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란 무엇인가>를 리뷰해주세요.
아버지란 무엇인가
루이지 조야 지음, 이은정 옮김 / 르네상스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아버지란 무엇인가?'라니! 이런 물음은 사람을 잠시 멈칫하게 한다. 뭔가 말하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순서가 잡히지 않는 묵음의 단어들이 맴도는 기분이랄까. 눈을 감고 '아버지'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을 음미할 순 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길다랗게 언어화해서 내뱉긴 힘들다. 

원서의 제목은 그냥 'The Father'인데, 우리말 번역본엔 도발적인 제목이 붙었다. 어쨌거나 아버지든 아버지란 무엇인가든 아버지라는 이런 울림을 그냥 감정과 생리에만 맡기지 않고, 잠시 인문학이라는 공간이 주는 거리감을 통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역사와 심리, 그리고 문화(사회)라는 틀을 가지고서.. 

저자 루이지 조야는 융의 영향을 받은 학자로, 이 책의 제2부(그리스, 로마의 부성 신화)에서 그러한 성향이 보이지만, 과도한 적용이나 억지로 끼어 맞추려는 경직된 시도는 자제한다. 너무 많은 지식을 끌고 들어와서 장식만 요란한 글쓰기도 아닌 것 같다. 각 장에 맞는 틀(가령, 역사, 신화, 문화)을 가지고 차근차근 깊은 맛이 우러나도록 접근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스-로마로부터 출발하는 그 지점이 분명 서양을 가리키지만, 현대 사회는 동양 역시도 서양의 것이 충분히 전이된 상태이므로 그러한 관점이 큰 무리는 없다고 저자는 보는 것 같다.   

이러한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아직은 부성이 어색한 수컷의 본능과 신화 속에서 운명의 힘에 갈등하는 남자를 만나볼 수 있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 더욱 큰 구멍이 뚫린, 부성결핍증을 앓는 남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부성이 점점 그 자리를 잃고 휘청하는 몰락의 궤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혹은 그 위기를 강조하면서 다시 부성, 즉 남자의 권위를 되찾자는 마초의 위기감에서 나온 인문학적 대응도 아니다. 저자가 볼 때, 부성은 모성과 달리 본능에서 자연스럽게 싹튼 것은 아니지만, 우리 문명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위로 이끄는 힘'을 가진 그 '무엇'이다. 그리고 뒤늦게 우리에게 도착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모성과 부성에 기대는 건 위험하다. 거짓된(부정적인) 모성과 거짓된 부성 역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구강기에 호소하는 현대의 소비사회는 전자를 말하고, 자칫 권력의 아버지라는 독재정치로 빠질 위험을 후자는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특히 제2부인 그리스-로마의 부성 신화를 흥미롭게 봤다. 마치 흑백으로 만든 고전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지만, 여러 등장인물들이 커다란 줄거리를 통해서 각자 적당한 매듭을 가지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오디세우스, 헥토르 그리고 아이네아스에 닥친 운명과 여정은 한 개인이자 영웅에게 맡겨진 우리 모두의 원시적 꿈이 통과해야만 할 스크린이 아니였나싶다.  

그러한 와중에 우리는 간혹 재미있는 지식도 주어 듣는다. 고대 그리스인의 극단적인 여성관을 보자면, 마치 여자를 남자와 전혀 다른 인종으로 여길 정도였고, 그러한 배경에서 동성애가 이성애보다 더 숭고한 자리를 차지한다. 따라서 같은 동성애라 하더라도, 지금의 동성애와는 또 그 내막이 다른 것이다.  

신화의 꿈을 걷다가 갑자기 대리석 바닥 같은 로마로 오게 되면, 부성과 관련하여 대단히 놀라운 변화, 반전을 만나게 된다. 아버지의 아들 되기! 혹은 아들의 아버지 되기가 피의 연결이 아닌 하나의 의식(儀式)을 통한 승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사내아이를 하늘을 향해 높이 쳐드는 상징적인 행위는 바로 부자관계의 결속을 낳는다. 로마는 법률의 시대였고, 그리스라는 신들과 인간이 섞인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한 문명의 한 단계가 아닌가? 그래서 아비 될 사람이 사내 아이를 높이 쳐들 수 있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이 남자에게는 전과는 다른 책임감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 순간이, 이 책을 읽으면서도 인상적인 곳이었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저자가 명확한 결론으로 몰아가려는 강박을 포기하는 대신, 아버지가 빚어내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볼 기회를 독자들에게 준다.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하나의 주제를 진득하게 파고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더욱 안성맞춤이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자연은 어머니와 관련해서 '어떤 도약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도약이 필요했고, 이런 점에서 부성은 문명의 시작과 동등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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