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스카 라이초(平塚雷鳥 1886~1971) 여성 해방운동가이자 『청탑』의 창간인. ‘청탑青鞜’은 19세기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는 신여성을 지칭하던 ‘블루스타킹’을 한자어로 바꾼 단어다.

오스기 사카에(大杉栄 1885~1923), 아라하타 간손(荒畑寒村 1887~1981)은 정치가이자 저널리스트로 일본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에 큰 궤적을 남겼다.

「옥중의 여자가 남자에게」라는 단편소설로 일본 사회에 낙태 논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편집 여담

마키노 신이치牧野信一
마키노 신이치는 1919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시사일보사에 입사해 잡지 『소년』과 『소녀』 편집자로 일하며 ‘마키노 시치로’라는 필명으로 『소녀』에 소녀소설을 썼다. 동시에 동급생 열세 명과 함께 동인지 『13인』을 창간했다. 이듬해 8월 「볼록거울」로 이름을 알리는 한편 『소녀』의 투고자였던 스즈키 세쓰와 교제를 시작했다. 「공원에 가는 길」, 「비탈길 고독 탐미」를 잇따라 발표하며 신진 작가로 인정받자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인 오다와라로 내려가 결혼, 전업 작가가 됐다.
「편집 여담」은 『소년』, 『소녀』에 실린 편집 후기에서 발췌한 글이다.

히나마쓰리
일본에서 3월 3일에 여자아이의 행복을 기원하는 축제로 전날부터 붉은 제단 위에 히나 인형과 복숭아꽃을 장식하고 쑥떡, 백주, 소라, 조개 같은 음식을 올린다.

펜을 쥐고

다네다 산토카種田山頭火
다네다 산토카는 서른한 살이던 1913년 3월 하이쿠 잡지 『층운』에 처음으로 하이쿠를 투고하는 한편 와카 동인으로 활약했다. 당시 『층운』은 가인 오기와라 세이센스이가 만들던 잡지로 보다 자유로운 하이쿠와 와카를 지향했다. 계절어나 음수율 같은 정형성을 따르는 정통 하이쿠를 짓던 그에게 오기와라 세이센스이의 ‘자유율 하이쿠’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후 자신의 운율을 중시하며 하이쿠와 와카를 읊기 시작했고 1916년 3월 『층운』의 첫머리를 장식하며 자유율 가인의 대명사가 됐다. 「펜을 쥐고」는 1913년 4월 와카 회람잡지 『사십 여인의 사랑』에 실린 글이다.

소식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1886년 이와테현 출생. 1902년 중학교를 중퇴한 뒤 도쿄로 올라와 일본 시가문학에 혁신을 불러온 잡지 『명성』에 투고하는 한편 동인 ‘신시사’에 참여했다. 1905년 열아홉 살에 첫 시집 『동경』으로 문단에 데뷔했지만, 생계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1908년 『명성』이 폐간되자 이듬해 기타하라 하쿠슈, 히라이데 슈 등과 함께 낭만주의 문예지 『묘성』을 창간했다. 1910년 정형성이 아닌 자율을 중시하며 솔직한 감성을 읊은 가집 『한 줌의 모래』를 펴내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지금도 일본 국어 교과서에 실릴 정도. 1912년 4월 13일 스물여섯 살에 폐결핵으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 죽음을 앞둔 심정을 소박한 언어로 노래한 가집 『슬픈 완구』가 출간됐다.
「소식」은 1909년 2월 잡지 『묘성』에 실린 편집 후기다.

편집자 시절

우메자키 하루오梅崎春生
우메자키 하루오는 1946년 9월 자신이 편집을 담당한 『순진』 창간호에 「사쿠라섬」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업 작가로 활동했다. 『군상』과 첫 인연을 맺은 작품은 미완의 연작 「해시계」로 격월로 네 번에 걸쳐 연재되다가 중지됐다. 이후 단편 「어떤 청춘」, 「S의 배경」, 「모델」을 발표하는 한편 1955년 미군 비행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스나가와 주민의 이야기를 다룬 르포르타주 「스나가와」를 써서 화제를 모았다.
「편집자 시절」은 1961년 10월 잡지 『군상』에 실린 글이다.

나는 그해 12월에 아카사카서점을 그만두었다. 이제 글로 먹고살 수 있을 테니 자른다고 에구치 편집장이 말했으니 ‘잘렸다’고 봐야 하나. 글로 먹고사는 일은 굉장히 힘들었다. 이듬해 1년은 가난의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져 있었다. 주문이 없진 않았건만 일찍 슬럼프에 빠져서 이후 15년간 쭉 슬럼프에 시달리고 있다.

편집 당번

기시다 구니오岸田國士
1890년 도쿄도 출생. 1917년 도쿄대 불문과에 입학해 프랑스문학과 러시아문학에 심취했다. 1919년 파리로 유학 가서 연극을 공부한 뒤 1923년 귀국, 이듬해에 희곡 「낡은 완구」를 발표하며 극작가로서 인정받았다. 1930년 『유리 하타에』를 펴내며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1936년 기쿠치 간,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과 함께 『문예간담회』를 창간했다. 1937년 작가 구보타 만타로, 시시 분로쿠와 함께 극단 ‘문학좌’를 세우고 새로운 연극 운동을 벌이며 연출가로서 수많은 신인을 길러냈다. 1950년 미시마 유키오 등과 ‘구름회’을 만들어 소설가의 희곡 집필을 권유했다. 1954년 3월 4일 연극 연습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 이튿날 예순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편집 당번」은 1936년 2월 잡지 『문예간담회』에 실린 글이다.

새하얀 지면

『반장난面白半分』
작가이자 편집자 사토 요시나오가 ‘재밌어서 견딜 수 없는 잡지’를 만들자며 소설가 요시유키 쥰노스케 등의 도움을 받아 창간한 월간지. 1972년 1월호(창간호) 96쪽, 150엔으로 3만 부 발행했으며 편집장은 반년마다 이노우에 히사시, 엔도 슈사쿠 등 당대 인기 작가들이 돌아가며 맡았다. 1972년 7월호에 나가이 가후가 썼다고 알려진 에로소설 「작은 방의 맹장지 속」(1907)을 원문 그대로 실어 외설문서 판매죄로 당시 편집장 노사카 아키유키, 발행인 사토 요시나오가 기소되었다. 소설가 마루야 사이이치가 특별 변호인으로, 유명 작가들이 증인으로 나서면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일본 사회에 ‘성적 표현의 자유’라는 화두를 던진 이 사건은 결국 1980년 11월 28일 유죄로 최종 판결이 났고, 이 소식을 알린 12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됐다.
「새하얀 지면」은 1977년 9월 『반장난』에 실린 내용이다.

하나모게라어는 외국어처럼 들리지만 실제 아무 뜻도 없는 가짜 외국어를 가리킨다. 개그맨이자 에세이 작가로 활약한 다모리(タモリ 1945~ )가 처음 방송에서 말한 이후 하나의 개그 코드로 자리잡았다.

작가 명단에서 빼버릴 테야

호리 다쓰오堀辰雄
호리 다쓰오는 고등학교 시절 훗날 러시아문학 번역가로 명성을 떨치는 진자이 기요시를 만났다. 진자이 기요시는 어릴 적부터 수학을 좋아해 수학자를 꿈꾸던 호리 다쓰오를 문학의 길로 이끌었고, 두 사람은 평생 벗으로 지내며 여러 동인지를 함께 만들었다. 그중 『문학』은 요코미쓰 리이치를 중심으로 호리 다쓰오, 진자이 기요시, 가와바타 야스나리, 요시무라 데쓰타로 등 일곱 명의 작가가 뜻을 모아 1929년 창간했으며 1930년 3월 제6호로 종간됐다.
「작가 명단에서 빼버릴 테야」는 1929년 『문학』 편집을 담당하며 진자이 기요시에게 보낸 편지다.

출간 연기에 대해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
『문장독본』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문장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알려주는 일종의 작법책으로 1934년 11월에 출간됐다. 내용은 크게 문장이란 무엇인가, 문장 단련법, 문장의 요소로 나뉜다. 발간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수만 부가 팔려나갔고, 이후 1950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신문장독본』을, 1959년 미시마 유키오가 『문장독본』을 출간하는 등 일본 출판 시장에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출간 연기에 대해」는 1934년 10월 잡지 『중앙공론』에 실린 글이다.

아무도 안 봐, 아무도.그러니 신경 쓸 것 없잖아

『작가의 마감』은 발문도 해설도 필요 없는 책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줄지어 나와서 이런 심약한 말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고를 쓰려고 마음먹은 날이 되자 오랫동안 잊고 있던 위경련이 일었다."(사카구치 안고) "쓸 수 없는 날에는 아무리 해도 글이 써지지 않는다. 나는 집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화장실 안이다. 아니, 볼일도 없는데 여긴 뭐 하러 들어왔지."(요코미쓰 리이치) "14일에 원고를 마감하란 분부가 있었습니다만, 14일까지는 어렵겠습니다. 17일이 일요일이니 17일 또는 18일로 합시다."(나쓰메 소세키) "열흘이나 전부터 무엇을 쓰면 좋을지 생각했다. 왜 거절하지 않았을까."(다자이 오사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불치병을 선고받은 환자가 거친다는 다섯 단계를 정식화한 바 있는데, 혹시 마감을 뭉갠 작가들이 그와 똑같은 과정을 밟고 있지 않을까? ①부정: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번 임무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아니야. ②분노: 왜 이 청탁을 수락한 거야, 바보같이! ③타협: 그래도 먹고 살려면 해야 하는 일이야. 약속을 어길 수는 없어. ④우울: 대체 나는 왜 이런 일을 매번 해야 하는 걸까?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아. ⑤수용: 이게 내 팔자니 할 수 없지.

글이란 내 마음대로 써서, 내 마음대로 발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터넷이 이 두 가지 자유를 마련해주었다지만, 글을 써서 고료를 받아야 하는 직업 작가들 거의 모두는 이 두 가지 자유에 괘의치 않는다. 아니, 괘의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실은 저 두 가지 자유를 뿌리쳐야만 한다.

직업 작가가 자기 마음대로 글을 쓰고 자기 마음대로 제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지경이면 오히려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퇴출을 맞이한 상황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직장인들은 출근과 업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소원이지만, 그 두 가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을 보통 ‘실업자’라고 한다. 바로 그런 때문에 직업 작가들은 자유가 아닌 주문 제작과 원고 마감이라는 이중 구속에 목숨(생계)을 걸게 된 것이다.

당나라 시인 이백과 두보에게 나쓰메 소세키와 다자이 오사무가 겪었던 것과 똑같은 마감 스트레스가 있었을 법하지 않다. 주문 제작과 원고 마감은 모두 출판 산업과 돈을 내고 글을 읽는 독자가 생기고부터 생겨난 절차다.

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받고 잊어버리지 못한,
변소 휴지의 효용성에서 우연히 벗어난 원고 청탁서
나는 이걸 받을 때마다 말문이 막힌다.

잡지 편집자들에게 원컨대

내게 보내는 청탁서엔 이렇게 써주오
모월 모일까지
당신을 죽여달라거나
날더러 죽으라고!
그리고 덧붙여 주서하시오
마감일을 지켜달라고!

누굴 죽일 만한
열정과 고뇌가 없는 곳엔
희망도 없는 것인가?

장정일

마감: 1. 하던 일을 마물러서 끝냄. 또는 그런 때.
        2. 정해진 기한의 끝.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와 있는 ‘마감’의 뜻이다. 일본어로는 ‘しめきり(시메키리)’, 영어로는 ‘deadline(데드라인)’.

다자이 오사무는 "어떻게든 꾸밈없이 쓸 수 있는 경지까지 가고 싶다. 단 하나의 즐거움이다"라고 말했는데, 글을 팔아 먹고사는 장사꾼인 나는 어떻게든 『작가의 마감』이 2쇄, 3쇄, 4쇄를 찍어 지금 남몰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작가 시리즈’를 엮고 번역하는 것이 지금 단 하나의 즐거움이다.

안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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