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수 없다면, 김초엽 첫 장편소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마침내 재건하는 사람들의 마음."
낡은 차가 덜컹거리며 오르막 흙길 앞에 멈춰 섰다. 끊겨 있는나무 계단, 낡은 이정표와 부서진 난간들. 한때 국립공원이었던이곳은 이제 인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흩어진 자갈과 바위만 가득했다. 길 양옆의 고무나무들은 줄기 표면이 까맣게 변했고 발톱에 긁힌 듯한 겉면에 말라붙은 수액만 섬뜩한 흰색이었다. 아래로 축 늘어진 야자 잎들은 어두운 잿빛으로 죽어 있었다. "돌핀을 가지고 있었으면 저 안쪽까지는 올라갈 텐데."
"흙이 말라 있어. 비가 오랫동안 안 왔나봐." 수년간 더스트가 증식하며 기후도 엉망이 되었다. 바람도, 구름도 예측 불가능했다. 몇 달 사이 더스트 농도가 짙어지면서 말레이반도 남부에 가뭄이 이어졌다. 바싹 마른 흙으로 보아 원래열대우림이었던 이 숲도 지금은 건조해진 것 같았다.
더스트가 휩쓸고 간 숲은 죽음 같은 적막으로 덮여 있었다. 야생동물은 물론이고, 바닥을 기어다니는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수북히 쌓인 낙엽 더미에 발이 푹푹 빠져 들었다. 땅 위로드러난 거대한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나오미는 아래만 보고 걸었다. 한 시간쯤 걸었는데도 숲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빼곡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점점어두워졌다.
"조심 좀 해. 내성이 널 모든 더러운 것들로부터 지켜주진 않아." 나오미는 어깨를 으쓱하고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러고는 다시한 걸음 물러나 사체와바닥을 살폈다. 기묘한 점이 한 가지 더눈에 띄었다. 오랑우탄의 넓적다리 일부분이 손바닥만한 잎을가진 덩굴식물로 뒤덮여 있었는데, 마치 오랑우탄이 죽은 이후에 자라난 것 같았다. 나오미가 중얼거렸다.
"난 이제 돌아갈 수 없어. 너도 알고 있잖아. 그렇지? 숲 밖으로 나가도 안개는 언제든 찾아올거야. 평생 도망치며 살 수는없어. 나오미 너는 그럴 수 있지만, 난 그럴 수 없어. 내가 마지막으로 진실을 확인하게 해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맛있거나 예쁘거나, 하다못해 약으로 쓸 수 있는 식물 외에는 더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같았다.
"그럴 땐 역시 ‘생물다양성‘이지. 생물다양성이 우릴 구원할거야. 더스트 종식 이후 가장 먼저 재건된 지역도 생물다양성이잘 보존된 지역이었다, 뭐 이런 얘기라도 써놔야지. 더스트 폴이또 터질 수도 있다고 겁도 좀 주고."
강원도 해월, 폐허에서 유해 잡초 이상 증식······ 인근 마을 민원 쇄도해
산림청과 회의한다는 일이 저건가? 아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긴 더스트생태연구센터이고, 잡초를 다루는 곳은 아닌데. 더스트 시대나 재건 직후에 번성했던 잡초라면 모를까. 그래도 윤재와 박 팀장 정도면 식물 관련 문제에서 여러 해결책을 알 테니조언을 구하러 온 것일 수도 있었다.
2129-03-02, 해월 폐기 구역 B02 인근, 산림청. Hedera trifidus VOCs, 토양, 잎·줄기추출액 성분 분석 부탁드려요. "혹시 제 자리에 있는 이거, 윤재언니 샘플이에요?" "그거 아영 씨한테 좀 부탁할게요. 미안, 다들 바빠가지고."
괴담이라는 것들은 대개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한 현상을 공포와 미스터리로 얼버무리는 이야기다. 딱히 창의적인 발상의 씨앗이 되지도 않는다. 읽고 나면 어딘가 으스스하고 찝찝한 기분이 드는데, 그 중독적인 상태가 또다른 괴담들을 읽도록 이끌 뿐이다. 아영은 여기서 온갖 이상한더스트 크리처들에 대한 제보를 많이 읽었지만, 실제로 학계에서 그런 존재를 확인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확인해서 나쁠건없지.‘
[악마의 식물이 내 정원에 자라고 있는데, 이거 혹시 멸망의 징조 아니야?]
알려진 영어 명칭은 모스바나, 송악속의 상록성 덩굴식물로 흔히 키우는 관상용 담쟁이의 근연종이다. 더스트 이전 식물들에대한 자료가 많이 사라진 탓에, 기원이 어디인지는 정보가 없었다. 다른 식물들에 피해를 입힐 정도로 강한 침투성 식물이고, 땅에서도 넓게 퍼져 잘 자라지만 주로 벽이나 나무를 타고 오른다. 독성이 있어 피부염이나 알레르기를 유발하고, 식물의 거의모든 부위가 사람에게 위험하며 특히 잎과 열매는 더 강한 독성을 가진다. "생각보다는 평범한데?"
모스바나는 재건 직후에는 지구상의 전 대륙에 퍼져 있을 정도로 엄청난 확장성을 자랑했지만, 생태계 다양성이 회복되면서 다른 식물들과의 경쟁에서 급격히 밀려났고,현재는 일부 지역에 정착한 사례 외에는 흔히 발견되지 않았다.그만큼 한번 보이면 ‘왜 이게 갑자기 나타났지?‘ 하는 의문을 생기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렇지만 그 생존력이 어마어마한 만큼, 일단 한번 모스바나가 자랐던 장소라면 오랫동안 땅속에서동면 상태로 있던 씨앗들이 싹을 틔우거나 하는 일은 얼마든지가능했다.
"만약 누가 마음먹고 벌이는 일이면, 범인을 특정하는 데에저희가 도움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이런저런 정황을 파악할수는 있겠지만 저희가 수사기관은 아니니까요. 생태학적인 추적도 장기간 지켜봐야 의미가 있는 거고요. 어쨌든 인위적인 사건인지, 자연적인 상황에 의해 일어난 일인지 같이 조사해볼 테니자료를 공유해주세요. 방제 대책도 좀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는지 내부 의견을 구해볼게요."
"더스트 시대에는 이타적인 사람들일수록 살아남기 어려웠어.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니까, 우리 부모나 조부모세대 중 선량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찾기 힘들겠지. 다들 조금씩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딛고 살아남았어. 그런데 그중에서도나서서 남들을 짓밟았던 이들이 공헌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고,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아영이 네가 아직이해하기는 어렵지?"
결국은 더스트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는 원죄가 있는 것인가 하는, 심오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재밌지. 정적이면서 아주 역동적이야. 나는 이 정원에 손을 안 대는데도, 자신들만의 균형을 절묘하게 이루고 있지. 참 흥미로운 존재들이야."
"할머니는 타운의 어른들이 위선자라고 말했지만, 어른들만그런 건 아니에요. 아이들도 다 조금씩 비겁하거든요. 여기 아이들은 제가 내년이면 여길 떠난다는 걸 알아서 저를 더 쉽게 괴롭혀요. 도와주는 애들도 없고요. 정작 그러면서 타운 어른들에 대한 비난은 잘 거들죠. 그래서 전 사람은 누구나, 모두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했어요. 자기위치에 따라 좋은 사람인 척할 뿐이라고요."
"나도 어느 순간 깨달았지. 싫은 놈들이 망해버려야지, 세계가 다 망할 필요는 없다고. 그때부터 나는 오래 살아서, 절대 망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단다. 그 대신 싫은 놈들이 망하는 꼴을 꼭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살 수 없었지. 도저히 살 수 없었는데, 그런데………… 돔 밖에도사람은 있었어. 사람이 아닌 것들도 있었고, 어떻게든 악착같이살아가는 존재들이 있었단다."
"식물들은 아주 잘 짜인 기계 같단다. 나도 예전에는 그걸 몰랐지. 나에게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걸 알려준 녀석이 있었거든."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미생물이나, 땅을 헤집고 다니는 벌레들, 바다와 호수의 조류,축축한 곳마다 균사를 뻗치는 균류. 아영은 그렇게 느리고 꾸물거리는 것들이 멀리 퍼져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천천히 잠식하지만 강력한 것들,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정원을다 뒤덮어버리는 식물처럼. 그런 생물들에는 무시무시한 힘과놀라운 생명력이, 기묘한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영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아디스아바바는 더스트 시대가 끝난 이후 가장 먼저 재건된E도시였다. 동시에 멸망이전의 자연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었고,더스트생태학에 대한 연구도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다. 재건 육십 주년 기념 생태학 국제 심포지엄이 이곳에서 열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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