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도 많이 벌고 명예도 얻는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극소수나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기회 또는 환상임을 안다. 모두 가질 수 없다면 하나만 가져도 좋다는 이 씩씩한 중년 여성은 이런 삶의 철학들을 자신의 생활로 증명하는 사람이다. 허공을 떠도는 좋은 이야기들이 아니라 스스로 한 걸음씩 내딛어 보고 깨달은 것만을 투박하고 단단한 언어로 말한다. 이 책의 빛나는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다. 임혜지는 그녀 자신의 말대로 유명하거나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한 것은 유명하거나 대단한 사람의 훈계가 아니라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엄마와 언니의 조언이 아니던가.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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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스티븐 킹은, 재능이란 엄청난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자르지 못하는 무딘 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 생각도 그와 같다. 언젠가부터 나는 노력이야말로 진정한 재능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해도 이것보다는 낫겠다!"고 불평을 터뜨린다.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그 감독이나 작가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는 웬만해선 그 사람들처럼 영화를 만들거나 책을 쓰는 수고를 감내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기발한 아이디어에서 완벽한 결과물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은 영화감독 봉준호가 <괴물>을 찍으면서 했다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고생시키다니 ‘나는 분명 지옥에 갈 것‘이라는 괴로움의 웅덩이에 수백 번은 빠지고 나서야 지나가는 것이다. 또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와 그의 영화 <버드맨>의 주인공 리건 톰슨처럼 자신이 가진 재능을 뛰어넘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정신병자처럼 환청에까지 시달리는 각오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하는 건 쉽지만 그걸 현실에서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만들어 내는 데는 거의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 노력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뭔가를 해낸 사람과 하지 못한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자신이 가진 재능을 결국 꺼내보지도 못한 채 살다가 죽을 거라는 사실 말이다. 그것도 운명의 장난이나 시대적 한계가 아니라 게으름과 의지박약이라는 한심한 이유 때문에. 그래서 세상은 우리에게 ‘당신이 가진 재능의 100%를 발휘하라!‘며 등을 떠민다. ‘이것만 따라하면 당신도 ㅇㅇㅇ가 될 수 있다!‘ 류의 성공에 이르는 수많은 공식들은 그저 노력만 한다면 우리 몸 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재능을 모조리 끌어내서 쓸 수 있을 거라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영화 <위플래쉬>에서 최고의 재즈 드럼 연주자가 되겠다는 야심으로 가득 찬 열여덟 살 청년 앤드류는 음악학교 최고의 교사인 플레처의 밴드에 보조 드러머로 뽑힌다. 그런데 이 플레처라는 인간이야말로 지독한 선생의 표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의 수업은 한마디로 살벌 그 자체. 플레처는 폭언을 퍼붓고 폭력을 휘두르는 식으로 학생들을 거세게 압박하면서 자신의 템포에 맞출 것을 주문한다.
심지어 그는 비열하기까지 하다. 상대를 추켜세우다가 한순간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 짓이겨 버리는 것이 그의 특기다. 자신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한 제자의 죽음을 교통사고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눈물까지 보이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런데 제자 또한 만만치 않다. 반드시 최고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앤드류는 메인 드러머의 자리를 따내기 위해 말 그대로 피땀을 흘리며 연습한다.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일방적인 이별을 고하는 이유도 그녀가 성공에 방해되어서다. 도무지 열정이라고는 없는 그녀와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한몫을 했다.
그렇게 아등바등하다 불운의 연속으로 연주를 망치고 플레처의 밴드에서 쫓겨난 앤드류는 드럼을 포기하고 살아간다. 얼마 후 그는 우연히 재즈 바에서 플레처와 마주치는데 플레처는 그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언제나 내 학생들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를 바랐다. (중략) 세상에서 가장 쓸 데 없는 말은 ‘그만하면 잘했다‘는 말이야."

사실 나는 일찌감치 성공 같은 건 포기한 사람이다. 나도 내게 영 재능이 없지는 않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최소한 대한민국 남쪽 끄트머리의 시골 도시 백일장에서 최우수상을 탈 정도는 됐다. 20년 평생을 갑갑한 모범생으로 살다가 이제 한 번 사는 것처럼 살아 보자는 마음에 서울에 있는 대학의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것만 해도 내 인생 전체를 돌이켜 볼 때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야 나 정도의 재능이야 시장 바닥에 널렸고 이걸 제대로 갈고 닦으려면 비상한 머리와 기이할 정도의 집념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는데, 동시에 내게는 그런 게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그걸 결정적으로 깨닫게 해준 것이 그 남자였다.
20대 중반에 잠깐 만난 그 남자는 콤플렉스만큼이나 집념도 대단했다. 정상적인 인간의 눈으로 보자면 상종을 말아야 할 찌질이, 콤플렉스덩어리에 쓰레기 같은 놈인데, 눈에 뭐가 씌어도 단단히 쓰인 내 눈에는 대단한 재능의 아티스트로 보였다(과거에 사귄 남자들을 회상할 때는 언제나 문체가 과격해지는 걸 보면 내가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놀다 보면 나는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며 자 버리는 인간이었지만, 그는 밤을 새고서라도 굳이 해야 할 필요가 없는 일, 자신의 미래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만한 일들을 기어코 하는 인간이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아, 저렇게 독한 놈이 성공하는 거구나. 그러니까 나는 성공을 못하겠구나.
그러나 동시에 이런 것도 깨달았다. 그는 정말 불행한 남자였다. 그는 영혼 깊숙이에 뿌리박힌 결핍과 트라우마와 콤플렉스 따위를 호소하면서 이 여자 저 여자를 쑤셔 대느라 바빴다. 그럼에도 그가 진정으로 관심 있는 것은 자기 자신, 그리고 성공 뿐이었다. 그는 우리 중에 가장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행복해 보이지가 않았다.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에게 진실한 친구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사람들은 그를 떠올릴 때마다 미간부터 찌푸렸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들 특히 예술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대개 성격에 모가 났거나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뭔가를 대단히 열심히 한다는 건 제정신으로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반 고흐처럼 단 한 장도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거나, 도스토옙스키처럼 우울증과 발작에 시달리면서 글을 쓰는 일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정도의 수준이다. 사실은 침대에 누워서 리모컨을 드는 게 훨씬 쉽고 훨씬 기분 좋으며 건강에 보탬이 되는 일일 것이다.
그들에게 ‘그만하면 잘했어‘의 순간은 웬만해서는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 순간이 쉽게 찾아왔더라면 그들이 잔인할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고통스러웠던 덕분에,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남기다가 고립되면서 더더욱 고통스러워지는 바람에, 우리는 그들이 신의 눈으로 만들어 낸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사실 진짜 행복한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일지도 모른다.

코엔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은 <위플래쉬>가 들춰내는 야심의 다른 면을 그린 이야기다. 무명의 포크 가수 르윈 데이비스는 한겨울에 코트 한 벌 없이 기타 하나와 우여곡절 끝에 맡게 된 남의 집 고양이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오늘 밤 자신을 재워 줄 소파를 찾아 거리를 떠도는 처지다. 성공의 순간은 언제나 그가 손을 뻗어 보기도 전에 달아나 버린다. 자꾸만 도망치는 고양이처럼. 성공에 필요한 것이 재능과 노력과 운이라면 그는 지질이도 운이 없는 남자다. 어쩌면 그 자신이 자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파에서 신세를 지다 눈이 맞아 함께 사고를 친 전력이 있는 동료 여가수 준은 그에게 임신을 했는데 네 아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청나게 기분이 더럽고 너는 살 가치도 없는 쓰레기 루저이니 당장 아이를 지울 돈을 마련해 오라며 욕설을 퍼붓는다. 사람들은 그가 부르는 어둡고 궁상맞은 노래보다는 준의 애인인 짐이 부르는 가벼운 사랑 노래를 더 좋아한다.
그는 거의 마지막이다시피 한 기회에 자신의 운을 건다. 유명한 프로듀서 버드 그로스맨을 만나기 위해 시카고로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남의 차를 얻어 타고 겨우 도착한 시카고에서 하루 종일 벌벌 떨며 버드를 기다려 겨우 오디션을 볼 기회를 잡은 르윈이 부른 노래는, 끝내주는 노래로 이 프로듀서를 넉다운시켜 주기를 바랐던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 것도 아니고 충족시킨 것도 아닌 어정쩡한 것이다.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곡 선택에 ‘미스‘가 있었다고나 할까. 창법이 ‘올드‘하다고나 할까. ‘한 방‘이 없었다고나 할까. 자신만의 매력을 찾지 못했다고 할까. 본인이 잘할 수 있는 노래와 잘하고 싶은 노래 사이의 간극이 크다고나 할까. 그냥 네 노래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한없이 처진다고나 할까.
르윈이 부른 노래의 가사는 제인 왕비의 이야기다. 임신한 왕비는 아이를 낳지 못한 채 며칠 동안 진통을 앓는다. 괴로워하다 못해 왕비는 헨리 왕에게 배를 갈라서 아이를 꺼내달라고 애원하지만 결국 낳지 못하고 죽는다. 이 뜨악한 노랫말 속에 인사이드 르윈, 즉 르윈의 내면이 있다.
르윈은 그런 사람이다. 아니, 수많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다. 그 사람들은 세상이 말하는 실패자, 그러니까 루저들이다. 그들 모두가 허황된 꿈을 꾼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버드가 말했듯이 르윈에게도 재능이 전혀 없지는 않다. 노력도 안 한 게 아니다. 그런데 별로 운이 없었다. 듀엣으로 좀 잘나가나 했더니 파트너가 다리에서 몸을 던져 자살해 버렸다. 솔로로 서자니 어쩐지 매력이 부족하다. 그건 그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그의 운명은 결국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포크의 시대라는 파도에 휩쓸려 사라져 갈, 세월이 흐르면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그저 그런 무명 가수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르윈은 그런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재능을 꺼낼 수가 없다. 저절로 나올 생각도 않는다. 그런 상태가 계속되다 보면 누구라도 지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뉴욕으로 돌아가는 고속도로에서 르윈은 애크론이라는 이정표를 지나친다. 그곳은 르윈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사라진 옛 여자 친구의 고향이다. 저 멀리 불 켜진 집들이 보인다. 그곳은 눈보라 치는 어둡고 황량한 고속도로보다 따뜻해 보인다. 어쩌면 저 집에서 그의 아이가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침대에 누워 엄마에게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조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도 여자 친구와 함께 아이를 키우며 자동차 수리를 하거나 전자제품 외판원으로 착실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인생도 어쩌면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가 살 수도 있었을 인생은 지나가 버린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야 한다. 그의 앞날은 막막하기만 하다.
1960년대의 미국, 포크의 시대에 밥 딜런이라는 걸출한 스타의 그림자에 가린 얼마나 많은 르윈 데이비스들이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포크송에 인생을 바치고 그것에 걸려 넘어졌을까.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로 나이 들었을까.
성공하지 못할 것을 예감하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르윈이 아버지에게 불러 주는 노래의 가사처럼, 청어 떼를 잡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밤낮으로 바다와 싸워야 할 것이다. 바람이 불어도, 잔잔해도, 돌풍이 불어도, 땀에 젖어도, 추워도, 나이 들어 늙어가도, 결국 죽을 때가 되어서도 우리는 청어 떼를 꿈꾸며 살아갈 것이다. 청어 떼를 만날 수 있든 없든.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나를 쥐어짜지 않았더라면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희미하게 떠오르는 깨달음은 그 쥐어짬의 과정에 어떤 희열이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지점에 도달했을 때, 그로 인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었을 때의 희열 말이다. 등산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바벨을 들어 올리는 것이나, 달리기와도 비슷한 일일 것이다. 매일 만원 전철에 오르는 것이나, 보고서의 마감 기한을 맞추는 것이나 비슷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앤드류가 언제나 동경하던 전설적인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 일명 ‘버드‘는 그의 엉망인 연주를 듣다 못한 드러머가 던진 심벌즈에 맞을 뻔한 사건을 겪은 후 수치심을 못 이겨 강물에 몸을 던지거나 전화기를 끈 채 잠수를 타는 대신, 이를 악물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래서 버드는 최고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성공 뒤의 공허함을 이기지 못해 약물에 찌들어 살다 이른 나이에 죽었다.
정말 위험한 것은 그런 것이다. 한계를 뛰어넘을 때 엄청난 쾌감을 맛보게 된다. 하지만 쾌감은 언제나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다시 조금 더 강한 쾌감을 원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중독된다. 쾌감과 자극으로 가득 찬 특별한 인생과 밋밋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인생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쉽지 않다.
젊어서 산화해 버리고 싶지도, 늙어서 회한에 젖고 싶지도 않다. 천재도 아니고 배짱도 없다.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지만 여전히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다. 유명해지거나 부자가 되는 것보다는 하루하루의 소박한 행복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 싶다. 반 고흐도, 도스토옙스키도 필요 없다. 그런 내가 ‘그만하면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패자의 섣부른 자기 합리화인 걸까?

<위플래쉬> 속 앤드류의 아버지는 아들이 열정과 욕망에 사로잡혀 산화해 버리는 대신, 특별하지도 않고 무의미해 보이지만 소소한 삶의 기쁨을 누리다 조용히 사라지는 보통 사람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실패했든 성공했든 우리를 안아 주고 다독여 줄 것이다. 그는 우리가 패배했을 떄 돌아갈 곳이다. 그러나 또 우리에게는 플레처처럼 사회적인 아버지도 필요하다. 그는 우리가 쉽게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가 가진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낼 수 있도록 이끌고 채찍질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두 명의 아버지가 필요하다. - P88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행동 목표다. 다시 말하면 불건전한 영혼은 또 건전한 육체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_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무라카미 하루키) - P132

어쩌면 사람들이 달리는 이유는 자기만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파에 퍼져서 TV 채널이나 돌리거나 두둑한 뱃살을 부여잡고 치킨을 뜯는 나태한 인간이 아니라, 고된 정신노동을 마친 후 달리기로 육체를 단련하는 금욕적 지성인이라는 자기만족. 이유야 뭐든 과하지만 않으면 됐다. 달리지 않는다고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좀처럼 몸 쓸 일 없는 현대인이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는 이유는, 머리는 완전히 방전되었지만 몸은 조금도 에너지를 소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부조화가 각종 질환과 정신적 피로, 우울증, 망상 등을 낳지 않았을까?
마음이 복잡할 때, 까닭 없이 우울할 때, 에너지가 정체된 기분이 들 떄 나는 운동화 끈을 묶고 달리러 나간다. 에너지를 완전히 방전시키자는 마음으로 달린다. 그 에너지는 몸속에 남아 출구를 찾지 못하고 마음을 병들게 한다. 달리고 나면 그것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흙탕물로 뒤덮인 유리창을 말끔히 씻어 낸 것처럼 개운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인생이 조금 가벼워진다. 내 두 다리로 이고 달릴 수 있을 정도로. - P134

"좋아 보여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거"라는 마사코의 말에 사치에는 야무진 답을 내놓는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뿐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안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으려면 좋아하는 일을 정말로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 P168

만약 장사를 시작하기로 했다면 어떤 분야가 되었든,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일은 상상 이상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이런 부분은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만으로 해 나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미칠 정도로 좋아하는 마음 하나가 있어야, 나머지 수백, 수천 가지의 어렵고 힘든 부분을 견뎌 낼 수가 있어요. 또 그렇게 미쳐서 힘든지도 모르고 해 나가야 성공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본성이 악착 같은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자연스럽게 악착같이 버티게 됩니다. _회사 가기 싫은 날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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