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생존과 번식, 기생에 특화된 식물이지요. 더스트시대의 정신을 집약해놓은 것 같다고 할까요. 악착같이살아남고, 죽은 것들을 양분 삼아 자라나고, 한번 머물렀던 땅은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한자리에서 오래 사는것이 아니라 최대한 멀리 뻗어 나가는 것이 삶의 목적인……… 그 자체로 더스트를 닮은 식물이지요."
"아영 씨의 추측이 맞아요. 모스바나는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니었어요. 제대로 된 약조차 아니었고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약이라고 사람들이 믿게 만들어야 했어요. 당신이 추정한 것처럼 모스바나는 멸망의 시대와 긴밀한 관련이 있지요. 하지만 그건, 아영 씨가 예상한 방식대로는 아니랍니다." 나오미는 그렇게 말하고는 싱긋 웃었다.
무작정 여기 머물 수는 없다. 어떤 곳이든 열흘 이상 머무르지 않는 것이 믈라카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사람이지내다보면 반드시 그 티가 나고, 그러면 사냥꾼들의 표적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아마라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새벽마다 폐를 토해낼 것처럼 기침하는 아마라를볼 때마다 나는 랑카위의 연구원들에게 분노가 치밀었다.기회가 있을 때 제대로 되갚아주고 나왔어야 했는데.
"저 사람들, 믿지 마. 어떻게 돌변할지 몰라." 나는 아마라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았다. 우리가여태까지 당한 일들을 떠올렸다. 이유 없는 친절은 없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도 없다. 그러니 호의를 최대한이용하고, 그들이 무언가를 바라기 시작할 때 도망쳐야했다.
그 망할 실험을 당하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대신 다른것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더스트가 아닌, 그밖의 모든 것들이. 그래도 우리가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내성종이 아닌 사람들, 그러면서도어리고 약한 사람들은 더 많이 죽었다. 그 모든 것이, 나는 끔찍하게 싫었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모든 현실이.
아마라의 마음을 알 것 같으면서도 외면하고 싶었다. 아마라는 이제 그런 소문에 매달릴 만큼 내몰려 있었다. 소문 속 마을이 한때 정말로 존재했더라도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 돔 시티와 작은 마을들을 불문하고모든 공동체들이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안전한 곳, 희망이 있는 곳 따위는 없었다.
"우리는 프림 빌리지라고 부르지. 기대했던 것보다 조촐하지 않나. 그냥 작은 마을일 뿐이야."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왜 망해가는 세상에서 어른들은굳이 학교 같은 것을 만든걸까 생각해보았다.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대체로 하품을 하며 수업을 듣는 반면, 칠판앞에 선 어른들은 늘 의욕에 가득차 있었다. 나는 이것이어른들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워야 해서 학교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행위 자체가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아휴, 넌 역시 겁이 많구나? 나무 아래에서 입만 벌리고 열매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면 굶어 죽는 거라고. 나TETRIE무를 타고 올라가 열매를 쟁취하는 사람만이 이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얼마 전부터 정찰 드론들이 자꾸 숲 경계에서 외부인을 발견한다는 거 알아? 나도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한데, 어른들은 우리한테 자세한 건 말 안 해주잖아. 대니도 자꾸 얼버무리기만 하고. 혹시 높은 데 올라가면 뭐 다른 게 보일까 그런 생각도 했었지."
"눈에 보이는 건 떠돌이들이 이미 건져가고 폐품만 남은 곳을 목적지로 삼지. 프림 빌리지에 대해 누군가 눈치채면 곤란하니까. 그런 폐허를 걷다보면 아주 이상한 생각이 들어, 타인의 무덤을 파헤쳐서 이곳의 삶을 쌓아올리고 있다는 생각. 더스트 폴 이후로 세상은 예전보다도더 모순으로 가득해진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음과 삶이 한 장소에 공존하는 어떤 기묘함. 어쩌면 이곳 프림 빌리지도 그런 장소일 수 있었다. 더스트 폴 이전에 여기 살았던 이들의 흔적일지도모르는, 오래된 옷가지나 낡은 가재도구를 발견할 때면나는 그들이 어디로 갔을지, 지금 살아는 있을지 짐작해보곤 했다.
"하지만 난 무엇보다 네가 살아남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모든 건 결과를 두고 말하는 것이니 네가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고 해야겠지. 그렇지만 사실 잘 모르겠어. 미어캣의 칼날이 닳아 있어서 넌 죽지 않았던 거야. 날카로웠다면 죽었겠지. 폭탄 로봇일 수도 있었어. 나오미, 다음에는 도망쳐야 해. 알겠지? 분명 네가 마을을 구한 건 사실이지만··"
"하지만 공개적으로 알려줄 순 없지. 그랬다간 레이첼이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눈치를 챌 테니까. 연금술사들이 제자에게 비법을 조심스레 전하듯이 그렇게 알려줘야해. 지금여기가 바로 그 고대의 비법 전수실인 거지. 네가 첫 제자인 거고. 가능하다면 다음 제자들도 가르쳐야겠지만."
"제조에 필요한 재료와 무게, 과정을 정확히 기록하는것이 과학의 원칙이지. 하지만 이건 달라. 감추는 것이 널구할 테니까. 지금은 그런 시대야. 원칙이 네 약점이 되고, 편법이 네 무기가 되지. 이 비참한 시대가 끝날 때까지는 네 머릿속에 제조법이 완벽하게 들어가 있어야 해. 남이 볼 수 있는 기록은 절대 남기지 마. 아무리 신뢰할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숨기는 게 좋아."
"제 생각은 분명해요. 우린 프림 빌리지를 지켜야 해요. 이 마을 밖은 아주 끔찍해요. 전 돔 시티의 사람들이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 봤어요. 그들은 약한 사람들을위해 절대 자리를 내어주지 않아요. 인류를 구하겠다는생각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더스트에 버티는식물들을 가져가면, 그들은 횡재를 했거니 생각하며 뺏어가겠죠. 그러고는 우리를 죽일 거예요."
"돔 안의 사람들은 결코 인류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 타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던사람들만이 돔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인류에게는 불행하게도, 오직 그런 이들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았지. 우린정해진 멸종의 길을 걷고 있어. 설령 돔 안의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더라도, 그런 인류가 만들 세계라곤 보지 않아도 뻔하지. 오래가진 못할 거야."
"그래도 우린 식물들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야 해." "왜요?" 지수 씨가 짧은 침묵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돔을 없애는 거야. 그냥 모두가 밖에서 살아가게 하는거지. 불완전한 채로. 그럼 그게 진짜 대안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 똑같은 문제가 다시 생길 거야.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뭔가를 해야 해. 현상 유지란 없어. 예정된 종말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을 계속해서벌이는 것 자체가 우리를 그나마 나은 곳으로 이동시키는거야."
푸르게 빛나는 먼지들이 공기중에 천천히 흩날렸다. 나는 숲을 푸른빛으로 물들이는 그 식물들을 보며 고통은늘 아름다움과 같이 온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면 아름다움이 고통과 늘 함께 오는 것이거나. 이 마을에 삶과죽음을 동시에 가져다준 이 식물이 나에게 알려준 진실은그랬다. 어느 쪽이든, 나는 더이상 눈앞의 아름다운 풍경에 마냥 감탄할 수는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저에겐 여기 하나면 충분한데요. 또다른 프림빌리지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 지금 이곳, 여기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의미 없는걸요."
나는 온실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그 온실은 신전처럼보였다. 그러나 이제야 도달한 결론은, 신전을 지킬 사람들이 흩어지면 그 신전도 의미를 잃는다는 것이었다.
그곳의 모든 이야기들이 막을 내리던 날, 이별은 갑자기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프림 빌리지에 있는 내내 그 마지막날을 상상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영은 나오미의 증언에 기반해, 그 온실 공동체가 ‘프림(Forest Research Institute Malaysia, FRIM)‘이라는, 과거 쿠알라룸푸르 북서쪽의 국립공원 지역에 있었던 산림연구소 마을일 것이라고 추론했다.
‘당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겠습니다. 우리가 결국만나게 된 이유도요. 저는 운명을 믿지는 않지만, 같은 것을 쫓는 사람들이 하나의 길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고 믿거든요. 우리는 그 기이한 푸른빛에 이끌렸고, 또 같은 사람을 통해 연결되어 있네요. 그 사람의 생사를 알게 되면꼭 바로 알려주세요.‘
어떤 학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바탕으로 결론을 내린다. 혹은 관측으로부터 데이터를 축적하고, 정확한 분석을 거쳐 귀납적으로 하나의 이론을이끌어낸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과학이 수행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어떤 기묘하고 아름다운 현상을 발견하고, 그현상의 근거를 끈질기게 쫓아가보는 것 역시 하나의 유효한 과학적 방법론일지 모른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대부분은 실패하겠지만, 그래도 일단 가보지 않으면발견하지 못할 놀라운 진실을 그 길에서 찾게 될지도 모른다고, 아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식물들은 아주 잘 짜인 기계같단다. 나도 예전에는 그걸 몰랐지. 나에게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걸 알려준 녀석이 있었거든.‘
더스트에 취약한 사람들은 진작 다 죽었으니 살아남은사람들은 약하게라도 내성이 있었고, 그러니 몇 년은 살아남을 법도 했는데, 그런 공동체는 대부분 반년을 채 가지 못했다. 대개는 내분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일이었다.
지수가 정말로 레이첼에게 멸망에 대한 책임을 기대한것은 아니었다. 그가 솔라리타 연구소 소속이었다고 해도, 이 사태가 연구원 한 명의 의지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솔라리타의 대책 없는 연구를 부추긴건 기후 위기를 간단한 솔루션 하나로 해결해보려는 데에얄팍한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 전부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인류를 구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 건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돔 시티 안팎을 돌아다니며 지수가 도달한 결론은, 인간은 유지되어야 할 가치 있는 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동물을 과대평가하고 식물을 과소평가합니다. 동물들의 개별성에 비해 식물들의 집단적 고유성을 폄하합니다.식물들의 삶에 가득한 경쟁과 분투를 보지 않습니다.문질러 지운 듯 흐릿한 식물 풍경을 바라볼 뿐입니다.
우리는 피라미드형 생물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식물과 미생물, 곤충들은 피라미드를 떠받치는 바닥일 뿐이고, 비인간 동물들이 그 위에 있고, 인간은 피라미드의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반대로 알고 있는셈이지요.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식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식물들은 동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종의번영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언제나 지구라는생태에 잠시 초대된 손님에 불과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해 지는 저녁, 하나둘불을 밝히는 노란 창문과 우산처럼 드리운 식물들. 허공을 채우는 푸른빛의 먼지. 지구의끝도 우주의 끝도 아닌, 단지 어느 숲속의 유리 온실. 그리고 그곳에서 밤이 깊도록 유리벽 사이를 오갔을 어떤온기어린 이야기들을.
원예학을 전공한 아빠가 나에게 해준 대답은 "식물은 뭐든 될 수 있다"라는 거였다. 지구 곳곳에실존하는 기이한 식물들에 대한, 끝없이 이어지던 이야기는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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