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과 부정의 이중성
제주민의 동향을 가장 잘 알려주는 자료는 호적중초다. 호적중초는 조선시대 마을단위로 주민을 조사해서 기록한 장부. 제주의 신분 구성, 가족 구성, 인구 구성, 혼인 관계 등 다양한 제주생활사를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P374

궨당의 부정적 면도 있지만, 친족 관계를 재해석 해보면 제주 궨당의 진보적측면도 존재한다. 육지에는 가부장적 부계친에 입각한 성펜겠당만이 있을 뿐이다. 출가외인 풍토에서 웨펜궨당은 생각할 수도 없다. 처 중심의 처궨당, 딸 중심의 시궨당은 가부장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유교적 행위다. 웨펜궨당, 처궨당, 시궨당은 여성의 권한과 가족 내 권력이 강고함을 뜻한다. 가부장적 틀에 얽매여 부계친, 그것도 장자 중심의 서열화만을 강조하는 육지의 친인척 관계보다훨씬 진보적이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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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백성이 유리하여 육지 고을로 옮겨가 사는 관계로 세 고을의 군액 (庫爾이 감소되자, 비국이 도민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조선의 출륙금지령은 탐라가 축적시켜온 모든 해양력을 한 순간에 날려버렸으며 섬 백성을 옥죄었다. - P345

출륙금지는 억압을 낳고
옥죄면 반드시 튕겨 나가는 반동이 있는 법이다. 출륙금지령은 오히려 더 많은포작인을 육지로 내몰았다. 감옥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도는 무단 탈출이었다. - P346

게다가 ‘제주읍성 산지물을 사흘만 먹으면 모두 한 가지로 탐관이 된다‘는 속언이 있을 정도로 알려진 경래관의 토색질은 조선 팔도 어느 곳보다 극심했다. - P348

서울에서 떨어진 극변인데다가 출륙 금지된 감옥이니 토색질을 하자고 들면 않은뱅이 턱 차기로 쉬웠던 탓이다. 수령의 작폐를 직접 조정에 고변하려 해도 출륙을 금하니 어찌 해볼 도리가 있있다. 제주민에게 200년 세월은 단설과 억압의슬픈 역사였다. - P348

빛나는 단심이 잡초에 묻혔도다
몽골 복속 2년 뒤인 1275년, 원나라에서 도적질한 죄수 1백여 명을 탐라에 귀양보낸다. 몽골은 귀족일 경우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이는 그들의 습속에 따라 종신 유배지로 고려의 섬을 선호했다.  - P348

유배형에는 죄인을 고향에서 먼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천사(遷), 유배인의 정상을 참작하여 유배지 현관(官)에게 책임을 지우고 그 조치를 맡긴 부처(付處), 그리고 안치(安置)가 있다. 안치는 죄질이 가벼운 사람을 고향에 유배시키는본향안치, 중죄인을 섬에 격리시키는 절도안치, 가시울타리를 치고 죄인을 유폐시키는 연금조치인 위리안치가 있다. - P350

불우한 유배객은 죽어서도 유배당한다
대정향교에 가면 늘 푸른 소나무를 만난다. 대정으로 귀양 온 추사 김정희가 그유명한 세한도(歲寒圖)를  그릴 적의 모델이었다. 찬바람 이는 제주도 남동쪽 끝자락에 의지하여 의연하게 서 있는 이들 소나무가 추사의 손을 통해 제한도의 소나무로 옮겨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추사적거지가 대정향교와 지척이니 단산의 절경에서 귀양객의 의연한 외로움을 소나무에 실었음 직하다.
1960년대의 사진을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옛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알수 있다.
- P356

제주 유배 당시, 추사는 이미 모든 서체에 통달해 있었으나 대정의적거지에서 비로소 추사체의 완성을 보았다. 박규수는 추사체가 유배지에서 더욱 무르익은 것이라고 했다.
만년에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일이없었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되니 신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하며 조수가 밀려오는 듯했다.
- P359

자식조차 버린 유배객의 몰염치
조천포구에는 순조 20년(1820)에 지은 연북정이 한양쪽 바다를 바라본다.
왜 하필 ‘임금 그리워하는 정자일까. 임금을 의무적으로 그리워해야했던 봉건제의 징표이리라. 충군의 교의에 충실할 수 밖에 없던 시절이지만 유배객 처지에 진정 마음으로 그리워했을까. 임금을 향해 간절히 돌아갈 그 날, 나아가 해배 이후에 다른 벼슬자리, 아니면 일신의 보신책을 기대한 것이 아닐까.
- P362

자기 자식조차 버리고 떠나면서 천첩 취급했던 유배객의 몰염치를 어떤 미사여구로 가려줄 수 있으랴!
- P365

본토에서 굽어보는 내부 식민지
유배객만 귀양 온 것이 아니었다. 제주도 벼슬살이는 그 자체 또 다른 귀양살이에 간주되었다. 16세기 후반에 권응인이 찬한 송계만록(松)을 보면, 조사수가 제주목사로 나갔을 때 임억령이 지어 보낸 시에서 제주 벼슬길을 귀양살이로 표현하고 있다. 김익수는 친구 이증이 탐라 사절로 가는 길에 벼슬길의 위태함을 위로하면서 다부진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
관원으로 오는 것이 귀양과 무엇이 다르랴!
이번 이별이 가장 상심되네. - P365

뭍에서 벼슬하러 내려온 사람과 그 수족 같은 토속관원의 휘두름이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 무한 권력을 휘두른 벼슬아치나 천천의 도움을 받으며 잘 살다가내뺀 유배객이나 공통점이 하나 있으니, 본토에서 굽어보는 내부 식민지 ! - P366

삼춘의 섬
이당 저당 렌당이 최고  - P367

시골집의 모양과 규모가 매우 깊고 그윽한데 각 집채가 서로 연속되지 않았다.
- 김정, 제주풍로록 -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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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1. 뱀신의 생태성
뱀신앙은 두고두고 외래인의 독한 비판을 받는다. 이미 《탐라지》에서도 뱀신앙을 언급했다. ‘이 지방에는 뱀과 독사 · 지네가 많은데, 만약 회색 뱀을 보면 차귀신(遮歸神)이라 하여 죽이지 못하게 금한다‘고 했다. - P316

일반인에게 뱀신을 설명하면 대부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나는 이들뱀신앙이 농작물이 대단히 귀한 제주도에서 쥐 피해를 줄이기 위해 나온 뱀에대한 보호책을 신앙화시킨 결과라는 일각의 주장을 권하고 싶다. 인류학자 마빈해리스식의 문화유물론적 해석방식인 바, 뱀이 쉬를 천적으로 잡아먹는다는 사실을 주목한다면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 P316

변증2. 물색의 생태성
육지의 신령목과 마찬가지로 제주도에서도 신령이 깃든 나무는 금기의 대상이며, 숲은 성역이 되어 마을신이 된다. 마을나무에 손상을 입히면 벌을 받는다.
- P318

변증3. 신구간의 생태성
제주도에는 천년 전통의 입춘굿이 전해온다. 입춘굿은 ‘춘경(春辦)친다‘고도한다. 탐라시대부터 전해 온, 왕이 백성 앞에서 밭을 가는 친경(親耕)의 유습이다. - P321

변증4. 치병의례의 생태성
굿판은 병마와 기를 세운 싸움터이기도 하다. 큰굿을 하려면 마당에 큰 대부터 세우고 좌우에 작은 좌우돗기를 세우고 간단한 기메고사를 한 후에 악기를울린다. 신을 모으는 것은 기를 세우는 것이요, 기를 타고 신이 내려오기 때문에큰대는 하늘과 땅을 가장 가까이 잇는 신의 하강로다. - P323

굿판에서 망자의 넋을 부르는 영게울림이 시작되면 산 자와 죽은 자는 잠시나마 하나가 되어 교감한다. 4·3에 죽은 망자를 달래는 굿판에서는 고단한 역사가 재현되고, 산 자들은 굿을 통하여 혼미한 일상을 수습한다. 몸과 정신에 관한생태적 접근이 굿판에서 가능한 대목이 아닐까. - P325

1만 8천 신들의 고향
목장이 펼쳐진 척박한 땅. 밭농사 조차 쉽지 않은 섬에서 신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P325

제주도 어느 마을이고 존재하는 본향당(本鄕堂)은  그리스로 치자면 마을마다 신전이 하나씩 서 있는 식이다. - P326

송당본풀이의 금백주할망신화가 시작된 송당은 고대의 신시(神市), 한라산을 내려온 신들이 마을 당신으로  좌정하던 시기, 떠돌아 다니면 사동바치 (사냥꾼) 신들이 결혼을 하여 마을의 신으로 좌정한 곳, 신화의 메카, 당의 불휘공이라 일컸는 곳. - P327

신당의 패밀리가 있는 만큼 당신화도 각 패밀리의 계보가 있다. - P327

신들은 아름다운 곳에서 산다
신당은 최고의 성소에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모셔진다. 구좌읍 김녕리의 경우, 마을에는 본향당, 일당, 어드레당, 궤네깃당, 서문하르방당이 있다. 한 마을 안에 비교적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서 각각의 기능과 역할을 하는 당이분산되었다. 그중 하나인 서문하르방당(미륵당)을 찾아가보면 언제나 매혹 그자체다.
- P330

풍금과세익스피어만 배워야한다면
제주도는 기록문학이 빈약한 대신 상대적으로 구비문학이 풍부하다. 민요·설화무가는 가히 한국의 중심부라 할 만하다. 산업화 · 도시화 등으로 전통적 구전 전승력이 쇠퇴해가는 세계적 추세에 비추어볼 때, 제주의 구비신화는 어쩌면 세계적 수준을 자랑한다. 제주대의 신화학자 허남춘 교수는, ‘서사무가는 원래 신의내력을 풀어내는 이야기 위주의 노래로 신화의 근원이며, 신화는 서사문학의 원형‘ 이라고 명료하게 정리했다. - P333

요점1. 심방에 관하여제주굿을 이해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심방을 알아야 한다.
- P337

요점2. 굿에 관하여
제주 굿은 그 규모에 따라 큰굿 작은굿, 굿하는 범위에 따라 집안굿마을굿으로 나뉜다. 큰굿은 적어도 3~4일이 소요된다. - P338

이상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다면? 대체로 제주도에서도 대학원 과정에서전공자들이나 이해하는 수준일 것이다. 그러나 풍금소리와 세익스피어만 가르치는 정체성 사라진 교육을 생각하면서, 조금이라도 공들여 제주굿을 바라보길권하는 중이다. 제주사람들의 불휘공인 굿을 간과하고 무엇이 보이겠는가. - P341

신들의 고향수건과 갈옷과 태소땅
사람들은 제주도를 ‘신들의 고향‘이라고 말한다. 제주도는 1만 8천 신과 더불어살아가는 섬이었기 때문이다. 굿 연구가 문무병선생이 해석하는 제주굿에 관한의미로 정리하고자 한다. - P341

해금과 유배의 섬
바다에 뜬 감옥을 만들지니 - P343

가장 괴로운 것은 속반(栗飯)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사갈(場)이다. 가장 슬픈 것은파도소리다. 하물며 왕도의 소식, 고향의 소식에 이르러서는 이것을 몽혼(夢魂)에  나불어볼 수 밖에, 들을 길이 없다. 병이 들면 그저 손을 놓고 죽음을 기다릴 뿐으로 침과 약을 쓸 방법이 없다. 이야말로 통국(通國)의 죄지(地)다.  나라에서 죄인을 이 땅으로 내쫓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탐라는 통국의 죄지로서, 유찬(流道)은 나라의 중형이다 - 이건, 《제주풍토기》 - P343

잃어버린 항해술과 조선술
고대 및 중세의 제주는 대단한 해양력을 자랑했다. -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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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재현함으로써 우마번성을 기원한다. 한라산을 지켜주는 하로산또는 하늘과땅 사이의 기후와 바람을 관장하는 신이지만 수렵 목축의 신이기 때문이다. 하로산또는 사농바치(사냥꾼)를 상징한다. 사농바치라는 한라산신계 수렵목축신은 삼천병마 일만 초깃발‘을 날리며 달리는 장수신으로 표현된다. 궤네깃당 본풀이를 보자. - P249

소천국과 백주또가 결혼해 아이들을 낳은 후, 백주또는 사냥만으로는 살기힘드니 농사를 짓자고 소천국에게 제안한다. 소천국은 국과 밥을 아홉 동이씩가지고 밭에 나가 일하게 되는데 중이 와서 밥을 청하기에 권했더니 모두 먹어 버린다. 그래서 소천국은 밭을 가는 소를 잡아먹는데. 이 때문에 백주또는화가 나 부부가 헤어지게 된다. 그 후 소천국은 예전처럼 사냥해 노루 · 사슴돼지를 잡아먹고 살았다. - P249

소천국과 백주또의 갈등은 미식파와 육식파의 갈등이다. - P249

문화사적 발전과정을 볼 수 있다고 보았다. 미식파와 육식파의 갈등, 대단히 흥미로운 관점이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한때 육식파가 이기다가 다시금 미식파에게 열광하는 시대가 아닐까. - P250

제주에 남은 몽골의 흔적 - P250

원 탐라총관부는 사실상 목장 경영을 위한 식민부서였다. - P250

몽골제국의 세계경영 차원에서 본다면 탐라의 훌륭한 초지가 눈에 들어온 것은 당연지사다. 맹수 없는 초원인데다가 격리된 섬이라 가축이 도망치지 못하니 이만한 목장터가아시아에 또 있을까. - P250

초원 내부의 역사는 최상의 초지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던 여러 투르크 몽골 집단들의 역사이자 가축을 방목하기 위해 한 복지에서 다른 목지로끊임없이 옮겨 다닌 그들의 이동의 역사이기도 했다.
-르네 크루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 P250

최영 장군이 목호를 토벌할 때,
최후까지 저항한 목호가 3,000여 명에 이르렀음은 순수 몽골인뿐 아니라 몽골의 피를 받은 제주사람도 섞여 있었다는 결정적 증거다. 목호 토벌은 목축의 하이테크놀로지가 일시에 사라지는 결과를 빚었다. 제주 말이 왜소해지기 시작한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 P251

대몽골제국의 말은 제주도에만 남아 - P252

두 바퀴 마차에 210Kg의 짐을 싣고 4시간에 16km를 걸을 수 있는 괴력을 지녔다. 매일 32㎞씩 22일간연일 행군해도 견딜만큼 굽이 치밀하고 견고하다. 1901년 독일인 지그프리트 겐테(s. Genthe)는 제주마의 지구력을 높게 평가했다. - P254

열심히 키웠으면 내놓아라
원이 물러가자 마필은 고려에 귀속된다. - P255

되살려야할 검은쉐
제주 신화에서 검은 암쉐생산력과 주술력이 뛰어난 소로 간주된다 - P259

공동체성의 전범인 추렴과 몸국
제주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가축은 사실 도새기(돼지)다. - P264

환경 리사이클링의 전범인 돗통시
제주도 돼지문화의 으뜸은 역시 돗통시(똥돼지다. 통시(변소)에 보리짚을 깔고돼지가 똥을 누면 그 짚은 썩혀서 화산재 날리는 보리밭에 뿌렸다. 사람이 음식을 먹고, 그 음식으로 생성된 변을 돼지가 먹고, 거름으로 변한 보리짚은 보리밭에 뿌리고, 다시금 사람이 그 보리를 먹는 생태순환이 이루어졌다. - P269

미국 농림부 토양관리국장으로서 1909년 중국과 한국, 일본을 여행하면서 일찍이 유기농업을 주목했던 프랭클린 히람 킹(Franklin Hiram King)이 남긴말을 떠올려본다.
동아시아에서 땅은 먹을거리와 연료, 옷감을 생산하는 데 남김없이 쓰인다.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사람과 가축의 입으로 들어간다. 먹거나 입을 수 없는모든 것은 연료로 쓰인다. 사람의 몸과 연료, 옷감에서 나온 배설물과 쓰레기는 모두 땅으로 되돌아간다.
- 4천 년의 농부 - P274

구제역에서 인드라망을 생각하며 - P274

구제역 파동으로 수많은 소와 돼지를 산채로 구덩이에 쓸어 넣는다. 공장식축산이 불러온 문명사적 패배다. 불가의 연기론을 생각하고 인드라망(網)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덩이에 쓸어 넣는 만행에 나서는 중이다. 자연을벗삼아 뛰놀며 마소를 돌보던 옛 테우리를 생각하면서, 21세기형 테우리정신을정립해야할 순간이 아닐까. - P276

표류의 섬
조선시대에 베트남에 간 사연은 - P277

일기 청명하고 서풍이 솔솔 불어오면 순루로 돛을 달아 1일 내에도 가겠삽고, 중류에서 불..
행하여 초풍을 만나오면 안남 · 면턴 표박하여 구미에 가기도 쉽사오며, 만일 다시 불행하면 쪽박 없는 물도 먹고 고기 배에 이사도 하나다.
- 판소리 배비장전 - P277

표류기는 살아남은 자의 기록실뿐 - P278

험난하기만 한 제주도 물목
추자도와 제주도 사이에 배를 댈 만한 곳이 없었으므로 강풍이 불면 표류가 다반사였다. 세계 항해사 측면에서 볼 때 남해안은 좁은 물목에 불과했으나 조금한심한 항해술에 의지해야 했던 당대 사람들은 늘 두려움을 갖고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며 항해했다. - P281

당신이 새라면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을 거요
표류의 국제성은 서양인 선박의 출현으로 보다 세계화된다. 인조 5년(1627) 9월에 네덜란드 선원 벨테부레(Weltevree, J. J)가 제주에 상륙했다. - P300

1688년 7월에 네덜란드로 귀환함으로써 13년간의 억류생활을 끝낸다. 하멜이제주 해안에 당도하여 심문을 받았을 때, 본국으로 보내달라는 표류민의 탄원을듣고서 박연의 통역을 통해 우리의 고관이 들려준 말이 인상적이다.
당신이 새라면 그곳으로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을 거요. 그러나 우리는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지 않소. 그 대신 당신들을 보살펴 주고 식량과 의복도 지급해 줄 것이니, 이 나라에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살아야 할거요.
- P300

신들의 섬
에게해에는 올림포스
제주도에는 본향당 - P305

이제 들으니 후임자가 도임한 다음날 크게 굿을 했다. 또 무당들이 빨리 신당을 복구하도록 하고 의생을 파했다. 백성들이 낙담하여 등소장으로 정지할 것을 청했으나,
오히려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또 무녀안을 만들어 전과 같이 편모를 거두고, 무당들은 재력을 내어 이미 폐했던 신당을 세웠다고 한다. 가히 한심스럽다.
이형상, 《남환박물》

굿당이되 굿당이 아니고, 절이 있되 절 아니다 - P306

풍속은 음사를 숭상하여 산과 숲, 내와 못, 높은 언덕이나 낮은 언덕, 물가와평지,나무와 돌 따위를 모두 신으로 섬겨 제사를 베푼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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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톡, 파트너 - P490

2대 건문제(1398~1402)를 쿠데타를 통해서 전복하고 3대영락제(1402~1424)가 제위를 차지했다. 내정에서는 홍무제의 방침을 거의 대부분 계승하면서 황권을 강화하였다. 권력에대한 황제의 강한 의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건문제가영락제의 정변으로 축출됐을 때 건문제의 스승 방효유는 끝까지 항거하다가 능지처참당했고, 그의 가족, 친구, 제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847명이 몰살당했다.(브룩, 183~184) 영락제는 방효유의 친족, 외족, 처족을 비롯한 구족 그리고 여기에 더해 문인, 동지, 그의 서적을 탐독한 인사들을 모두 숙청하고, 집안 여성들은 노비나 첩, 기녀로 보냈다. ‘십족을 멸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 P503

나는 이곳 사람들보다 노래를 못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이들이 하는 노래는 목구멍에서 끄집어내는툴툴거리는 소음인데, 개 짖는 소리와 비슷하지만 개 소리보다도 더 짐승 같다.
(Graham-Campbell, 81~83) - P550

그러므로 바이킹이라는 말은 자기 민족의 정체성이 아니라 특유의 삶의 방식을가리키는 말이었다. 꼭 북유럽 출신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떠돌아다니며 약탈 공격을 하거나 혹은 다른 지배자의 용병 역할을 하는 등 삶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적 방식을 사용하는 인간들‘을 뜻한다. 따라서 북유럽 내에서도 일부 용맹한 모험가들만 바이킹일 뿐이다. 해외로 떠나지 않고 고향에 남은사람들은 농사와 목축에 전념했으며, 이들은 바이킹과는 거리가 멀었다. - P552

인류학자 시드니 민츠는 어릴 때 날이면 날마다 청어가 올라와 불평을 하자 그의 아버지가 "청어에 대해 함부로말하지 말아라. 청어가 없었다면 우리 유대인도 살아남지 못했어" 하고 말했던 사실을 소개한다.(민츠, 21~22) - P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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