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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편하고 따스한 방 안에서 누군가의 녹녹치 않은 삶을 읽는 건, 기분을 묘하게 여럿으로 갈래질친다. 우선 인간적으로 서서히 텍스트의 주인공에게 감정이 동화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뭉클해짐이 여러 번 반복되면 어느새 내 자신이 세속의 감정에서 벗어난 듯 가뿐해진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책을 읽게 되면 누구나 맞딱드리게 되는 감정의 수순이 아니겠는가? 마치 가슴이 촉촉하게 살아 있는 휴머니스트가 된 양, 일순간 정화된 눈과 가슴을 느낀다. 물론 이러한 느낌도 아름다운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모습을 좀 더 거리를 두고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자신을 되돌아 반성하는 태도는 이 책에서도 되풀이 되면서 글쓴이(신영복 선생)를 그 긴 시간 속에서 다듬어 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짐작하고도 남을 저 밑?에서 보낸 저자의 젊음과 수십년의 생활을 엿보면서, 지금 나의 삶과 비교하고 안도하면서, 어떤 부지런한 자극을 삼는, 그런 일차원적인 감상에만 머물지 않는 엄밀한 사색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그 생활을 짐작하고 언뜻 그려 볼 수 있지, 저자의 실제 체험하고는 괴리감이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러하기에 우리의 감상이 어떤 자기 위안으로 그치기 쉽고, 그 지속력은 짧아 얼마 후면 전과 똑같은 나태한 우리들의 모습을 마주치게 된다.
이 책은 저자의 이십년 가까운 감옥 생활 동안 여러 사람들한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받는 사람에 따라 글맛은 물론 주제와 내용도 달라지는데, 여기서 저자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느낄 수 있다. 즉 관계가 단순히 이어지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맞게 적절하게 자신을 드러내면서 대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즉 관계는 기계적인 '선(線)'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살아 있는 대상 사이에 조율된 '음(音)'도 있어야 함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관계에는 나와 분리된 대상이 아니라 서로 '애정'으로 닿아 있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형수에게 보낸 글에서 저자의 '관계의 최고형태'가 분명한 어조로 들어나는데, 대상과 자기가 애정의 젖줄로, 운명의 핏줄로 맺어진 즉 '나와 대상의 육화(肉化)된 인식'(p.312)을 강조하고 있다.
단순한 감정에만 이끌렸다면, 이 편지들의 오고감이 제한된 위안과 안부 전하기로 그쳤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감옥 생활이 바깥 세상과 단절된, 그리고 유보된 것이 아닌, 어렵지만 또 하나의 '삶'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거 같다. 그러하기에 이 생활도 나름데로 지속되어야 할 이유가 있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께 보내는 글에서 염려의 글이 아닌 주제가 발전적으로 가능한 '대화'의 글로 전환하고자 하는 뜻을 내비친다.(p.73) 또한 아버지가 보내 준 '중용'을 읽고, 동양 고전에 대한 본격적인 독서 포부를 밝히기도 한다.(p.79) 아마 이러한 계기가 나중에 동양 고전을 다룬 '강의'라는 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나 모르겠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그 심도가 점점 짙어가는데, 저자는 책을 대하는 태도에서 실천이 배제된 상황에 많은 책을 대하는 것 보다 읽은 것을 되새기는 생각하는 시간을 더 가지려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식을 넒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 함은 사침(思沈)하여야 사무사(思貿邪) 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p.85) 여기서 더 나아가 지독한 '지식의 사유욕'으로 형성된 것들을 버려 나가는, 전과 분명히 다른 전환된 실천의 모습을 글로 전하기도 한다.(pp.104-105) '인디언의 편지'라는 제목이 붙은 글에서는 미국 정부로부터 돈을 받고 땅을 건네라는 요구에 인디언 추장이 보낸 편지를 읽고 저자가 느낀 바를 써 놓았다. 추장의 짤막한 편지에서 저자는 자기 사고의 식민지적 잔재를 반성하면서, "서구적인 것을 보편적인 원리로 수긍하고 우리의 것은 항상 특수한 것, 우연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사고의 식민성'은 우리들의 가슴에 아직도 자국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p.133)라고 자신의 아주 깊은 속까지 들어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아버지와의 대화에서는 이렇게 지적 성찰로 이어지는 어떤 엄격함이 부모에 대한 애틋함을 숨기고 진행되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저자도 어쩔 수 없이 약해진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어머니의 병환을 염려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다.
형수와 계수한테도 많은 편지가 오고 갔는데, 특히 조카와 관련된 교육 문제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지금 우리 교육의 문제와도 직접 닿아 있는 것이라 새겨들을만하다. "창의성 있고 개성 있는 어린이, 굵은 뼈대를 가진 어린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불량학생이란 흉한 이름을 붙여 일찌감치 엘리트 코스에서 밀어내버리고, ...."(p.272) 이렇듯, 자기가 능동적으로 터득하는 즐거운 지식 습득이 아닌, 단순하고 수동적인 태도가 오히려 유리한 교육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장차 우리나라의 미래를 뚝심있게 책임 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 책에는 엄연미(嚴然美)와 진지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엷은 미소를 띠게 하는 글들도 있다. 특히 '청구회 추억'이란 제목이 붙은 글은 저자가 감옥에 들어 오기 전, 이십대 시절 꼬마 아이들과 겪은 추억을 적은 글인데, 마치 흙냄새나는 단편 소설처럼 잔잔한 웃음과 흐뭇함, 그리고 알 수 없는 짬짬함이 가을 바람처럼 스산하게 여려 있다. 형수에게 보내는 '떡신자' 제목 편지글에는 잿밥?에 관심 있어 참석하게 된 종교집회에서 너무도 인간적인 그의 면모를 마주하면서, 내 자신도 그와 비슷한 군대 시절의 경험을 끄집어낼 수 밖에 없었다. 너무도 인간적인 식탐이 아닐런지..
이렇듯, 편지글을 모은 이 책에서는 선비같은 책표지와는 달리 여러 다양한 이야깃거리와 사고의 무게가 알맞게 나눠 담긴 내용들을 읽을 수 있다. 즉 저자의 특정 기간 삶의 색깔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저 빛이 무수히 밝은 바깥 사람들이 어쩌면 단조로운 반복을 일삼는 생활을 할 때, 저 볕이 약한 곳에서도 자신을 계속 다듬어 나가는 '생의 실천', 그 삶의 줄기가 더욱 푸르게 이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저 좁은 곳에서 저자는 우리들보다 더 큰 사고의 우주를 넘나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 책에서 섬뜩한 내용으로 다가오는 자기 응시(p.125)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나의 치졸한 꺼풀을 벗고 자신을 바라보아야만 즉, 나마저 투과하는 그런 응시야말로 진정 '나의 반성'을 가능케하고, 그것이 곧 나를 온전히 변화하게 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씨실과 날실의 매듭, 그 움툭함에 저자의 그런 응시가 서려 있음을 느꼈고, 그것이 나에게도, 다시 나를 응시하게 하는 또 하나의 기회를 주었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글쓴이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나를 자극해 돋아나게 만든 하나의 사색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