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원성왕릉의 문인석상은 중앙아시아 위구르인의 모습인 데 반해, 무인석상은 페르시아계 무슬림 군인의 모습이다. 고분에서 출토된 여러 토용의 모습에서도 페르시아계나 튀르크계 서역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페르시아 왕자의 신라 진출을 전해 주는 고대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의 발굴과 연구는 신라 사회의 대외 접촉사에 새로운 실마리를 던져 주었다.

고려에 거주하던 회회인들은 왕실과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며 경제적 활동으로 부를 축적해 갔으며,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개경에 가게를 차리고 장사도 했다.

대표적인 고려 가사 <쌍화점>에 보면 ‘회회 아비’가 등장하는데, 이는 이슬람 상인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쌍화’는 지금도 위구르 지역이나 중앙아시아에서 즐겨 먹는 만두의 하나인 ‘삼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이슬람 문화의 흔적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1427년 세종의 외국 문화 배척 칙령으로 이방인들에게 빠른 동화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국가적 이념으로 받아들인 신유교주의가 강조되면서 세계관의 초점은 온통 중국이었다.

그 결과 이즈음 이슬람권을 평정하고 새롭게 세계의 강자로 떠오르던 오스만 제국과, 그들과 경쟁하며 힘을 키워 가던 유럽의 변화를 읽을 수가 없었다. 세계사의 흐름을 놓친 잘못은 훗날 참담한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무엇보다 오스만 제국의 튤립이 유럽으로 이식된 것은 경제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튤립은 오스만 제국 황실의 꽃이 되면서 모자이크, 타일, 옷, 장식에 쓰이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런 튤립의 알뿌리가 이스탄불에 파견되어 있던 비엔나 대사에 의해 1554년 비엔나로 건너갔다. 그 뒤 1591년 네덜란드에서 재배에 성공하면서 대단한 인기 품목이 되었다.

1554년 세계 최초의 카페인 ‘차이하네’가 이스탄불에서 문을 열었다. 16세기는 오스만 제국이 가장 활력에 넘치던 시대였으며, 이런 시대를 반영하듯 수도 이스탄불에는 600개가 넘는 카페가 있었다. 화려한 카페 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

카페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담론을 나누는 공간이 되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설계하는 혁명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다. 좋은 예가 1789년 7월 13일, 파리의 ‘카페 드 포이’에서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미국 커피의 중심 도시는 시애틀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와 보잉사를 중심으로 화이트칼라가 주도하는 첨단 산업의 메카 시애틀에서 미국 3대 커피 브랜드인 스타벅스, 시애틀 베스트, 툴리스가 탄생했고, 이제 커피는 세련된 서구 문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나마 하나의 위안은 아직도 전통과 역사를 이야기할 때 튀르키예 커피가 빠질 수 없는 아랍의 정서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쿠쉬나메》의 신라 부분은 2014년 1월 우리말로 출판되었고, 필사본 전체도 완역되어 2022년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인생은 유한하고, 하늘의 도는 바꿀 수 없다. 선을 행하고, 거짓과 절도, 기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라. 살인은 대역죄이다. 그러나 전쟁에 나가 적을 무찌르고 전사하는 자는 큰 보상을 받으리라."

탈라스 전투는 13세기 몽골 제국이 건설되어 동서 문화 교류가 속도를 더하기 전까지, 서아시아 이슬람 문화와 동아시아 유교, 불교문화의 상호 교류를 가져왔다. 이 전투는 아시아 대륙에서 발생한 가장 극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동아시아 문화와 아랍-이슬람 문화가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문화권이 적극적으로 교류한 결과 문화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셀주크의 승리가 주는 의미는 튀르크 민족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선 튀르크족의 역사가 아나톨리아에서 새롭게 시작되어 오늘날 튀르키예 공화국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비잔틴의 핵심 지역이 이슬람 문화권에 속하게 됨으로써 이슬람 세력의 약진과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비잔틴 제국이 완패하면서 아나톨리아 반도는 영원히 튀르키예의 차지가 되었다. 이 여세를 몰아 셀주크 튀르크는 예루살렘까지 진격해 유럽 기독교 세계의 공포를 더욱 커지게 했다. 이는 유럽 교황청에서 성지 탈환을 주장하며 십자군 전쟁을 독려하는 빌미가 되었다.

결국 국가의 안전과 미래는 누구도 대신 지켜 줄 수 없다는 역사의 처절한 교훈을 되새기게 된다.

영국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알려진 비밀협정1915년으로 전쟁 후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 국가의 독립을 보장해 주었다. 이에 따라 아랍 민족들은 얼마 전까지 지하드의 대상이던 영국을 위해 형제 나라인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종교적 신념마저 버리는 운명적 선택을 했지만, 영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으로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합의했고, 급기야 2,000년간 아랍인들이 살아온 땅을 유대인에게 넘겨 버렸다.

"미국은 아랍 석유의 판매를 대행함으로써 노골적으로 그 수익을 도둑질하고 있다. 지난 25년 동안 석유 1배럴이 팔릴 때마다 미국은 135달러를 챙겼다. 이렇게 해서 중동이 도둑맞은 금액은 하루에 40억 5,000만 달러로 추산된다. 이것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도둑질이다.

이런 대규모 사기에 대해 세계의 12억 무슬림은 1인당 3,000만 달러를 보상해 달라고 미국에 요구할 권리가 있다." 로레타 나폴레오니, 《모던 지하드》, 34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