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 하는 육신의 울타리를 쳐 놓고 나와 남을 가르고, 나와 다른 생명 및 세계를 나누어 보는 우리들의 삶은 한마디로 자기 중심적인 삶이요 욕심 부리고 성내며 어리석은 이른바 탐진치 삼독의 삶이다. 나와 남, 나와 대상을 둘로 보면, 내 앞에 무엇을 더 놓으려 하고,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되면 성내고 짜증 부리게 된다. 이런 자기 중심적 삶은 개인적으로는 이기적인 삶으로 나타나고, 다른 생명이나 자연과의 관계에서는 비좁은 인간 중심적 삶으로 나타난다. 즉, 인간만을 중심으로 보아 다른 생명이나 자연을 인간의 편의를 위해 정복하고 착취하는 삶인 것이다. 이런 삶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사람과 다른 생명 및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괴로운 삶일 수밖에 없다. - P343
한국의 다종교 상황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견해도 없지 않다. 사실 논리적 귀결을 기대한다면, 한국 사회는 다종교 상황의 문제점이 그 어느 사회보다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할 만큼 전형적인 다종교 사회이고, 다종교 현상이 심하면 심할수록 종교간의 알력과 반목도 증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다종교 사회의 전범(典範)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은 극단적인 종교 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이에 대한 종교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그러나 주요한 이유는 2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 사회는 동일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 민족에 의해 형성된 국가로서 강력한 사회 통합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단위 공동체 간에 분쟁의 소지가 적다. 종교 분쟁이 심각한 사회와 달리 한국은 종족이나 지역 공동체가 종교 공동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남북한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심각한 분쟁을 겪고 있지만, 양 진영이 종교를 한 가지씩 나누어 갖고 있지는 않다. 한 쪽에서는 종교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있고 다른 한 쪽 역시 하나의 종교가 압도하고 있지 못하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지만, 만일 남북한이 각각 하나씩의 신앙을 나누어 가진 채 대립하고 있다면 분쟁의 정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이며 통일을 향한 전망도 그만큼 어두울 것임에 틀림없다. 두 번째 이유로는, 한국의 문화나 한국인들이 종교적 심성이 분열이나 개성보다는 통합과 총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체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비롯해서 인간 관계를 포함하는 모든 사회생활을 유교적 가치관과 질서에 따르고 있다. 특히 조상 제사는 전적으로 유교의 것이지만 대다수의 한국인이 이를 실천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고수하고자 하는 기독자들조차 한국에서는 조상 제사를 점차 수용해 가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기독자를 포함하는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인생을 무상하게 여기거나 윤회나 인과응보를 믿는 등, 인생관이나 가치관에서 다분히 불교적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자신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든 간에 합리적 이성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들에 맞닥뜨리게 되거나 일생의 중요 고비에 당면하면 대체로 점 치는 집을 찾거나 굿거리를 마련한다. 한국인들은 새로 들여온 점보 제트기나 슈퍼 컴퓨터 앞에서도 고사를 지내야 안심한다. 대규모 관급 공사의 기공식에서 해당 부서의 수장(首長)이 돼지머리에 지폐를 얹거나 막걸리를 올리는 광경 역시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무속적이다. 요즈음은 예수를 몸주 혹은 귀신으로 모시는 무당들이 등장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인들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기독교 공동체에 기꺼이 합류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구성상의 성격과 한국인의 심성이나 문화적 성격 때문에 종교간의 갈등이나 알력이 억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심각한 종교 분쟁을 겪어 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이 한국 사회에서는 전혀 염려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과 알력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다종교 상황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심리적인 긴장과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가정을 비롯해서 학교나 직장 등 모든 단위 사회 속에서 알력과 반목의 요인으로 기능하고 있다. 한국의 종교인들은 누구나 이러한 갈등과 알력에서 비롯되는 불쾌와 불안을 느끼고 있다. 다종교 가정에서 장례 의식 문제로 가족 구성원들끼리 불안을 겪거나 다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다툼은 심각한 가정 불화로 비화되기도 한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갈등과 알력을 분쟁 직전의 수준까지 경험하기도 한다. 불교와 기독교간의 알력 때문에 종종 저질러지는 방화 사건은 어쩌면 조상 대대로 물려 내린 팔만대장경 같은 민족의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 단숨에 잿더미로 변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여러 가지 요인들 때문에 이러한 갈등과 알력이 집단적인 분쟁으로 표출되지 않았을 뿐, 암묵적인 차원에서는 분쟁의 잠재력으로 포진하고 있다. 이러한 잠재력은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가연성(可燃性)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P390
우리는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에 실재하지도 않는 주인공의 희로애락에 공감하여 웃고 울고 성내고 기뻐한다. 타종교인을 위한 헌신은 타종교인을 위한 ‘공감적 이해’에서 출발한다.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내가 그 주인공이 된 듯이 느끼는 것이다. 타종교에 대한 공감적 이해란 내가 타종교의 신자가 된 듯이 느껴야 하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 없는 헌신이란 있을 수 없다. 만일 공감적 이해도 없이 사랑이나 자비를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결코 사랑이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공감적 이해 없이는 드라마 한 편도 온전히 볼 수 없다. 사랑이나 자비야말로 진정한 공감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성실하고 온전한 불자나 기독자는 공감적 이해를 가지고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을 추구해야만 한다. - P401
4) 고정적 실체를 부정하는 종교 독자들은 지금 한 권의 책을 손에 들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 책이 언제 어디서나 책일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불교는 실체적 존재로서의 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책이란 존재는 사용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책으로 존재한다. 즉, 종이와 활자로 이루어진 물체에 담긴 내용을 ‘읽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책이 존재한다. 그 물체를 베고 누우면 그것은 책이 아니라 베개이다. 그 물체 위에 그릇을 올려놓으면 그것은 그릇 받침이다. 찢어서 오물을 닦으면 휴지가 된다. 틀어쥐고 때리면 무기가 될 것이다. 심지어 뜯어먹는 염소에게는 음식이 된다. 종이와 활자로 이루어진 그 물체가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에 의해서 책이 되는 것이다. 그 물체 자체가 언제나 스스로 음식인 것이 아니라 뜯어먹는 염소에 의해서 음식이 되는 것이다. 불교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이처럼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 따라서 불교는 자신을 어떤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는다. 이것을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연기의 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드러나는 것이 불교의 자기 개방성이다. 자신을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폐쇄적으로 갇혀 있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를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은 자기 앞에 놓인 모든 존재에게 자기를 열어 놓는 것이다. 이 자기 개방성은 자신을 절대시하거나 완결시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 놓인 상대에게 영원히 열려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종교간의 대화에 정직하고 진지하게 임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있다. - P407
5) 상대적 한계를 고백하는 종교 불교는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성격을 대체로 4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눈·귀·코·혀·피부의 5가지 감각 기관이 각각 그 상대인 색깔·소리·냄새·맛·사물을 감지하는 인식으로서 전오식이라 하고, 둘째는 의식이라는 여섯 번째 감각 기관이 이 5가지의 감각적 인식들을 통합하여 모든 존재들에 내재하는 원리를 인식하는 제6식이다. 셋째는, 제7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모든 사물과 사물의 원리를 자기 중심적으로 보는 성격을 갖는다. 넷째는, 제8식이라고 하는데 이는 과거의 행위에 영향을 받아서 인식하거나, 현재의 행위가 미래에 영향을 끼치도록 현재의 행위의 결과를 간직하여 미래로 전달해 주는 씨앗과 같은 역할을 하는 성격을 갖는다. 우리는 인식 과정의 성격을 파악하는 이러한 불교의 입장에서 역시 불교의 자기 개방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은 분명 사물을 자기 중심적으로 인식한다. 술이 반쯤 담긴 술병을 앞에 놓고 ‘이제 반병밖에 안 남았구나’와 ‘아직 반병이나 남았구나’로 전혀 다른 인식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모든 인간이 자기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은 인간 자신의 상대적인 한계를 역설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인간은 반드시 과거의 영향을 받아 성립하며 미래의 인간은 현재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다는 사실 역시 인간의 상대적 한계를 고백하는 것이다. 불교는 인간 존재가 이러한 이상 인간의 종교 역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어떠한 계시도 그것의 절대성을 믿지 않는다. 계시 역시 구체적이며 상대적인 역사적 환경의 산물이라고 본다. 불교는 모든 종교가 각자 특수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성립한 자기 자신의 역사적 한계 속에 놓여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입장을 우리는 흔히 역사적 상대주의라고 부른다. 불교는 자신의 역사적 한계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또 한 번 불교가 철저한 자기 개방성을 갖고 있으며, 그로부터 종교간의 대화에 정직하고 진지하게 열려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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