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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섬세함 - 이석원 에세이
이석원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1월
평점 :
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내리려다가 간편하게 드립백으로 커피를 내렸다. 조금 더 간편해지고 싶은 때가 있는 것이다. 오늘처럼. 커피만 마실까 하다가 초콜릿도 내왔다. 조금 더 달콤해져도 괜찮을 것 같아서. 오늘만큼은. 뜨거운 커피는 혀에 있던 초콜릿을 단박에 녹였다. 우리의 관계처럼.
자의로든 타의로든 우연이든 필연이든 살면서 타인과 무수히 많은 관계를 맺고 끊으며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나는, 관계를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다고 단언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구질구질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러려고 퍽 노력했던 것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는 것이 내 대답이다. 그것은 이전에 끊어진 관계에 대해 후회를 한 적이 있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됐을 관계들이었다. 미성숙한 마음들이 모여 관계를 형성했던 그때의 나는 네가, 너는 내가 될 수 없었으니까. 우리는 철저하게 나의 입장에서 너를 향해 뾰족하게 내뱉었으니.
이미 지나가버린 관계들을 떠올리며 미성숙했던 우리들을 고스란히 넣어두고, 내 앞에 주어진 관계들을 가만가만 손으로 짚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관계들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 최선이 나에게 최선인지 그에게 최선인지는 모르고 방법은 더더욱 모르는 막연한 상태로.
최근에는 내가 한때 사랑했(겠)지만 사랑하기를 포기한 엄마를 이해해 보려고 했다가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제멋대로 흐르는 것을 고요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그러면서 이모를 떠올린다. 이모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떻게 다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런 걸 보면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혹은 알고 싶지 않은 수많은 이해들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 안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이해를 받고 싶은 순간이 당연히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러기 위해 나는 해명을 하거나 변명을 해왔지만 내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오해를 즐기는 삶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에게는 (몰염치하게도) 나에 대한 이해를 바라곤 한다. 내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물론 입안에 물고 내뱉지 않을 때가 더 많기는 하지만.
그리고 나는 그럴 때마다 기억해야 한다.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적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사설이 길었지만, 이석원은 그것들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형태의 삶의 착시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 우리는 단편적으로 바라보지만 이후에 입체적임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고로 세상 모든 일에는 여러 가지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97. 남의 하소연을 함부로 징징댐으로 치부하지 않는 태도를 갖는 것. 남들과 대화할 때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시선을 주는 것. 누군가 아파 쓰러지면 무작정 일으켜 세울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상태를 봐가면서 그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
다시 말해서 주인공은 도움을 주는 내가 아니라 도움을 받는 상대라는 사실을 항시 잊지 않고, 따라서 내가 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필요로 하고 받고 싶은 것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내가 생각하는 섬세함이라고나 할까.
출처 입력
그것을 아우르는 것을 이석원은 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했다. 타인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시선을 내가 아닌 타인을 향하게 하는 것.
그러면 나는 입원 당시 간호통합병동의 간호조무사들의 거침없던 손놀림은 업무가 많아서 하나하나 다 신경 쓰지 못해서 그랬구나, 엘리베이터에서 (나도 내릴 건데) 본인이 내리겠다고 나를 밀쳤던 것도 급한 일이 있었구나, 회사에서 신입이 A부터 Z까지 물어보는 것에 대해서도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구나, 물리치료를 가야 해서 소독해주는 여사님께 연락해보니 바로 온다고 했는데도 늦는 것은 비가 와서 그랬구나, 그러고 집에 들어와서 난데없이 여기저기 문을 열고 퉁명스럽게 말씀하시는 것도 아직 다른 집도 많이 남아있나보구나...(?) 해야 한다는 건데... 참 어려운 일이다.
많은 해를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살다 보니 크고 작은 소동들이 자주 벌어지는 것이 인생이었다. 모든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의식적으로라도 편하게 힘을 뺀 채로 늘어뜨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해를 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해버리는 것.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그것은 (오늘 오후에) 미리 세운 2024년의 목표와도 닮아있다.
덧) 하지만,
1. 달고 시원한 음료를 마시는 것에 대해 꼭 ‘죽어도 좋을 만큼의 쾌감이라고’ 표현해야했을까.
2. 빵 한 쪽과 단 음료수를 마시는 행위가 잘못은 아니지만, 병마에 시달리며 일생을 참회해야했던 이의 잘못도 없었다는 것은 어째서 잘못‘도’라는 보조사가 붙었을까. 도대체 어떤 것을 동일시하고 싶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