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다카시는 보았다. 멀리 줄기차게 내리는 눈의 장막 너머로 바리케이드가 길을 막고 있는 모습을. 그 건너편에 늘어선 군인들의 검은 그림자를.

분명히 군인들이 있다. 언뜻 봐서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모두 바리케이드 건너편에 서서 이쪽을 향하고 있거나 그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몸을 감출까 생각했다. 겁을 먹은 정도가 아니다. 무릎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걸음을 옮기자 곧바로 발이 스르르 미끄러져 몸이 허우적거렸다.

―자네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돌아다니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사흘간.

히라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모 저택에 있을 때는 막연히 흘려듣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말을 뼛속 깊이 절감했다.

2·26사건으로 사망자가 나왔던가?

그러나 발은 움직이질 않는다. 식은땀이 마구 흐른다. 전쟁도 테러도 폭도도 모르는 우리 세대는 일단 진짜 ‘무력武力’과 부닥치면 바로 무릎을 꿇고 만다. 아무리 그게 눈의 장막 저편에서 유령처럼 소리 내지 않고 오가는 군인들의 어슴푸레한 그림자뿐이라고 해도.

"미, 미, 민간인입니다."
스스로도 한심할 정도로 상기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저, 저는 민간인입니다."

다카시 손에서 떨어진 초롱이 타 버린 잔해는 거의 다 눈에 쌓여 가려졌지만 흔적은 남아 있다. 마치 자신의 겁먹은 마음이 타 버린 것 같은, 그런 잔해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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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하고 어두침침하여 서 있는 것만으로도 병에 걸릴 것 같은 부엌. 일부러 고용인들에게 불쾌한 환경을 주기 위해 저택 안에서 가장 채광이 안 좋은 장소를 골라 만든 것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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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말대로 사실은 역사의 일부로서 역사를 구성하고 있네. 천재지변과 같은 자연현상을 제외하면 사실을 만드는 건 인간이니까 역사 속의 사실은 곧 인간이라는 말이 되지. 인간 역시 역사의 일부인 거야. 그렇기 때문에 대체가 가능해."

"우리 인간은 역사의 흐름에 있어 단지 부품이라는 거지. 대체 가능한 부품일 따름이야. 부품 각자의 삶과 죽음은 역사에 있어 관계가 없어. 개개의 부품이 어떻게 되든 역사에 의미가 없다고. 역사는 자신이 가고 싶어 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뿐이야."

"역사가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 영원한 수수께끼지. 그렇지만 난 이미 결론을 내렸어. 역사가 먼저야. 역사는 자기가 가려는 쪽을 지향해. 그것을 위해 필요한 인간을 등장시키고, 필요 없게 된 인간은 무대에서 내리지. 때문에 개개의 인간이나 사실을 대체하더라도 상관없는 거야. 역사는 스스로 보정하고 대역을 세우면서 사소한 움직임이나 수정 등을 모두 포용할 수 있거든. 그러면서 내내 흘러가는 거지."

과거에 일어난 어떤 참사를 막으면, 마치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반드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는 거야. 물론 장소도 다르고 연관되는 사람들도 달라. 그렇지만 사건의 성질은 똑같아. 일어날 사건 그 자체를 절대적으로 막는다는 건 불가능해.

"바보 같은 생각은 집어 치워요. 역사가 스스로 세상사를 결정한다니.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거예요."

발길을 돌릴 찰나였다. 별안간 다카시 머리 위로 가모 저택 안 어디선가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진 건.

‘쇼와 11년 2월 26일, 2·26사건 발발 당일, 가모 대장은 장문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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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시는 머리를 감싸 쥐고는 쿵쿵 때려 정신을 차리려 했다.
"이상한 행동을 하는군." 남자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프지 않나?"
"아프죠. 그러니까 하는 거예요. 멍해진 머리가 돌아가게."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안 나올 때 두드려 고치는 것처럼?"

그런데 이 방, 뭔가 이상하다……. 다시 한번 방 안을 꼼꼼히 둘러보다가 문득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런가, 텔레비전이 없다.

2·26사건이란 건 일본을 암흑시대로 몰아넣은 전환점이었으리라. 그 뒤는 죽음의 공포와 결핍과 굶주림 같은 불길한 것들만이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1994년이라는 풍족하고 안전한 시대를 살아가던 인간이, 아무리 시간 축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해도 그렇지, 어째서 이처럼 어두운 시대로 다시 오겠다고 마음먹었던 걸까. 궁금해서 관광이라도 하겠다는 거라면 이해가 되지만 남자는 아예 ‘히라타’라는 이름과 호적을 얻어 눌러 살 속셈이다.

거짓말이란 건 한 번 내뱉기 시작하면 술술 나오게 마련이다. 대신에 멈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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