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세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3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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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잠을 잤는데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꿈속에서 읽었다. 이 책과 같은 내용을 본 것인지, 다른 것을 본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게 조금 아쉽기도 하다. 예전에는 읽던 책 다음 내용이 꿈에 나오기도 했는데, 그게 책과 같았는지 달랐는지 잘 모르겠다. 깨어나서 바로 잊어버렸으니까. 읽던 책에 대한 꿈을 자주 꾸는 것은 아니다. 책 때문에 안 좋은 꿈을 꾸는 일도 없다. 아니, 있었지만 내가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가 꿈속에서 교향곡을 작곡했다는 이야기 때문에 이런 말을 쓴 것인지도. 베를리오즈는 아픈 아내 때문에 꿈속에서 작곡한 교향곡을 잊어버려야 했다고 한다. 교향곡을 쓰면 다른 일을 할 수 없게 되어서 아내 약을 살 수 없었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 반대가 되는 일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기억하고 싶은 것은 잊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싶은 것은 자꾸 생각나는. 그래도 결국 자신의 뜻대로 잊고 싶은 것은 잊고,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은 잊어버리지 않기도 하겠지. 그것에 대한 생각이 크다면.

 

책 제목이 재미있다. 지난번 책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는 책속에 있는 글 제목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이야기는 없다. 거의 드문 일에 대한 비유였다. 그런데 정말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가 없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자신보다 힘없는 동물을 잡아먹는 사자만 있을까. 언젠가 육식동물도 가끔 풀을 먹는다는 말을 본 것 같기도 한데. 우연히 풀을 한번 먹은 사자가 그 풀에 맛을 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풀만 먹고 살아간다, 는 이야기는 재미있지 않을까. 그런 사자를 생각하니 다른 사자나 다른 동물한테 따돌림 당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사자가 무리지어 다니던가. 힘이 가장 센 수사자가 다른 사자들을 이끌었던 것 같다. 어쨌든 다른 사자들과 함께 다닌다면 자신의 비밀이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이다. 다시 생각하니 자신과 달라서 따돌리는 일은 사람만이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가 잘 살아가기를 바란다.

 

내 경우, 고양이와 음악과 채소 이야기가 아무래도 많다. (212쪽) 이 말처럼 이번에도 고양이 이야기가 여러 번 나왔다. 고양이 이름 짓기,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고양이와 놀다보면 한주가 다 가 버린다는 말. 그러고 보니 이 말은 다른 말을 하면서 쓴 것이다. 그리고 어릴 때 기르던 새끼고양이 이야기. 오페라 가수의 고양이 이야기도 있구나. 예전에 읽었던 책에도 고양이 이야기가 나왔다. 고양이가 잠꼬대를 했는데 사람이 하는 말 같았다고. 그리고 그 고양이가 새끼를 낳을 때 하루키가 앞발을 잡아주기도 했단다. 고양이가 잘 따르는 사람이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새끼 때부터 기르면서 길들인다면 따를지도 모르겠지만, 처음 보는 사람을 잘 따르는 고양이도 있다. 아주 가끔 길에서 길고양이와 마주칠 때가 있는데 늘 도망친다. 언제나 사람을 보면 달아나는 길고양이인지도 모르겠지만. 먹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사람 가까이에 올 까닭이 없겠구나. 그래도 조금 관심을 가지고 나를 보는 것도 있다. 아기다. 본래 아기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관심을 갖는 것이기는 하겠지. 나를 보고 달아나는 것(아기는 그럴 수 없겠다)만 있는 게 아니어서 다행인가.

 

예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에 하루키 자신의 이야기도 넣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루키한테 그것을 물어본다면 ‘그렇지 않다’고 할 것 같다. 경험이 들어가 있건, 아니건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구나. 지금까지 쓴 게 저마다 다른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 점을 이제와서 고치기는 어렵겠다. 하루키의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에 실린 글은, 진지한 얼굴로 조금 웃기는 이야기를 해주는 느낌이다. 첫번째는 예전에 읽어서 거의 잊어버렸지만. 잠깐 다른 글을 봤는데 어떤 사람이 하루키는 아직도 어린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슬쩍 본 것이어서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다(그 책 읽어보고 싶어지기는 했는데 언제쯤 볼 수 있으려나). 쉰이 넘었을 때였던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많이 다를 것 같지는 않다. 나이를 먹어서 상처받는 일은 적어졌다 해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언제나 빛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여전히 상처 잘 받지만.

 

나도 알고 싶었던 것이 있다. 그것은 한해 동안(한주마다) 글을 쓸 때 쓸거리가 없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일은 없다고 한다. 먼저 쓸거리를 정해두고 그 안에서 골라서 쓰다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쓴다고. 내 생활은 아주 단순하다. 그래도 그 안에서 쓸거리를 찾으려면 둘레를 잘 살펴봐야 할 텐데. 잘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잠깐이었다. 늘 잊어버린다. 그리고 들쭉날쭉한 감정도 문제다. 또 다른 이야기로 빠졌다.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희선

 

 

 

 

☆―

 

나이 먹는 것을 여러 가지를 잃어가는 동안으로 보는가, 혹은 여러 가지를 쌓아가는 동안으로 보는가에 따라 삶의 질은 한참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뭔가 좀 건방진 소리 같지만.  (115쪽)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그 일이 일어나고 벌써 열세 해가 흘렀다.

 

이 동물원에는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가 있다. 어떻게 보면 내가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부모님과 동물원에 놀러왔다. 그런데 동물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동물을 보다가 나는 부모님과 떨어졌다. 부모님이 어디에 있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에는 사람도 얼마 없었다. 둘레가 어두워진 듯하여 하늘을 올려다보니 비구름으로 덮여있었다. 곧 비가 내렸다.

 

나는 비를 피할 곳을 찾아서 뛰었다. 조금 가니 울타리 대신 심은 나무 사이에 나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자리가 있었다. 수풀 동굴처럼 보였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잠시 앉아 있으니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나뭇잎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새끼사자였다. 비를 맞고 떠는 것 같아서 나는 새끼사자를 안았다. 그때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얘, 너 혹시 먹을 거 없어?”

 

“어디에서 들리는 목소리지?”

 

“바로 밑이야.”

 

나는 새끼 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나 배고파. 먹을 것 좀 줘.”

 

내 윗옷 주머니에는 작은 토마토가 하나 있었다. 그것을 새끼사자한테 주었다. 새끼사자는 토마토를 맛있게 먹었다.

 

“이거 처음 먹어보는 건데 뭐야?”

 

“토마토야.”

 

“그렇구나. 너 이름이 뭐야?”

 

“난 하루키야.”

 

“하루키, 너 나한테 가끔 토마토 갖다주지 않을래?”

 

“응? ……그건 별로 어렵지 않은데 여기 자주 오기 어려워. 한달에 한번쯤 와도 괜찮을까?”

 

“그래, 그렇게 해.”

 

갑자기 새끼사자가 내 품에서 땅으로 내려갔다.

 

“하루키, 비 그쳤으니까 그만 여기에서 나가. 어른 사자가 오고 있어.”

 

나는 깜짝 놀라서 그곳에서 나왔다.

 

“하루키, 나중에 보자.”

 

내가 비를 피하러 들어가 있던 수풀 울타리는 사자 우리 끝이었다. 잘 보니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나오자 빈틈이 없어졌다. 꼭 꿈을 꾼 것 같았다. 그 뒤 나는 바로 부모님과 만났다.

 

한달이 지난 뒤에 나는 새끼사자와 만났던 나무 울타리 앞으로 갔다. 빈틈없던 나무 사이에 구멍이 생겼다. 구멍으로 들여다보니 건너편에 새끼사자 한 마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한테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새끼사자한테 토마토와 다른 채소도 주었다. 나는 새끼사자한테 토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토마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토마토가 언제나 있는 게 아니어서, 나는 철마다 다른 채소를 토마한테 갖다주었다. 그 안에서 토마는 양배추와 토마토를 함께 먹는 것을 좋아했다. 토마가 좋아하는 것은 채소라기보다 샐러드였다.

 

열세 해가 흐른 지금도 나는 토마한테 샐러드를 갖다준다. 토마는 이제 새끼사자가 아니다. 어쩌면 내가 한 말을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세상 어딘가에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가 한 마리쯤 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토마야, 그동안 잘 지냈어? 오늘은 더 맛있는 샐러드야.”

 

 

 

 

*내가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가 있는 이야기를 써버렸다, 울타리로 심은 나무 이 부분 조금 이상하지만,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거다 사자 우리가 다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것은 아니다 끝부분만 그렇다 샐러드 하면 양배추밖에 떠오르지 않는 나... 어쩔 수 없다 이런 말도 안 쓰고 시침을 떼야 하는 것인데...^^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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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3-08-28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는 읽고 조금 후회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책은 미처 읽지 못했었는데..ㅎㅎ

희선 2013-08-28 02:55   좋아요 0 | URL
후회는 왜 했는데요, 괜히 읽었다 하는 건가요
저는 재미있게 봤던 편입니다
무라카미 라디오가 이랬던가, 했죠 예전에 첫번째 것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어쩌면 시간이 흘러서 조금 달라진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그렇고 하루키도...^^


희선
 
해피해피 브레드
미시마 유키코 지음, 서혜영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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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없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먹을 것에 대한 추억이다. 사람한테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먹는 것인데, 나한테는 그에 대한 일이 없다. 사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까 말까 조금 망설였다. 제목에는 빵이 있지만, 그리고 커피도 있다. 커피와 빵 좋아하는 편이지만 아주 많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아무거나 내키는 대로이기 때문에. 내가 느껴본 적 없는 이야기를 보는 것은 그리 편한 일은 아니다. 이것은 질투인지도. 느껴본 적 없는 게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닌데 조금 우습기도 하다. 쓰다보니 무엇이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꼭 가장 좋아하는 것을 정해둘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가장 좋아하는 것은 정하는 게 아니겠구나). 그래서 내가 쓰는 말은 ‘좋아하는 편’이다. 이렇게 말했지만, 여기에 나온 리에가 어렸을 때 좋아한 그림책이 있다는 것은 부럽다. 비록 이 세상에는 없는 마니를 만나고 싶어할지라도. 마지막에 마니는 리에 자신이라는 말을 미즈시마가 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앞으로도 모를지도.

 

앞에는 이런 말이 있다.

 

 

“중요한 건

네가 빛을 받고,

너는 또 누군가를 비춰준다는

사실이야.”  (8쪽)

 

 

뒤에는 이런 말이 있다.

 

 

눈물이 흘러나와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리에 씨는 리에 씨의 ‘마니’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운명의 사람을 찾는다든가 하는, 그런 차원의 얘기가 아닙니다.

 

먼저 자기 자신한테 그 어떤 능력이 있을 것.

그리고 상대한테도 그 어떤 능력이 있을 것.

그런 두 사람이 함께 있음으로 누군가한테 도움이 되거나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

결코 ‘마니’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달’이 될 수 없다면 ‘마니’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마니’는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없다면 절대로 손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리에 씨의 슬픔이 너무나도 깊다는 생각에 나는 떨면서 울었습니다.  (192쪽)

 

 

앞에는 마니가 해를 없애달라고 하는 달한테 하는 말이다. 해가 없어지면 달도 사라진다. 그리고 달이 사라지면 마니도 없어진다. 자신을 긍정해야 한다는 말도 맞다. 자신을 부정하면 이 세상에 자신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그림책에 참 깊은 뜻을 담은 것 같기도 하다. 바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있어서 빛날 수 있다 같은데. 이 책속에 나온 다른 사람한테도 자신을 긍정해야 한다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좀처럼 하기 어려운 일이다. 얼어붙은 마음을 따듯한 커피와 갓 구운 빵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 풀어주는 것인가보다. 또한 바로 앞만 보던 마음이 더 멀리까지 넓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카페 마니가 있는 곳은 홋카이도의 쓰키우라라는 곳이다. 도시와는 떨어져있는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다. 이것과 비슷한 풍경을 볼 수 있는 책이 《무지개 곶 찻집》(모리사와 아키오)이려나. 이 책은 아직 못 봤다. 이것 말고도 비슷한 분위기의 책이 여러 권 나오기는 했다. 책속에 나온 사람도 그렇지만 지금 사람들은 마음을 편히 쉬게 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런 책이 나오는 거겠지. 마음을 다친 사람들 마음이 조금씩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따듯해지니까.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는 쉽게 못 볼 것 같다. 나는 나한테 없는 것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겠다. 그러고 있기는 한데.

 

 

 

희선

 

 

 

 

☆―

 

“미즈시마 씨, 난 내게 소중한 것을 언제나 소중하게 잘 간직하면서 살아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소중한 게 무엇인지 모르게 돼버렸어요. 미즈시마 씨, 고마워요. 나를 여기로 데리고 와줘서.”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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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3-08-28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도 안되요, 정말? 먹을 것에 대한 추억이 없나요?ㅠㅠㅠ 정말 그건 슬픈 거 같은데. 라고 써놓고보니 저도 딱 하나밖에는 없네요, 하하하.

멋진 리뷰네요. 빵과 커피가 생각이 나는..

희선 2013-08-28 02:51   좋아요 0 | URL
그래도 가연 님은 하나 있군요
어쩌면 제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그리고 먹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해야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주 싫어하지는 않지만 아주 좋아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희선
 
두 개의 달 위를 걷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33
샤론 크리치 지음, 김영진 옮김 / 비룡소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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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내가 거의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때 날씨다. 왜냐하면 내가 책을 읽고서 쓰는 때와 블로그에 올려둘 때 시간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아주 가끔은 그때 읽고 쓴 것을 바로 올려두기도 한다). 어쩌다 보니, 라기보다 그냥 게을러서 그렇게 된 거다. 이런 말을 왜 쓰느냐 하면, 그냥이다. 지금은 칠월 초다. 블로그에 쓰게 되는 때는 언제일지 나도 모르겠다. 지금 마음과 그때 마음은 아마 다를 것이다.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올해 반이 흐르고 칠월이 왔는데도 기운이 안 난다고나 할까. 지금 기운이 날 때는 아니지만. 칠월부터는 조금 부지런히 책을 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처럼 안 되는 거다. 나는 대체 언제부터 기분이 하루 괜찮고 하루 안 좋게 됐는지 모르겠다. 요새는 안 좋을 때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핑계일 테지만 그래서 책읽기가 쉽지 않다. 더위 때문은 아니고 내 마음 때문이다. 사실 아직 그렇게 더위를 느끼고 있지도 않다(칠월 중순이나 말쯤 되면 덥겠지).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니고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쓰다니. 책이 읽고 싶고 글이 쓰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방법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하기다. 그러니까 책을 읽고 쓰는 거다. 그래야 우울한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다. 별 말 아니지만 이만큼 쓰니 기분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

 

이 책을 읽으려고 한 것은 며칠 전이다. 미루다가 드디어 읽기 시작했는데 앞부분은 집중이 안 되었다. 그렇게 집중 못하고 읽은 게 한두번이 아니기는 하다. 요새는 졸리면 안 읽지만, 예전에는 졸면서도 읽었다. 그리고 쓰기도 했다. 잘 쓰지는 못했지만. 썼다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다. 꼭 잘 써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세상에는 사람이 많고 그 안에는 아이도 많다. 여기에 나온 아이 샐(살라망카 트리 히들)은 만으로 열세 살일 테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중학생이겠지. 중학교 일학년은 아직 초등학생 티를 벗지 않았을 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실 초등학생 중학생은 상관없다. 사람이 어떤 슬픈 일을 겪으면 그 일에 파묻혀 슬퍼하다가 시간이 흐르면 다시 살아간다. 이게 보통이지만 슬픈 일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기가 죽었을 때 엄마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마음을 놓아버리거나 아직도 살아있다고 믿기도 하지 않는가. 아들이 죽은 어머니 시체와 살았던 영화 <사이코>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여기에 이런 일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샐은 어느 날 집을 떠난 엄마가 다시 집에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엄마는 더 이상 집에 돌아올 수 없다.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전에는 차 사고로 아빠와 동생을 떠나보낸 오브리를 만나기도 했는데. 이런 것을 보면서 세상에는 슬픈 일을 겪는 아이들이 많구나 했다. 책에 나오는 것은 부모님이나 식구가 죽는 것이다.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샐한테는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었다. 샐을 걱정해주는 사람이라고 해야겠구나. 샐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엄마가 떠났던 길을 따라간다. 그게 삼천킬로미터였다. 여행길에서 샐은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친구 피비 이야기를 들려준다. 피비 엄마가 집을 나갔던 이야기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샐은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모르는 척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샐 엄마는 죽은 아이를 낳고 무척 마음 아파했다. 그리고 어느 날 훌쩍 집을 떠났다. 그렇다고 샐을 버린 것은 아니다.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샐은 엄마가 자기 때문에 죽은 아이를 낳고 집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피비 이야기를 하면서 피비 엄마가 집을 나간 것은 피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샐은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슬픔을 받아들이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상처와 마주하는 것과도 같다. 마음 아파도 슬픔에서 달아나면 안 된다. 생각해보니 어른도 잘 못하는 일이기도 하구나. 할머니 할아버지와 떠난 여행이 샐한테 도움이 되었다.

 

 

(지금은 칠월이 다 끝나갈 때다 타이핑하는 게 귀찮았는데, 이번에는 조금 해두었다 쓸 때 잘 쓰면 좋을 텐데, 나중에 타이핑하면서 늘 왜 이렇게 썼을까 한다 좀 괜찮다고 생각하는 적은 어쩌다 한번)

 

 

 

희선

 

 

 

 

☆―

 

“누구든 자기 문제, 자기 삶, 자기의 작은 걱정거리만 생각하며 살아간단 말이지.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내 일정표에 맞춰 주기만을 바라지 않니? ‘내 걱정거리 좀 봐 줘요. 나 좀 걱정해 달라고요. 관심 좀 가져줘요, 내 문제들을. 날 좀 돌봐 달라고요.’ 한다 이거다.”  (118쪽)

 

 

어느 날 문득 루이스턴 시로 갔던 여행이 나를 위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값진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분은 내게 엄마의 모카신을 신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나는 엄마가 본 것을 보았고 엄마가 삶의 마지막 여행에서 느낀 것을 느꼈다.  (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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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세상에서
루타 서페티스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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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소련은 발트해 연안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를 점령했습니다. 얼마 뒤 크렘린은 반 소비에트 인사들의 명단을 만들고, 그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보내거나 시베리아로 보내 강제로 일을 시키기로 결정했지요. 의사, 변호사, 교사, 군인, 작가, 사업가, 음악가, 심지어 도서관 사서들까지 반 소비에트로 보이는 사람들을 모두 추리면서 없애버릴 사람들 명단은 점점 더 늘어났습니다. 첫번째 강제 내쫓김은 1941년 6월 14일에 일어났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471쪽

 

 

제2차 세계전쟁(얼마 전에 우리나라는 왜 세계대전이라 할까 하는 말을 들었다. 세계전쟁, 세계전 더 쉽게 세계싸움이라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은 1939년 9월 1일에서 1945년 8월 15일까지로 연합국과 독일·일본·이탈리아 동맹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것은 나한테 있는 오래된 국어사전에서 찾아본 것인데, 독일·일본은 그렇다 치고 이탈리아가 이쪽이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독일이나 일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 책 속에 나온 소비에트(스탈린)가 한 일은 거의 몰랐다(나만 잘 모르는 것인지도). 1991년 발트해 세 나라(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가 오십 년 동안의 소비에트 점령에서 벗어난 뒤에 알려졌을까. 1991년은 제2차 세계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뒤다. 그러고 보니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비슷한 때 알려진 것 같다. 1980년대 말인가 1990년대 초였던 듯. 사실 나도 확실히는 모른다. 어떤 것은 알아보기도 해야 하는데……. 마지막에 ‘남은 말(에필로그)’에 나온 때는 1995년 4월 25일이다.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서 땅을 파던 일꾼은 땅속에서 나무상자를 꺼냈다. 그것은 리나와 동생 요나스가 1954년에 십이 년 동안 갇혀있던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돌아와 묻은 것으로 글과 그림이 들어있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리나 빌카스로 열여섯 살 여자아이다. 리나를 보니 독일에서 숨어 지내던 여자아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안네 프랑크. 리나와 식구들은 리투아니아에 살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도망치려고 했을 때 NKVD(소련의 내무위원회를 줄인 말)가 리나와 엄마 그리고 동생 요나스를 끌고 갔다. 아빠는 집에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리나가 아빠를 만난 곳은 화물열차를 타러간 역이었다. 리나 아빠는 남자들과 다른 곳으로 끌려가고 리나, 요나스 그리고 엄마는 알타이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갔다. 세 사람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끌려갔다. 소비에트에서는 사람들을 범죄자로 여겼다. 그리고 사람들한테 범죄자인 것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서류에 이름을 쓰라고 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내가 그곳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인정하지 않아도 무서워서 이름을 썼을지도. 그래도 여기에는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름을 쓰면 안 된다고. 그런 일을 시키는 것은 사람들 마음을 꺾기 위한 것이라고. NKVD는 서류에 이름을 쓰지 않은 사람들을 이틀에 하루는 못 자게 했다. 그런 것에 못 이겨 이름을 쓰는 사람이 늘어갔다.

 

사람한테 일을 시키려면 어느 정도 시설이 갖춰져야 하는데 사람들이 끌려간 곳은 환경이 그리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먹을 게 적었다. 리나는 쓰레기통에서 음식을 찾아먹기도 했다. 리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어려운 형편에도 사람들은 희망을 갖고 살아갔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모두 모여서 축하하기도 하고, 리나 생일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서 축하해주었다. 리나는 그림을 잘 그렸다. 그림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리나는 자신이 겪는 일, 보는 일을 쓰고 그렸다. 그것은 NKVD한테 들키면 안 되는 거였다. 그때 리나처럼 글이나 그림으로 남긴 사람이 많았겠지. NKVD라고 해서 모두 나쁘지는 않았다. 끌려온 사람들을 도와준 사람도 있었다. 리나가 NKVD 지휘관 초상화를 그리게 해준 것은 NKVD 대원 니콜라이 크레츠스키다. 리나는 지휘관의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렸다. 그리고 음식을 받았다. NKVD들이 음식을 거칠게 던져주었지만. 리나는 크레츠스키를 나쁘게 생각했는데, 나는 크레츠스키가 일부러 나쁘게 행동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더 심하게 괴롭히지 못하게 하려고. 리나는 크레스츠스키가 엄마를 도와준 일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리나와 요나스 그리고 엄마는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리나는 안드리우스한테 지금까지 쓴 글과 그림을 맡겼다.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바라며. 리나네 식구들과 사람들이 끌려간 곳은 북극 트로피모프스크였다. 그곳은 아주 추웠다. 그곳에 갔을 때 엄마가 제대로 걷지 못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조금 걱정했는데 리나 엄마는 죽는다. 어쩌면 엄마는 아빠가 총살당했다는 말 때문에 살아갈 힘을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동안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병으로 죽어갈 때 그곳에 의사가 나타났다. 요나스도 괴혈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치료를 받았다. 그곳을 의사한테 알려준 사람은 니콜라이 크레츠스키였다고 했다. 여기에는 한해가 조금 넘는 시간이 나왔지만, 사람들이 시베리아 수용소에 갇혀있었던 것은 십이 년이다. 살아서 자기 나라에 돌아간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서도 편하게 살지 못했다. 소비에트는 자기들이 한 일을 숨기려고 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났다. 시베리아 수용소.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끌려가서 갇혀있었다는 것이. 시베리아라는 말 봤을 때 바로 떠올려야 했는데. 그렇지만 발트해 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일은 훨씬 나중에 알려졌을 것이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그런 데 끌려간 일은 진짜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그런 일을 잊지 않고, 또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형편에 있다 해도 희망을 버리면 안 된다.

 

 

 

희선

 

 

 

 

☆―

 

“안드리우스, 나…… 무서워.”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안 돼. 두려워하지마. 저들한테 어떤 것도 내주어선 안 돼, 리나. 두려움조차도 보이면 안 돼.”  (334쪽)

 

 

“날 봐.” 안드리우스가 가까이 다가서며 소곤거렸다. “난 너를 찾아낼 거야. 그것만 생각해. 내가 네 그림들을 가지고 찾아간다는 생각만 해. 그걸 그려. 왜냐하면 내가 갈 거니까.”  (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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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아이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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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떠한 것이든 이길 수 있다’고 썼는데 정말 그럴까. 내가 써놓고 이런 생각을 하다니. 얼마전에 우리가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누군가 우리한테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정말 내가 생각하는 것인지 자신이 없어졌다고나 할까. 우리는 나고 자라면서 이런저런 매체에 드러나게 된다. 거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아주 오래전에 세상에는 나쁜 것이 가득했다. 그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절대자(위에 있는)는 사람들 마음속에 사랑을 심어두었다. 그게 오랫동안 이어와서 사람들은 사랑이 위대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소설, 영화, 드라마에서는 무엇보다 사랑을 앞세우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물들어간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믿어야 하는 것은 사랑이다고 말하는 것에. 이런 음모는 그나마 낫다. 세상을 조금은 좋게 만들 테니 말이다. 나도 사랑을 믿고 싶다. 누군가 몰래 심어둔 생각이라 할지라도.

 

좀 더 잘 쓰고 싶었는데,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잡아서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대로 쓰지도 못했다. 이 소설 제목을 봤을 때는 외국 사람이 쓴 소설인가 했다. 그때는 제목만 보고 작가 이름은 안 봤다. 나중에 작가가 우리나라 사람인 것을 알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사랑 이야기구나’다. 대놓고 말하는 사랑에 대한 소설은 아니다. 그래도 조금 유치한 부분도 있다. 본래 사랑은 조금 유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은 미국이다. 한국사람도 나온다. 이름은 신가야. ‘가야는 신라한테 망한 나라던가. 신가야는 신라, 가야를 다 담고 있는 이름인가.’ 이런 생각을 잠깐 했다. 어쩌면 아무 상관도 없을지도. 신가야는 오드아이다. 신가야가 만나는 운명의 사람은 엘리스 로자다. 엘리스한테는 모든 일을 기억하는 과잉 기억 증후군이 있다. 둘 다 보통사람이 아니다.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사랑을 못할 것은 없다. 엘리스가 신가야와 만나고 함께 보낸 날은 겨우 닷새다. 그 닷새는 엘리스를 십년 동안 동굴에 갇혀 있게 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엘리스가 결정한 일이기도 하다.

 

과잉 기억 증후군이 있는 사람을 소설에서 본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 사람이 힘든 일을 겪어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일을 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잉 기억 증후군을 가진 사람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다. 엘리스는 신가야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모습을 보았다. 신가야가 왜 그렇게 해야 했나는 십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어떤 일은 죽을 때까지 모르기도 하는데, 십년이 지나서라도 신가야 마음을 알게 된 엘리스는 그나마 낫지 않나 싶다. 다 엘리스와 딸인 미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신가야는 어떻게 자신한테 딸이 생길 것을 알았느냐고. 신가야는 앞날을 기억하는 궁극의 아이였다. 궁극의 아이 가운데서도 뛰어났다. 자기 앞날뿐 아니라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다 알 수 있었다. 이런 힘이 있는 사람을 가만히 놔둘 리 없다. 신가야는 세상을 손에 쥐고 싶어하는 사람한테 매여 있었다. 그것은 악마 개구리다.

 

신가야가 앞날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어쩌면 신가야가 알았던 십년 뒤는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신가야가 상관해서 앞날을 조금 바뀌게 한 것은 아닐까. 엘리스와 미셸을 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지나간 날은 벌써 일어난 일이니 바꿀 수 없지만, 앞날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바꿀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앞날은 정해져 있지 않다. 뒤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여기에 조금 무서운 이야기도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게 하려는 계획이다. 어딘가에서 진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일은 없기를 바란다. 신가야가 십년 전에 보낸 편지를 받고 엘리스를 찾아온 FBI 요원 사이먼 켄도 중요한 사람인데 제대로 못 썼다. 그러고 보니 사이먼도 사랑 때문에 마음을 다쳤다. 십년이 지나서야 아내 모니카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신가야에 대해 알게 되는 엘리스와 같다.

 

끝이 어설프게 되었다. 사실은 더 앞에서 끝내려고 했는데 쓸데없는 말이 더 붙었다. 이 말도 그런가. 사실 나는 사랑을 잘 모른다. 넓은 뜻의 사랑은 조금 알지만. 넓든 좁든 사랑은 이 세상에 있어야겠지.

 

 

 

희선

 

 

 

 

☆―

 

“운명은 정말 바꿀 수 없는 건가요? 그렇다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쓰는 우리는 뭔가요?”

.

.

.

 

운명은 바꿀 수 있어요. 벨몽이 이런 말을 했을 거예요. 운명이란 뽑을 수 없을 만큼 깊숙이 박힌 커다란 뿌리라고. 그 뿌리가 바로 당신이에요. 당신이 바뀌면 뿌리가 바뀌는 거예요. 운명을 바꾸고 싶으면 당신이 바뀌면 돼요.  (541~5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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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3-07-16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가지가 섞여있네요, 사랑과 운명... 둘 다 너무 무거운 개념들입니다

희선 2013-07-17 01:03   좋아요 0 | URL
사랑과 운명 그렇기도 하군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사랑이 있으면 운명도 바꿀 수 있다
그저 생각일 뿐이군요
정말 제가 믿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