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왜 일상적 삶에서 권위주의는 건재할까? 권위주의적 성격 中

*권위주의: 어떤 일에 있어 권위를 내세우거나 권위에 순종하는 태도.


우리 인간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보호와 권위에 의존하는 삶을 살다가 자립할 때에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하면 오히려 자유가 부담스러워진다. 이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새로운 보호와 권위를 찾게 되는데, 이렇듯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새로운 권위에 기대려는 심리 상태가 바로 ‘권위주의적 성격‘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 프롬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권위주의적 생각의 공통적인 특성은 삶이 자기 자신, 자신의 관심, 자신의 소망 등이 아니라 그 밖에 있는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확신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러한 힘에 굴종하는 데 있다.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나오는 용기란 본질적으로 운명 또는 그의 상관이나 지도자가 그에게 요구한 것을 견뎌내는 용기다. 그 괴로움을 끝내거나 적어도 완화시키려고 시도하는 용기는 금물이다. 불평 없이 견디는 것이 최상의 미덕이다. 운명을 바꾸지 않고 운명에 복종하는 것이 권위주의적 성격의 영웅주의다." - P100

영국 심리학자 애드리언 펀햄Adrian Furnham은 "권위주의자는 복잡성, 혁신, 새로움, 모험이나 변화를 옹호하는 대상을 혐오한다. 갈등과 의사결정을 싫어하며, 자신이ㅡ 개인적인 감정과 욕구를 외부적인 권위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규칙, 규범, 관습에 복종하며 다른 사람들 또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람은 자신의 내면과 외부 세계를 정리하고 통제하는 일에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그는 단순하고 경직된, 즉 융통성이 없는 법이나 도덕, 의무와 규칙, 과제를 좋아한다. 이런 성향은 예술을 선택하는 일에서부터 투표를 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친다." - P104

옳건 그르건 우리는 이런 경우 별 고민 없이 갑질을 저지른 사람에게 갑질의 책임을 묻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갑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실 중요한 건 갑질을 저지르는 상사를 둘러싼 개인적인 상황이라기보다는 회사 전체, 더 나아가 사회 전반의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권위주의적 성격이 생존 경쟁에서 경쟁력이 없다고 한다면, 제발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져달라고 등을 떠밀어도 그런 성격을 가질 리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스로 고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세상은 어떤가? 왜 ‘갑질 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갑질을 저지르는 권위주의적 성격이 생존 경쟁에 도움이 된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
조직 생활에서 널리 떠도는 속설 가운데 "잘해주는 사람보다는 못살게 구는 사람에게 잘해주려 애쓴다"는 말이 있다. 물론 약자의 처지에서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런 처세술 메커니즘은 권위주위적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그런 토양에서 자라나는 독버섯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권위주의 시대는 갔다지만,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권위주의가 여전히 건재한 이유이기도 하다. - P106

128 160여 년 전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자신의 마지막 책인 『부록과 추가』(1851)에서 "고슴도치들은 겨울에 어떻게 함께 살아가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제시했다. 고슴도치들은 날씨가 추워지면 서로 모여들어 체온을 나누는 습성이 있다는데, 같이 붙어 있게 되면 가시에 찔리고 떨어져 있자니 추운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결국 답은 가시에 찔리지 않을 정도의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모이는 가까움과 멂의 균형이다.
인간 역시 인간관계에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고슴도치와 같다. ‘고슴도치의 딜레마hedgehog‘s dilemma‘는 곧 ‘인간의 딜레마‘인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그런 말을 했나 보다 하는 정도로 묻힐 수도 있었던 이 개념을 널리 알린 이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다. 프로이트가 『집단심리학과 자아 분석』(1921)에서 쇼펜하우어를 인용함으로써 ‘고슴도치의 딜레마‘는 심리학의 영역에 편입되었고, 이후 수많은 저자에 의해 자주 거론되는 유행어가 되었다.
어떤 개념이건 후세 사람들이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용하다보면 원래의 뜻과는 다르게 점점 더 확장되어가기 마련이다. 정성훈은 "쇼펜하우어는 이 현상을 통해 외부로부터 따뜻함을 구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비관적 세계관을 전파하는 데 평생을 바쳤고 여성을 비하하여 결혼도 하지 않았던 그에게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살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한 말이었습니다. 한편 인간관계가 점점 더 계산적이 되어가는 현대에 와서, 고슴도치 딜레마는 쇼펜하우어가 쓴 의미와는 달리 아무리 타인에게 다가가려 해도 두려움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고민을 절실히 표현하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고슴도치의 딜레마‘는 인간관계에 큰 부담을 느끼는 젊은이들의 행태를 지적하는 용도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예컨대, 이주형은 "서로 알아가고 신경 써주면서 시간과 돈과 정신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혼자 편하게 지내는 것이 낫지"라고 생각하는 ‘신인류 고슴도치‘들이 늘고 있다고 우려한다.
"그래서 오늘도 온라인상에서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친구들과의 적당한 거리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매일 메신저와 댓글을 통해 소통하는 동안 가시는 더욱 뾰족해지고 날카로워진다. 앞으로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 자신과 코드가 맞는 사람하고만 소통하는 ‘관계의 편식‘이 일반화될 것이다. 이것이 당장은 세상 살아가는 데 별 불편함을 주지 않을 것이다. 갈수록 쿨한 사람, 쿨한 관계들로 넘쳐날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단거리경주가 아니다.
‘고슴도치의 딜레마‘를 거시적 관점에서 사회 전체의 문제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는 『사회의 재창조: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을 찾아서』(2007)에서 이 딜레마는 ‘인간 협력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독립성의 가치를 중시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상호 의존성을 인정한다. 우리는 온기와 우정과 도움을 나눌 다른 누군가를 펼요로 한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한편으로 지나친 접근성은 긴장을 유발한다. 우리는 개인성을 개발하기 위한 사적인 공간을 필요로 한다. 서로의 비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은 밀실 공포증을 유발할 만큼 숨 막히는 것일 수 있다."
이런 논의를 연장시키면 결국 ‘공동체주의 논쟁‘으로까지 이어지겠지만, 공동체주의 문화가 강했던 한국에서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가족주의가 야기하는 ‘고슴도치의 딜레마‘다. 그 딜레마는 ‘가족 파시즘‘이란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전혜성의 장편소설  『마요네즈』에 나오는 "가족은 안방에 엎드린 지옥", 배수아의 장편소설 『랩소디 인 블루』에 나오는 "가족은 흡혈귀"라는 표현 등이 말해주듯이, 이미 여러 작가가 ‘가족 파시즘‘을 고발하고 있다.
한국인에겐 평소 잠재된 ‘고슴도치의 딜레마‘가 겉으로 불거져 나오는 특별한 기간이 있는데, 그게 바로 명절이다. 가족 또는 친족이라는 미명하에 말로 상처를 주는 한국형 ‘마이크로어그레션microaggression‘은 ‘적정거리‘를 무시함으로써 "추워도 좋으니 뿔뿔이 흩어져 살자"는 생각을 갖게끔 만드는 주범 중의 하나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고슴도치의 딜레마‘에 대한 답으로 제시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포용적 개인주의 inclusive individualism‘다. 포용적 개인주의는 물리적 접촉 없이 홀로 존재하지만 상호 연결되어 있는 개인주의로, 그 핵심은 ‘따로 그러나 같이‘라는 슬로건으로 표현할 수 있다. 포용적 개인주의는 ‘강한 연결‘을 추구했던 이전의 방식을 탈피해 개인주의적이면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는 배척하지 않기 때문에 이른바 ‘약한 연결의 힘the strength of weakties‘과 친화적이다.
포용적인 개인주의는 이미 온라인에선 예외 없이 작동하는 법칙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오프라인에선 고립된 개인임에도 온라인에선 ‘사회적 실재감social presence‘을 느끼는 방식으로 사회의 구성원 지위를 만끽하는 것이다. 사회적 실재감은 매개된 커뮤니이션에서 사람을 ‘실제 사람real person‘으로 느끼는 정도, 또는 타인과 같은 공간을 공유할 때 느끼는 기분을 말한다. 온라인에서 게임을 하는 사람은 ‘홀로 함께 플레이하기playing alone together‘에 빠져드는데, 한 플레이어는 이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게 아니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게임 속에서 주위에 실제 플레이어들이 있다는 게 참 좋다. 그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이루는지 보는 것도 재미있고, 서로 자기 할 일 하다가 우연히 마주치는것도 재미있다.
 지금 우리는 그런 온라인 세계의 삶이 실제로 오프라인화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1인 가구 비율은 이미 27퍼센트를 넘어섰고(2015년 기준 27.2퍼센트), 통계청 추계로 본다면 당장 2019년에 1인 가구(590만 7,000가구)가 ‘부부+미혼 자녀‘(572만 1,000가구) 가구를 추월하고, 2045년(1인 809만 8,000가구, 부부 + 자녀 354만 1,000가구)이면 그 차이를 2배 이상 벌리게 됨으로써 가족의 범위가 사실상 ‘개인‘으로 수렴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가수 나미는 늘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관계에 대해 ‘좋아하는 우리 사이‘ 멀어질까 두렵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의심도 없이 그런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고슴도치 이야기는 우화였지만, 인간은 점점 고슴도치를 닮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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