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과 거짓말(Secrets & Lies'1996)
흑인 여성 호텐스는 생모를 찾기 위해 자신의 서류를 보다가 갑자기 입이 벌어진다. 이건 오류가 아닌가? 내 생모가 백인 여자라니!!! 게다가 호텐스는 전혀 혼혈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담당자는 절대 오류가 아니라고 자리를 피한다.
생모를 만났다. 젊은 흑인 여자와 마흔이 넘은 백인 여자(신시아). 그 백인 아줌마 신시아도 가슴 벌렁이며 자기를 찾는 딸을 (딱 한번임을 강조하고) 만나러 왔다가 흑인임을 보고 이건 뭔가 착오가 있을거라며 한 발짝 물러선다. 그래도 이왕 나왔으니 차나 마시면서 확인좀 하자는 호텐스의 말에 신시아도 결국 응한다.
서로 차를 마시며 느릿 느릿 시간을 보내면서 어색한 대화를 섞다가, 어느 순간 신시아는 오열한다.
닫아 두었던 기억이 불쑥 솟은 것이다. 다시 꺼내보기도 싫었던 소녀 시절의 기억. 그래서 없던거나 마찬가지인 과거의 사건이었는데.. 이십여년이 흘러 그 결과가 살아 있는 존재가 되어 그녀를 찾아 온 것이다.
이 영화는 여기서부터 어떤 응축점을 향하여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딱 한번 보고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핏줄은 땡기는지 그 뒤로 '보고 또 보고' 관계가 되어 버린 백인 엄마와 흑인 딸의 몰래 만남.
이제 '관계의 장'이 최종 국면을 맞게 되는 날이 찾아 온다. 바로 신시아의 또 다른 딸, 록산느(호텐스의 이복 동생)의 생일 축하 파티. 신시아의 남동생이자 록산느의 삼촌인 모리스가 그의 새집에 초대를 한 것이다. 신시아, 록산느와 남자 친구, 모리스와 모리스의 아내, 여직원이 이 생일 파티에 함께 한다. 그리고 신시아의 요청에 의해 마지못해 호텐스도 공장 동료인양 속이고 참석한다.
백인들의 모임에 홍일점이 되어 버린 흑인 여자, 호텐스는 마치 이 영화에서 어떤 균형을 깰듯한 침입자의 역할을 위임받은 듯 하다.
폭풍전야와 다름없는 야외에서의 식사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압권이 아닐까?)그 분주한 움직임과 대화들은 겉으로 왁자지껄 즐거운 파티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혹시 뭔가 실수가 있지 않나 보는 사람을 노심초사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부정적인 기운으로 형성된 관계의 균형은 깨지는 것이 낫다. 그것이 이 영화의 도발성이고 역설이다. 안정된 균형잡힌 비극?도 위협을 받으면 움츠리고 방어하지만, 그 위협이 그 비극을 와해시키는 열쇠가 된다는 거. 그러나 고통스러운 과정을 잘 통과해야 한다.
신시아와 딸 록산느는 단둘이 한 집에 살면서도 말 한마디에도 서로 상처주기에 바쁜 모녀로, 모리스와 그의 아내는 서로 사랑하지만 불규칙한 심리에 시달리며 위태롭다. 또한 신시아와 모리스의 아내는 오해와 시기로 심한 반목 상태이다. 다만, 모리스는 아내와 누나 신시아, 그리고 조카 록산느를 사랑하면서 그 중간 지점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모리스와의 일대일 관계에서는 그래도 애정의 신호가 깜빡이지만, 외곽의 점으로 배열된 세 사람은 무관심이나 오해, 시기로 반발한다.
----------여기부터 스포일러---------
이 요상한 그러나 오래 안정적으로 유지해 온 '분자 구조' 에 검은 입자의 충돌로 잠시 혼란 상태가 오게 되는데, 신시아는 결국 호텐스가 자신의 딸임을 털어 놓는다. 그 후로는 안봐도 짐작이 가겠다. 록산느는 또 가시를 듬뿍 담아 엄마에게 한방 먹이고 집 밖으로 뛰쳐 나가고, 다른 사람들은 일시에 굳어 버린다. 모리스는 록산느를 겨우 설득해 다시 집으로 들이고, 다시 이들의 앙금 담긴 대화가 시작한다.
비밀과 거짓말로 서로를 위장하고 그 오래된 위장이 굳은 가면처럼 자신들의 얼굴이 되어 버린 관계들. 그 경직되고 두터운 가면에 금이 갈 때, 짧은 순간이지만 증폭된 고통이 일순간 이들을 덮친다. 입자 하나는 밖으로 튀어 나가기도 했다.
과연 이들 가족은 서로에게서 터져 나오는 비밀과 거짓말을 한자리에 펼쳐놓고 감내해낼 수 있을까? 이것을 잘 통과한다면 그 뒤에는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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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키드로 유명한 마이크 리 감독은 이 영화로 깐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신시아 역을 잘 해낸 여배우 역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