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 너머로 개선문을 바라보며 우리는 프랑스혁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헤아려보았다. 그 혁명이 어찌 프랑스 시민만의 것이겠는가. 인류 모두가 그 혜택을 입었다. 프랑스혁명이 있었기에 후세는 공화국의 가치를 알았다. 자유와 평등이란 지표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언어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우리의 통념을 부정한다. 베를린의 본래 뜻은 ‘습기가 많은 땅’이었단다. 이 도시를 적시는 풍부한 강물과 근교의 크고 작은 호수로 인하여, 이곳은 오래전부터 습지였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주장이다. 이런 사실이 밝혀졌다 해도, 시민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다. 그들에게 베를린은 곰의 도시가 맞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이 도시 한복판에는 파리 광장이 있다. 1814년 프로이센 군대는 연합군의 일부로서 파리를 함락시켰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영원히 물러났다. 이를 기념하여 베를린 도심에 파리 광장이란 지명이 생겼다. 그 이전에는 지형이 사각형이었기 때문에 ‘피어에크’(사각형)라고 했다. 바로 그곳에 브란덴부르크 문이 나를 보란 듯 버티고 서 있다.
상수시 궁전에서 게오르크와 나는 비스마르크 수상을 떠올렸다. 그는 빌헬름 1세 때의 명재상이었다.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연달아 격파했고, 급기야는 독일제국을 건설한 으뜸가는 공신이었다. 그는 재상으로 취임할 당시, ‘오직 철(무기)과 피(전쟁)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해 ‘철혈재상’이란 별명을 얻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전형적인 군국주의자였다.
그때 비스마르크는 예언하였다. ‘만약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내가 퇴임한 지 15년쯤 뒤에 독일제국이 파멸할 것이다.’ 그가 해임된 것은 1890년이었고, 독일제국이 파산한 것은 1918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1천만 명의 전사자와 2천만 명의 부상자를 낸 채 끝났으나, 패전국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은 형언할 수 없이 처참하였다.
1942년 1월 20일에는 베를린 근교 반제 호숫가에서 비밀회의가 열렸다. 나치 친위대의 별장에서 열린 그 회의에서 유대인 홀로코스트, 즉 유대인 대학살이 구체적으로 계획되었다. 이후 유럽에서는 오직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600만 명의 무고한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히틀러의 인종청소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과거 유럽 역사에서 반유대주의 광풍이 간헐적으로 되풀이되었으나, 마침내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다!
현재 독일은 순항 중인 것 같다. 역사상 오랜 숙적이던 프랑스와도 관계 개선에 성공했다. 두 나라는 힘을 합쳐 유럽통합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 길은 험하고 아득히 멀다고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초유의 역사적 실험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평화와 공존을 향한 노력이 부디 성공하기를 바란다.
세상에서 성 평등 지수(GDI)가 가장 높은 곳은 어디일까. 덴마크이다(2019년 현재). 그럼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역시 덴마크이다.
그들은 세상의 아이들이 더없이 좋아하는 레고(LEGO)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덴마크를 대표하는 대기업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잘 만들어도 부자 나라가 될 수 있다!
공원을 개장한 게오르그 카스텐슨은, "사람들이 즐겁게 놀 때 정치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왕의 허락을 얻었다. 정치가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시민들이 정치에서 눈을 돌리게 할 궁리에 여념이 없다.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가 다음과 같은 말로 덴마크 사람들을 고무 격려했단다. "나치 정권이 유대인들에게 노란 별을 가슴에 붙이라고 명령한다면,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가슴에 노란 별을 달 것이다!" 이 얼마나 유쾌하고 기발한 반격인가.
우리의 짐작과는 달리 어린이만을 위해서 동화를 창작한 것도 아니었다. "어린이는 내 이야기를 피상적으로 읽는다. 성숙한 어른이라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까마득한 옛날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에 세관이 있었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북이탈리아와 프랑스 및 독일을 하나로 연결하는 길목이었다. 취리히라는 도시의 이름이 세관을 뜻하는 라틴어(Turicum)에서 유래했다니 신기하다.
모스크바는 날씨도 빈부 차이도 극단적이다. 이곳에는 1천 200만(2019년 현재) 명의 시민이 거주한다. 일부는 서구적 가치를 내면화했다고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서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가 ‘모스코비치’(모스크바 사람)의 가슴을 지배한다.
도시 분위기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었다.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 나는 그들의 독특한 생활 감정을 피부로 느꼈다. 차르(황제)와 보야르(고위 귀족)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크렘린이 역사의 주된 무대가 된 것은 13세기였다. 모스크바 공국의 창건자 유리 돌 고루키가 이곳에 목책을 둘러 요새를 구축했었다. ‘성채(城砦)’ 또는 ‘성벽(城壁)’을 뜻하는 러시아어가 크렘린이다.
알래스카를 잃었음에도,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한다. 그들에게 시베리아는 유형지였다.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도 그러했다. 레닌도 스탈린도 시베리아 유형을 직접 체험하였다. 지금은 그곳이 천연자원의 보고로서 사랑받고 있으나, 한때는 저주받은 자들의 땅이었다.
박물관 앞에는 푸시킨 부부 동상이 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으나 손을 마주 잡지는 않은 모습이다. 그 두 사람의 손을 함께 잡으면 영원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이 때문에 이곳을 찾아온 청춘 남녀들은 부부의 손끝을 쥔다. 시인 부부의 손끝이 매끈하게 닳아 있다.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레닌의 후계자는 스탈린이었다. 그 역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망명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레닌의 뒤를 이어 차르 이상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스탈린이란 말은 ‘강철 사나이’라는 뜻이다. 본래 이름은 ‘이오시프 주가시빌리’였다. 신앙심이 강했던 모친의 영향으로,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이 그를 혁명가로 만들었다.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는 헤어나기 어려운 혼란에 빠져 있었고, 혁명의 기운이 움텄다. 스탈린은 권력을 손에 쥐자 산업화를 서둘렀다. 계획경제를 신봉했기 때문에, 그는 5개년 계획을 세웠다. 3차에 걸친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각 방면에서 초유의 속도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사업은 겉만 번지레하였다. 실제로는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그는 최악의 독재자였다. 끝없이 자신을 우상화하고, 죽을 때까지 공포정치를 펼쳤다. 불행히도, 그를 모방한 독재자들이 거의 모든 공산권 국가에 등장했다. 루마니아의 차우체스크를 비롯해 중국의 마오쩌둥이나 북한의 김일성도 스탈린의 분신이었다.
국경 도시의 비운 처음부터 이 도시는 국제적인 교통의 요지였다. 인구는 고작 30만 명(2019년)이지만 이곳을 독일어로는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라고 한다. 로마 시대부터 그렇게 불렀다. ‘스트라스(stras)’는 큰길이란 뜻이요, ‘부르(bourg)’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가리킨다. 즉 한길에 자리한 성곽도시였다. 수백 년 동안 로마의 통치를 받다가 나중에는 훈족의 지배 아래 신음하였다. 5세기 중반의 일이었다. 그 후로는 줄곧 독일 영토였다.
스트라스부르는 중세부터 문학의 중심지로도 호평을 받았고, 출판업의 전통도 깊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금속활자로 이름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도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오늘날 구시가지에는 구텐베르크 광장이 있고, 그의 동상이 있다. 구텐베르크는 여기서 마르틴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을 인쇄하였다. 16세기 스트라스부르는 유럽 출판업의 중심지였다.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의 진실 스트라스부르의 운명은 기구했다. 19세기 후반, 근대화에 성공한 프로이센(독일)이 팽창전략을 펼쳐 옛 땅을 회복하였다(1870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 무렵 알자스의 민심은 어땠을까. 프랑스 애국 시민의 관점에서 쓴 문학작품 하나가 있다. 『마지막 수업』이란 단편소설로, 알퐁스 도데가 1871년에 발표한 인기 소설이다. 이 소설은 국토 상실이라는 첨예한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부터 많은 한국인의 심금을 울렸다. 나도 중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이 소설을 읽고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새롭다.
모국어를 상실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이 작품으로 인해 프랑스인들이 애국심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해, 그 시절 스트라스부르 시민들의 모국어는 아직도 독일어였다. 그들은 심한 사투리를 사용하였고, 지금도 큰 차이가 없다. 도데의 소설이 묘사한 애국심은 너무 과장된 것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스트라스부르는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그러고는 다시 독일 쪽으로 넘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또다시 독일군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프랑스로 국적이 또 바뀌었다. 1869년부터 1946년까지 스트라스부르 시민의 국적은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혼란의 연속이었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다음부터는 프랑스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이 점차 강화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대학은 자본주의의 하급 간부를 육성하는 공장이 되고 말았다. 지식인들이 이를 묵인하는 슬픈 현실이다."
당시 유럽 대학의 현실을 이렇게 비판한 다음, 공저자들은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대학생들은 오직 사회 전체에 대한 처절한 저항을 통해서만 자신들이 당면한 소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인간은 제아무리 훌륭한 문명을 건설한다 해도 결국 자연의 일부이다. 만약 이 사실을 망각하면 큰 재앙이 올 뿐이다. 자연 앞에 오만한 도시는 결코 오랫동안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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