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4박5일 자유여행(5.22.~5.26.)
이시카와현, 도야마현, 나가노현
이시카와현 고마츠공항 IN, 고마츠 OUT

가나자와 윤봉길 의사 참배
도야마 쿠로베 협곡열차
도야마 알펜루트 횡단, 설벽, 쿠로베댐

출발 2일전

가나자와 윤봉길 의사 암장지, 구금터, 순국지
소주 한 잔 올리고 온다.

임정로드 4000km, 약산로드 7000km 에 이은 항일로드 2000km
김종훈 기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임정로드와 약산로드는 ‘23년4월에 감명깊게 읽었다.
책이 나온지 좀 늦은 감이 있다.

가나자와 윤봉길 의사 참배코스는 임정로드 4000km를 읽고 코스를 계획하였다.

임정로드와 약산로드의 대부분은(사실 윤의사님 빼고 모두 중국) 중국땅에 있어 찾아가기가 어렵다.
충칭에 가서도 바로(가까운 거리에) 옆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화지 청사가 있음에도 가보지 못했다.(패키지의 한계)
일본은 그나마 찾아가기기 쉽다.

앞으로 항일로드 2000km 한번에 다 할 수는 없겠지만 일본에 갈때마다 최대한 참배하고 오고 싶다. 이 책이 좀더 일찍 나왔었더라면(핑계) 그동안 다녀왔던 일본 도시들의 역사의 현장을 찾아봤을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나가사키ㅇ, 후쿠오카ㅇ, 오사카ㅇ, 쿄토ㅇ, 도쿄ㅇ.......
시모노세키, 히로시마, 지바, 미야기

발바닥에 땀나도록 다녀보자... 항일로드 2000km

그 첫발을 22일에 내딪는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혹시, 가나자와에 가시는 분들 중 관심있으신 분을 위해 여정을 공유합니다.

일정표를 주니 이미지를 Ai가 이쁘게 잘 만들어 줍니다. 물론, 이것저것 코치를 잘 해줘야 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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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보고]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 1·2권 종합 분석: 해방을 향한 남부군의 불꽃 같은 항전, 그리고 지리산에 묻힌 실존적 체감

1. 작품 총괄 개요

가. 기본 성격

ㅇ (기록 문학적 성격) 『빨치산의 딸』은 ‘빨갱이 딸’이라는 연좌제의 굴레를 안고 살아온 작가가 부모 정운창과 이옥남의 빨치산 투쟁 궤적을 사실적으로 복원한 현대사 기록물임.

ㅇ (거시사와 미시사의 교차) 해방 공간의 이념 대립과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 흐름 속에서 굶주림, 추위, 죽음의 공포를 견뎌낸 이름 없는 민중들의 실존적 고통을 함께 조명함.

ㅇ (가족사와 현대사의 결합) 작품은 한 가족의 상처에서 출발하지만, 그 상처는 곧 여순사건, 남부군, 지리산 토벌, 휴전 이후의 방치와 연좌제 문제로 확장됨.

나. 시공간적 배경

ㅇ (시대적 배경) 작품은 1948년 여순사건 직후부터 한국전쟁기, 1953년 휴전협정 전후, 이후 잔존 빨치산 토벌기까지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를 배경으로 함.

ㅇ (공간적 확장) 1권은 전남 구례·백운산·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빨치산 투쟁의 형성과 입산 과정을 보여 주고, 2권은 무주, 낙동강, 대구 비슬산, 강원도 후평, 속리산을 거쳐 다시 지리산으로 회귀하는 남부 빨치산 투쟁사의 공간적 확장을 보여 줌.

2. 제1권 핵심 분석: 해방의 좌절과 산악 투쟁의 시작

가. 입산의 역사적 배경

ㅇ (무너진 해방의 약속) 해방은 억눌린 사람들에게 새 세상을 약속하는 듯했지만, 친일 세력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고 미군정은 우익 중심의 질서를 재편함.

ㅇ (산으로 밀려난 사람들) 빈농과 좌익 활동가, 지역 청년들에게 해방은 약속했던 새 세상이 아니라 낡은 지배층이 이름만 바꿔 되돌아온 현실로 다가왔고, 그 분노와 탄압의 압박이 사람들을 산으로 밀어 올림.

나. 정운창, 가명 유혁운의 조직 활동

ㅇ (해방구 건설) 정운창은 유혁운이라는 가명으로 전남도당 활동에 들어가며, 단순히 산속에 숨는 것이 아니라 산과 마을을 연계해 조직을 건설하고 민중을 규합하려 함.

ㅇ (산의 이중성) 초기의 백운산과 지리산은 혁명의 이상을 실현할 해방구였지만, 토벌이 강화되면서 점차 생존을 위협받는 고립과 죽음의 공간으로 변해 감.

3. 제2권 핵심 분석: 남부군의 투쟁과 비극적 종결

가. 이옥남, 곧 이옥자의 독자적 투쟁

ㅇ (여성 혁명가의 탄생) 이옥자는 봉건적 억압과 가난, 기다림과 배움을 거쳐 여맹위원장과 정치지도원으로 성장함. 그는 보조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혁명가로 세워 간 주체적 인물임.

ㅇ (산생활의 실체) 이옥자와 여성 대원들은 전투, 보급, 간호, 이동, 생존을 함께 감당했으며, 작품은 여성 빨치산이 산중 투쟁의 주변이 아니라 한복판에 있었음을 보여 줌.

나. 남부군의 궤적과 몰락

ㅇ (비슬산 후방 교란) 이현상 부대는 정규 인민군도 넘지 못한 낙동강을 도하한 유일한 부대로 제시되며, 비슬산·대구 일대에서 적 후방 교란 작전을 수행함. 이는 남부 빨치산 투쟁이 단순한 산중 도피가 아니라 한국전쟁의 흐름에 직접 개입한 유격전이었음을 보여 줌.

ㅇ (상징의 붕괴) 지리산 회귀 이후 박종하의 전사와 이현상의 최후는 남부군의 구심점이 사라지는 장면임. 박종하의 죽음은 몰락의 전조곡처럼 다가오고, 이현상의 죽음은 남부 유격투쟁의 상징적 중심이 무너지는 결정적 장면으로 읽힘.

ㅇ (끝나지 않은 산) 휴전 이후에도 빨치산들에게는 돌아갈 해방구도, 받아 줄 국가도 없었음. 자수, 지하사업, 최후 저항이라는 선택지만 남은 산은 더 이상 해방구가 아니라 사람을 하나씩 삼키는 감옥이자 무덤으로 변해 감.

4. 해방 공간의 구조적 모순과 역사의 아이러니

가. 수탈 지역 간의 비극적 충돌

ㅇ (서북청년단의 남하) 서북청년단으로 대표되는 일부 월남 반공 청년 조직이 구례까지 내려와 폭력과 토벌에 가담한 대목은 해방 공간의 폭력이 남도 농촌까지 깊숙이 파고들었음을 보여 줌.

ㅇ (수탈 지역의 아이러니) 남도는 곡창지대로서 오랜 수탈을 겪었고, 서북은 사신 접대와 변방 통치의 부담을 겪은 지역이었음. 두 지역 모두 중앙 권력의 압박을 경험했지만, 해방 이후에는 서로 다른 이념의 편에 서게 됨.

ㅇ (증오의 전이) 같은 상처를 지닌 민중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칼을 겨눈 것은 분단이 낳은 가장 쓰라린 아이러니임. 못살겠다며 들고일어났던 홍경래의 고장에서 나온 사람들 중 일부가, 훗날 남도 농민과 좌익 활동가를 때려잡는 자리에 섰다는 점은 이 작품이 던지는 중요한 역사적 질문임.

5. 실존적 체감과 역사적 관조

가. 이현상과 남부군에 대한 재인식

ㅇ (이현상의 재평가) 이현상은 작품 속에서 단순한 무장투쟁의 지휘관이 아니라, 외세와 분단, 전쟁의 격랑 속에서 민족의 자주와 평등한 세상을 꿈꾼 인물로 다가옴.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는 논쟁이 남을 수 있으나, 적어도 이 작품을 읽은 뒤에는 그를 한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떠안은 강렬한 혁명가로 보게 됨.

ㅇ (남부군과 영화의 교차) 이태의 『남부군』과 영화 『남부군』은 지리산 빨치산의 체험을 다른 방식으로 떠올리게 함. 특히 영화 속 남부군의 이동과 굶주림, 피아골과 지리산의 장면은 『빨치산의 딸』에서 확인한 남부군의 고통을 시각적으로 다시 체감하게 함.

ㅇ (버려진 사람들의 비극) 휴전협정은 전쟁을 멈추었지만, 남쪽 산악지대에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길은 마련하지 못함. 남은 빨치산들은 국가와 조직 양쪽에서 모두 버려진 채 산속에서 죽거나, 자수하거나, 다시 지하로 숨어드는 선택 앞에 놓였음.

나. 지리산의 물리적 감각과 역사의 교차

ㅇ (낭만과 사선의 대비) 1990년대 초반 대학 시절 동아리원들과 지리산을 종주하며 연하천과 장터목 산장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던 기억은 낭만의 시간으로 남아 있음. 그러나 『빨치산의 딸』을 읽고 나면, 같은 지리산이 누군가에게는 살아남기 위해 넘어야 했던 사선이었음을 생각하게 됨.

ㅇ (고통의 감각화) 등산객에게도 벅찬 지리산의 험로를, 빨치산들은 굶주림과 추위, 젖은 옷과 낡은 신발, 총과 탄약, 부상자와 죽음의 공포를 안고 넘어야 했음. 책 속의 역사는 추상적인 이념 논쟁이 아니라, 발바닥과 어깨, 허기와 추위로 느껴지는 물리적 고통으로 다가옴.

ㅇ (지리산에 대한 기억) 지리산은 젊은 날의 종주와 야영, 무박 산행의 기억이 남아 있는 산임. 그러나 『빨치산의 딸』을 읽고 난 뒤의 지리산은 단순한 추억의 산으로만 남지 않음. 오십 중반에 들어선 지금, 그 산은 청춘의 낭만과 함께,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산을 넘었던 사람들의 고통까지 함께 떠올리게 하는 장소가 됨.

다. 최종 소회

ㅇ (추억과 역사의 반추) “남자는 마흔이 넘으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처럼, 지리산은 이제 단순한 산행지가 아니라 청춘의 기억과 현대사의 상처가 함께 겹쳐지는 장소로 남음.

ㅇ (사람의 기록) 『빨치산의 딸』은 영웅적 투쟁사도, 단순한 패배의 기록도 아님. 피를 흘리고 생존을 다투었던 사람들의 불꽃 같은 삶을 복원하는 기록임.

ㅇ (최종 결론) 이 책은 빨치산의 승리를 말하지 않지만, 해방의 약속을 믿고 산으로 갔던 사람들의 존엄과 돌아오지 않는 동지들의 이름을 오래 붙들게 함. 결국 『빨치산의 딸』은 조국의 슬픔과 한을 품고 지리산에 스러진 사람들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작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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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의 딸 2
정지아 지음 / 필맥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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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보고]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 2권 – 유혁운과 이옥자로 본 남부 빨치산 투쟁사,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동지들

1. 작품 개요

가. 작품의 기본 성격

ㅇ (부모 서사의 분기) 『빨치산의 딸』 2권은 초반부에서 아버지 정운창, 곧 유혁운의 서사를 마무리하고, 이후 어머니 이옥남, 즉 이옥자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됨.

ㅇ (유혁운 서사의 마무리) 유혁운은 위장 자수, 지하조직 재건 시도, 김춘옥과의 관계, 권상수의 밀고, 사형선고와 무기징역을 거치며 남한 사회에 동화되어 감.

ㅇ (이옥자 서사의 본격화) 이후 작품은 이옥자가 가난, 여성 억압, 시집살이, 기다림, 여맹 활동, 산생활을 거치며 여성 빨치산으로 살아가는 과정을 중심 서사로 풀어감.

ㅇ (남부 빨치산 투쟁사의 확장) 2권은 한 가족의 수난사에 머물지 않음. 이옥자의 삶은 이현상 부대와 남부군의 탄생, 남녘 산하를 가로지른 유격투쟁, 그리고 휴전 이후 몰락의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하는 과정으로 전개됨.

ㅇ (산과 전쟁의 대서사) 작품은 이옥자의 삶을 통해 지리산과 백운산에 머문 빨치산 투쟁을 넘어, 무주와 대전, 낙동강 전선, 비슬산과 대구 일대, 양양 등 태백산맥, 후평과 속리산, 다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남부 빨치산 투쟁사의 긴 궤적을 보여 줌.

나. 시대적 및 공간적 배경

ㅇ (시대적 배경) 작품은 1948년 여순사건 이후의 산중 투쟁,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낙동강 전선, 같은 해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후퇴, 1950년 11월 남부군 재편, 1951년 이후 남부군의 남하와 지리산 재진입, 1953년 휴전 전후의 토벌 강화, 이후 잔존 빨치산의 몰락까지를 배경으로 함.

ㅇ (공간적 배경) 전남 구례·광주·곡성 등 호남 남부 지역과 지리산·백운산·덕유산·속리산·비슬산 등 남부 산악 지대, 무주·대전·대구·양양 등 이동 경로, 그리고 이현상 부대가 이승엽의 지령을 받고 남부군 체계로 재편되는 강원도 세포군 후평리 일대가 주요 무대로 나타남.

ㅇ (서사의 핵심) 2권의 핵심은 유혁운의 산중 투쟁이 체포와 수감 이후 남한 사회 적응의 문제로 이어지고, 이옥자의 삶은 남부군의 탄생과 남녘 투쟁, 그리고 몰락의 전 과정을 온몸으로 통과한다는 데 있음.

2. 유혁운 서사의 마무리

ㅇ (위장 자수와 지하사업) 유혁운은 산속 투쟁만으로는 조직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보고, 김춘옥을 위장 자수시켜 지하사업의 기반을 만들려 함.

ㅇ (사랑과 임무의 충돌) 김춘옥은 유혁운이 사랑한 사람이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평범한 사랑으로 남지 못함. 사랑은 조직의 임무와 생존 전략 속으로 끌려 들어감.

ㅇ (밀고와 체포) 권상수의 밀고는 유혁운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됨. 이는 한 사람의 배신이라기보다, 이미 조직이 버틸 힘을 잃어 가던 현실을 보여 줌.

ㅇ (질곡을 통과한 삶) 유혁운은 사형선고와 무기징역, 옥살이를 거치며 산에서 감옥으로, 다시 남한 사회 안으로 들어옴. 그가 믿었던 혁명의 길은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그의 삶 전체를 패배로만 볼 수는 없음. 오히려 그의 삶은 전쟁과 반공, 감옥과 적응의 시간을 지나며 대한민국 현대사가 얼마나 거칠게 후퇴하고 다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는지를 보여 주는 한 인간의 기록임.

3. 이옥자의 삶과 여성 빨치산의 길

ㅇ (기다림과 가난) 이옥자의 삶은 남편을 기다리고, 시집살이를 견디고, 가난과 가족의 부담을 감당하는 데서 출발함. 그는 처음부터 완성된 혁명가가 아니라, 견디고 배우며 조금씩 자기 삶의 방향을 찾아간 인물임.

ㅇ (배움과 자존) 글을 배우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욕망은 이옥자에게 단순한 공부가 아니라, 자기 삶을 남에게 맡기지 않으려는 첫걸음이었음.

ㅇ (혁명가로의 전환) 이옥자는 여맹 활동과 조직 활동을 거치며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를 혁명가로 세워 감. 그의 삶은 말로만 외치는 신념이 아니라, 굶주림과 이동, 전투와 상실을 감당한 실제의 혁명가적 삶에 가까웠음.

ㅇ (여성 빨치산의 현실) 이옥자와 양봉순 같은 여성 대원들은 단순한 보조 인력이 아니었음. 그들은 전투, 보급, 간호, 이동, 생존을 함께 감당했고, 작품은 여성 빨치산이 산중 투쟁의 한복판에 있었음을 보여 줌.

4. 서북청년단과 해방공간의 아이러니

ㅇ (구례까지 내려온 폭력) 서북청년단으로 대표되는 일부 월남 반공 청년 조직이 구례까지 내려와 폭력과 토벌에 가담한 장면은 해방공간의 폭력이 남도 농촌까지 깊숙이 파고들었음을 보여 줌.

ㅇ (지역사의 아이러니) 남도와 서북은 모두 중앙 권력의 수탈과 차별을 겪은 지역이었음. 남도는 곡창지대로서 수탈의 부담을 졌고, 서북은 사신 왕래와 변방 통치의 부담을 오래 겪음.

ㅇ (억눌린 자들의 충돌) 그러나 해방 이후 두 지역의 상처는 같은 방향으로 모이지 못하고 서로 다른 이념의 편에 서게 됨. 못살겠다고 들고일어났던 홍경래의 고장에서 나온 사람들 중 일부가, 훗날 남도 농민과 좌익 활동가를 때려잡는 자리에 섰다는 점은 해방공간의 쓰라린 아이러니로 읽힘.

5. 남부군의 이동과 전쟁사적 확장

ㅇ (지리산을 넘어선 빨치산) 이옥자의 서사는 빨치산 투쟁을 지리산에만 가둬 보지 않게 함. 작품은 이현상 부대가 덕유산과 무주, 대전, 낙동강 전선, 비슬산과 대구 일대까지 움직였음을 보여 줌.

ㅇ (낙동강 도하와 비슬산·대구 전투) 이현상 부대는 정규 인민군도 넘지 못한 낙동강을 도하한 유일한 부대이며, 이후 낙동강 전선 후방 교란 임무를 맡아 비슬산과 대구 일대에서 전투를 이어 감. 이 대목은 남부 빨치산이 단순히 산속에 숨어든 패잔병이 아니라, 정규전의 빈틈을 메우고 적 후방을 흔들며 전쟁의 흐름에 직접 개입한 유격부대였음을 보여 줌.

ㅇ (전세의 급변과 북상)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바뀌면서 남부 유격대는 인민군의 후퇴와 함께 북상함. 승리처럼 보였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고, 이들은 강원도 후평에서 남부군 체계로 재편된 뒤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게 됨.

ㅇ (남부군의 남진과 귀환) 남부군은 속리산, 백화산, 추풍령, 황악산, 민주지산, 덕유산을 거쳐 다시 지리산으로 향함. 이 길은 승리의 진군도, 평온한 귀향도 아니었음.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포위와 토벌의 산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길에 가까웠음.

6. 지리산 재진입과 남부군의 마지막 국면

ㅇ (지리산으로의 귀환) 남부군은 긴 이동 끝에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감. 이는 해방구로 돌아가는 길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더 깊은 고립과 토벌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길이었음. 달궁 일대가 잠시 안정된 공간처럼 기능하기도 했으나, 그 평온은 오래가지 못하고 더 큰 포위의 전조로 남음.

ㅇ (박종하의 죽음) 박종하의 전사는 남부군 내부에 큰 충격을 남김. 그의 죽음은 한 지휘관의 죽음을 넘어, 남부군의 몰락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지리산의 전조곡처럼 들려옴.

ㅇ (이현상 비판과 이옥자의 판단) 남부군 출신들은 이승엽 일파와 이현상까지 종파주의자로 비판하라는 요구 앞에 놓임. 그러나 이옥자는 자신이 곁에서 지켜본 이현상을 함부로 비판할 수 없었음. 이는 이옥자가 단순히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본 것과 믿는 것을 끝까지 붙든 혁명가였음을 보여 줌.

ㅇ (이현상의 최후와 마지막 저항) 이현상은 경남도당으로 향하던 중 경찰의 매복에 걸려 전사함. 그의 죽음은 남부 유격투쟁의 상징적 구심점이 사라진 사건이었음. 그러나 남은 대원들은 곧바로 무너지지 않고, 57사단의 의령경찰서 기습처럼 끝까지 저항을 이어 감. 다만 그 저항은 이미 기울어진 전세와 촘촘해진 토벌망 속에서 점점 마지막 불꽃처럼 남게 됨.

7. 휴전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산

ㅇ (휴전의 배신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빨치산들에게는 돌아갈 해방구도, 받아 줄 국가도 없었음. 전쟁은 끝났지만 그들에게는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남지 않음.

ㅇ (세 갈래 선택) 휴전 이후 빨치산 앞에는 살기 위해 자수하거나, 지하사업으로 숨어들거나, 끝까지 산에서 싸우다 죽는 길이 놓임.

ㅇ (배신으로 닫힌 산길) 이옥자의 생포는 단순히 토벌망에 걸린 사건이 아님. 함께 산을 넘고 같은 해방을 꿈꾸던 이명재의 배신이 그의 마지막 산길을 끊어 버림. 총과 포위보다 더 아픈 것은, 끝까지 믿고 싶었던 동지의 이름으로 다가온 배신이었음.

ㅇ (끝내 꺾이지 않은 혁명가) 이옥자는 생포 이후 전향을 강요받았지만, 자기 사상을 쉽게 버리지 않음.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승리와 인간 해방을 믿고 산을 넘은 사람이었고, 패배한 몸으로 붙잡힌 뒤에도 혁명가다운 자존과 신념을 지키려 함.

8. 종합 소회

가. 주요 인물 평가

ㅇ (유혁운) 유혁운은 산중 투쟁과 지하조직 활동을 이어 갔지만, 밀고와 체포, 사형선고와 무기징역을 거치며 남한 사회 안으로 들어감. 그의 혁명 노선은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그의 삶 자체를 패배자의 삶으로만 단정할 수는 없음. 그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통과한 인물로 평가됨.

ㅇ (이옥자) 이옥자는 2권의 중심 인물임. 그는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로만 남지 않고, 배움과 활동, 전쟁과 산생활, 생포와 전향 강요를 통과하며 독자적인 삶을 살아낸 여성 빨치산으로 제시됨. 특히 그는 자기 사상을 지키려 한 혁명가적 면모를 끝까지 보여 줌.

ㅇ (박종하와 이현상) 박종하와 이현상은 남부 유격투쟁의 상징적 인물로 등장함. 박종하의 죽음은 남부군 몰락의 전조곡처럼 다가오고, 이현상의 최후는 남부 유격투쟁의 구심점이 사라지는 결정적 장면으로 읽힘.

ㅇ (돌아오지 않는 동지들) 작품 후반부의 핵심은 이름 없이 죽거나 흩어진 수많은 동지들에게 있음. 그들은 역사 속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해방의 약속을 붙들고 산을 넘은 사람들이었음.

나. 거시적 고찰

ㅇ (가족사에서 전쟁사로) 2권은 가족사를 넘어 전쟁사로 확장됨. 유혁운의 감옥, 이옥자의 산, 남부군의 이동과 몰락은 한 가족의 이야기가 한국 현대사의 깊은 상처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줌.

ㅇ (남한 전역을 관통한 유격전) 작품은 빨치산을 지리산에 갇힌 존재로만 그리지 않음. 이옥자의 삶을 통해 남부 빨치산 투쟁이 산중 도피가 아니라, 한국전쟁의 전선과 후방을 가로지른 남한 전역의 유격전이었음을 보여 줌.

ㅇ (산의 변질) 1권에서 산은 해방구이자 마지막 피난처였으나, 2권에서 산은 점차 감옥이자 무덤으로 변함. 그곳은 신념을 지키는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사람을 하나씩 삼키는 공간이었음.

ㅇ (해방공간의 아이러니) 서북청년단의 구례 진입은 해방공간의 폭력이 민중과 민중을 갈라 서로를 치게 만든 비극을 보여 줌. 억눌렸던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서로 다른 이념의 이름으로 충돌한 장면은 이 작품의 중요한 역사적 함의임.

다. 개인적 소회

ㅇ (읽기의 차이) 예전에 이태의 『남부군』을 읽었을 때도 지리산 빨치산 투쟁의 혹독함은 강하게 다가왔지만, 『빨치산의 딸』 2권은 조금 다른 무게로 다가옴. 『남부군』이 산중 부대의 이동과 전투를 현장감 있게 보여 준다면, 이 책은 유혁운과 이옥자의 삶을 통해 그 산을 통과한 사람들의 가족, 몸, 상처, 기억까지 함께 보여 줌.

ㅇ (지리산의 체감) 학창 시절 지리산을 종주한 기억이 있음. 여름방학 때 운동화 신고 텐트, 쌀, 라면, 생수를 짊어지고 걷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나중에 무박 종주를 했을 때도 지리산은 결코 만만한 산이 아니었음. 그런데 그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젖은 옷과 낡은 신발, 총과 탄약, 부상자와 죽음의 공포를 안고 그 산을 넘었음.

ㅇ (선택의 질문) 이 책을 읽으며 자꾸 생각하게 됨.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나 그 현장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쉽게 신념을 말할 수는 있지만, 죽음이 눈앞에 있고 가족과 내 몸의 안위가 걸린 순간에도 끝까지 산에 남을 수 있었을지는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려움. 아마 나 역시 일신의 안위를 먼저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음.

라. 최종 판단

ㅇ (불꽃같은 삶의 기록) 『빨치산의 딸』 2권은 승리의 기록도, 단순한 패배의 기록도 아님. 유혁운은 감옥으로 들어가고, 박종하는 죽고, 이현상도 쓰러지며, 이옥자는 끝내 생포되지만, 작품은 그들을 패배자로만 그리지 않음. 오히려 해방의 약속이 무너진 시대 속에서도 자기 신념을 붙들고 끝까지 살아낸 사람들의 불꽃같은 삶을 기록함.

ㅇ (사람의 기록) 이 작품은 빨치산을 이념의 이름으로만 보지 않게 함. 읽고 나면 총보다 먼저 사람이 보이고, 전투보다 먼저 굶주림과 두려움이 느껴지며, 역사보다 먼저 한 가족과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상처가 남음.

ㅇ (최종 소회) 『빨치산의 딸』 2권은 이옥자라는 한 여성이 빨치산, 남부군의 탄생과 몰락을 온몸으로 통과한 기록임. 그는 혁명을 위해 아이를 잃고, 남편을 잃고, 자기 삶까지 바쳤지만, 그 혁명은 끝내 실패로 돌아감. 그러나 그 실패 속에서도 그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자기 사상과 혁명가다운 자존을 끝까지 지키려 함. 그래서 이 책은 빨치산의 승리를 말하지 않지만, 패배한 사람들의 존엄과 돌아오지 않는 동지들의 이름을 오래 붙들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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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 어디 색신 줄 몰라도 여기 우리 집에 숨어 있다가 자수하러 갑시다. 요즘엔 자수하면 다 살려준다오. 당신들이 좋은 세상 만들자고 하는 일인 줄은 알지만 그것이 어디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오. 이미 대세가 기울었는데 당신들이 아무리 그래 봐야 소용없소. 나도 옛날에는 산사람들 오면 아까운 줄 모르고 털어줬던 사람이오. 인제 틀렸소. 곧 있으면 전쟁도 끝난다는데 틀린 일을 붙잡고 생목숨 버려서야 되겠소? 자수합시다. 사람 목숨만큼 귀한 것이 또 어디 있겠소." - P-1

그녀가 경남도당으로 떠난 후 역시 경남도당 위원장으로 일하다가 그녀보다 몇 달 앞서 54년 1월 조개골에서 생포된 조병하는 고향의 소꿉친구였던 어느 국군 장성의 끈질긴 전향 권유에도 불구하고 미제의 앞잡이들과 타협할 수 없다며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사형대에 올랐다. - P-1

"동무들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질 것이오. 동무들도 아다시피 산에서는 더 이상 유격투쟁이 불가능하오. 동무들은 곧 지하공작 사업을 맡게 될 것이오. 산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처럼 열심히 투쟁하기 바라오." - P-1

"학습 열심히 하고, 건강부터 회복하시오. 건강하게…… 잘 싸우시오."
그것이 이현상과의 마지막이었다. 후세의 사람들이 이현상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녀가 아는 이현상은 소박하고 따뜻하고 강인한, 그야말로 철의 투사였다. 누구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고, 대원들의 짐을 대신 들어주고, 이름 없는 하부원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신경 쓰던 아버지 같은 지도자였다. - P-1

그녀는 그곳에서 조국을 알았고 조국을 위해 싸웠고 인간을 알았으며 인간해방을 위해 싸웠다. - P-1

기다렸다. 좀처럼 연락은 오지 않았다. 유화열과 김태봉이 내려가자마자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 리 없었다. 45년 해방 직후의 정세와는 전혀 달랐다. 이미 입산자들의 신원과 경력이 샅샅이 밝혀진 뒤였으며, 그런 그들이 사회에 숨어들어 지하사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 P-1

기다리던 소식 대신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정전은 그들이 바라던 바였다. 51년 6월 23일 소련 외상 말리크가 유엔에서 휴전을 제의한 다음부터 남한의 전 빨치산들도 정전을 요구하며 싸워왔다. 그러나 휴전협정에서 빨치산들의 거취문제는 다뤄지지 않았다. 죽음과 함께 생활했던 지난날이지만 이제 정말로 남은 것은 혁명가다운 장렬한 최후뿐이었다 - P-1

전쟁은 끝났다. 빨치산들에게는 바늘 하나 꽂을 만한 해방구도 없었다.
자기들이 피를 흘리며 싸웠던 그 땅에서 최후까지 싸울 수밖에. - P-1

휴전회담이 빨치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건 이제 몇 가지 선택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는 혁명투쟁을 포기하고 살기 위해 자수하는 방법이었고, 둘째는 언젠가 다시 올지도 모르는 해방을 위해 지하로 숨어들어 유격투쟁을 지하조직 사업으로 바꾸는 것, 셋째는 사라진 꿈과 더불어 최후까지 싸우다 전멸하는 것이었다 - P-1

두 번째 방법은 수차례 연구하고 실시했으나 성공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살아 있던 대다수의 빨치산들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 세 번째를 선택했다. - P-1

남부군 출신들이 그런 비판회에 곤욕스러워하고 있던 그 무렵, 1953년 9월 18일 이현상은 호위대까지 다 다른 곳으로 떠나보낸 후 부관만을 데리고 경남도당으로 오던 중 경찰의 매복에 걸려 전사했다(이현상의 죽음에 관해 여러 가지 추측들-남로와 북로 간 헤게모니 투쟁의 희생양이라든가-이 난무하고 있지만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다). - P-1

종파주의자든 아니면 역으로 종파주의에 의해 희생당한 제물이든 분명한 것은 남한 현대사의 한 장을 장식할 유격투쟁의 지도자였으며 남부군 대원들에게는 친아버지와 같은 존경을 받던 한 탁월한 혁명가가 유격투쟁의 본거지인 지리산에서 최후를 마쳤다는 사실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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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2일 이현상부대는 영천을 통과했다. 비행기 폭격이 얼마나 심했는지 영천은 완전히 잿더미였다. 전쟁의 폐허 위에도 가을은 깊어가고 있었다. 미군이 이미 북진해버린 중부전선은 텅 빈 상태였고, 수많은 인민군 낙오병들과 당기관원, 좌익 지지자들이 적의 뒤를 따라 북을 향해 후퇴하고 있었다. 영천을 지나 태백산맥을 타고 북상하기 위해 울진으로 향하는 길에 잠시 휴식을 취하던 이현상은 남루한 인민군 낙오병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는 자랑스런 인민의 부대요. 힘을 내시오. 잠시 후퇴를 한다고 그렇게 엉망이어서야 되겠소. 단추도 채우고 먼지도 털고 총도 똑바로 드시오. 행색이 남루해지면 사기도 떨어지는 법이오."

이현상은 본부 취사대원 이창례를 돌아보며 생쌀이라도 한줌 주라고 일렀다. 그렇게 낙오된 병사나 기관원들을 부대 뒤에 따르게 하고 이현상부대는 영일, 양양, 울진의 동해안 도로를 따라 오른편으로 확 트인 동해를 끼고 북진하다 도계재를 넘어서부터는 태백산맥을 타기 시작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부대 뒤에 따라붙은 낙오병과 피난민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삼팔선을 넘을 때는 거의 만여 명에 가까울 정도였다. 사람이 많아지니 식량보급이 우선 문제였고, 부대만 후퇴하는 것보다 시간도 훨씬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 정규사단인 방호산의 6사단이 4백 명의 병력을 안전하게 후퇴시켰다고 그 후 칭찬이 자자했던 것을 생각하면 백 명도 안 되는 부대로 만여 명을 규합하여 안전하게 후퇴한 이현상부대의 공적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평양으로 간다는 사실에 그들은 가슴이 부풀었다. 삼팔선을 넘기만 하면, 평양에만 가면, 유대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찾아가듯 그들은 자신들의 꿈과 휴식이 이루어질 그곳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이현상부대는 그때까지도 소식이 없는 이영회부대를 위해 백묵으로 갈림길의 큰 바위마다 표지를 남겨놓았다.

본대의 애타는 기다림은 빗물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고 오랫동안 바위 위에 남아있었지만 끝내 후속부대는 본대를 따르지 못했다.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결국 도착할 수 없었듯이.

10월 중순 이현상부대는 양양에 도착했다.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동해바다가 멀리 내려다보였다. 드디어 삼팔선을 넘은 것이다.
"양양 현남면의 어떤 집은 윗방은 이북, 아랫방은 이남, 그렇다오."

다음날도 부대는 떠나지 않았고 대신 어디 가 있었던 것인지 그 마을 기관원들이 쌀과 반찬 등을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 여맹원들이 잠시 이리저리 부산하게 뛰어다니더니 어느새 밥을 지어왔다. 며칠 뒤에는 어디에 숨겨놨었는지 소와 돼지도 내놓았다

11월 10일경 정식으로 부대가 재편되었다.
 
승리사단(약 500명) - 사단장 이진범, 정치위원 유주목
인민여단(약 170명) - 사단장 김재연, 정치위원 김삼홍
혁명지대(약 130명) - 사단장 서흥석
본부(약 60명)

총참모장엔 박종하, 본부 정치위원엔 차일평이 임명됐고, 전체는 무려 860명에 이르는 대부대였다. 부대의 정식 명칭도 조선인민유격대 4지대로 바뀌었으나, 통상 남반부 인민유격대로 불렸다. 이 중 승리사단은 여순사건 이후 구빨치를 중심으로 한 중핵부대였으며, 인민여단은 주로 후퇴 중이던 기관원, 남조선 의용군, 민간인 중에서 지원자를 뽑아 새로 만들어진 부대였고, 혁명지대는 원래 충청지방에 침투할 예정으로 경기와 충청 출신들로 편성된 부대였다. 혁명지대와 인민여단은 승리사단과 별도의 행동을 할 경우도 많아서 흔히 두 부대를 묶어 연합부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의 자원도 가득 찬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역사에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아끼고 길이 받드세.
 
처음으로 마음껏 불러보는 국가였다. 하얗게 서릿발이 내린 들판을 녹이며 뜨거운 애국가 소리가 점점 드높아졌다. 이 국가 한번 맘대로 불러보지 못한 채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죽어갔는가.

"우리의 혁명은 이제부터입니다. 한라산과 지리산, 남반부 곳곳에 붉은 피를 뿌리고 가신 동지들의 원수를 기어이 갚고야 말 것을, 우리 여기서 다시 한번 결의합시다!"

우리 모두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지리산 골짜기를 수없이 옮겨 다니며 무주로, 낙동강으로, 그리고 삼팔선을 넘어 그들은 후평까지 왔다. 그들이 그렇게 꿈꾸던 평양도 지척이었다. 그러나 아직 조국의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기나긴 투쟁의 여정 또한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우리 내일 남조선으로 떠나오. 옥자 동무는 이곳에 남아서 공부를 계속하고 훌륭한 지도자가 되시오."
"……."
"어떻소? 여기 남겠소?"
혼자 이곳에 남는다? 부대는 남조선으로 내려가고?
"싫습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죽더라도 부대와 함께 가서 죽을 것입니다. 저 혼자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허, 고집도 참. 옥자 동무의 의사가 정 그렇다면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을 테니 오늘 밤 시간을 두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오."

다음날(14일이나 15일) 새벽 비상이 걸렸다. 곧바로 아침을 먹고 희뿌옇게 밝아오는 새벽 들판에 9백여 명의 전 대원이 줄지어 섰다. 이현상과 박종하의 연설이 끝나고 나자 붉은 태양이 환하게 솟아올랐다. 부대는 곧 왔던 길을 되짚어 남쪽을 향해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북조선 땅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 뒤로는 수십 마리의 황소가 부대가 먹을 식량을 싣고 뒤따랐다.

평강을 지나 철원, 화천, 양구를 가로질러 오대산을 탔는데 중부지역은 완전히 공백상태나 다름없었다. 기동로에는 미군의 보급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지만 큰 전투 한 번 없이 남부군은 진부령에 도착했다. 멀리 넘실거리는 동해바다가 바라보였다. 이곳에서 진부지서를 습격, 점령한 남부군은 그날 나팔을 불며 돌격했었는데 그 후로 나팔만 불고 공격하면 적들이 혼비백산 도망치기 바쁠 정도였다. 이곳에서 남부군은 태백산맥을 버리고 소백산으로 향했다.

후방을 교란하는 유격투쟁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소백산 주위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남부군은 한 달여간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단양경찰서와 문경경찰서 습격, 문경에 있는 미군부대 습격, 수안보를 중심으로 한 주요 도로 매복, 기습투쟁, 영풍 미군부대 습격, 기동로인 죽령 국도 열흘가량 차단 등으로 남부군은 자신의 임무대로 후방의 미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비행기의 공습은 끊임없이 이들을 쫓아왔고 이 무렵부터 재귀열 환자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과로를 해서 염병(장티푸스)에 걸린 줄 알았으나, 나중에 평양 중앙방송을 듣고서야 미군의 세균 살포로 인한 것이고 병명도 염병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재귀열이라는 것을 알았다.

"태규 동무! 살려면 이거 좀 먹어봐!"
의식을 잃고 있던 김태규는 녹 동무가 먹여주는 뱀을 비몽사몽간에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그 뱀고기를 먹고 김태규는 오랜 병에서 회복되었다.

나중에 남부군에서 대단한 활약을 한 문춘이 바로 이때 충북 유격대에 있다가 남부군에 합류했다.

김흥복만이 아니고 당시 남부군의 주요 지휘자들 대부분이 스무 살이 겨우 넘거나 스물다섯 안팎의 젊은이들이었다. 박종하도 그때 겨우 스물다섯의 청년이었다.

남부군은 적의 차량 수십 대를 동원해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4백여 명의 좌익수와 전리품을 실은 다음 유유히 예비대가 대기하고 있는 장소에 가서 자동차를 모두 소각한 뒤 전리품만 가지고 그날 밤중으로 무사히 속리산에 도착했다. 남한 내의 유격대로서 도청소재지를 점령한 것은 이것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신발 한 짝이라도 다 보고하고 부대 안에서 가장 발이 안 좋은 대원에게 그 신발을 주는 것이 남부군의 사업작풍이었다. 그 정도의 동지애가 아니었다면, 언제라도 뒷주머니에 자기 것을 챙기는 요즘의 세태대로였다면, 그 혹독한 조건 속에서 이탈하지 않고 어떻게 싸울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청주작전 후 국군과 경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미 공군의 공중폭격으로 더 이상 속리산에서 버틸 수가 없게 되자 남부군은 석 달여간 활약하던 무대를 버리고 아직 회복되지 않은 환자들과 그들을 보살필 의무요원, 보급요원 등 총 50여 명을 속리산에 남겨놓은 채 눈물을 머금고 다시 남진을 시작했다

속리산을 출발하여 백화산을 지나고 추풍령고개를 넘고 황학산을 거쳐 민주지산에 도착한 것은 아카시아 꽃내음이 향긋한 5월 중순이었다. 경상, 충청, 전라 3도의 접경지점인 민주지산에는 진달래가 지고 철쭉이 한창이었다

남부군은 여독을 풀 새도 없이 몇 개의 부대로 나눠 부근의 미군, 국군 주둔지와 경부선 철도 등을 습격하며 십여 일을 보냈다. 전투마다 승승장구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

남한에서의 유격투쟁을 포기하고 북상하던 길에 덕유산에서 6.25 소식을 접하고는 그 후 꼭 일 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후평에서 덕유산까지 참으로 먼 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부군의 누구 하나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삶을 거기서 마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8월 초순(10일에서 12일 사이), 남부군은 남부군 유격투쟁의 정점을 이루는 가회지서 습격투쟁을 시작한다. 이 가회지서 습격투쟁을 마지막으로, 승승장구하던 남부군의 투쟁은 고개를 꺾기 시작한다. 이후로는 단 한 번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부군은 그곳에서 48년 이래 남부군을 지휘해왔던 탁월한 지휘자 박종하를 잃게 된다.

미군복을 입고 나갔던 어제의 그 모습 그대로 이마가 총탄에 뚫려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싸늘하게 누워 있는 시체는 바로 박종하였다. 박종하는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느닷없이 막내가 보고 싶다고, 해방되면 다 같이 고향에 가자고, 평소에는 꺼내지도 않던 말을 하고 나가더니 시체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박종하의 죽음은 부대 내에서 일체 비밀에 부쳐졌지만 간부들에게 준 충격만도 엄청났다. 박종하의 죽음 이후 남부군은 두 번 다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물론 그 패전의 원인이 박종하의 죽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후평에서 지리산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직 주전선에 적들의 모든 관심이 쏠려있었고 이후에는 휴전협정이 거의 확실시되면서 적의 병력이 지리산으로 몰려든 탓도 있었을 것이고, 빨치산과 오랫동안 싸우면서 단련된 적들이 갈수록 강해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박종하가 살아있었다면 남부군의 투쟁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바로 지리산의 초입 달뜨기가 녹음에 우거진 채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구빨치에게는 꼭 1년 2개월 만의 귀향이었다.

그날 중으로 경호강을 건너 웅석복 어느 골짜기에 도착한 부대는 그곳에서 노숙하고 다음날 지리산 거림골과 중산리 입구에 있는 시천지서, 삼장지서와 덕산리 외곽에 있는 경찰초소를 공략했다. 작전지휘는 속리산에서 합류한 충북부대 출신의 문춘이 맡았다.

지리산의 여름은 비가 잦다. 워낙 산이 크고 웅장하니 아래쪽의 날씨로는 산 날씨를 짐작키도 어렵다. 지리산에 처음 도착한 다음날도 여름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앞으로 닥칠 남부군의 처절한 운명에 대한 불길한 예고라도 하듯이.

"미제의 앞잡이 놈들! 역사가 너희들을 심판할 것이다!"
박대수는 경찰에게 침을 뱉고 욕설을 하며 대들었다.
"이런 개새끼! 쏴버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
외마디 비명이 채 끝맺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대부분의 빨치산은 당시 최대한 적의 병력을 끌어들여 주전선으로 향하는 적의 힘을 분산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유일한 임무라고 생각했고 그 임무를 위해서는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돼 있었다. 물론 머지않아 해방이 될 거라는 확신 속에서 말이다. 그것이 무모했건 어리석었건 순수한 혁명성에서였건 적어도 당시의 실정은 그랬다. 모든 정보가 차단되고 매일매일 전투에 쫓기는 상태에서 일반대원들은 실제로 당장 내일의 자기 운명조차도 모르고 살 때였고, 보통의 상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감상쯤은 끼어들 여지도 없던 시절이었다.

지리산 상봉에까지 쫓겨 와서 두 사람의 입씨름이 또 한판 붙은 것이다. 이현상의 중재로 유주목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물러나긴 했지만 그날의 정겨운 다툼을 사무치게 그리운 추억으로 남기고 유주목은 그 후 어느 땐지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빨치산에게 있어 무소식이란 희소식이 아니라 죽음 아니면 생포를 의미했다. 유주목이 생포됐다는 말은 그 후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으니 아마 지리산 어느 골짝엔가 무덤도 없이 누워 있을 것이다.

후평에서부터 남부군에 합류한 차일평은 김일성대학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는, 삼십대 중반의 전형적인 학자풍의 사나이로 그녀의 학습을 담당한 개인교수이기도 했다. 훗날에야 차일평이 실제로 적에게 협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한동안 분노에 치를 떨기도 했다. 그에게는 혁명의 순결성보다 자신의 생명과 지식이 더 중요했던 걸까. 그녀를 감탄시키던 놀라운 지식과 이론이 한낱 관념이었을 뿐일까. 적어도 그가 인간인 이상 아마 적에게 구걸한 나머지 인생 동안 그의 앞에 기다리는 것은 굴욕과 자기파괴와 참담함뿐이었을 것이다.

한두 사람이야 어땠건 대부분 남한 사회주의자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적과 투쟁하면서 마지막 총 한 방까지 적을 향해 겨누다가 전사하거나 자폭으로 자신의 생명을 거두었다. 이현상도, 박종하도, 김흥복도, 이진범도, 이영회도, 전남도당의 박영발이나 김선우도, 전북도당의 방준표도, 모두 자신의 동지들이 숨져간 차가운 산기슭에서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해방을 꿈꾸며 죽어간 것이다

이 대부대는 적정을 피해 세석평전 서쪽을 돌아 칠성봉 아래 대성골로 접어들었다. 대성골에 도착한 것이 새벽쯤 되었을까. 이상하게 그날 새벽까지 사방에서 빨치산들이 대성골로 몰려들었다. 얼마 전 거림골에서 갈라졌던 92사단도 대성골로 밀려왔고, 전남부대에서 지리산으로 파송했던 투쟁인민과 노약자들, 조금 전에 만난 경남도당, 경남부대, 지리산을 무대로 싸우던 적어도 천 명 이상의 빨치산들이 사십 리가 넘는 대성골 넓은 골짜기에 총집결한 것이다(이 피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남부군은 작전 총화를 통해 국방군이 며칠 동안 전 빨치산을 대성골로 몰아넣기 위해 교묘하게 대성골로 가는 길목만 터놓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리산 숱한 골짜기를 놔두고 전 부대가 대성골로만 집결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국민학교에 갓 입학할 나이였다. 여덟 살 자형이는 전남부대의 꽃이었고 전남부대만이 아니라 전 빨치산에게 유명한 꼬마 영웅이었다. 지난번 악양전투 때 남부군들도 소문으로만 듣던 자형이를 직접 봤는데 정이 많은 유주목은 특히 두고두고 자형이 얘기를 꺼내곤 했다.
"공화국의 보배요. 끝까지 살아남아야 할 텐데……."

여성과 예술인을 특별히 우대하는 남부군이라 일선 지휘자들이 나름대로는 신경을 써주었지만 특별대우를 해준다고 해도 거부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남자들보다 몇 배나 더 열악한 신체조건을 가지고도 남부군의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하게 조국해방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해도 해도 산더미처럼 쌓이는 일 때문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또 역사와 조국이란 무엇인지도 생각할 짬이 없던 그녀들이 지금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바치겠다는 뜨거운 결의로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싸워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94호 결정서가 즉각 이현상에게 전달되었다. 이 전달서에는 도당을 해체하고 5지구당을 결성할 것이며 지리산 일대 5지구당의 책임자로 이현상을 임명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중앙당이 현지의 사정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지시했다는 이유로 박영발과 방준표는 도당 해체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국 도당조직은 그대로 둔 채 통일적인 지도를 담당할 5지구당 조직위원회를 결성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위원장에는 이현상, 부위원장에는 박영발과 방준표가 임명됐다.

5지구당 결성과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20여 명의 상선 연락대는 다음날 오전 다사로운 가을햇살을 받으며 정든 지리산을 떠나갔다. 이제 남은 인원은 총 백 명도 되지 않았다. 후평을 떠나올 때 8백이 넘었던 인원이었으니 만 2년도 안 되는 동안 8백 가까운 동지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해 젊고 뜨거운 피를 바친 것이다. 남은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먼 얘기가 아니었다.

서류봉투 두 개 분량쯤 되는 서류를 누런 밀가루 푸대로 겹겹이 싼 후 솥에 넣고 바위틈으로 들이밀었다. 전투 와중에도 무슨 보고서와 문서가 그렇게 많았던 것인지, 아마 그 몇 년간 지리산에 비장한 것만 해도 한 트럭분이 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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