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로부터 수많은 종류의 레저와 스포츠가 인류와 함께 있어왔지만, ‘등산‘이라는 개념은 그 역사가 230여 년에 불과하다. 바로, 동상의 주인공 두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 자크 발마의 몽블랑등정이 인류 최초의 등산으로 기록되고, 그 계기를 제공한 사람은소쉬르였다. - P28

당시만 해도 산간 오지에 불과했던 샤모니를 식물 채집차 방문했던 소쉬르는, 해발 2,526미터의 브레방에 올랐다가 넋을 잃었다. 샤모니 계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거대 설산의 위용이 혈기왕성한젊은이의 영혼을 송두리째 빼앗은 것이다. 해발 4,807미터의 봉우리에 일 년 열두 달 흰 눈을 뒤집어쓰고 있던 무명의 설산은, 소쉬르와의 이 만남을 통해서 ‘하얀blanc 산mont‘, ‘몽블랑‘이라는 고귀한이름을 얻었다. - P30

몽블랑 등정의 베이스캠프이자 인류 등반 역사의 메카나 다름없는 샤모니Chamonix Mont-Blanc, 이 소도시의 중심지인 파카르 거리와 발마 광장에서 3인 영웅의 자취를 느껴보며 몽블랑 트레킹을 시작한다. 알프스 여러 산들과 함께 그 둘레를 한 바퀴 돌아 십 일 후다시 이곳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것이다. - P34

1786년 어느 여름날, 마침내 그들은 1박 2일 동안의 사투 끝에 몽블랑 정상에 섰다. 오늘날과 같은 산행 장비와 과학도구 같은 건 있지도 않았던 시절의 설산 등반이었다. 그야말로 죽음에 맞선 도전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산한 그들은 전 유럽의 영웅이 되었다. 악마도 없었고 인간이 오를 수 없는 곳도 아니었음을 입증해낸그들이었다. 태고 이래 인간의 발길을 허용치 않았던 몽블랑 속살이두 사람에 의해 베일을 벗었다. - P32

TMB는 레우슈에서 시작하여 레우슈에서 끝난다.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 수도 있지만,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 방식이 좀 더보편화되어 있다. 열한 시십분에 샤모니를 출발한 버스는 십오 분후에 레우슈의 벨뷔 Bellevue에 도착했다. 꽃과 화분으로 장식된 거리와 형형색색의 이삼층 목조건물들이 어울려 아름다웠다. - P39

가끔씩은 도중에 마을을 만나 점심거리를 사 먹을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숙소 떠날 때 샌드위치나 간식 등을 준비해가는 게 맞을 것이다. 점심은 가볍지만 아침은 토스트와 시리얼과 우유와 과일등으로 든든했고, 오늘 저녁도 어제처럼 충분하고 만족스런 성찬이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행을 더 많이 즐기기 위한 필수 요소들 중맨 앞에 둬야 하는 것, 매일매일 잘 먹어야 하는 일 아니겠는가? - P77

세이뉴 고개에 그 많던 트레커들이, 이탈리아 땅으로 넘어오면서부터는 거의 보이질 않았었다. 엘리자베타 산장Refugio Elisabetta에 들어와보니 언제 다 이리로 모였는지 온통 북적거린다. TMB 종주는 시계방향이건 반대방향이건 큰 차이는 없다. 산장에 모여든 이들 중 절반은 우리와 반대방향으로, 오늘 쿠르마예르를 거쳐 왔고내일 아침 세이뉴 고개를 오르려는 사람들로 보인다. - P122

첫날 레콘타민의 호텔에서는 욕실 딸린 2인실에서 럭셔리하게 일박 했고, 그제 크로와 뒤 본옴므 산장에서는 2층 침대 두 개있는 도미토리 4인실이었다. 지난밤 엘레자베타에서는 5인용 침상의한가운데 자리였다. 여행 중 어떤 유형의 불편한 잠자리에도 익숙하다고 스스로 자부하지만, 간밤은 잠이 들 때까지 다소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5인용 침상 자체가 비좁았고, 양쪽에서 들려오는 곳소리와 이 가는 소리 때문이었다. - P123

뭔가에 대해 결정을 못 내리고 주저하던 사람들이 누군가 한명의 결단에 용기를 얻어 그를 따르게 된다. 그렇게 앞선 사람을 우리는 리더라 부른다. 내 앞에 여성 네 명을 이끌고 있는 남성 한 명이 오늘 아침 저 삼거리에서의 리더였다. 그가 외친 ‘렛츠고‘ 한 마디에 그의 일행 넷은 물론 나까지 따라나섰고 내 뒤의 여럿도 뒤를따르고 있다. - P129

저녁 여덟 시부터 시작된 저녁식사 자리에는 이십여 명의 투숙객들이 전부 한자리에 모였다. 절반 정도 됨직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특유의 쾌활함으로 전체 분위기를 유쾌하게 이끌었다. 6인실 탁자인 우리 자리에는 네 명의 이탈리아인들이 합석했는데, 안 박사의유창한 영어 솜씨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 P152

안 박사가 식탁에 늘어놓은 진미오징어포가 그들 입맛에 맞았는지 인기가 높았다. 실내에 유일한 동양인 둘이 주목을 받은 건지 옆자리 여기저기에서도 오징어포를 요청하는 소리가 나왔다. 안박사가 방으로 돌아가서 아껴두었던 오징어포 두 봉지 전부를 배낭에서 가져와 옆자리 세 군데에 골고루 풀었다. 한 자리에서 시작된박수가 식당 전체로 이어졌다. - P-1

같은 길을 걸어와 한 숙소에 묵는 트레커들 모두로부터 박수와 환호를 받아보는 경험도 짜릿한 것이었다. 삼일치 오징어포는 아깝게도 모두 소진되어버렸지만, 안 박사 배낭에는 북엇국 수프나 견과류 등 국내에서 준비해 간 먹거리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노련한 후배와 동행한 덕택에, 혼자 여행할 때 소홀히 했던 우리 먹거리를 즐기는 호사도 누리고, 서양인 트레커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는영광도 함께 누리고 있다. - P-1

"벤베누토!"
스위스에서 온 그들도 알아듣고는 즉시 화답이 왔다.
"벤베누토! 벤베누토!",
부지런한 안 박사는 얼마나 일찍 도착했는지 돗자리까지 펴고 그 옆에서 버너에 물을 끓이고 있다.
"상무님, 라면 두 개와 햇반 하나 꺼내셔요. 배고파요."
안 박사 옆에 놓인 깻잎 통조림 한 캔이 위액을 자극했는지갑자기 허기가 느껴진다. 뱃속에서 꼬르륵 신호를 보내온다. - P163

어떻게든 저 빙하 옆까지 도로 내려간 다음 엘레나로 돌아가서 차를 불러 스위스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을때 두 사람의 남녀가 나타났다. 빙하 앞에서 아이젠을 차는 모습이눈에 들어왔고 남자가 먼저 성큼성큼 빙하를 건넜다. 아차 하는 순간에는 가차없이 미끄러져, 아득해 보이는 계곡 밑으로 추락할 것같은 위험구간인데도 말이다. - P183

엘레나 산장으로 돌아가서 차를 타고 스위스로 넘어간다는건 TMB 종주라는 당초 목표를 포기하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고개 정상에 올라 나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안박사도 문제였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국은 아이젠 없이 빙하를 건녔고, 오 분도 안 된 어느 순간 나는 빙하 건너편에 주저앉아 있었다. 돌이켜보면 TMB 십일 중 가장 많이 겁먹은 날이었다. - P186

멀리 산 능선 경사진 초원에 울창한 나무숲을 배경 삼아 띄엄띄엄 앉아 있는 목조 가옥들은, 영화나 사진 속에서 언젠가 보았을스위스 목장마을의 정경 그대로이다. 이국적 정경을 만끽하면서도몸과 마음은 우리 동네 뒷동산을 거니는 것처럼 느슨해졌다. 그렇다고 긴장이 풀어진 상태로만 계속된 건 아니다. 절벽 중턱으로 난 위험한 길을 이백여 미터 건너는 구간에서는 조마조마했다. 한 사람만지날 수 있는 좁은 길에서 발을 헛디디기라도 한다면 절벽 아래로무참한 추락이었다. 먼 길 여행 중에는 마음이 너무 느슨해질 때를스스로 경계하라고 조용히 타일러주는 구간이었다. - P206

여행 중에서의 사진 찍기는 오년 가까이 몸에 밴 하나의 버릇, 무의식적 습관이 되어버렸다. 여행이 끝난 후, 찍어둔 사진을 한장씩 넘겨볼 때면 그 사진을 찍었을 당시의 상황이나 느낌들이 소상히 떠오른다. 그래서 사진 한 장은 수첩 한 페이지의 메모량과 같다는 믿음이 언제부턴가 확고해졌다. 하루 종일 찍은 사진들은 그대로 그날 하루의 일기나 다름없다는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 P208

‘저렇게 큰 배낭 지고 굼벵이 같이 기어서 무슨 재미가 있을까?‘
제비는 제비 나름의 삶이 있고, 토끼는 토끼 나름의 즐거움이있듯이 굼벵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P223

어쨌거나 오늘은 TMB 종주 열흘 중 가장 힘든 여정이 될 것이다. 산을 두 번 넘어야 하고, 두 번의 해발고도 차이를 합치면2,000미터에 가깝다. 한라산 백록담을 하루에 두 번 오르고 내리는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다. 샹펙스 앞에는 해발 2,814미터의아르페트 산Clochers d‘Arpette이 놓여 있고, 발므 고개까지 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 P223

"아무래도 안 되겠어."
"왜요?"
"이 산 내려가면 배낭 운반해줄 데 있나 찾아보자."
"그럴까요?"
"내일 락블랑까지 가려면 오늘 힘을 좀 남겨두는 게 맞겠어"
말로는 ‘내일을 위한 거‘라고 얘기하지만 실제는 오늘 당장의문제였다. 해발 700미터를 내려간 후 발므 고개까지 다시 900미터를 치고 오르기에, 지금 내 상태로는 아무래도 힘이 부칠 것 같고자신도 없어진다. - P230

‘십 일 안에 TMB를 종주한다‘와 같은 여행의 어떤 ‘목표‘라는건 이렇듯 ‘자유‘에 대한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물론 성취를 위한 동기부여의 의미가 더 중요하긴 하다. - P238

시간은 이미 여섯 시 반을 넘기고 있다. 어서 빨리 안 박사와만나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발 밑으로 펼쳐진 하산길은 눈밭이없어 다행이었고, 인적은 없었지만 험하진 않았다. 완만하게 펼쳐진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흙길을 총총걸음으로 내려갔다. 발므 산장에 도착해 배낭을 내릴 때만 해도 더 이상은 못 걸을 것이라 여겼는데, 사람의 몸에는 비상 에너지라는 게 어딘가에는 반드시저장이 되어 있는 모양이다. - P243

이십여 분 동안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길가에 널브러져 있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몽블랑 여정을 다 마쳤다는 나름대로의 감동이나 감상이 없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관심은 오로지 한 가지였다. 어서 빨리 샤모니 숙소 알펜로제에 도착하는 것이다. 조금있다가 한인 민박집에서 마주할 저녁밥상 메뉴만이 머릿속을 가득채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일한 된장찌개, 그리고 돼지고기 볶음과 상추, 게다가 절대 빠져선 안될 푸짐한 김치. 입안 가득 군침이  고여오고 어디선가 샤모니행 버스가  도착했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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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 한 켤레, 팬티 한 장, 비상약품 몇 알, 볼펜 한 자루... 트레킹 중에 필수가 아니라고 여겨지는 여분 물품들은 단 몇 그램일지라도 다 빼냈다. 십여 일 후 몽블랑 일주를 마치면 다시 돌아올예정이기에 이곳 숙소에 맡겨두면 되는 것이다. 장거리 트레킹에서의 배낭 무게 최소화는 현대전 참전 용사의 첨단무기만큼이나 중요하다. 출국 일주일 전부터 넣고 빼고를 반복하던 배낭 무게는 출국날 아침 비로소 결정되었는가 싶더니, 결국은 이곳 샤모니까지 와서야 최종 확정이 되었다. 그래 봐야 큰 차이는 아니었다. 집 떠날 때14킬로그램이었던 배낭 무게에서 고작 300그램 정도 줄었을 것이다.
짐 정리 끝내고 한 시에 침대에 들자마자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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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지붕인 알프스 여러 산들 중, 그 최고봉은 몽블랑 MontBlanc, 4,807m이다. 우리의 백두산(白山. 2,744m과 이름이 같다. 둘 다 ‘하얀Blanc 머리의 산Mont‘이다.  만년설이나 부석으로 정상 봉우리가사시사철 하얗게 보이는 데서 유래한다. - P10

‘알프스 등반‘을 뜻하는 ‘알피니즘Alpinism‘이란 용어는 두 사람이 몽블랑 정상을 밟은 1786년 어느 여름날부터 ‘고산 등반‘을 뜻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넓어졌다. 이후, 세상의 설산들은 인류에게두려움과 신비의 대상이 아닌 도전과 탐험의 영역으로 바뀌었다. - P10

십 일간의 트레킹은 프랑스 이틀, 이탈리아 사흘, 스위스 사흘그리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이틀, 이런 식으로 이어지며 이 책 열개의 장을 순차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프랑스 남동쪽 샤모니 인근레우슈에서 시작해 레우슈에서 끝나는, 총 거리 170킬로미터의 원점회귀 순환길이다. 나라와 나라의 오래된 길들이 하나의 길로 이어지며, 산과 산이 계곡과 산골마을들로 연결되다가 결국은 처음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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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남산 투어‘의 코스는 다음과 같다. 출발지는 명동역이다.
반민특위 터-나석주 의거지 - 이회영 거주지 이재명 의거지-남산 예장공원-김익상 의거지 조선총독부 터 - 노기 신사터-경성신사 터 - 남산 중앙정보부 - 국치 현장- 와룡묘- 조선신궁터 - 안중근 장군 동상 - 안중근 기념관 - 백범 동상 - 성재동상 - 조선신궁 계단 - 서울역 강우규 의거지 - P278

최근에는 ‘명동-종로 의열독립투쟁 투어‘를 주제로 새로운 코스도 만들었다. 명동 코스는 기존 코스와 같고, 이재명 의사 의거지 방문 후 남산대신 방향을 바꿔 종로로 향하는데, 코스는 다음과 같다.
반민특위터 - 나석주 의거지 - 이회영 거주지 이재명 의거지(종로로 이동) - 김상옥 의거지 -3.1독립선언서 인쇄소 터 수송공원-신흥대학 창립지 - 태화관 - 신채호 부인 박자혜 지사 운영산파소 터 -3.1혁명 발상지 탑골공원 - 종묘공원 이상재 지사 동상 - 김상옥로 - 김상옥 최후의 격전지 - 마로니에 공원 김상옥 의사상 - P278

양 손에 안중근 장군과 윤봉길 의사 배지를 각각 쥔 채 가만히 서서 참배 행렬을 바라보자니, 야스쿠니 신사에 잠들고 싶다고 말했던 국가공인친일파 신태영이 떠올랐다. 그는 바라던 이곳 대신 대한민국 최고의 명당인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됐다. - P279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장군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께 하얼빈역 승차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쐈다. 안중근 장군의 간절함과 운이 닿아 의거는 성공했다. - P289

그날 오전 9시께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역에 멈췄다. 이토는러시아 재무대신 코코체프와 약 25분간 대화를 나눈 뒤, 의장대 사열하고 각국 사절단의 인사를 받았다. 러시아군 의장대 뒤에서 대기하던 안장군은 의장대 사이로 나와 품속에 있던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 열 발자국 거리 앞에 있는 이토를 향해 조준하고 첫 발을 쏘았다. 첫 발은 이토의 팔을뚫어 가슴에 도달했고 안 장군은 두 발을 추가로 발포했다. 이토는 땅바닥에 쓰러졌고 안 장군은 혹여 다른 사람이 이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행중 하얼빈 총영사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 남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에게도 총탄을 발포하여 중상을 입혔다.
의거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안 장군은 러시아 군인에 의해 붙잡히는 가운데 "코레아 우라!"를 외쳤다. 대한독립 만세다. - P-1

안중근 장군이 밝힌 이토를 죽인 이유는 15가지다. 1. 대한제국민 황후를 시해한 죄 2. 대한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을사늑약과 정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대한인들을 학살한 죄 5. 국권을 강탈한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 8.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대한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불태운 죄 12. 대한인이 스스로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분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대한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일왕을 속인 죄 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왕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 P290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일이니 나를 사형 피고로 다루어서는 안 되며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시오." - P290

지사들의 삶을 돌아볼 때마다 반복적으로 드는 생각은 하나다. 과연 나는 지사님들처럼 싸울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 생각의 정점에 자리한 인물이 바로 후세 다쓰지다. 그는 서슬 퍼런 일제의 압박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일본인으로서 조선의 독립투사를 변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다. 아니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만약 나라면 시도할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싶다. 그런데 그는 해냈다. ‘나는 인간으로서 인간을 위해 살겠다‘는 그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 P295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 P298

반가운 소식은 도쿄 릿쿄대학에서도 교토 도시샤대학처럼 윤동주를 기억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2025년 3월 1일 자 《중앙일보》에 따르면, 올 가을 릿쿄대학은 교정에 윤동주 기념비를 세우기로 했다고 한다. 니시하라 렌타 릿쿄대 총장은 기념비를 세우는 이유에 대해 윤동주의 순국 80주년을 언급하며 "윤동주 시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도시샤대와 함께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한·일 양국 간 우호의 상징으로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윤동주 작품을 통해 윤동주의 세계관과 문학관을 학생들이 알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P303

릿쿄대학은 15년째 꾸준히 한국인 유학생에게 ‘윤동주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또 그의 기일에 맞춰 추도예배를 진행하는데, 그 노력이 기념비라는 결실로 이어졌다고 본다. 물론 내 개인으로서는 시인 윤동주가 걸었을 그 교정을 다시 한번 방문해야할 핑곗거리가 생겼다는 사실이 더 기쁘다. 여럿이 함께 그곳을 찾아 시인동주를 생각하며 술 한잔 올리고 싶다. - P304

신간회는 3.1혁명 후 일제의 압박이 거세진 1920년대에 독립투쟁의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고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독립투쟁의 선봉에 선 여러세력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결과다. 1927년 2월 15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창립대회가 열렸다. 월남 이상재가 회장, 벽초 홍명희가 부회장으로 선출됐다. 강령으로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단결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를 채택했다. 신간회는, 독립운동의 큰 축인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해 만든 일제 강점기 최대규모의 항일운동 단체였다. - P305

다만 김시현 지사는 해방 후 남긴 기록에서 황옥 경부를 진정한 독립운동가라고 평가했다. 김원봉은 황옥이 스스로 밀정이라고 털어놓아 세상의비난을 자초한 것은 의열단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이사건을 주도하고 이끈 두 사람, 김시현 지사와 황옥 경부는 여전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서훈받지 못하고 있다. 김시현 지사는 한국전쟁 중 발생한 ‘이승만 저격 미수사건‘의 주범이라는 이유로, 일제의 경찰이었지만 목숨걸고 의열단을 지원했던 황옥 경부는 밀정인지 독립투사인지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배제됐다. 김시현과 황옥 경부에 대한 평가는 후인들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지점이다. - P315

"의열단 국내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시현(82)옹이 심한 생활고에 빠져 있다. (중략) 불광동 산비탈 단칸방 두 개를 전세 들어 팔 식구가 살고 있으나 이달 말 그 셋방마저 내놓게 되었다. 김옹은 1923년 폭탄을 갖고 상하이에서 국내에 들어왔다가 일본 관헌에 잡혀 1년간 투옥된 것을 비롯, 전삼회 17년간, 그리고 8.15 이후엔 52년 6월 이승만 박사 저격사건에 관련되어 9년, 합쳐 약 30년 동안 옥고를 겪었다. 무상배급밀가루(한 달에 52킬로)로 연명하는 (중략) 기거가 부자유해 누워서 지낸다는 김옹은 ‘아직 정부의 별다른 혜택을 받은 건 없으나 오는 8월쯤 원호대상에 든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그날만 기다리고 있다. - P318

김시현은 아내 권애리를 평생토록 ‘동지‘라고 불렀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권 동지, 미안하오. 내가 조국독립을 위해 몸바쳐 투쟁했는데 반쪽 독립밖에 이룩하지 못했소. 남은 생을 조국통일 사업에 이바지해 주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권애라 지사는 1990년에야 서훈됐고 1995년 10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464번 무덤에 안장됐다. 김시현 지사는 앞서 말한 이유로합장되지 못했다. 그의 묘는 경북 예천군 호명읍 직산리 야산에 위치해 있다. 2021년 그의 묘를 발견한 후 매년 찾아 술 한잔 올리고 있다. - P319

당시에 관헌, 이재민, 주변 주민에 의한 살상 행위가 다수 발생했다. 무기를 가진 다수의 사람이 비무장 소수자에게 폭행을 가한 끝에 살해한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학살‘이라는 표현이 타당한 사례들이었다. 살상의 대상이 된 이들 가운데 가장 많았던것은 조선인이었지만, 중국인과 내지인 또한 적지 않게 피해를입었다. 가해자의 유형은 관헌에 의한 경우부터, 관헌이 보호하고 있던 피해자를 민간인이 관헌의 제지를 무시하고 살해한 경우까지 다양했다.
살상 사건으로 인한 희생자의 정확한 수는 파악할 수 없지만, 지진재해로 인한 사망자 수의 1%에서 수%에 해당하며, 인적 손실의 원인으로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 P322

이 비는 다른 위령비와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비석 뒷면에 학살의 주체를 명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1923년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여 일본의 군대·경찰· 유언비어에 현혹된 민중에 의해 많은 한국 조선인이 살해당했다. 도쿄의서민 거주지에서도 식민지하의 고향을 떠나 일본에 와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귀중한 생명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를 가슴에 새겨, 희생자를 추도하고, 인권의 회복과 두 민족 사이의 화해를 염원하여 이 비를 세운다." - P328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는 대림사는 절이 있다. 안중근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찰이다. 절 마당에는 안중근 장군이 일본 헌병 출신 치바 도시치(千葉十七, 1885~1934)에게 마지막으로 써준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이 새겨진 유묵비도 세워져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라는 뜻이다. - P338

도쿄에서 43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이곳에 왜 안중근 장군의 유비와위패가 존재하는 것일까? 1909년 이토를 격살한 안중근 장군이 뤼순감옥에 수감되었을 당시, 치바 도시치는 안 장군의 전담 교도관이었다. 처음에는 일본의 심장이라 불리던 이토를 죽인 안 장군에게 분노와 적대감을드러냈으나, 동양평화에 대한 그의 의지와 인품에 감화되어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 - P338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장군의 사형은 예정대로 집행됐다. 교도관 치바가 아무리 안 장군에게 감화받았을지라도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슬퍼하는 그에게 안 장군은 ‘위국헌신군인본분‘ 여덟 글자를 남긴다. 눈물로안 장군을 보낸 그는 제대를 자청했고, 고향 미야기현 센다이로 돌아왔다. - P338

스님은(사이토 다이켄) 두사람을 기리는 현창비와 기념관을 세워 둘의 영정을 모셨다. 하지만 이 때문에스님은 여러 차례 살해 위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매년 대림사는 빠짐없이 안 장군의 추모제를 열고 있다. 교도관 치바의 후손이 안중근 장군탄생 100주년을 맞아 1979년 유묵을 우리 정부에 기증했고, 안 장군을 기리는 숭모회는 1981년 대림사에 안 장군의 유묵비를 세웠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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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무덤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석재로 만들어진 거대한 도리이가 눈에 들어온다. 히데요시가 죽은 이듬해에 건립된 도요쿠니 신사의 정문인데, 신사 이름 도요쿠니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도요와, 나라를 의미하는 쿠니를 합친 것이다. 코무덤 앞에 서서 도리이를 바라보니이상하게도 히데요시가 죽을 때 남긴 절명시가 떠오른다.

이슬로 와서 / 이슬로 사라지니 / 
나의 몸이여 / 나니와(오사카)의 영화는 /
꿈속의 꿈이로다

삶의 끝자락에서 마치 관조하듯 떠나는 이의 모습이 담겼다. 아름답고목가적이다. 하지만 그의 삶이 이 시처럼 아름다웠다 할 수 있을까? - P160

"전쟁의 시대가 있었고, 많은 학생들이 그 시대의 희생자가 되었던 사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중략) 그 역사 속에 윤동주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역사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며 새로운 시대를 전망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2024년 12월 윤동주에게 명예문화박사 학위를 증정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 P166

"단 하나의 조선백자항아리에 이끌려 고미술상 가게 앞에 멈춰 선것이 사십여 년 전이었습니다.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나 자신은 아직 돌아갈 길이 없던 날의 일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기념품 하나쯤 하자는 마음으로가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오늘‘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 P176

그는 미술관이 개관한지 4개월 만에 지병으로 세상을 등진다. 통일 조국이 생기기 전까지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했던 그는 "단 한 점의 문화재도 유산으로 남기지 않겠다. 나중에 통일되면 통일조국에 기증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생전에 그는 "문화 앞에 나라라는 건 의미가 없다. 정치를 떠나 민간인의 문화 교류를 통해 우리가 하나의 민족임을 깨달을 수있다"라고 늘 말하곤 했다.28 - P179

물론 이에야스가 막부를 에도(도쿄)에 두었기 때문에 니조성은 치소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전국 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성들에 비해 해자의 폭이 좁고 천수각도 높지 않다. 참고로 니조성 니노마루 어전을 걷다보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나는데, 자객의 습격을 우려한 조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걸쇠와 복도를 지탱하는 못이 닿으면서 휘파람새가지저귀는 듯한 소리가 난다고 해서 ‘휘파람새 복도‘라고 불린다. 윤동주의 도시샤대학을 거쳐 교토 어소, 니조성을 함께 걸어 보자. - P184

2005년 윤동주를 애정하는 교토 시민들이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 위원회‘를 만들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시비를 제작해 우지시에 세우고자 했다. 그런데 교토부가 우지시와 시인 윤동주 사이의 연고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며 장소를 내주지 않았다. 위원회는 우지시와시인의 인연을 찾는 작업을 펼쳤고, 윤동주가 마지막 사진을 찍은 장소가 우지 강변의 아마가세! 다리라는 것을 알아냈다. 마침내 위원회 설립 후12년 만인 2017년 10월 우지 강변에 윤동주의 시가 새겨진 ‘기억과 화해의 비세워졌다. 시비에는 윤동주가 1938년에 쓴 <새로가운길>이 새겨져 있다. - P188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P188

기념관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우토로 마을 주민들의 사진이 사람들을맞이한다. 팻말에는 손글씨로 "우토로에서 살아왔고 우토로에서 죽으리라"라고 적혀 있다. 긴 시간을 버텨 온 우토로 주민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기념관 개관 시간은 금·토·일 ·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이다. 화·수·목요일과 12월 28일~1월 4일, 8월 14~16일에는 휴관한다. 입장료는 일반 500엔, 고등학생 이하 100엔, 초등학생 이하 무료다. 시간을잘 알아보고 한 번쯤 가보면 좋겠다. - P194

"진폐증을 앓다 47킬로그램 몸무게로 돌아가신 이정호 선생이나 당시 탄광에 끌려간 광부들의 모습이 다르지 않았다는 거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바닷물과 메탄가스를 뒤집어쓴 채 섭씨 40도가 넘는 지하 1000미터 탄광 속에서 석탄과 광물을 캐다 진폐증을 앓고 떠났다. 젊은 나이에 키도 크고 덩치도 컸던 분들은 다들 갈비뼈와 광대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 됐다.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처음 만들 때 이들의 보편적인 모습을 모티브로 삼았다." - P197

위도 36° 31′ 30.11" N, 
경도 136° 40′ 17.9" E. 
1932년12월 19일 오전 7시 27분 
천하영웅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가 순국한 지점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꼭 한 번쯤 들러 술 한잔 올리면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금단의 땅이기도 하다. 윤 의사가 순국했을 당시에는 일본군 제9사단이, 2025년 현재는 일본 육군 자위대가 주둔하고 있기36°31‘30.1"N 136 4017 9‘E오쿠오大樂나가도때문이다. 자위대가 해당 지역을 사격장으로활용하고 있어 허가받은 인원을 제외하고는한국인, 일본인 가릴것 없이 접근이 제한된다.  - P200

현장에 있던 간수가 무릎 꿇려진윤 의사에게 유언이 있느냐고 묻자 윤 의사는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하등 말할 바 없다"라고 했다. 오전 7시 27분 미간에 총을 맞고 13분 뒤인7시 40분에 심장이 완전히 멎었다. 총탄이 이마를 정확히 관통해 피가 별로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 P203

윤 의사는 의거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두 아들에게 "너희도 만일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로 시작하는 편지를 남긴다. 편지에서 윤 의사는 "태극의 깃발 높이 드날리고,
31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는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라고 강조했다. 이틀 뒤인 1932년 4월 29일 오전윤 의사는 상하이 원창리 13호 김해산의 집에서 백범과 식사를 한다.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아침 7시가 되자 윤봉길은 백범에게 시계를 교환하자며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윤 의사는 훙커우 공원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32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1만여 명의 일본 군경을 뚫고 무대앞쪽으로 나아가 중앙 무대를 바라보고 왼쪽으로 20여 미터 떨어진 곳 - P207

윤 의사는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무대를 향해 4~5미터 정도 뛰어 들어간 뒤 소지하고 있던 두 개의 폭탄 중 하나인 물통형 폭탄을 던졌다.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이 울렸고 이 순간 윤 의사는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바로 이어 도시락형 폭탄을 던지려는 순간 주변에 있던 일본 군경의 무차별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윤 의사는 얼굴을 제대로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한 발길질을 당한 뒤 상하이 헌병대로 끌려갔다. - P208

일제는 무자비한 취조를 이어 갔다. 그러나 윤 의사는 분명한 목소리로
‘조선인의 각성과 독립 의지를 알리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강조한다. 일제군사법원은 1932년 5월 25일 윤 의사에게 살인과 살인미수, 폭발물단속벌칙위반 등의 이유로 사형을 선고한다. - P208

윤 의사 암장지에는 월진회 일본지부가 1992년 세운 암장지적비가 있다. 이 비에는 윤 의사가 집을 나설 때 남긴 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不‘이 새겨져 있다. ‘사나이 집을 나가니 뜻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 위에는 손바닥만 한 윤 의사 흉상도 있다. 암장지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에 재일민단이 주도해 세운 순국기념비도 있다. 둘 다 자위대 부대 안에 있는 순국지에 들어갈 수 없는 탓에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같은 이유로 매년 의거일인 4월 29일에 이곳에서 윤봉길 의사의 추모식이 열린다. 함께 들러 윤의사께 술 한잔 더 올리자. - P211

1932년 12월 18일, 윤봉길이 생의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은 가나자와성 내부에 자리한 위수구금소다. 현재는 공중화장실이됐다. 처음에는 윤 의사가 생전의 마지막 밤을 보낸 장소가 화장실이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확인했다. 하지만 옛 지도를 봐도, 관련글을 봐도 변하지 않았다. 천하영웅 윤 의사가 생의 마지막 밤을 보낸 장소는 정말 이곳이었다. - P213

문효세자가 모셔졌던 자리에 삼의사의 묘역이 조성됐고, 의빈 성씨 덕임이 잠들었던 자리에 임정요인들의 묘역이 만들어졌다. 백범은 일제가강제로 흩트려 놓은 왕가의 무덤을 독립투사들을 위한 자리로 바꿨다. 독립유공자를 위한 국립묘지가 없는 상황에서 임시방편으로라도 지사들을모실 수밖에 없었고, 백범은 주인이 사라진 효창원 묘역을 그 장소로 선정한 것이다. <백범일지>에서 백범은 "장례에 임하여 봉장위원회(奉葬委員會)책임자들이 장지를 널리 구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결국 내가 직접 잡아놓은 용산 효창원 안에 매장하였다. 그것은 서울 역사 이래 처음 보는 장례식이었다"라고 기록했다. - P224

1990년대 말 김대중 정부 때 기존 테니스장 자리에 백범기념관이 세워졌다. 2000년대 초중반 노무현 정부에서 민족공원화와 독립공원화를 추진하기 위해 효창운동장 철거 및 이전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축구계의주민들의 반발로 이뤄지지 못했다. 2013년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추가지정하는 내용을 담은 법 개정안도 벌어졌으나 창원 일대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무산됐다. 2019년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문재인 정부는 ‘근린공원시설이었던 효창공원을 ‘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바꾸고 효창원 묘역을 국가차원에서 관리하고 예우하도록 결정했다. - P225

양근환 지사가 1921년 3월 25일(음력 2월 16일) 친일파민원식을 처단한 장소는 도쿄역호텔 2층 14호실이다. 그래서 도쿄에서 답사를 잇는 동안 그곳에 머물려고 했다. 물론 가격을 알아보기 전의 생각이다.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도쿄스테이션호텔, 4박, 숙박인원 1인, 조식 포함, 스탠다드룸으로 검색했다. 총 68만 3976원이 나왔다. 오호, 가격을 보는 순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도쿄 한복판임에도 하루에 17만 1000원 정도면 양호하다. 물론 10초 뒤 바로 깨달았다. 착각이었다는 것을 예약하기를 누르고 들어가는 순간 가격이 이렇게 나왔다. 세금 포함 355만9784원. - P232

붙잡힌 이후의 법정 싸움에 주목해야 한다. 김 의사의 변호인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에도 등록되어 있는 후세 다쓰지였다(그에대해서는 조선인의 변호인 후세 다쓰지> 편에서 더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미 결론이 정해진 재판, 재판장은 노골적으로 불공정한 재판을 진행했다. 후세 다쓰지 등 변호인들은 재판장의 불공정한 재판에 항의해 기피신청을 했다.
그러나 김지섭은 이마저도 "나는 조선 사람이므로 일본 사람인 재판장이누가 되든지 똑같을 것이니 기피신청을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는아무 죄가 없으니 무죄를 선언하든지 제1심 검사의 청구대로 사형에 처하든지 하여 달라"라고 말한다. - P242

경시청 앞 신호등에 서서, 끊임없이 오가는 차들을 보며 90여 년 전이공간에 서 있었을 청년 이봉창을 생각했다. 특히 의거 전 그가 백범을 만나 말한 "영원한 쾌락이 떠올랐다.
"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해를 더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39 - P247

"나는 적성한인애국단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으로써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國團의로 맹세하나이다."
20여일 뒤 의사 이봉창은 영원한 쾌락을 위해 폭탄을 던지고, 이치가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사형이 집행되었다. 죄명은 대역죄였다. 영원한 쾌락을 말했던 그의 나이 서른둘이었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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