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맞으며 한해의 소망을 표현하기때문에 춘축문春祝文 이라고 부르기도한다. 이같은 글귀들을 대문이며 집안의 기둥과 문에 여기저기 붙인다. - P11

입춘春立春올해의소망을 대문에 붙이다
연일 영하로 뚝 떨어지는 날씨에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었다. 밝은 햇살이 비치는 한낮에도 수은주는 좀처럼 올라가지 않는다. 점심을 먹고 산책을 나선다. 두툼한 겨울외투에 몸이 둔하다. 비둔한 몸놀림으로 천천히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뜻밖에 바람끝이 그다지 매서운 느낌은 들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지난 겨울추위 속에서도 꿋꿋이 제자리를 지켜준 나무들이 반갑다. - P13

해마다 겨울이 깊어질 때면 매화가 보고 싶어진다. 어떤 이는 매화에서 선비의 지조를 읽기도 하고, 어떤 이는 매화를 아내 삼아한적한 호숫가에 은거하여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매화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뭐라 단언할 수 없는 마음속에서도 매화는 내 겨울의 연인이었다. - P13

퇴계는 임종할 때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고 한다. 그이의 인품과 덕은 고사하고 매화에 정성을 쏟은 것도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이제 뒤 집에 매화가 피었는가 수소문하는 도리 외에는 내가 할 일이 없을 듯하다. 매화 향기를 따라 술 한병 들고 가서 매화 구경을 하는 것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호사가 아닐까 싶다. - P14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짙어진다. 올해는 입춘이 섣달에 들었다. 좀 이른 감이 든다. 아직 설날도 되지 않았는데, 입춘을 맞은목련은 봉오리를 곧추세운다. - P15

춘첩자에 담은 소망들 
막다른 골목에 이어진 대문 위로 춘첩자春帖(입춘방立春膀이라고도 한다)가 선명하다. 
이따금 스치는 바람에 먼지가 날린다. 금세붙여놓기라도 한 듯, 춘첩자의 먹빛에 윤기가 흐른다. 그리 잘 쓴글자는 아니지만, 그것도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고 달랑  넉 자만을 써놓은 것이지만, 볼수록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푸근하게 느껴진다. - P15

새봄을 맞으며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행운을 맞으려는 소망을담아 사람들은 춘첩자의 글귀를 지어 붙인다. 많이 알려진 춘첩자는 立春大吉 建陽多慶‘,‘國泰民安  家給人足‘,‘雨順風調 時和年豊‘과 같은 글귀다. 
‘입춘을 맞으니 크게 길하고, 봄이되니 경사가 많아라‘,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하며, 집과 사람은 넉넉하기도 해라‘, ‘비와 바람 순조로우니, 시절은 조화롭고 올해도 풍년든다‘는 내용이니, 붙이는 사람의 마음을 짐작할 만하다. 봄을 맞으며 한해의 소망을 표현하기 때문에 ‘춘축문春祝文‘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같은 글귀들을 대문이며 집안의 기둥과 문에 여기저기 붙인다. - P16

봉각 동쪽으로 어여쁜 해 막 오르자
향로 연기 아른아른 맑은 하늘에 흩어진다.
봄바람은 정말 임금님 뜻과 같아
곤궁한 마을 가난한 집에도 고루 불어주리.

麗日初升鳳閣東 爐煙細細散晴空
春風政似君王意 應遍窮村白屋中
임제, <입춘첩자 대전立春帖子大殿>, 
《백호집白湖集》권3  - P17

궁궐 대전에 붙이기 위한 춘첩 한시 작품이다. 봉각은 원래고려시대 문하門下省을 일컫는 말로, 여기서는 모든 관아의 사무를 총괄하는 곳을 말한다. 대궐 건물 위로 해가 비치고 향로에서는연기가 아련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한편으로는 나른한 느낌으로,
또 한편으로는 우아한 필치로 궁궐의 정경을 화려하면서도 부드럽고 섬세한 감각으로 표현했다. 어여쁜 일출을 맞아 한없이 기분 좋을 때 부는 봄바람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가. 세상 어디든 봄바람이 닿지 않는 곳이 없듯이, 임금의 은택역시 아무리 궁벽지고 가난한 삶에도 온화하게 미친다는 것이다.
지체의 차이에 상관없이, 빈부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봄바람은 공평하게 불어준다. 그렇게 우리는 봄을 맞는다. 그 봄처럼, 임금의은혜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를 감싸면서 우리의 삶을 생육해준다는 내용이다. - P18

흔히 사용되던 춘첩 대련으로 위에서 소개한 것 외에도 ‘壽山福海처럼 장수하시고바다처럼 복을 받으시라)‘  라든지가지 재앙은 물러가고 백 가지 온갖 복은 오라)‘ 같은 글귀도 많이 쓰였다.
草綠 南極壽星明과 같은 구절도 있다. ‘훤초萱草‘는  원추리를 말하는데 주로 집안의 내당화단에 많이 심었다. 집이 보통 남향이라고할 때 내당은 가장 깊은 후원에 속하므로 북쪽에 건물이 위치한다. - P18

그래서 ‘부당‘이다. 그곳은 나이 드신 여성들이 주로 거처했기때문에, 북당의 훤초는 나이 드신 어머니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또한 남극성은 보통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이라서 수성으로부른다. 그러니 ‘북당에 원추리 푸르고, 남극의 수성이 밝아라‘ 라는 말에는 부모님의 건강과 장수를 비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 P19

이처럼 대궐이나 관청에서는 임금의 장수를 빌고 임금의 은혜가백성들에게 골고루 퍼져나가기를 기원했고, 일반 여염집에서는 부모님의 장수와 집안의 평안함을 비는 것이 보통이었다. - P19

재앙도 병도 없이 영화로움만 가득
하늘이 내리신 임금 은혜, 집안에 모였다.
게다가 느긋하고 한가롭게 늘그막 즐기니
분에 넘치는 이 내 생애, 더 바랄 게 없어라.

無災無病飽榮華 天賜君恩萃—家
兼得優閑娛晚境 更無餘望侈生涯

김안국金安國,  <임오년 입춘에 아이들이 문에 붙일 입춘 구절을 요청하길래 써서 주었다 壬午立春 兒輩請門帖句 書與>, 
《모재선생집慕齋先生集》권3  - P19

사물 때깔은 생생한 뜻 알아
조화로운 봄 기운은 지극히 어진 마음 펼친다.
새롭게 삼라만상 열치고
남은 은택 흘러서 사람들에게 미치기를.

物色知生意 陽和布室仁
惟新開萬化 餘澤及流人
김구金絿 <문에 붙일 입춘 글귀를 쓰다題立春帖戶>, 
<자암김선생문집自菴金先生文集》권11 - P20

사실 입춘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한겨울인 것만은 부인할 수없다. 
입춘立春의 ‘‘은 ‘곧, 즉시‘ 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서다‘ 는 뜻과는 달리 쓰인 말이다. 그러니 ‘입춘‘은 곧 봄이된다는 의미니, 봄의 문턱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시점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아무리 봄을 뜻하는 ‘을 썼다지만 겨울은 겨울이다. - P21

우를 종종 본다. 어른들이 이따금씩 하시는말씀 중에 ‘글씨 잘 쓰면 고생한다‘는 게 있다. 아마도 글씨를 잘 쓰면 고급 관리가 되기보다는 실무를 담당하면서 고생만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고 추측해보기도 한다. - P21

그렇지만 다른 쪽에서는 ‘신언서판身言書判‘ 이라고 해서, 글씨를 잘 쓰는 능력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 중의 하나로 꼽히던 적도 있었다. - P22

우리 속담에 ‘가게 기둥에 입춘‘ 이라는 것이 있다. 춘첩자를 써붙인다고 하니 가게 기둥과 같이 초라한 곳에도 큼지막하게 써 붙였다는 것이다. 이는 격에 어울리지 않게 과도한 치장을 한 경우를말하지만, 한해살이가 잘 될 수 있도록 비는 의미에서 붙이는 것이니 가게 기둥이면 어떻고 곳간 문앞이면 어떻단 말인가. 소망을 담아 붙이는 마음이 참으로 소중한 것 아닌가. - P23

붉은 매화 한 송이, 입춘을 장식하다 

간밤 샛바람에 북두칠성 바뀌더니
길섶 버드나무에 눈이 막 녹았다.
새벽 되자 나무 한그루 흐드러진 살구꽃처럼
작은 다리 저편 외로운 마을 향해 피어났다.
분명 이는 조물주가 성근 모습 싫어해서
일부러 때깔을 어여쁜 꽃으로 도와준 것일 테지.
푸른 가지와 잎사귀 구분할 필요 있겠는가
온갖 꽃다지 속에서 최고의 지위 뺏았는걸.

昨夜東風轉斗杓  陌頭楊柳雪纔消
曉來一樹如繁杏 開向孤村隔小橋
應是化工嫌粉瘦 故將顏色助花嬌
青枝綠葉何須辨 花卉叢中奪錦標

원희元淮 <입춘날 붉은 매화를 감상하며立春日賞紅梅> - P21

하루에 잠깐 드는 볕을 받으며 차가운 풍매화속에서도는 피어난다. 우리의 생도 그렇게 잠깐 드는 봄볕으로 일년의 험난한 바람 속을 헤쳐나가는 것은 아닐까. 입춘이 반가운 것은, 어쩌면 잠깐의 봄볕을 한껏 받아보고 싶은 소망 때문이리라.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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